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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관소/문화사 &시사

강기훈 유서대필 의혹 사건(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의의 &시대배경 & 사건 & 재판참여인 & 재심

                                                      


                              강기훈 유서대필 의혹사건









 노태우 정권의 실정에 항의하는 분신이 잇따르는 가운데 1991년 5월 8일 김기설이 분신 자살하자 당시 검찰이 강기훈이 김기설의 유서를 대필하여 자살을 방조했다는 혐의로 기소해 처벌한 인권침해 사건이다.




강기훈은 법원으로부터 목격자 등 직접적인 증거도 없이 국과수의 필적 감정결과와 정황에 따라 자살방조 및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년에 자격정지 1년 6월을 선고받고 1994년 8월 17일 만기 출소했다.


사건 발생 16년 만인 2007년 11월 13일 대한민국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제58차 전원위원회 회의에서 ‘강기훈 유서대필 의혹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결정을 내리고 국가의 사과와 재심 등의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시대 배경


1991년 노태우 정권 집권 후반기로 공안통치 3당 합당 등 정치적 격변기였고, 수서지구 특혜분양, 국회의원 뇌물외유, 대구 낙동강 페놀 방류 등 각종 비리사건이 발생하던 중 강경대 치사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계기로 4.27 범국민대책회의가 결성되었고, 이 대책회의가 명동성당에서 완전히 철수하는 6월 29일까지 약 60여일간 전국에서 집회와 시위가 일어나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가 매우 높았다.


4월 3일 경원대 천세용, 4월 29일 전남대 박승희, 5월 1일 안동대 김영균, 5월 8일 김기설 등이 분신, 투신, 의문사로 사망하여 이 기간동안 모두 13명이 사망하였다.


정권에 항의하는 분신이 연일 계속되자 일부 언론에서는 운동권 사이에 죽음을 찬미하는 소영웅 주의 허무주의적 분위기가 집단 감염되듯 확산되고 있다며, 김지하는 “죽음의 굿판 당장 걷어치워라”는 글을 발표하고, 서강대학교 박홍 총장은 성경위에 손을 올리고 “지금 우리 사회에는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는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사건 경과



김기설은 1991년 5월 8일 아침 8시 7분 경 서울 마포구 신수동 서강대학교 본관 5층 옥상에서 분신 후 16.5 미터 아래로 투신하여 아침 8시 25분 경 사망하였다. 


옥상에서는 “단순하게 변혁 운동의 도화선이 되고자 함이 아닙니다. 역사의 이정표가 되고자 함은 더욱이 아닙니다……”로 시작되는 유서 2장이 발견되었다.




검찰은 강기훈을 유서대필자로 지목하여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필적감정 결과를 근거로 자살방조 혐의와 이적단체 가입, 이적 표현물 소지 등의 혐의로 기소하여,1992년 7월 24일 대법원에서 판결이 확정되었다.




검찰 주장


당시 검찰은 강기훈이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에 함께 근무하던 사회부장 김기설이 1991년 4월 26일 강경대 쇠파이프 치사사건 발생으로 재야 운동권 및 반정부 투쟁분위기가 조성되자 민중을 자극하여 고조된 반 정부 투쟁분위기를 더욱 확산시키기 위하여 분신자살을 계획한 것을 알고 김기설 명의의 유서 2매를 작성하여 분신자살을 방조했다고 주장했다.



재판 참여 인


재판은 강기훈에게 유죄, 1심에서 징역3년 자격정지 1년 6월이 선고되어 3심에서 원심대로 확정되었으며,


재판에 참여한 인물은 다음과 같다.


직책참여자
판사1심부장판사 노원욱(1936년 평북 선천), 배석판사 정일성(1958년), 이영대(1955년 전남 진도)
2심부장판사 임대화(1942년 충남 대덕), 판사 윤석종(1954년 서울), 부구욱(1952년 부산)
대법원(형사3부)주심판사 대법관 박만호(1936년 경북 의성)
검찰(강력부)총지휘 부장검사 강신욱(1944년 경북 경산), 주임검사 신상규(1949년 강원도 철원), 실무검사 송명석(1956년 서울), 윤석만(1957년 충남 대전)
변호사김창국 등 변호인단 3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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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9명의 검사 중 김기춘 검사는 현재 박근혜 후보의 측근인 ‘7인회’ 멤버로 활동 중이다. 

강신욱 당시 강력부장은 대법관을 지내고 2007년 박근혜 대선캠프에서 법률지원특보단장을 역임했다.

 남기춘 검사 역시 박근혜 캠프에서 클린검증 소위원장을 맡았고, 곽상도 검사는 박근혜 후보의 ‘싱크탱크’로 알려진 국가미래연구원 발기인에 참여했다. 


박근혜정부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내고 있다. 윤석만 검사는 올해 대전지역에서 새누리당 예비후보로 출마했으며, 현재 박 후보를 지지하는 외곽 조직에 있다. 


임철 검사는 2008년 총선 당시 한나라당 후보로 나서기도 했다. 




의혹 사항




강기훈은 검찰수사 과정에서 밤샘조사를 받았고, 참고인도 강압적으로 조사를 받는 등 고문가혹, 조작행위 의혹이 있고, 국과수가 문서감정 처리규정 등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편파적인 필적감정을 했다는 의혹이 있다.




기타


1890년대 프랑스에서 유대인 장교 드레퓌스가 필적 때문에 석연찮게 반역죄로 몰려 종신형을 선고받자 에밀 졸라 등 당대 지식인들이 옹호하고 나섰던 것과 비유되어,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렸다.

1992년 2월 11일 검찰이 유죄의 논거로 삼았던 필적 감정 책임자였던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김형영이 뇌물을 받고 허위감정을 한 혐의로 구속되었다.




2007년 11월 13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재심 권고로 2009년 9월 서울고법은 재심청구를 받아들였고, 대법원 2012년 10월 19일 재심을 결정했다



위키백과






# 2013년 12월





유서대필사건 강기훈의 20년 전쟁

[주장] 검찰이 '직접 만든' 사건... 이제 진실 밝히고 책임자가 사죄해야

기사 관련 사진
▲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의 당사자 강기훈씨. 사진은 지난해 12월 20일 서초동 서울고법에서 열린 첫 재심 재판에 출석하기 전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는 모습.
ⓒ 연합뉴스



후배 강기훈이 22년 동안의 억울함을 털어낼 것 같다. 12일 '강기훈유서대필사건' 재심 재판에서 법원은 김기설의 유서는 강기훈이 아닌 김기설 본인이 쓴 것이라는 유력한 증거를 확인했다. 무죄가 전망된다.

1991년 노태우의 공안통치에 저항해 많은 후배들이 몸을 던졌다.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도 그 대열에 참여했다. 김기설은 나와 성남 민청련을 함께 했던 마음 착한 후배다. 당시 정권과 검찰은 김기설의 유서는 강기훈이 대신 써주었고, 자살을 방조했다고 기소했다.

필자도 유서의 글씨체와 똑같은 김기설의 유품 수첩 사본(투신한 날 아침 병원에서 가족들에게 연락하려고 수첩 전화번호명단을 복사한 것이다)을 재판부에 제시하고 법정에서 증언을 했지만 모든게 조작이라고 배척당했다.

강기훈은 무죄다

세월이 흘러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는 재심을 권고했다. 그러나 법원은 재심결정을 차일피일 미뤘다. 거기에는 검찰의 완강한 저항이 있었다. 다른 공안사건 재심과 달리 검찰이 직접 사건조작에 관여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공안사건은 과거 박정희 중앙정보부나 전두환 안기부(이른바 '남산'), 치안본부 대공분실(이른바 '남영동')에서 고문 등 가혹행위로 조작됐다. 사건을 이첩받은 검찰은 고문 등으로 조작한 내용 그대로 조서를 꾸며 기소했다. 즉 검찰은 고문 등 가혹행위의 직접 가해자가 아니어서 여러 재심사건 재판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러나 강기훈 사건은 달랐다. 검찰이 직접 나서서 유서를 대필한 사람이 강기훈이라고 만들고, 사건을 끌고 갔다. 다른 사건과 달리 핑계 댈 곳이 없었다. 강기훈 사건 재심 재판에서 검찰이 이렇게 완강하게 저항하고 무려 6년이나 끌어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가 관련된 1981년 '학림사건' 재심 고법, 대법원 재판에서 검찰 자신들은 고문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려 했다. 결국 대법원은 "검찰이 수사과정에서 고문을 하지 않았다해도 수사기관(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 등 가혹행위 속에서 작성된 수사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된 검찰의 조서는 증거능력이 없다"고 판결하고 무죄를 최종 결정했다. 검찰은 이렇게 반쪽짜리 면죄부를 얻었다.

검찰은 자신의 행위에 무오류를 주장한다. 그러나 사람의 일이 그렇듯 무오류란 있을 수 없다. 하물며 검찰은 역대 권위주의 정권에서 정권의 충실한 하수인 노릇을 했다. 강기훈 사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당시 노태우 공안통치에 맞서 일어난 전국적인 저항을 차단하기 위해 정권과 합작해 벌인 희대의 조작사건이다.

강기훈은 자살방조죄로 3년을 감옥에서 살았다. 20여 년 넘도록 유서를 대신해 써주고 동료의 죽음을 이용했다는 오해를 받으며 살아왔다. 이제 진실이 밝혀질 때가 왔다. 강기훈과 김기설, 두 후배의 명예가 회복될 때가 왔다. 이제 강기훈과 검찰의 20년 전쟁을 끝낼 때가 됐다. 승자는 강기훈이고, 패자는 검찰이다.

한 가지 걱정이 있다. 1991년 이 사건을 담당했던 검사들이 박근혜 정부의 공신들이라는 점이다. 당시 법무부장관은 지금의 김기춘 비서실장이다. 박근혜 정부 초대 민정수석 곽상도를 비롯해 당시 검사들은 박근혜 캠프에서 활약했다최종 판결이 있을 내년 봄까지 검찰과 이들 공신들이 이 재판을 어떤 방향으로 비틀지는 않을지 걱정이다.

과거사 재심사건 재판에서 재판부는 자신들의 과오를 반성하고 피해자에게 사과한다. 그러나 검찰은 그 많은 일들을 저지르고도 반성할 줄 모른다.

20여 년 넘게 마음 속 깊은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야 했고, 몸에 중한 병까지 얻은 강기훈 후배. 남은 시간 용기를 잃지 말고 진실을 밝혀 정의를 세워주길 바란다. 

강기훈은 무죄다.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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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파일 대필 공방 20년, 유서는 말한다




 제1편-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제2편- '필적감정
' 


제3편 검찰에 묻다 '정의란 무엇인가' 



 4편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그 후 



 '유서대필 사건' 강기훈, "내가 원하는 건 재판이 아니라 사과"








뉴스타파 24회_끝나지 않는 유서대필 조작사건







판, 검사들의 승승장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