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스쿠니 신사]
야스쿠니 신사(일본어:
야스쿠니를 한국식 한자 발음으로 읽은 "정신사"라고도 부른다. 총면적 93,356㎡로 일본에 있는 신사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영미권의 언론에서는 ‘전쟁 신사(war shrine)’란 용어를 주로 사용하고 있다.
1869년(메이지 2년), 침략 앞잡이의 넋을 달래기 위해 설립한 도쿄 초혼사(招魂社)가 그 전신이다. 지금의 이름인 ‘야스쿠니(靖國)’는 ‘나라를 안정케 한다’는 뜻으로, `좌씨춘추(左氏春秋)'의 `吾以靖國也'에서 따왔다. 1879년 메이지(明治) 천황에 의해 현재 이름으로 개명됐다. 야스쿠니 신사는 벚꽃의 명소로도 잘 알려져 있다.
보신 전쟁, 세이난 전쟁, 러일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의 병사 이외에 전범으로 사형을 당한 도조 히데키 수상 등의 A급 전범들이 안치되어 있어서 대한민국이나 중국 등의 아시아 여러 나라는 야스쿠니 신사와 그곳에 참배하는 정치인 등을 비난하고 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2001년 8월 15일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할 의향을 표시한 것에 대하여 A급 전범이 안치되어 있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인정할 수 없다며 중국 정부는 강력히 반발하였다.
결국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는 15일을 피하여 8월 13일에 참배하면서 중국과 대한민국 양국에 일종의 배려를 표시하였다.
그런데 그 후에도 2002년 4월 21일과 2003년 1월 14일, 2004년 1월 1일, 2005년 10월 17일, 2006년 8월 15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면서 아베 정권 탄생까지 중-일 간의 수뇌 교류는 정체되었었다.
국가와 그 기관은 종교 관련 교육이나 활동을 할 수 없다는 일본 헌법 20조, 공공비용은 종교기관이나 단체에 사용될 수 없다는 일본 헌법 89조 조항에 위배된다며 일본 내에서 여러 차례 소송이 제기되기도 했다.
니혼케이자이 신문이 실시한 총리 대신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한 일본 여론 조사에서 전체 응답자 가운데 46%는 찬성했고 38%는 반대했다. 일본의 우익 단체,신토 신앙자, 전몰자 가족등이 찬성하고 있다.
야스쿠니 신사의 역사
야스쿠니 신사의 기원은 에도말, 막부의 개국에 반대하다 100여 명이 투옥된 안세이 다이고쿠(安政の大獄)에서 희생된 사람을 기리는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1978년 태평양 전쟁의 A급 전범 14명이 합사되었다. 이후 합사자가 점점 늘어나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246만 6,532명의 합사 명부가 봉안되어 있다. 전사자 유골이나 위패는 없다.
재정수입
매년 예산은 20억 엔을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주요 수입은 합사된 전사자 200여만 명 유족들의 향불값과 야스쿠니 내 전쟁 기념관인 유취관(游就館) 입장료, 협찬금 등이다.
[ 야스쿠니 A급 전범 ]
교수형 (사형)
- 이타가키 세이시로 - 육군 군인, 제1차 고노에 내각·히라누마 내각 육군 대신, 만주국 군정부 최고 고문, 관동군 참모장
- 기무라 헤이타로 - 육군 군인, 버마 방면 일본군 사령관, 도조 내각 일본 육군 차관
- 도이하라 겐지 - 육군 군인, 펑텐 특무 기관장, 제12방면 군사령관
- 도조 히데키 - 육군 군인, 제40대 내각총리대신
- 무토 아키라 - 육군 군인, 제14방면군 참모장 (필리핀)
- 마쓰이 이와네[1]
- 히로타 고키 - 문관, 제32대 내각총리대신
종신형
아라키 사다오
본의 아베 신조(安倍晉三) 총리가 지난해 말 2차 세계대전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靖國) 신사를 전격 참배하면서 한·일, 중·일 관계가 급격히 악화된 가운데 중국 공산당 기관지가 그 곳에 어떤 전범이 합사됐는지에 대해 자세히 소개해 주목받고 있다.
당기관지 런민르바오(人民日報) 해외판은 이날 '14명 A급 전범의 극악무도한 죄상'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이들의 자료 사진과 함께 죄상에 대해 조목조목 전했다.
아시아 침략의 장본인으로 알려진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전 일본 총리에 관련해서는 "그는 진주만의 미국 함대기지를 기습 공격해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며 "그는 히틀러나 무솔리니와 함께 세계 3대 파시즘의 두목 중 한 명으로 이들과 이름을 나란히 할 전쟁 범죄를 행했다"고 소개했다.
도조 히데키 이외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14명의 A급 전범에는 시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郎), 기무라 헤이타로(木村兵太郎), 도이바라 켄지(土肥原賢二), 무토 아키라(武藤章), 마츠이 이와네(松井石根), 히로타 코우키(広田弘毅), 우메츠 요시지로(梅津美治郎), 시라토리 토시오(白鳥敏夫), 히라누마 키이치로(平沼騏一郎), 토고 시게노리(東郷茂徳), 나가노 오사미(永野修身), 마츠오카 요스케(松岡洋右) 등이 포함됐다.
이들은 도쿄 전범 재판을 통해 유죄 판결을 받고 처형을 당하거나 옥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1978년 10월17일 비밀리에 이들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한 것으로 전해졌다.
런민르바오는 "일본의 침략은 평화를 파괴했으며 A급 전범이 합사돼 있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것은 일본의 군국주의 침략과 식민통치로 고통받은 이들의 마음에 상처를 내는 것이자 역사적 정의와 인류의 양식을 짓밟는 행위"라고 비난했다.
아울러 "우리는 절대 물러설 수 없다"며 "A급 전범들의 죄상을 천하에 밝히고 다시 한번 역사적 심판을 받도록 할 것"이라고 신문은 강조했다.
[ 군국의 城, 야스쿠니 ]
오른손을 깁스한 60대 일본인 할머니가 배전(拜殿·참배하는 장소) 앞에 섰다. 어렵사리 양손을 모아 합장을 하고 눈을 감았다. 손을 깁스했기 때문에 신사 참배 때 으레 하는 박수를 칠 수는 없었다. 남들의 ‘탁 탁’ 박수 치는 소리를 들으며 할머니는 합장했다. 약 1분 후 눈을 떴다. 두 번 절을 하고선 몸을 돌렸다. 3단 계단을 내려갈 때 몸이 기우뚱거렸다
6일 일본 도쿄(東京)의 중심가인 지요다(千代田) 구 구단시타(九段下)의 야스쿠니(靖國)신사. 한국의 광복절이자 일본의 종전기념일인 8월 15일을 약 열흘 앞두고 신사에는 참배객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았다. 초등학생 아이를 데리고 참배하는 30대 부부, 양복 정장을 빼입은 40대 샐러리맨, 중절모를 쓰고 온 70대 할아버지, 여행 배낭을 멘 20대 연인…. 이날 정오부터 약 2시간 동안 신사를 찾은 참배객은 1000명이 훌쩍 넘었다. 이들은 왜 이곳을 찾는 걸까. 역사 왜곡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이곳이 일본인에게는 어떤 의미인 걸까.
▼ 가미카제 대원들 “야스쿠니에서 만나자” 외치고 출격 ▼
A급 전범도 야스쿠니의 신
“오∼, 오∼.”
밤 12시경 야스쿠니신사는 신관(神官)이 내는 소리에 파묻혔다. 신사 관계자가 영새부(靈璽簿·신으로 모시는 사람들의 명부)를 본전(本殿·신이 모셔져 있는 장소) 한가운데에 조심스럽게 놓았다. 영새부에는 신으로 모실 전몰자의 이름, 사망 장소, 사망 날짜 등이 적혀 있다.
야스쿠니신사의 어신체(御神體·신령이 머무르는 장소. 신사에 따라 거울, 칼, 구슬, 돌, 나무 등 다양하다)는 대검이다. 대검은 본전에 놓여 있다. 영새부를 본전에 둠으로써 영새부에 적혀 있던 ‘인간의 혼령’은 대검 속에 들어가 ‘신령’이 된다. 즉, 합사(合祀·둘 이상의 혼령을 한곳에 모으는 것)가 된 것이다. 이런 장면은 일반인이 좀처럼 보기 어렵다. 의식을 지켜본 일본 월간지 세이론(正論·2005년 8월호)과 같은 언론에 묘사돼 있을 뿐이다.
야스쿠니신사 본전 정문은 항상 닫혀 있는데 추계대제 첫날 행사 때는 특별히 열린다. 이때 영새부를 본전 뒤에 있는 봉안전(奉安殿)에 두는 의식을 치른다.
영새부 봉안전은 야스쿠니신사에만 있다. 전몰자를 신으로 모시기 때문에 신의 수는 전쟁과 비례해 가파르게 늘어나기 마련. 애초 본전에 영새부를 뒀지만 너무 많아지다 보니 영새부를 보관하는 봉안전을 1972년에 별도로 지었다.
현재 야스쿠니신사가 모시는 신의 수는 246만6000여 명. 이 중 태평양전쟁 전몰자가 213만여 명으로 대부분을 차지한다. 야스쿠니신사가 펴낸 ‘야스쿠니의 기도’ 책자를 보면 합사 대상자는 군인과 군속(軍屬·군 업무를 보는 사람)뿐만 아니라 소련(현 러시아) 만주 중국 등에 억류돼 사망한 사람, 국가총동원법에 따라 징용돼 사망한 사람, 오키나와 전투에서 사망한 일반 주민 등이다.
이처럼 폭넓게 합사 대상을 정해 놓다 보니 간호사, 학생, 군수 노동자와 민간인 등도 영새부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1945년 6월 오키나와 전투 때 사망한 만 2세의 아기도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돼 있다.
실제로 신사를 참배하는 일반인 중 대다수는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형제, 아버지, 할아버지, 친척, 혹은 이름 모를 애국자에게 감사와 추모의 마음을 전하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기자가 야스쿠니신사에서 만난 수많은 일본인의 표정과 말에서 군국주의에 대한 향수를 찾아내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합사 대상자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경우 육군성과 해군성이 결정했는데 1945년 전쟁이 끝나면서 더이상 전몰자가 나오지 않자 합사 결정 부처도 필요 없게 됐다. 하지만 합사에서 누락되거나 새로운 특례를 적용해 합사 대상이 된 사람을 뒤늦게 합사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 경우 야스쿠니신사는 후생노동성에서 자료를 받았다.
2차 대전 당시 A급 전범 14명을 극비리에 합사한 것도 이런 과정을 거쳤다. 1978년 야스쿠니신사는 당시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분류돼 사형되거나 옥중에서 사망한 14명의 전범을 ‘쇼와(昭和) 시대의 순난자(殉難者)’라는 이름으로 합사했다. 한국과 중국이 문제 삼는 대목도 바로 이 부분이다.
공포에 대한 마취제
“야스쿠니에서 다시 만나자.”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패색이 뚜렷하던 1944년 말 가미카제(神風) 자살특공대원은 이 말을 남기고 전장으로 떠났다. 전투기를 타고 적의 군함에 돌진하는 군인들은 ‘야스쿠니의 신이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두려움을 없앴다.
사쿠라(櫻·벚꽃)도 공포에 대한 ‘마취제’ 역할을 했다. 활짝 피었다가 며칠도 안 돼 비처럼 꽃잎을 날리며 지는 사쿠라는 봉건시대 무사도의 상징이었다. ‘꽃은 사쿠라요, 사람은 사무라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 무사들은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순간 사쿠라가 아름답게 떨어지듯 주저 없이 죽음을 택했다.
야스쿠니신사와 사쿠라는 태평양전쟁에서 한창 유행했던 군가 ‘동기(同期)의 사쿠라’에서 함께 만난다.
‘너와 나는 동기의 사쿠라. 같은 군사학교 교정에 피었네/핀 꽃은 지는 법. 나라를 위해 멋지게 지자/ (중략) /너와 나는 동기의 사쿠라. 따로따로 지더라도/꽃의 고향 야스쿠니신사. 봄에 피어 다시 만나자.’
지금도 도쿄에서 사쿠라가 피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표본목(標本木)은 야스쿠니신사에 있다.
야스쿠니신사의 전신은 1869년 6월에 지은 초혼사(招魂社)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전년도에 메이지 일왕을 떠받드는 정부군과 쇼군(將軍)을 정점으로 하는 막부(幕府·무사 정권)는 1년 이상 내전을 벌였고 결국 정부군이 승리했다.
일왕은 에도(江戶·현재의 도쿄)에 사당을 지어 사망한 정부군 병사 3588명을 위해 제사를 지내게 했다. 그 이후 전몰자의 영령은 모두 초혼사에 안치됐다. 초혼사는 1879년 6월 국가(國)를 평안(靖)하게 한다는 의미의 야스쿠니(靖國)신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현재 일본에서 신사 수는 2012년 말 기준으로 약 8만1000개로 편의점 수(약 5만 개)보다 훨씬 많다. 그러다 보니 신사에도 레벨이 생겼다. 신화에 나오는 신이나 일왕의 제사를 지내는 신사를 관폐사(官幣社)라고 하고 으뜸으로 친다. 야스쿠니신사는 일반인의 제사를 지내지만 관폐사와 같은 별격(別格)관폐사의 지위를 부여받고, 일왕의 문양인 국화꽃도 사용한다.
일왕의 관심은 각별했다. 메이지(明治·1867∼1912) 일왕은 모두 합해 11회 참배했고, 요시히토(嘉仁·1912∼1926) 일왕은 5회, 히로히토(裕仁·1926∼1989) 일왕은 54회 참배했다. 아키히토(明仁·1989∼현재) 일왕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일왕의 참배는 어떤 의미를 지녔을까. 전쟁에서 세 아들을 잃은 한 산골 주부의 소감을 실은 여성 잡지인 ‘주부의 벗’ 1944년 1월호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황송하게도 천황 폐하(일왕)께서 친히 참배하시는 모습을 엎드려 보았다. 우리 같은 천한 산골 출신은 죽어도 산속 너구리조차 울어주지 않는데 나라를 위해 죽었다고 천황 폐하까지 참배해주시는 것을 보고 감전된 것처럼 기쁨과 고마움을 느꼈다.”
결국 야스쿠니신사는 ‘전사→야스쿠니 합사→일왕 참배→징병→새로운 전사’와 같은 사슬 구조를 떠받치는 전당이 된 것이다.
전쟁을 미화하는 ‘유슈칸(遊就館)’
야스쿠니신사 배전 옆에는 유슈칸이라는 전쟁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1882년 문을 연 이곳은 막부 말기부터 2차 대전까지 수집한 유품 약 10만 점을 모아 놓았다. 이 박물관은 전쟁 미화의 핵심 역할을 한다.
7월 26일 동북아역사재단 장세윤 책임연구위원과 함께 이곳을 찾았다. 입구에는 ‘대동아전쟁 70년전(展)’이란 특별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특별전 이름부터 눈에 걸린다.
일본은 1941년 말 아시아 침략을 시작하며 “서양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되려면 일본을 중심으로 대동아공영권을 결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동아전쟁이란 말에는 침략 전쟁이 아니라 식민지 해방전쟁이라는 일본 우익의 시각이 담겨 있다.
특별전시회장 입구에는 태평양전쟁 작전도가 걸려 있다. 가로 세로 각각 1m가 넘는 대형 지도에 일본을 한가운데 놓고 일본이 침략했던 지역과 작전명이 곳곳에 표시돼 있다. 동으로는 진주만 공격(1941년 12월 8일), 북으로는 만주 방위작전(1945년 8월 9일)…. 일본은 태평양전쟁 때 아시아 여러 국가를 침략했다. 하지만 지도는 ‘작전도’라는 이름을 사용해 ‘침략’이라는 뉘앙스를 모두 지웠다. 오히려 일본이 전 세계를 지배한 듯한 인상을 줬다.
작전도 바로 옆 브라운관에선 ‘서구 열강이 앞다퉈 아시아를 식민 지배할 때 일본이 나서 아시아를 해방시키려 했다’는 설명이 나왔다. ‘아시아 침략’이 ‘해방’으로 바뀌어 있는 것이다.
일본의 과거 침략사를 합리화하는 표현은 여러 곳에서 발견됐다. 태평양전쟁을 설명하며 ‘아시아 민족의 독립이 현실로 된 것은 대동아전쟁에서 일본군의 빛나는 승리 후였다. 일본이 패한 뒤 각국은 독립전쟁 등을 거쳐 민족국가가 되었다’고 돼 있었다. 일본군의 아시아 침략이 민족국가 수립을 앞당겼다는 해석이다.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특별전시회에 놓여 있던 방명록을 들춰봤다.
“대일본제국 만세”(사쿠마·佐久間)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1년에 한 번 국민의 의무로 해야 합니다. 일본을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와다 준코·和田順子)
“아름답고 뛰어난 일본을 되찾자. 일본 국민 한 명 한 명의 손으로.”(사가 현·佐賀縣)
▼ 신사 측, 한국인 합사 철폐 요구에 “신의 영역” 거부 ▼
그렇지만 포화로 숨진 부모 시신 옆에서 우는 아이의 사진 등 전쟁의 참상이 전시된 다른 전쟁박물관을 다녀가는 일본인들은 하나같이 “전쟁이 무섭다. 절대 다시 일어나선 안 된다”고 말한다.
장 위원은 “야스쿠니신사와 유슈칸의 역사 인식은 왜곡 교과서를 펴내고 있는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과 비슷하다. 역사교과서뿐 아니라 유슈칸의 전시물에서도 잘못되고 왜곡된 내용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8·15 일본 총리의 참배=침략 정당화
야스쿠니신사는 8월 15일을 전후해 한국 중국 일본 간 외교전쟁의 불씨를 제공하는 현장이다. 일본의 지도자들이 A급 전범까지 합사돼 있는 야스쿠니신사를 찾아와 침략전쟁 과정에 목숨을 잃은 조상에게 공식적으로 경의를 표하는 행위에 대해 침략 받은 피해 국가들이 침묵할 수는 없는 일.
8월 15일엔 야스쿠니신사의 방명록과 주차장이 유독 주목을 받는다. 일본 총리와 각료들이 방명록에 무슨 내용을 적고 어떤 직함을 사용하는지, 총리가 관용차를 타고 오는지, 수행원은 데리고 오는지가 참배의 성격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총리가 개인 자격으로 참배했는지, 공식적으로 방문했는지를 판가름하는 선례는 1975년 8월 15일 미키 다케오(三木武夫) 총리가 만들었다. 그는 도쿄 무도관에서 열린 전국 전몰자 추도식에 ‘총리 자격’으로 참석했다. 이어 야스쿠니신사에 ‘개인 자격’으로, 무명용사의 유골이 납골돼 있는 도쿄 지도리가후치(千鳥ケ淵)의 전몰자 묘원에는 ‘총리 자격’으로 각각 참배했다.
법률 해석 기관과 야권에서 반발이 일었다. 당시 미키 총리는 “참배 방명록에 총리 직함을 기재하지 않았다, 총리 관용차를 사용하지 않았다, 공식 수행원을 동행하지 않았다, 공물(供物)을 공적인 비용으로 하지 않았다” 등 4가지 이유를 들어 공식 참배가 아니라고 주장해 논란을 잠재웠다. 그러자 후임 총리들이 하나둘 8월 15일에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기 시작했다. 애초 ‘개인 자격’을 강조했지만 그 성격도 점차 총리 공식 자격으로 근접했다.
그런데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총리는 1985년 사상 처음으로 총리 자격임을 밝히고 종전기념일에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했다.
‘나카소네 공식 참배’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과 중국은 총리 참배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하지만 총리가 공식 자격으로 참배하자 전쟁 피해 국가들이 거세게 항의했다. 그 후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총리가 1번, 고이즈미 총리가 6번이나 참배하긴 했지만 나머지 총리들은 재임 기간 신사 참배를 하지 않았다.
새로운 갈등… 한국인 합사
7월 24일 오후 4시 도쿄 지요다 구 도쿄고등법원 101호 법정.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한국인 유족들이 청구한 재판이 열렸다. 무산(むさん)법률사무소 오구치 아키히코(大口昭彦) 변호사는 목소리를 높였다.
“헌법 20조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의 문제입니다. ‘너는 일본을 위해 싸웠다’는 이유로 야스쿠니신사에 한국인을 합사하면 일반 한국인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합사 철폐는 당연합니다.”
재판관은 잠자코 듣고만 있다가 한마디 던졌다. “10월 23일 오후 2시에 판결하겠습니다.”
야스쿠니신사에는 현재 한국인 전몰자 약 2만1000명이 합사돼 있다. 합사 이유에 대해 신사 측은 “당시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야스쿠니신사 홈페이지에는 ‘야스쿠니신사는 당시 일본인으로서 싸운 대만과 조선반도 출신의 신령에게도 제사를 지내고 있다. 신분, 훈공(勳功), 남녀 구별 없이 평등하게 모시고 있다’고 적혀 있다. 시혜를 베푼다는 투다.
한국인 유족들은 2001년 6월과 2007년 2월 각각 도쿄지방법원에 한국인 합사에 대한 일본 정부의 책임을 묻고 합사 철폐를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 일제에 징용돼 강제로 전쟁터에 끌려 나가 죽음을 맞았는데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것은 치욕이라는 주장이다.
1946년 10월 조선성명복구령에 따라 창씨개명이 무효화됐지만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한국인은 아직 창씨개명된 상태다. 예를 들어 일본 육군 대위로 1945년 5월 오키나와 부근에서 전사한 탁경현 씨는 미쓰야마 히로부미(光山博文)라는 이름으로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돼 있다. 2001년 소송의 경우 지방법원과 고등법원, 대법원에서 모두 기각됐다. 2007년 소송은 현재 고등법원에서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야스쿠니신사 측은 합사 철폐 요구에 대해 “사망자의 이름이 올라와 있는 영새부는 신의 영역이기 때문에 어떤 표기도 수정할 수 없다”고 버티고 있다.
한국인 유족들은 속이 탄다. 5월 29일 도쿄고등법원에서 진행됐던 구두변론에서 원고 이희자 씨가 제출한 진술서에 한국인 유족의 심경이 잘 나타나 있다.
“저는 야스쿠니신사에 갇혀 있는 제 아버지의 이름을 지워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죽은 사람을 살려 내라거나 야스쿠니신사를 없애 달라는 게 아닙니다. 일제 식민지 지배로 인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버지 없이 자라온 딸이 그 피해를 일으킨 당사자인 일본 국가와 야스쿠니신사에 요구하는 것치고는 소박한 것 아닌가요.”
부침(浮沈)의 역사와 갈림길
도쿄 한복판에 자리를 틀고 있는 야스쿠니신사는 침략전쟁에 대한 일본 우익의 강경한 입장을 상징하는 난공불락의 성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이 시설도 일본의 부침에 따라 운명이 크게 바뀌어 왔다. 67년 전인 1946년만 해도 야스쿠니신사는 국가 시설에서 일개 종교법인으로 전락했다.
당시 미군을 중심으로 하는 연합군최고사령부(GHQ)는 신사에 대한 정부의 지원을 끊게 만들었다. 전쟁을 미화했던 유슈칸도 폐쇄시켰다. 종교법인이 된 야스쿠니신사는 각종 제사를 자비로 지내야 했다.
그러자 전사자 유족들이 반전을 시도했다. 1947년 11월 ‘일본 유족 후생연맹(이후 일본 유족회로 개명)’을 결성한 뒤 일본 정부에 유족에 대한 대책 마련을 요구했다. 2007년 9월 도쿄 도 신주쿠(新宿) 구 일본청년관 대강당에서 열린 유족회 창립 60주년 기념행사에는 일왕 부부가 처음으로 참석했다. 유슈칸도 다시 문을 열었다. 그만큼 유족회의 지위가 높아진 것이다.
그동안 야스쿠니신사 문제 해결을 위한 방안들이 여러 차례 나왔다. 1985년 8월 나카소네 총리의 공식 참배 이후 국제사회의 비판이 일자 ‘A급 전범 분사론’이 자민당과 유족 일부에서 제기됐다. 하지만 야스쿠니신사는 교리상 A급 전범만 따로 떼어내 모시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거부했다. 그 경우 한국인 합사자 등에 대한 요구에도 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야스쿠니신사 이념 자체가 붕괴될 우려가 있다는 점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국립 추도시설을 짓자는 논의도 있었다. 고이즈미 총리는 2001년 8월 참배에 대한 비판을 무마하기 위해 야스쿠니신사 및 전몰자 묘원과 다른 새로운 추도시설을 만드는 방안을 논의할 필요가 있다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일본유족회와 야스쿠니신사 측의 반대로 제대로 논의가 진전되지 않고 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올해 5월 국회에서 정부가 새로운 국립 추도시설을 건설하는 데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올해도 어김없이 야스쿠니신사발(發) 외교 갈등이 예상된다. 아베 총리는 6일 히로시마(廣島)에서 개최된 평화기념식에 참석한 후 기자들에게 “각료가 개인으로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할지는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에 자유다”라고 말했다.
전쟁 피해 국가들의 목소리는 그의 귀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듯하다. 그는 올해 4월 “한국의 항의는 김대중(대통령) 시대에도 조금은 있었지만 노무현(대통령) 시대에 들어 현저해졌고, 중국도 이른바 A급 전범을 합사했을 때에는 항의하지 않다가 어느 날 갑자기 항의하기 시작했다. 그 배경이 뭔지 조사할 필요가 있다”는 말을 꺼내기도 했다.
총리가 이런 말을 하자 이나다 도모미(稻田朋美) 행정개혁담당상,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자민당 정조회장 등 일부 각료와 의원들은 공개적으로 8·15 참배 의사를 밝혔다.
동아일보는 이번 특집 기사를 준비하면서 야스쿠니신사와 유족회 간부들에게 지난달 인터뷰를 요청했다. 하지만 유족회 측은 임원회의를 통해 인터뷰에 응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6일 알려왔다. 이유는 설명하지 않았다. 수십 년째 동북아 역사 갈등의 뇌관, 과거사 왜곡의 상징이 되어버린 야스쿠니신사가 그 고즈넉한 풍경처럼 평범한 일본의 한 전통시설로 되돌아갈 수 있는 날은 언제일까.
도쿄=박형준·배극인 특파원 lovesong@donga.com
동아일보
야스쿠니신사 - 세계인들이 일본의 꿈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이유 (한글판)
[야스쿠니 신사의 조선인 합사는 언제부터?]
[발굴] 총 2만여 명... 첫 사례는 1926년 4월 배대영으로 추정▲ 도쿄 구단시타에 소재한 야스쿠니 신사 본당 전경. |
ⓒ 유용수 |
때만 됐다 하면 일본 총리가 잊지 않고 말썽을 부리고 있다는 소식이 몇 년째 계속이다. 주변국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강행하고 있는 일본총리의 행태가 과연 '무대뽀'정신의 원조답다.
그가 즐겨하는 말마따나 '국내용'의 몸짓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야스쿠니 신사에 관한 것이라면 일본인들의 문제에만 그치질 않는다. 당연히 내정간섭이라는 말로 피해나가거나 괜한 성질을 부릴 일도 아닌 듯하다.
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을 나라에서 극진히 모시는 것은 으레 있을 수 있는 예우이겠지만, 그것이 이른바 'A급전범'의 소굴이 되어서는 참으로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야스쿠니 신사라면 비단 'A급전범'에 대한 참배문제만 얽혀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2만 명이 넘는 조선인들의 위패가 그곳에 함께 있다는 것 역시 큰 문제다. 듣자하니 이들 조선인 전몰자들에 대한 합사(合祀) 취소 요구에 대해서는 묵살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조사입법고사국에서 발간한 <야스쿠니신사문제자료집> (1976년 5월)에는 "1975년 10월까지 조선인 합사주수의 누계가 2만636인"이라고 적고 있다. 한편, <동경신문(東京新聞)> 2001년 8월 12일자 보도에는 '조선출신자가 2만1181주, 대만출신자가 2만7863주'라고 전하여 그 숫자가 다소 늘었음을 알 수 있다. |
일본총리의 막무가내식 신사참배도 문제려니와 야스쿠니 신사에 볼모로 잡힌 조선인합사자들의 문제도 당연히 서둘러 해결이 되어야 할 과제가 아닐까 한다. 이를 지켜보는 합사자 유족들의 심정은 또 오죽할 것인가? 식민지의 백성이라 하여 애먼 전쟁터에서 산 목숨을 버린 것도 억울한데, 죽어서까지 그네들에게 충성할 필요는 결코 없을 테니까 말이다.
지난 1976년에 일본국회도서관에서 정리한 <야스쿠니신사문제자료집>에 따르면, 1975년 10월 현재의 조선인 합사주수(合祀柱數)는 2만636인, 대만인 합사주수는 2만7656인에 달한다고 했다. 하지만 <동경신문> 2001년 8월 12일자 보도내용에는 '조선출신자가 2만1181주, 대만출신자가 2만7863주'라고 소개하고 있다는데, 이로써 그 사이에도 숫자가 계속 늘어났음을 엿볼 수 있다. 결코 적지 않은 숫자이다.
이들이 어느 때에 전사한 것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그 가운데 태평양전쟁 때의 피해가 가장 컸던 것은 분명하다. 참고로 1940년 가을 임시대제까지의 야스쿠니 신사 총합사주수는 19만3811주였고, 그 후 시기부터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의 짧은 시기에 200만 명 이상의 추가 전사자를 냈던 것으로 보면 그 추세나마 대략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야스쿠니 신사에 조선인이 합사되기 시작한 것은 도대체 언제부터였을까?
1930년대 이후의 신문자료를 훑어보면, 경찰이나 국경수비대원 출신의 조선인 전몰자들이 야스쿠니신사 합사의 은전(?)을 입었다는 내용이 차츰 등장하다가 1930년대 후반기로 넘어갈수록 그러한 기사들은 부쩍 증가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는 그 사례들을 일일이 정리하기가 벅찰 정도여서, 다만 지금까지 발견된 최초의 사례 하나만을 소개하는 것에 그치려 한다.
필자가 1910년대 이후 조선총독부 관보와 신문자료 등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조선 사람으로서 야스쿠니 신사에 처음으로 합사된 이는 '배대영(裵大永)'으로 추정되는데, 그때가 바로 1926년 4월이 된다.
▲ <조선총독부 관보> 1926년 5월 11일자에는 조선인 고원 배대영을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를 앙출한다는 내용의 '육군성 고시 제8호'가 재수록되어 있다. |
이에 대해서는 우선 <조선총독부 관보> 1926년 5월 11일자에 일본의 관보에 수록된 '육군성 고시 제8호'를 다시 옮겨놓은 자료가 남아 있는데, 이 내용을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육군성 고시 제8호
대정3년내지9년전역 및 동 전역에 계속한 출병에 관한 근무에 복무하다 사몰(死沒)한 좌기인명의 자를 본년 4월 야스쿠니신사에 합사(合祀)를 앙출(仰出)함.
대정15년(1926년) 4월 15일 육군대신 우가키 카즈시게(宇垣一成)
고원 훈팔등(雇員 勳八等) 배대영(裵大永) 경기도
(4월15일 관보)
여기에 나오는 대정삼년내지구년전역(大正三年乃至九年戰役)은 1914년에서 1920년 사이에 벌어진 제1차 세계대전 및 시베리아출병을 말한다.
여기에 나오는 배대영이라는 사람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때마침 <매일신보> 1926년 5월 13일자에 관련기사 몇 줄이 수록되어 있다. "조선인 배씨, 야스쿠니신사에 합사, 배씨 일문의 큰 영예이라고"라는 제목이 붙은 기사 내용을 여기에 옮기면, 이러하다.
"경성부 서부 월궁정(月宮町) 47번지에 원적을 둔 배대영(裵大榮)은 금택(金澤, 가네자와)에 있는 기병 제9연대의 고원으로 노령 연해주(露領 沿海州)에 주둔하던 중 지난 대정 11년(즉 1922년) 6월 11일 '크라스뉘크ㅡ트'에서 전사한 공로에 의하여 일찍 훈팔등(勳八等)을 받았던 바 이번에 다시 정국신사(靖國神社)에 합사(合祀)하라는 천황폐하의 어명에 의하여 4월 28일에 초혼식(招魂式)을 집행하고 29일에 임시제를 거행하였다는 통지가 동 신사임시제위원에게로부터 왔으므로 고인과 그 유족의 명예는 실로히 크리라더라."
▲ <매일신보> 1926년 5월 13일자에는 짤막하나마 조선인 전사자 '배대영'의 야스쿠니신사 합사에 대한 몇 가지 사실을 전하고 있다. |
여기에 나오는 '월궁정'은 지금의 종로구 적선동(積善洞) 지역을 가리킨다. 일개 고원(雇員)의 신분으로 멀리 러시아 땅까지 나갔다가 전사한 지 4년 만에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것이 "배씨 일문의 큰 영예"라고 적고 있다. 천황폐하의 특명으로 그리 된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어쨌거나 '배대영'의 사례 이후에 특별한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선별적'으로 은전이 베풀어지던 조선인 합사는 1930년대 후반으로 치달으면서 거의 일상화되는 현상을 보여주었다. 이는 그만큼 조선인 희생자가 여기저기 늘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물론 그때마다 '광영'이니 뭐니 하는 소리가 빠지질 않았다.
그렇게 하나 둘씩 합사된 숫자가 태평양전쟁까지 거치면서 결국 2만명 선을 훌쩍 넘겼던 것이다.
야스쿠니 신사의 혼이 되는 것이 그네들에게는 얼마나 영광되고 감격할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해방이 되고도 60년이 다 된 지금 우리들에겐 그것이 분명 욕된 일이고 죽은 자에게나 살아 있는 자에게나 그저 뼈아픈 고통이 되고 있을 뿐이다
[조선 황족 이우, 야스쿠니에 있다]
▣ 전주=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 스나미 게스케 프리랜서 기자
“글쎄, 잘 모르겠는데.” 의친왕의 11번째 아들인 이석(67)씨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4월3일, 그를 만나러 전주 한옥마을을 찾은 <한겨레21> 취재진은 황망한 걸음으로 서울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아마 그랬을 수도 있을 거야. 이우 형님께서 돌아가실 때 일본 군인 신분이셨으니까. 야스쿠니신사라고 했나? 고약한 일이구만.” 이석씨는 헛기침을 했다. 늦은 오후, 전주 한옥마을의 공기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 이우는 1945년 8월7일 숨져 14년 뒤 야스쿠니의 영령이 됐다. 이우의 죽음을 전한 1945년 8월9일치 <매일신보>1면.(사진/매일신보) |
<야스쿠니 100년사>에 짧은 기록 남아
다른 친인척들도 사정은 비슷했다. 의친왕의 손자로 인정받고 있는 이혜원 국립고궁박물관 자문위원은 “그런 얘기를 들은 적도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우 삼촌이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돼 있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있긴 한데, 확인해본 적은 없습니다. 오랜 전 일이지 않습니까. 정확히 잘 모르겠네요.”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조선 황족들은 없을까? 야스쿠니신사에 강제 합사된 조선인들의 사연을 취재하던 <한겨레21>과 민족문제연구소는 옛 조선 황족 가운데 일부가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돼 있을 가능성에 주목하게 됐다. 이따금 언론에 동정이 소개되는 황족 후손들을 중심으로 취재가 진행됐다. 사람들은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거나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증언은 대부분 전언이어서 신뢰하기 힘들었다.
야스쿠니신사에는 일왕을 위해 싸우다 목숨을 버린 군인·군속 246만여 명의 영령이 일본의 ‘수호신’으로 모셔져 있다. 이 가운데 조선인 출신 합사자는 2만1천여 명, 대만인 출신 합사자는 2만7천여 명에 이른다. 조선 황족 가운데 일본 군복을 입었던 사람은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1897∼1970), 영친왕의 형 의친왕의 장남 이건(1909∼91), 의친왕의 둘째아들 이우(1912∼45) 등 3명이다.
이 가운데 이우는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의 양자로 들어가 법적으로는 운현궁의 후손이 된다. 이우는 제2 총군사령부 교육담당 참모(중좌·우리의 중령)로 근무하던 중 1945년 8월6일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에 피폭돼 다음날인 8월7일 숨졌다.1945년 8월9일치 <매일신보>는 1면에서 ‘이우공 전하, 7일 히로시마서 어(御)폭사’라는 톱 기사로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전하고 있다. “이우공 전하께서는 재작 6일 히로시마에서 작전임무 어(御)수행 중 공폭에 의하야 어(御)부상하시어 작 7일 어(御)전사하시었다.” 조선 황족 중 누군가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돼 있다면 그 가능성이 제일 높은 사람은 이우인 셈이다.
<한겨레21>과 민족문제연구소는 문서 등 기록자료 분석에 들어갔다. 해결의 실마리는 뜻밖에도 쉬운 곳에 있었다. 1869년 도쿄에 도쿄초혼사(東京招魂社)란 이름으로 역사에 첫 모습을 드러낸 야스쿠니신사는 1987년 6월30일 세 권짜리 분량의 책 <야스쿠니 100년사>(비매품)를 펴낸다. 이 책의 506쪽에서 이우의 야스쿠니신사 합사와 관련된 짧은 기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영세부봉안제서류철’(이우공 합사제 서류 포함) 소화34년 10월 ~소화35년 10월
이우 공은 소화 20년 8월7일 히로시마에서 전몰했다. 34년 10월7일 초혼식을 집행하여 상전에 합사하였고 17일 4만5천여 명의 육해군 군인, 군속과 함께 본전 정상(正床)에 합사하게 되었다. 본 철은 이에 관한 자료가 중심이 되고 있다.
기록은 이우가 1959년 10월17일 4만5천여 명의 육해군 군인들과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됐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구체적인 합사 경위는 ‘영세부 봉안 제 서류철’에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내용까지 확인할 순 없었다. 이석씨는 취재진이 이런 사실을 전해주자 “조국이 해방을 맞은 게 벌써 62년 전인데 형님이 야스쿠니신사에 억눌려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것은 기막힌 일”이라고 말했다. 그가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돼 있다는 사실은 국내 학계에 알려진 바 없다.
일본 황족과 같은 대우 받지 못했다
△ 이우는 수려한 외모 때문에 몇 해 전부터 ‘얼짱 황손’이라는 애칭으로 인구에 회자됐다. 제일 아래 사진은 중국에서 근무하던 무렵 찍은 것이다. 위의 두 사진의 촬영 시점은 명확하지 않다. |
작가 정범준씨는 조선 황족들의 역사를 다룬 책 <제국의 후예들>에서 “이우는 아버지(의친왕)처럼 호방한 성격을 지녔고 일본을 증오했다”고 적었다. 1912년 11월15일에 태어났고, 모친은 수인당 김흥인이었다. 1915년 경성유치원, 3·1운동이 나던 해인 1919년 종로소학교를 거쳐 1922년에는 여느 일본 황족들처럼 일본 유학을 떠나 귀족학교인 학습원에 입학했다.
당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뒤져보니 “이우가 탄 자동차가 행인을 치었다”거나 “말에서 떨어져 작은 부상을 당했다”거나 “도쿄에서 소매치기를 당했다”는 등 자잘한 단신 등이 이어지고 있다. 그는 지금의 기준으로도 “잘생겼다”는 감탄사가 터져나오는 옥골선풍의 귀공자였다.
그는 조선 황실에서 드물게 “조선은 독립해야 한다”는 명확한 민족의식을 가진 청년이었다고 한다. 생전에 이우를 접했던 지인들의 전언이 이를 증명한다.
정범준씨는 <제국의 후예들>에서 1988년 9월15일 ‘히로시마 쥬코트’라는 방송사가 이우에 대해 다룬 다큐멘터리 ‘민족과 해협’에 소개된 이우의 지인들의 증언을 소개하고 있다. 일본인 동기생 아사카는 “조선은 독립해야 한다고 항상 마음속으로 새기고 있었기 때문에 이우공은 일본인에게 결코 뒤지거나 양보하는 일 없이 무엇이든지 앞서려고 노력했지요”라고 말했고, 운현궁의 가정교사였단 가네코는 “조선은 독립해야 한다는 확실한 신념을 갖고 있었으므로 일본 육군에서도 두려워했다”고 증언했다.
역사학자 이기동은 1974년 5월치 월간 <세대>에 쓴 글 ‘이우공, 저항의 세대’에서, 이우가 일본의 정략 결혼을 피해 조선인 박찬주(후작 박영효의 손녀)와 결혼을 밀어붙여 뜻을 이루고 마는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영세부봉안제서류철’에는 어떤 내용들이 담겨 있을까. 이에 대한 암시를 주는 기록은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아카자와 시로우가 쓴 <야스쿠니신사>(이와나미서점, 2005년 7월20일 출판)를 보면 이우의 합사 문제를 처리하면서 일본인들이 맞닥뜨려야 했던 고민들을 읽을 수 있다. 숨질 때 이우는 일본의 황족과 동등한 취급을 받던 조선의 왕공족이었다.
조선인 강제 합사에 대한 야스쿠니신사의 공식 의견은 “죽은 시점에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일본을 지킨 신으로 모시는 게 당연하다”는 것이다. 일본의 논리를 그대로 따른다면 죽는 시점에 일본 황족과 동등한 지위였던 이우는 (합사 자체가 부당한 일이긴 하지만) 일본 황족과 동등한 취급을 받고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됐어야 한다.
1959년 10월6일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옛 황족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신노(北白川宮 能久親王)와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나가히사오(北白川宮 永久王)는 “황족과 평민을 같은 자리에 모실 수 없다”는 궁내청의 의견을 받아들여 두 황족을 따로 모실 수 있는 미타마시로(御靈代·야스쿠니신사의 영령이 깃든다는 거울)를 새로 만들어 혼백을 모셨다. 두 황족을 위해 따로 만든 거울은 신사 왼쪽에, 기존의 미타마시로는 오른쪽에 안치돼 있다.
숨진 이우는 일본 황족과 같은 대우는 받지 못한다. “히로시마에서 피폭 사망한 옛 왕족(대한제국의 왕가로 한국 병합 후에 황족에 준하는 지위로서 편입했다)의 이우공의 합사 처리는 야스쿠니신사에서도 특히 문제가 되었다. 그것은 옛 왕족인 이우공을 특별 ‘일좌’(一座)로 합사된(새로 미타마시로를 만들어 따로 혼백을 모신) 옛 황족의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등 2주와 동등하게 취급할지 말지라는 문제다.”(<야스쿠니신사>)
일본에 안 가려고 설사약까지 먹어
논의 끝에 이우는 일본 황족처럼 일좌로 합사되지 않고, 수백 명의 육해군 군인과 같은 수준에서 합사되는 것으로 결정됐다. “달리 취급한 이유는 불명하지만, 여기에도 궁내청 쪽에서 암시가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책은 적고 있다.
히로시마에서 피폭된 이우는 그날 오후가 돼서야 히로시마 혼가와 상생교 아래에서 흙투성이로 변한 채 발견됐다. 그날 밤 이우는 히로시마 남단의 니노시마라는 섬으로 후송됐고, 해군 병원에서 의식을 조금 되찾았지만 이튿날 새벽 고열로 신음하다 숨을 거뒀다. 이우는 히로시마로 전출되기 전 운현궁에 머물면서,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고 일본에 가지 않기 위해 설사약을 먹으면서까지 버텼다고 한다. “남에게 말할 수는 없지만 내가 보기에도 일본의 패망은 기정 사실인데 미국뿐만 아니라 소련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니 조선 해방도 뒷수습이 큰일입니다.”(김을한 <인간 영친왕>)
유해는 1945년 8월8일 서울로 운구됐고, 의무관들에 의해 방부 처리됐다. 일주일 뒤인 1945년 8월15일 정오, 히로히토 일왕은 라디오에서 새어나오는 모기만 한 목소리로 항복을 선언했다. 이우의 장례식이 열린 것은 일왕의 ‘옥음 방송’이 끝난 직후인 8월15일 오후 1시, 지금의 동대문운동장인 경성운동장에서였다. 조선 신궁의 궁사가 제주로 동원된 조선군사령부 주관의 육군장이었다. 젊은 미망인과 어린 두 아이의 모습이 도드라져 침통하고 구슬픈 장례식이었다고 한다.
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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