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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관소/문화사 &시사

[서북청년단] 창설*활동 *해체*백색테러 & 영락교회관계

                            

             서북청년단(西北靑年團, 약칭: 서청)   

                                    

                   

                  




 미군정 당시 조직된 대한민국의 보수운동단체로 반공주의 청년단체였다. 서북청년회의 사무실은 한국 민주당 본부가 있는 동아일보 사옥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서북청년회는 1946년 11월 30일 월남한 이북 각 도별 청년단체가 대공투쟁의 능률적인 수행을 위해 선우기성(鮮于基聖)을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하여 설립한 우익청년운동단체이다. 


1946년 8월경부터 대한혁신청년회·함북(咸北)청년회·북선(北鮮)청년회·황해도회(黃海道會)청년부·양호단(養虎團)·평안(平安)청년회 등의 각 대표 사이에 통합협의가 진전되어 서울 종로 YMCA강당에서 결성대회를 열고 창단하였다.


강령으로는 조국의 완전자주독립의 전취(戰取), 균등사회의 건설, 세계평화에의 공헌 등을 내세웠고, 기구는 중앙집행위원장 외 11개 부서와 감찰위원회 및 지부로 구성되었다. 제일 먼저 결성된 지부는 강계(江界) 출신 청년들이 중심이 된 서울종로지부로서 김이협(金履浹)이 위원장이었다.



1947년 1월 이선파(李鮮波)를 위원장으로 한 서울중구지부, 평안북도 청년들의 서부지구, 청단지부(靑丹支部), 인천지부 등이 잇따라 결성되었고, 1947년 6월 10일임일(林一)을 위원장으로 하여 대전에 남선파견대본부(南鮮派遣隊本部)를 설치하였다. 서북청년회는 좌우익의 충돌이 있을 때마다 언제나 우익진영의 선봉역할을 하였다.



1947년 3·1절 기념식을 각각 가진 좌우익의 시가행진중 남대문에서 충돌한 남대문충돌사건, 공산주의를 찬양·고취하던 민족예술제를 광복청년회와 합동으로 저지시킨 부산극장사건, 부산좌익청년운동의 본부격인 민주애국청년동맹의 사무실을 습격하여 서북청년회 부산지부의 간판을 건 좌익단체사무실점령사건 및 대북공작 등이다. 이러한 격렬한 반공투쟁은 모두가 공산치하의 학정에 못 이겨서 자유를 찾아온 그들의 과거경험이 크게 작용한 데서 나온 행동이었다.



이렇게 서북청년회가 대공투쟁을 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1947년 4월에 환국한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총사령관 지청천(池靑天)이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의 조직에 착수하였다.



 지청천은 광복군 참모장을 지낸 이범석(李範奭)이 만든 민족청년단(民族靑年團)과의 갈등 속에서도, 전국 청년의 대동단결을 전제로 한 청년조직을 강력히 추진하여, 대동청년단을 중심으로 기존 청년단체들의 통합공작을 시도하였다.



통합공작에 참가한 단체는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총연맹을 비롯하여 광복청년회·대한독립청년단·청년조선총동맹·서북청년회 등이었다.


 이 과정에서 서북청년회는 합동파와 합동반대파로 분열되어 심각한 대립이 계속되다가, 합동파는 1948년 9월 대동청년단에 통합되었고, 합동반대파는 문봉제(文鳳濟)·김성주(金聖柱) 등이 중심이 되어 서북청년단을 재건하였다. 이 조직은 1948년 12월 19일 대한청년단으로 흡수 통합됨으로써 자연 해체되었다.





[활동 & 해체]





제주4·3평화기념관에는 이승만은 공식석상에서 대놓고 ‘가혹하게 탄압하라’고 말하기도 했다는 기록이 보존하고 있다. 1949년 1월 21일 국무회의에서 “미국 측에서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동정을 표하나 제주도, 전남사건의 여파를 완전히 발근색원하여야 그들의 원조는 적극화할 것”이라며 “지방 토색(討索) 반도 및 절도 등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여 법의 존엄을 표시할 것이 요청된다”고 말한 이 대통령의 발언록이 보존돼 있다.


 이승만은 모슬포경찰서와 성산포경찰서를 신설하라는 대통령령도 공포(49년 1월 18일)했으며, 서북청년회 단원을 경찰과 군대에 편입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는 내용도 기념관엔 전시돼 있다.

1947년 대동청년단이 결성되자, 선우기성 중심의 합류파는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였으며, 서북청년회에서 문봉제 중심의 재건파는 이승만의 친위대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독자적으로 서북청년단의 간판을 사용하던 이들도 있었다.


한편 서북청년단 해체 요구가 나오자 장택상은 강력하게 반발하였다.조병옥 역시도 치안상의 문제를 들어 서북청년단 해산을 반대하였다. 1947년 3월 3.1절 당시 활동과 관련해 장택상은 서북청년단에 5만원을 지원하기도 했다.


서북청년회는 제주시민 10%까지 포함한 전국에서 30만명에 달하는 국민을 좌경분자 처단이라는 명목하에 탄압 혹은 살해했다. 




서북청년회 중에 문봉제 중심의 재건파로 이승만의 친위대 역할을 하였던 안두희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 들어가 김구를 살해했다. 


또한 1973년 문봉제는 증언을 통해 선우기성이 장택상에게 불려가 쌀한가마니에 해당되는 액수의 봉투를 받았다고도 했다.한편 좌파와의 무력충돌에서 승리하자 장택상은 그들에게 특별히 잔치상을 차려주기도 했다. 

한편 한민당·이승만로부터도 후원을 받았으나 자금의 대부분은 서북 출신 재산가들이 주로 지원하였다. 그러나 최창학·박흥식 등 친일파의 경우에는 협박을 통해 자금을 얻어내기도 했다.



일부는 군으로도 들어왔다. 조선경비대 통위부장 류동렬, 경찰청 경무부장 조병옥, 서북청년회 위원장 선우기성 사이에 합의가 있었는데 당시 서북청년회 내부에서도 대동청년단으로의 합류파와 재건파 사이에 분열과 반목이 있으면서 제3의 길을 선택한 사람(서청원)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서북청년회는 1946년 11월 30일부터 가장 규모가 큰 극렬 우익단체로 활동하였고 1948년 12월 19일 이후 해체되었는데 의외로 서북청년단의 단원 중에서 성공한 사람은 얼마 안되며 한국전쟁 중에 조선인민군에 의해 처형당하거나 점차 한국사회에서 잊혀져 갔다


위키백과






[영락교회관계 ]



[제주 4.3사건, 서북청년단...그리고 한경직]



그때 공산당이 많아서 지방도 혼란하지 않았갔시오. 그때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되어 조직을 했시오.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시오. 그러니까니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미움도 많이 사게 됐지요.” (김병희 편저, 『한경직 목사』, 규장문화사, 1982. 55-56쪽)

오늘은 제주 4.3사건 66주년째 되는 날입니다. 66년 전 제주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분들 꽤 많습니다. 특히 교회다니는 친구들은 더욱...


작년에 4.3사건을 다룬 '지슬'이라는 영화가 선댄스 영화제 최고상을 받으면서 제주 4.3사건이 다시 화제가 된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가장 청렴하고 모범적인 목사로 존경받는 한경직 목사와 제주 4.3학살을 주도한 서북청년회가 어떤 관계가 있는 지 아는 분은 교회 내에서 그리 많지 않습니다. 가장 큰 가해자들인데도요...



한경직 목사는 4.3사건의 학살을 주도한 '서북청년회'에 대해 무척 자랑스러워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규장에서 출판된 -한경직 목사-책에 그리나오니 부인할 수 없겠죠. 한 개인의 삶을 평가하는 건 다면적이고 입체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청렴하고 결백했을 수는 있으나 참혹한 역사의 진실 앞에서 한경직 목사가 과연 한국 기독교가 그렇게 존경할 만한 인물인지 다시 보게 됩니다.


 서북청년단 청년들의 4.3만행의 사진은 구글링으로 한번만 돌려보시면 바로 나올 겁니다. 한국 개신교는 제주 4.3의 가장 큰 가해자입니다. 그 사실을 잊지 않고 책임있는 모습을 보이면 좋겠습니다. 특히 영락교회는 더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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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한국교회는 다른 종교에 비해 우편향적인 모습을 강하게 보였다. 즉, 반탁-단정 노선을 충실히 지지함으로써 이승만의 권력 장악과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기여했던 것이다. 당시 불교와 천도교는 좌파나 중도파의 영향력이 강했고, 천주교의 경우 좌우합작 노선을 지지하다가 단정 노선으로 선회했다. 다른 종교들의 정치적 태도와 비교해볼 때, 해방정국에서 한국교회의 우편향성은 돋보이는 것이었다. 제1공화국(1948-60) 시기 동안 한국교회가 일방적으로 이승만을 지지했던 것은 해방정국 시기에서부터 예정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한국교회는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부터 극우반공체제의 성립에 크게 관여하였다. 대표적으로, 한국교회는 이승만 정권에 큰 도전이었던 제주도와 여수·순천 및 지리산 일대의 무력 충돌 사태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개입했었다. 제주4·3사건이 발생했을 때, 영락교회 청년들이 주축을 이룬 서북청년회 회원들은 경찰과 협력하여 무자비한 진압작전을 펼쳤다. 다음은 한경직 목사의 발언이다.


“그때 공산당이 많아서 지방도 혼란하지 않았갔시오. 그때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되어 조직을 했시오.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시오. 그러니까니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미움도 많이 사게 됐지요.” (김병희 편저, 『한경직 목사』, 규장문화사, 1982. 55-56쪽)


한경직 목사의 영락교회는 이북에서 월남한 개신교인들이 모여 만든 교회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공주의적 성형이 무척 강했다. 문제는 영락교회의 청년회가 군경과 함께 제주4·3사건 때 제주도민을 학살한 서북청년단의 구성원이었다는 사실이다. 


창립 당시 회원수가 229명에 달했던 영락교회 청년회 서북청년단의 발족을 주도하고 반탁운동, 기독교민주동맹의 창립대회장 습격, 제주4·3의 진압 등 “반공건국, 멸공건국, 승공건국”을 위한 활동에 헌신했던 것이다. 영락교회 청년회의 핵심회원 중 한명은 ‘사상검사’로 이름을 날린 오제도이기도 했다.


1980년대 초반에 나왔던 이 발언은 제주4·3사건을 ‘공산폭동’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시기에 나왔기 때문에 당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제주도에서 약 3만 명의 민간인이 이승만 정권에 의해 학살당한 것이 규명된 현재의 경우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발언이 아니다. 민간인 학살과 관련하여 한국교회는 책임지고 반성해야 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또한, 교회 지도자들은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교육에도 참여했다국민보도연맹은 좌익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전향시켜 사상 교화의 역할을 했던 사상통제기구였지만, 가입자 수가 위로부터 할당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좌익사상과 무관한 민간인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문제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권은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을 조직적으로 학살했던 사실이다. 

이로 인해 지금까지 약 30만 명의 민간인이 학살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조직에 교회 지도자들이 참여했던 것이다. 즉, 1950년 3월 경남 밀양지역의 경찰서가 실시한 합숙훈련에서 ‘지방 특지(特志)교회책임자’가 정신 방면의 강사로 활동했던 것을 볼 수 있다(『연합신문』1950.3.16). 성결교의 평신도 지도자였던 윤판석은 마포기독교연합회의 회장이었으며, 국민보도연맹 마포지구의 지도 위원이기도 했다(윤판석, 『간증백세』, 신망애출판사, 1970, 63쪽). 


보도연맹 민간인 학살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극우체제의 성립과 밀접한 보도연맹에 교회 지도자들이 밀접하게 관련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밖에 여러 가지 과정을 거쳐 한국교회는 반공적 폭력을 정당화시켜 주는 ‘폭력의 신학’을 외치게 되었다.


p.s: 이와 관련하여 1998년은 제주4·3사건 발발 50주년을 맞아 다양한 행사들이 개최되었다. 주목할 것은 6월 22일 민족선교연구소(이사장 한도전 목사)가 ‘민족화해와 통일을 위한 교회의 사명’이란 주제의 학술세미나를 개최한 사실이다. 세미나의 참석자들은 “제주4.3을 외면해온 한국교회는 회개의 신앙고백을 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9월 22일 민족선교연구소는 기독교대한감리회 제주지방회와 함께 ‘4.3해결의 과제’를 주제로 행사를 개최하였는데, 여기에서도 “교회가 그 동안 4.3의 아픔을 외면해온 데 대한 회개”를 다짐했다.


http://bokklers.com/all/10372






[제주 4.3학살]



[제주 4.3 항쟁 - 7.서청의 착취와 '민보단 강요']


7. 서청의 착취와 '민보단 강요'

여순사건 직후 48년 11~12월 두 달 사이에 최소한 1천 명 이상의 서북쳥년회 단원들이 경찰이나 경비대원으로 급히 옷을 갈아입고 진압작전에 투입되었다. 이 일엔 이승만이 앞장섰다. 미군의 48년 12월 6일자 보고에 따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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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대통령(이승만)과 내무부장관(신성모)의 합의에 따라 서북청년단원들이 한국군에 6천500명, 국립경찰에 1천700명이 공급될 예정이다. 이들은 남한 지역에 있는 9개 경비대와 각 경찰청에 배정될 것이다. 

모든 단체들 간의 상호합의에 따라, 서북청년회는 경찰에서 단원 20명당 경사 1명, 50명단 경위 1명, 200명당 경감 1명 등의 비율로 경사급과 간부급 요원으로 배치하도록 합의돼 있다."

이승만은 12월 10일 서북청년회 총회에 참석해 "제주도 4.3사태와 여수,순천 반란사태로 전국이 초비상사태로 돌입했다. 이 국난을 수습하기 위하여 사상이 투철한 서북청년회를 전국 각지에 배치하겠다"고 말했다.

이승만은 "사상이 건전한 여러분이 나서야 한다"며 서청의 제주 파견을 앞장서서 독려했는데, 여기엔 미군도 가세했다. 미군 보고서는 "제주도의 서북청년단이 경찰과 경비대를 지원하게 된 것은 몇몇 미군 장교들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고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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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청 단원들은 '특별 중대(elite company)'라는 특수 임무를 부여받았는데, 이들에겐 군 내부의 '반대자 색출' 이라는 헌병 기능까지 부여되었다. 그러나 정작 줘야 할 건 주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은 서청 대원들을 대거 경찰이나 군인으로 내려보내면서 월급이나 보급 체계를 제대로 갖추지 않은 채 현지 조달하라는 식으로 내몰았으며, "제주도민들은 사상적으로 믿을 수 없다. 대부분이 빨갱이 물이 들었다. 그러기 때문에 사상이 건전한 서청이 이곳을 진압해야 한다"는 논리를 주입시켰다.

서청 단원들은 3.1사건 직후부터 제주에 내려오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그때부터 경찰과 더불어 민중을 착취하는 길로 들어섰다. 김종민에 따르면,

"당초 서청은 민간인 자격으로 제주도에 들어왔다. 처음엔 주로 엿장수를 하다가 점차 세력이 커지자 이승만의 사진과 태극기를 강매했다. 4.3이 발발하자 서청은 경찰로 또는 군인으로 옷을 바꿔 입었다. 과거에 이승만 사진과 태극기를 사지 않았던 사람들은 총살되었다. 서청의 위세는 너무도 커서 제주 출신은 경찰조차 꼼짝 못했다."

이승만 정권의 의도된 서청의 착취행위 조장의 결과는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 서청의 악탈행위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고, 그걸 감내하든가 아니면 다른 선택을 해야 하는 양자택일의 구도로 내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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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도 아니고 경찰도 아니고 사람 피쟁이(백정) 서북청년단들, 다 사람백정이지, ...... 순 엿장수나 하던 무식한 것들이었지. ...... 매일 소 한마리 말 한마리 잡으라 하고, 조금만 거슬리면 잡아다가 총대가리로 때리고, 죽였지. ...... 시계 달라고 해서 안 주면 죽여 버렸지. 낮에는 일 시키고 밤에는 대총 들고 보초 서고 ...... 징그럽고 억울하게 그 빌어먹을 놈들의 종노릇 하며 생명까지 바치며 산 우리들. 우리들끼리 올며 분노하며 한탄하며 살았지. 산목숨으로 산 게 아니었지. 지옥살이 하듯 죽지못해 살았지. ...... 그래 살기 위해 싸우기 위해 산으로 갔지."

제주도민에 대한 착취엔 '민보단 강요'까지 가세하였다. 5.10선거에서 맹활약한 향보단은 48년 5월 22일에 해산되었지만, 이는 6월 민보단(民保團)으로 부활하였다. 제주도에선 8월 11일에 민보단이 결성되었는데, 이들은 경찰의 외곽조직으로 군경 진압작전에 동원되었다. 보초를 서는 일과 더불어 토벌작전시 죽창 등의 무기를 들고 군인이나 경찰관보다 앞서가는 총알받이 역할을 해야 했다.

제주 민보단은 5만명 규모였는데, 소집할 청년이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나중엔 남녀노소 모두에게 민보단의 이름 아래 동원 의무가 부여되었다. 민보단에 대한 미군의 한심한 보고서는 무지가 지나쳐 완전히 조롱이라는 느낌을 갖게 했다. 미군 보고서 49년 4월 1일자는 "제주도 남자들은 농사일보다는 보초를 서거나 토벌전에 나가는 것을 더 좋아한다"고 기록했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197~199쪽 그대로 인용



http://albertbelle.tistory.com/61





[세계역사상 무차별 백색테러로 유명한 단체]



[한국 대학살]


Pablo Picasso 1951

Massacre in Korea






1950년 10월 황해도 신천에서 미군과 서북청년단이 3만5천명의 양민을 학살한 소식을 듣고 그 만행을 고발한작품

신천 학살은 1950년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52일 동안 황해도 신천군에서 신천군 주민의 1/4에 달하는 35,000여 명의 민간인이 학살된 사건이다. 

신천 학살이 전 세계에 뉴스로 보도되자 당시 서구 사회는 경악했다. 






[김구 암살 세력]






1949년 6월 26일, 12시 36분, 서울의 자택인 경교장에서 육군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총격당하였다. 곧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절명하였다. 명동성모병원 원장 박병래는 정모 수녀 등 몇몇 간호수녀들을 대동하고 경교장으로 찾아가 천주교 예식대로 세례를 주었고베드로 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생전에 성모병원에 입원하였고당시 수녀들의 권고로 언제든 천주교에 입교할 것을 언약하였다. 며느리인 안미생의 권고도 있었다 한다.6월 26일 사망하자 성모병원 간호수녀들이 시신을 염하였다.

안두희가 한국전쟁 이후 사면을 받고 군납업체를 운영했기 때문에 권력층의 보호를 받았을 것이라고 추정만 될 뿐, 그 배후가 누구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일설에는 신성모 국방장관, 채병덕 육군총참모장, 장은산 포병사령관, 김창룡 소령, 김병삼 대위, 김태선 서울시 경찰국장, 김성주 서북청년단 부단장, 정치브로커 김지웅 등이 가담하고, 홍종만, 안두희 등이 하수인이었다는 견해가 있으나 배후는 미궁이다. 사망 당시 김구의 나이는 향년 74세였다.



김구 암살의 배후는?




1949년 6월 26일 일요일. 김구는 평소와 다름없이 새벽 5시에 일어나 중국시선을 읽은데 이어 휘호를 썼다. 전국에서 이를 요청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틈틈히 써 놓기 위해서다. 

이어 자신이 설립한 마포 창암학원 관계자를 접견해 학교 운영방안을 상의했다. 이때 포병소위 안두휘가 경교장을 찾아와 면담을 신청했다. 오후 12시 40분 면담이 이뤄졌고 곧이어 4발의 총성이 연이어 울렸다. 

▲ 김구 서거 직후 총알이 뚫고 지나간 창을 통해 본 경교장의 뜰로 깨진 유리창에 총구멍이 선명하다. 사진작가 칼 미이던스가 김구 서거 직후 찍은 사진이다.
▲ 김구 서거 직후 총알이 뚫고 지나간 창을 통해 본 경교장의 뜰로 깨진 유리창에 총구멍이 선명하다. 사진작가 칼 미이던스가 김구 서거 직후 찍은 사진이다.
당시 상황을 김구의 선우진 비서는“백범선생의 점심을 마련하기 위해 지하층 식당으로 내려갔는데 갑자기 위층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렸고 안두휘가 손에 권총을 든 채 2층에서 고개를 숙이고 내려오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현장에서 체포된 안두희는 우발적 단독범을 주장했다. 배후는 없다는 얘기다. 해묵은 의혹일지도 모르는 김구의 암살배후에 관심을 쏟는 이유는 그의 죽음이 여러 가지 숙제를 남겨두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김구의 암살배후는 ▲미군방첩대(CIC) ▲특무대장 김창룡 등 군부 ▲백의사 등이 거론됐다. 김구의 암살범 안두휘는 1992년“특무대장 김창룡의 지시로 백범을 암살했다”고 증언했다. 김창룡은 1940년 일본 헌병대 출신으로 수 많은 독립운동가를 잔인하게 고문해 악명을 떨친 혐의로 민족문제연구소로부터 군인 가운데 대표적 친일파로 분류됐다. 지금도 그가 묻힌 대전 현충원에는 시민단체들의 묘지 이장요구가 끊이질 않고 있다. 

안두휘의 증언에는 CIC도 등장한다. CIC대령이“서북청년단 사무실에서‘블랙타이거’를 제거하라는 언질을 주었다”고 밝혔다. 블랙타이거란 CIC가 김구를 지칭하는 은어다. 더욱이 안두희는 당시 CIC정보요원이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이는 김구 암살에 미국이 직접 개입했다는 증거로 제시되고 있다. 

또 다른 배후로는 남한의 단독정부수립 과정에서 극우 테러를 자행한 백의사라는 단체가 지목됐다. 안두희 역시 이단체에 가입해 있었다. 백의사(단장 염동진)은 해방 직후 대 공산주의 테러활동을 벌였는데 좌우를 가리지 않고 단독정부를 지지하지 않은 정치지도자에 대한 청부암살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김구 등 암살당한 정치인은 모두 모스크바삼상회의에 긍적적 태도를 보이거나 남북간 대화와 협상을 주장했던 인물들이다. 

이 과정에서 대원인 안두휘에게 암살이 지시된 가능성이 큰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미국 제1군사령부 정보장교 조지 실리(George E. Cilley)소령이 김구 암살 3일 뒤 작성해 미 육군 정보국장 앞으로 보낸 문건이 공개돼 제기됐다. 

▲ 서울운동장으로 운구되는 김구의 장례식 행렬. 이날 서울의 모든 상가는 김구의 장례에 맞춰 철시됐다.
▲ 서울운동장으로 운구되는 김구의 장례식 행렬. 이날 서울의 모든 상가는 김구의 장례에 맞춰 철시됐다.

보고서에서 실리는“백의사 단장은‘악질적인(The Most Malignant)’인물의‘맹인장군’(Blind General)으로 묘사되고 안두희(Ahn Tok Hi)는 이 비밀조직(백의사)의 구성원이자 이 혁명단 제1소조 구성원”이라며“나는 그를 정보원(informer)으로, 뒤에 한국주재 CIC의 요원(agent)으로 알고 있었다”고 밝혔다. 실리 소령은“안두희는 염동진이 명령을 내리면 암살을 거행하겠다는 피의 맹세를 했다”며“2명의 저명한 한국 정치인인 장덕수와 여운형의 암살범도 이 지하조직(백의사)의 구성원으로 알려졌다”고 덧붙였다. 

백범기념사업회는 1996년 김구선생 암살 진상규명조사보고서에서“백범 암살은 면밀하게 준비 모의되고 조직적으로 역할분담된 정권적차원의 범죄였다”며“안두희는 그 거대한 조직과 역활에 암살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규정했다. 

이어“암살의 계획과 조율은 김지웅, 암살하수인관리는 홍종만으로 이들은 모두 정권차원의 비호를 받았다”며“일차적 배후는 군부쪽으로 장은산은 암살을 명령하고, 사건 이후 김창룡의 적극 개입과 채병덕 총참모장, 전봉덕 헌병부사령관, 원용덕 재판장, 신성모국방장관등이 사후처리를 주도했다”고 보고했다. 

김구 암살의 가장 큰 쟁점은 미국과 이승만의 개입이다. 물론 이에 대해 아직 명백하고 확실한 팩트를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암살사건에 최고위층과 미국의 지시명령이 확인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다만 미국과 최고위층 자체가 상황을 만들기에 이들의 도덕적, 상황적 책임을 물을 수 있다. 

한평생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헌신했던 김구는 스스로 마지막 독립운동이라고 선언한 민족통일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아야 했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만약 김구가 살아있었다면 민족상잔의 비극을 막을 수있지 않았을까?

중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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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두희, 서북청년단 종로지부에 있었다










[서북 청년단 재건?]











[2014년9월]




이제는 ‘서북청년단’까지 등장…‘광기 시대’ 도래?




가칭 ‘서북청년단 재건 준비위원회’ 소속 회원들이 28일 오후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세월호 추모 
노란리본을 절단·수거하겠다며 가위와 박스를 들고 나서려다 경찰에 제지 당하고 있다. 


노란리본 철거 ‘서북청년단’ 정체 뭐길래… 비판 ‘봇물’

허지웅 “한국서 재현된 독일 나치친위대…부끄럽고 끔찍”

조국 “국민 빨갱이로 몰아 살해한 집단 재건 처벌되어야”

‘서북청년단 재건 준비위원회’를 자처하는 극우단체가 등장해 시민사회를 충격에 빠트리고 있다. 이들은 28일 오후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는 ‘노란 리본’을 강제로 철거하려 했다. 이를 두고 SNS에선 ‘해방 직후 정치 테러를 일삼던 것처럼 우리 사회를 이념적 광기와 사적 폭력이 지배하는 시대로 퇴행시키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조국 서울대 교수는 28일 트위터에 글을 올려 “서울시청 앞 노란리본을 철거하겠다는 망발을 부린 자들이 서북청년단 재건 준비위를 자처하고 나섰다”며 “서북청년단은 지존파보다 훨씬 많은 무고한 시민을 죽였다. 지존파 재건위가 마땅히 처벌되어야 하듯이, 서북청년단 재건위도 처벌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조 교수는 “서북청년단은 이승만의 전위부대로 수많은 국민을 빨갱이로 몰아 살해한 집단이다. 김구 선생을 살해한 안두희도 조직원이었다”며 극우적 행태에 대해 우려를 나타냈다.

가칭 ‘서북청년단 재건 준비위원회’ 소속 회원들이 28일 오후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세월호 추모 

노란리본을 절단·수거하겠다며 가위와 박스를 들고 나서려다 경찰에 제지 당하고 있다.


서북청년회는 어떤 단체일까. 서북청년회는 해방 직후 월남한 서북지방 청년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우익 단체로, 반공을 명분으로 정치 테러를 서슴치 않았다. 이들은 제주도민 10%가량을 포함해 전국에서 30만명에 이르는 국민을 ‘좌경 분자 처단’이라는 미명 아래 탄압하거나 살해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북청년회원이면서 이승만의 친위대 역할을 했던 안두희는 1949년 김구 선생을 살해했다.

영화평론가 허지웅씨도 이들의 행동을 개탄했다. 허씨는 “광복 이후 결성되었던 서북청년단은 한국에서 재현된 독일의 나치 친위대라 할 정도로 부끄럽고 끔찍하며 창피한 역사다”며 “한국이 국제사회의 구성 단위로 지속가능한 사회임을 스스로 증명하려면 저 단체를 심각한 혐오 범죄로 분류해 관리해야 마땅하다”고 말했다.

허씨는 “서북청년단이 뭔데 재건을 하겠다는 거야 하고 대충 넘어가면 안된다”며 “저런 이름을 쓸 수 있게 허용한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부끄러워하며 어른이 어른일 수 있는 마지노선을 지키자”고 호소했다.

역사학자인 전우용씨는 “서북청년단은 광기가 지배하던 시대의 표상이다. 서북청년단의 재건은 이 사회가 다시금 이념적 광기와 사적 폭력이 지배하는 시대로 퇴행하고 있다는 징표다”라고 진단했다.

가칭 ‘서북청년단 재건 준비위원회’ 소속 회원들이 28일 오후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세월호 추모 노란리본을 

절단·수거하겠다며 가위와 박스를 들고 나서려다 경찰에 제지 당하고 있다


앞서 서북청년단 재건준비위는 28일 9·28 서울 수복 행사가 진행된 서울시청 광장에서 세월호 분향소 참배객들이 묶어둔 노란리본을 철거하려다 서울시청 직원들과 경찰의 저지로 무산됐다. 



서북청년단 재건준비위에는 <사이버뉴스24> 발행인인 배성관씨를 비롯해 바른사회시민연대, 선전화시민행동, 엄마부대 등의 대표들이 참여하고 있다. 준비위원회의 대변인을 맡은 정함철씨는 노란리본을 철거하려는 이유에 대해 “세월호 유가족들을 더 이상 국론 분열의 중심에 서게 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한겨레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