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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관소/문화사 &시사

[ 삼성] 탐욕의제국 삼성 생존방법 & 삼성 3 대 세습 ,위기,,,




[탐욕의 제국  ,삼성 ]




삼성은 한국사회를 어떻게 지배하나?


삼성은 무역업→금융업→전자산업→중화학공업→첨단기술산업→자동차산업→정보통신산업 등으로 사업영역을 확장하며 '슈퍼재벌'로 성장했다. 하지만 삼성의 성장의 뒤에는 ▲그룹 계열사 간의 내부거래 ▲순환출자 ▲금융계열사 동원 ▲무노조 경영 ▲불법상속 등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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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삼성의 지배력은 '경제분야'에만 머물지 않고 정치·사회분야로까지 확장돼왔다. 삼성은 '비서실→구조조정본부(구조본)→전략기획실'로 이어져온 통제탑(control tower)이 주축이 돼 주요 정책의 입법·집행과정 등에 적극 개입해왔다. 이는 특히 정부 관료들의 장악을 통해 가능해졌다.

 

그런 점에서 "삼성이 '룰-메이커'가 되려고 한다"는 지적은 의미심장하다. '삼성제국' 혹은 '삼성공화국'이라 불리우는 현상이 한국민주주의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언론도 삼성의 지배력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는 40년간 <중앙일보>의 편향보도와 6개월간 지속된 '시사저널 사태'가 극명하게 보여준다. 특히 '시사저널 사태'는 삼성의 대언론로비가 편집권까지 유린할 수 있다는 '참혹한 현실'을 그대로 드러냈다.

 

<한겨레>와 <경향신문>이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을 바탕으로 '삼성의 정·관계 로비의혹' 등을 보도하자 '광고거부'로 대응했다는 점도 삼성다운 언론 길들이기라고 볼 수 있다. 




삼성은 사람들을 어떻게 관리하나?



삼성은 흔히 '관리의 삼성'으로 불린다. 그만큼 노동자를 비롯한 인적자원 관리가 철저하다는 얘기다.


이병철 선대회장의 유훈이었던 '무노조 경영'이 가장 대표적인 인적자원 관리방식이다. 삼성은 '무노조 경영은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선택할 결과'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금품 회유 ▲강제 납치 ▲강제 억류 ▲해고 등을 통해 노조 설립 시도들을 막아온 사례들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삼성의 주장은 억지에 불과하다. 이 정도라면 '무노조경영'이 아니라 '반노조경영'이라고 부를 만하다. 


삼성의 무노조경영은 국가기관의 협조 아래 지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심각하다. 구청에서 노조설립 신고서를 반려하거나, 사업장에서 이루어지는 부당노동행위를 무혐의 처리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또한 삼성은 공식적인 노무관리 외에 비공식적인 점조직을 통해 노동자들을 관리(통제)해왔다. 그래서 삼성의 노동자들은 '원형감옥의 죄수'에 비유된다. 결국 삼성의 노동자들은 늘 감시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삼성이 원하는 대로 사고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다.     

 

흥미로운 점은 삼성이 사무직 노동자와 생산직 노동자의 관리에 차별을 둔다는 사실이다. 사무직은 '동의에 기반한 통제'를 하는 반면, 생산직은 '물리적·위계적 통제'를 한다는 것. 이에 따라 사무직은 '소극적 저항'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반면, 생산직은 노조 설립 등을 시도하다가 퇴사하는 경우가 많다.

 

1993년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선언 이후 관리의 방향이 성과주의와 효율성을 중심으로 재편됐다는 점도 지적되어야 한다. 이는 과거에 비해 구성원들의 '삼성 귀속감'을 급격히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삼성은 축적된 자본을 어떻게 세습해왔나?



삼성은 계열사 간의 내부거래 등을 통해 기업을 확장해왔다. 내부거래는 상품·용역·자본에 걸쳐 광범위하게 이루어져왔다. 신생기업의 경우 내부 상품·용역 거래의 비중이 높은데 이는 "신생기업들이 타계열사들의 구매 지원을 통해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계열사 간의 자본거래는 이건희 회장 일가의 경영권 방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금융·보험 계열사의 지분 보유를 통해 주요 계열사들은 물론 나머지 계열사까지 지배함으로써 이 회장 일가의 경영권을 방어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거래는 금융자본에 의한 산업자본 지배를 심화시킨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삼성은 기술경쟁력 대신 '전근대적 하도급 관계'를 유지하면서 덩치를 키워왔다. 삼성SDS가 협력업체들을 상대로 제조위탁을 취소하거나 하도급 대금을 부당하게 감액하고 지급하지 않은 사례가 대표적이다. 뿐만 아니라 삼성의 자금줄인 삼성생명의 경우도 "자산운용능력보다는 기업운영에 필요한 사업비를 과다하게 책정"해 부당이득을 챙겨왔다.


삼성의 세습자' 이재용 전무(삼성전자)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44억원을 10년 만에 2조원으로 불렸다. 삼성에버랜드 등을 포함한 삼성 계열사들이 헐값으로 발행한 전환사채를 '의도적으로' 이재용 전무에게 판 결과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이 전무는 삼성 핵심기업들의 지배주주가 되었고, 결국 이건희 회장은 3세대 경영세습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하지만 계열사들이 전환사채를 헐값으로 발행한 것은 '업무상 배임죄'이고, 이러한 일들이 구조조정본부의 치밀한 기획과 지시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그룹차원의 조직적 범죄'라는 목소리가 높다. 삼성 특검의 수사에서 이러한 불법세습 과정이 확인돼 이건희 회장 등이 불구속 기소됐다. 




삼성을 어떻게 개혁해야 하나?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은 마지막 남은 성역 삼성을 개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런데 부실한 삼성 특검의 수사는 그 기회를 날려 버렸다. 하지만 한국민주주의의 위기와 관련 '삼성문제'는 절대 외면할 수 없다.


삼성을 개혁하는 일은 "한국의 민주주의 그리고 시민사회운동의 함량을 다는 저울추"이다.

 

'삼성문제'는 이건희 회장에서 시작해 이건희 회장으로 끝난다. 결국 삼성개혁의 핵심은 "총수 일가의 이해관계를 최우선시하는 총수가치 경영을 폐기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총수 일가의 퇴진과 지배경영권 세습 포기"가 선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삼성이 최근 발표한 쇄신안에는 이건희 회장의 퇴진만 포함돼 있을 뿐 편법과 불법으로 경영권을 승계받았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이재용 전무의 퇴진은 언급되지 않았다. 이것이 삼성의 쇄신안이 의심받는 이유다.

 

좀더 구체적인 개혁방향으로 ▲지배주주의 지배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조치 ▲지배 경영권 독점과 상속을 위한 불법행위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 ▲계열사간 순환출자 금지 ▲금융 계열사들의 의결권 약화 ▲노동자 등 이해당사자들 중심으로 기업지배구조 개편 등이 제시된다. 이는 삼성은 물론 한국의 재벌을 개혁하는 방향이기도 하다.


구글





[3대재벌세습과정]




삼성가(家) 3대 이야기



이건희 회장이 심근경색으로 쓰러졌습니다. 그는 1987년부터 삼성을 절대권력으로 이끌어온 인물입니다. 그의 재임기간 동안 삼성은 한국 사회에 빛과 그림자를 짙게 남겼습니다. 의료진은 그가 순조롭게 회복되고 있다고 밝히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가 없는 삼성이 어떻게 될지를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지요. 삼성의 3대를 되돌아봤습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쓰러졌다. 지난 10일 밤 갑작스런 호흡곤란 증세를 보였다가 쓰러졌고, 순천향대학병원으로 옮겨진 직후 심장마비 증세를 보여 응급 심폐소생술(CPR)을 받았다.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으로 옮겨진 이 회장은 심장의 좁아진 혈관을 넓히는 스텐트 시술을 받았고, 현재는 진정제를 투여받으며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삼성서울병원은 밝히고 있다. 


삼성서울병원은 16일 이 회장의 상태가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고 재차 설명했고, 병원 윤순봉 사장은 이날 낮 12시께 병원 지하 1층에 마련된 임시 기자실을 찾아 “이건희 회장의 (예후가)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 이전보다 조금 더 좋아진 상태”라고 말했다. 이 회장의 무의식 상태가 길어지면서 증권가 정보지 등에서 ‘이 회장 건강상태 악화설’이 퍼진 것에 대해 윤 사장은 “나빠졌다면 여기(기자실) 내려오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급성 심근경색 증세를 일으켜 병원에서 응급 심장시술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11일 오전 이 회장이 입원한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서 내원객들이 텔레비전을 통해 뉴스를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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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건희 회장은 이미 1999년 폐암 수술을 받은 바 있고 지난해에도 감기가 심해지면서 폐렴 증세로 번져 입원치료를 받기도 했다. 겨울이 되면 따뜻한 해외로 나간 지도 몇년째다. 이 회장이 깨어나더라도 계속 경영을 맡을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가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만약 이 회장이 은퇴한다면 삼성에는 3세 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 회장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삼성그룹이 연매출 300조원이 훌쩍 넘는 초거대 기업으로 성장하는 시기 삼성을 이끌었다는 공로는 부인할 수 없다. ‘삼성공화국’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삼성의 엄청난 영향력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 회장의 부재가 삼성에, 또 우리나라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한겨레>는 삼성 3대의 역사를 다시 한 번 되돌아봤다. 과거는 미래의 거울이다.


1938년 작은 상회에서 시작해 
삼성을 대기업으로 키운 이병철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물러났다 
경영 복귀해 전자산업까지 시작 
‘무노조’ 유훈은 여전히 비판받아


3남이지만 기업 물려받아 
스마트폰 세계1위 키운 이건희 
특검수사 뒤 경영 은퇴하고 
아버지처럼 위기 앞세워 돌아와 
빛과 그림자 다 함께 만들었다



이병철 시대, 삼성의 태동


                        故 이병철 전 회장

               

삼성의 역사는 이병철 선대 회장이 1938년 삼성상회를 열면서 시작됐다. 이 회장은 1910년 2월12일 경남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서 태어났다. 이병철 회장의 큰아들인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이 쓴 회고록 <묻어둔 이야기>에 보면 이병철 회장의 집은 ‘풍년이면 2000석, 가물면 1500석’을 짓는 부농이었다. 삼성가 외에도 이 근처에서 태어난 재벌은 또 있다. 엘지(LG)그룹의 창업주 고 구인회 회장은 진주시 지수면에서 태어났고, 함안군 군북면에선 효성그룹의 창업주 고 조홍제 회장이 태어났다.


또 지에스(GS)그룹의 창업주라고 할 수 있는 고 허만정 회장의 생가도 근처인 진주시 지수면이다. 구 회장은 이병철 회장과 지수보통학교를 같이 다닌 데다 나중에 사돈을 맺을 정도로 절친했고, 조홍제 회장도 삼성의 창업공신 중 한 명이지만 나중에 독립해 효성그룹을 일궜다. 구 회장과 허 회장은 함께 엘지그룹을 키웠다가 나중에 엘지와 지에스로 분리됐다. 국내 굴지의 재벌들이 이 인근에서 무더기로 태어난 데 대해 여러 해석이 많지만 이건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병철 회장은 애초 서당에서 공부를 시작했다가 곧 싫증을 느껴 지수보통학교로 입학한다. 하지만 서울로 가고 싶다고 부모님을 졸라 11살에 수송학교에 입학했다. 여기서도 그리 공부에 취미를 붙이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16살 때인 1926년 박두을씨와 결혼했고, 그 뒤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에 입학했다. 유학 생활은 길지 않았다. 나빠진 건강 탓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병철 회장은 입학은 여러 번 했지만 졸업은 한 적이 없다. 귀국 뒤 그는 고향에서, 또 서울에서 노름판과 술자리를 전전하는 ‘한량’ 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사업을 시작할 결심을 해 1936년 마산에서 정미소 사업을 시작했고 운수업, 부동산업까지 손을 뻗쳤으나 결국 망했다. 그 뒤 대구 수동에 무역회사인 삼성상회를 열고 재기에 성공했다. 인근의 사과와 동해의 수산물 등을 만주에 내다 파는 회사였다. 여기서 크게 성공한 그는 해방 뒤 서울에서 삼성물산을 열었고, 6·25전쟁 당시 전 재산을 날리는 등 몇번의 고비가 있었지만 제일제당, 제일합섬 등을 성공시키며 사업을 순조롭게 키워나갔다. 그리고 그 유명한 사카린 밀수사건’이 터졌다. 1966년 9월16일의 일이다.



1993년 6월 29일 한겨레신문 6면


사카린 밀수사건’의 진실이 무엇인지는 아직도 확실치 않다. 요샛말로 ‘팩트’는 분명하다. 당시 세무국장이 발표한 대로 ‘한국비료의 이일섭 상무이사와 이창식(이병철의 2남 이창희의 가명)이 사카린의 원료인 OTSA 2400부대를 건설 자재와 같이 밀수입해 정상 수입품인 것처럼 매각하려다가 부산 세관 감시과에 의해 적발된 것’이다. 하지만 이 회장은 훗날 <호암자전>에서 OTSA는 비료의 원료로 합법적으로 들여온 것이며, 한국비료 주식의 30%를 내놓으라는 ‘정치권의 누군가’의 압력을 거부하자 사건이 터졌다고 주장했다. 이맹희씨의 회고는 이병철 회장과는 다르지만 정황은 더 자세하다.



삼성이 당시 밀수를 한 것은 공장 건축공사를 수주한 일본 미쓰이 공업사의 리베이트 100만달러를 국내에 들여오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며, 이 방법을 제안한 사람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라는 것이다. 밀수로 들여온 돈 중 3분의 1은 박정희 대통령 쪽에 정치자금으로 주기로 약속까지 다 돼 있었다고 이씨는 주장했다. 밀수품은 변기, 냉장고, 에어컨, 전화기 등 다양했다. 그런데 당시 공화당의 실력자인 김아무개씨가 따로 정치자금을 요구했고 이에 응하지 않자 사카린 밀수사건이 터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앙일보>의 등장(1965년)으로 위협을 느끼고 있던 다른 언론들이 얼씨구나 하고 삼성에 융단폭격을 퍼부었다는 것이 이맹희씨의 설명이다. 어쨌든 이 사건으로 이병철 회장은 다음해 10월22일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한다’ ‘경제계에서 은퇴한다’는 두 가지 사항을 밝히고 물러났다.


이병철 회장은 은퇴 선언 뒤 1년3개월 만에 경영 일선에 다시 복귀한다. 삼성그룹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병철은 <호암자전>에서 “맹희에게 그룹 일부를 맡겼는데 6개월도 채 못 돼 그룹이 혼란에 빠졌다”고 썼다. 어디서 보던 말이다. 이건희 회장이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에 이어진 특검수사를 통해 조세포탈·배임으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뒤 3년 만에 다시 경영에 복귀하면서 뱉은 일성과 꼭 닮았다. 2010년 3월24일 이건희 회장은 “지금이 진짜 위기다. 글로벌 일류기업들이 무너지고 있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앞만 보고 가자”고 말하며 삼성으로 다시 돌아왔다. 역사는 돌고 돈다.


당시 이병철 회장의 복귀 시점에 대해서는 주장이 엇갈린다. 이맹희씨는 6개월이 아니라 7년 동안 자신이 삼성그룹을 이끌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어찌 됐든 당시에 이병철 회장과 이맹희씨의 사이가 결정적으로 틀어진 것은 확실하다. 1970년에는 한국비료 사건으로 6개월가량 복역하고 나온 2남 이창희씨가 이병철 회장이 외화 밀반출, 탈세 등을 저질렀다는 투서를 청와대에 제출하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삼성 일가에서 쫓겨난 이창희씨는 새한미디어를 세워 독립에 성공했지만 1991년 7월 백혈병으로 일찍 사망했다.

이병철 회장은 이런 격랑 속에서도 반도체를 포함한 전자산업, 석유화학, 건설, 중공업 등으로 사업 분야를 확대하는 한편 비서실을 강화해 삼성 특유의 그룹체제를 완성시켰고, 3남인 이건희를 부회장까지 승진시키며 그룹을 넘겨주는 작업을 공식화한다. 


이 회장은 1987년 11월19일 사망했고, 운명하기 직전에 인희, 명희(신세계그룹 회장), 건희, 재현(씨제이(CJ)그룹 회장·장손)씨를 모아 그 자리에서 구두로 유언을 하고 이건희 회장에게 정식으로 삼성의 경영권을 물려주었다고 이맹희씨는 회고록에 썼다. 최근까지 계속된 이맹희-이건희 유산상속 소송에서 이 회고록이 중요한 참고자료가 됐음은 물론이다. 이 유산 소송은 차명계좌와 비자금을 통해 투명하지 않은 방식으로 기업을 물려줄 경우 어떤 일이 생길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이병철 회장은 정경유착이나 비자금 조성 등 많은 일들이 ‘경제성장’이라는 구호 아래서 묵인되던 산업화 초기의 기업인이다. 현재의 잣대 그대로 평가하기는 힘들다. 다만 이 회장의 무노조 원칙은 여전히 ‘유훈’으로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이 회장은 제일모직 여공들이 파업을 벌이려 하자 바로 공장 문을 닫아걸고 직원을 해산한 바 있다. 삼성의 ‘그림자’ 중 가장 많은 비판을 받고 있는 부분이다.




이건희 시대, 삼성의 비상



1978년 서울 태평로 삼성 본사 회의실에서 해외사업추진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故 이병철 전 회장. 바로 앞에서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이 이병철 전 회장을 보면서 경청하고 있다



이건희 회장은 1942년 1월9일 태어났다. 지금도 매년 1월9일이면 삼성그룹은 자랑스러운 삼성인상 시상식과 신년 사장단 만찬을 연다. 언론이 이건희 회장 생일 만찬이라고 표현하는 행사다.


이 회장이 태어날 당시 이병철 회장은 삼성상회 일로 한창 바쁠 때여서 경남 의령의 생가로 보내져 할머니 밑에서 3년을 자랐다. 1947년 서울로 올라와 혜화초등학교에 입학하지만 6·25전쟁으로 마산·대구·부산으로 옮겨 다녔고, 초등학교 5학년 때는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일본에서 같이 살던 바로 위 형 창희와는 9살 차이였다.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고 같이 놀 친구도 없었을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사대부고를 졸업하고 연세대에 입학했지만 곧바로 일본 와세다대학 상학부로, 또 미국 조지워싱턴대 경영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건희 회장은 예전 <신동아> 등과의 인터뷰에서 떨어져 사는 게 버릇이 되어 내성적인 성격을 가지게 됐고, 혼자 생각을 많이 하고 또 깊이 하게 됐다고 자신의 성격을 설명했다. 그는 9시간이나 계속된 프랑크푸르트 회의 등 여러 군데서 자신의 외골수 같은 성격과 집념을 드러낸 바 있다. 그는 홀로 있는 시간에 영화, 개, 자동차, 전자제품 등에 빠져들었다. 외부와 적극적으로 소통하지 않고 자신들만의 성을 만든 듯한 지금 삼성의 모습은 어쩌면 이 회장의 모습을 닮았다.


이 회장은 이맹희, 창희 두 형이 잇따라 아버지의 눈 밖에 나면서 삼성의 총수가 될 기회를 얻었다. 이병철 회장은 <호암자전>에서 “건희에게는 처음에 매스컴 경영을 맡기기로 마음을 정했다. 매스컴의 어려운 경영에 대비해서 재정적 지원이 가능한 몇 개의 회사를 붙여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건희가 일본 와세다대학과 미국 조지워싱턴대학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 삼성그룹의 전체 경영을 맡을 사람이 없어 건희를 그룹 경영의 일선에 차츰 참여시키게 되었다. 다행히 건희가 자질도 보이고 기업 경영에 열심히 참여해 후계자로 정하게 됐다”고 썼다.




이건희 회장은 1968년 중앙일보와 동양방송 이사로 취임한 뒤 1978년 삼성그룹 부회장 자리를 꿰차며 후계자 자리를 확실하게 차지했다. 그사이 이 회장의 일은 아버지를 충실히 보필하는 것이었을 터이다. 하지만 그는 주변의 만류를 무릅쓰고 1974년 한국반도체를 사재를 털어 인수하는 승부수를 띄우기도 한다. 이건희 회장은 에세이집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에서 이병철 회장이 1983년 반도체 사업 진출을 공식 선언한 것을 ‘구멍가게 같은 공장에서 개인사업으로 시작한 반도체가 10년 만에 삼성의 핵심 사업의 하나로 인정받은 것’이라고 평가했다.


1993년 6월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캠핀스키호텔에서 이건희 회장이 주요 임원과 해외 주재원 200여명을 앞에 두고, “지금처럼 해서는 잘해야 1.5류다. 자식과 마누라 빼고 다 바꿔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신경영 선언’을 하고 있다.

이건희 회장의 진가가 드러난 것은 역시 1993년의 이른바 ‘신경영 선언’ 이후다. 이 회장은 에세이집에서 “87년 회장에 취임하고 나니 막막하기만 했다. 세계 경제는 저성장의 기미가 보이고 있었고 국내 경제는 3저 호황 뒤의 그늘이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이런 상황인데도 삼성 내부는 긴장감이 없고 ‘내가 제일이다’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50년간 굳어진 체질이 너무도 단단했다. 


경영자들은 변하지 않고 회사 간, 부서 간 이기주의는 눈에 보일 정도가 되어 소모적 경쟁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특히 92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불면증에 시달렸다. 이대로 가다가는 사업 한두 개를 잃는 것이 아니라 삼성 전체가 사그라질 것 같은 절박한 심정이었다”고 썼다. 지난해 신경영 선언 20주년을 맞아 삼성전자가 수원사업장에서 연 전시장에는 당시 이건희 회장이 임원단과 함께 본 사내방송이 상영되고 있었다. 세탁기 뚜껑이 제대로 닫히지 않아 직원들이 칼로 깎아내는 모습이다. 


93년 2월 이 회장이 미국 로스앤젤레스 가전매장 베스트바이에서 본 것은 삼성 티브이(TV)가 먼지를 뒤집어쓴 채 구석에 처박혀 있는 모습이었다. 이 회장은 삼성의 주요 임원을 모두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소집해서 “회장이 되고 만 5년 몇개월 동안 계속 불량 안 된다, 불량 안 된다. 모든 것을 양을 없애버리고 질을 향해라. 그런데도 아직까지 양을, 양을, 양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라며 불같이 화를 냈다. 이것이 바로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자’는 구호로 유명한 신경영 선언이다.


신경영 선언 이후인 1995년 이 회장이 불량률이 높은 무선전화기 15만대(150여억원어치)를 수거해 화형식을 해 전량 폐기처분하는 충격요법을 사용하면서 삼성은 차차 변해갔다. 신경영 선언 20년 동안 그룹 매출은 29조원(1993년)에서 302조원(2012년)으로 10배, 세전 이익은 8000억원에서 38조원으로 47배 늘어났다. 디(D)램 하나뿐이던 삼성의 월드베스트(세계시장 점유율 1위) 제품은 20개가 됐다. 실적만 놓고 보면, 이 회장의 ‘신경영 선언’은 엄청난 성과를 거둔 셈이다. 물론 그사이 자동차사업에 뛰어들었다가 결국 엄청난 적자를 남기고 포기한 일도 있었다.



1994년 삼성가족 한마음 축제에 참석한 이 회장의 모습.


이와 동시에 삼성은 차차 ‘삼성공화국’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영향력이 커졌고, 그 그늘도 짙어졌다. 대표적인 예가 안기부 엑스파일 사건과 김용철 변호사 비자금 폭로 사건이다. 엑스파일 사건은 이학수 삼성전자 부회장과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이 나눈 대화를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가 도청한 사건인데, 삼성이 정·관계 인사를 어떻게 관리하는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계기가 됐다.


 김용철 변호사의 비자금 폭로 사태 또한 선대 회장이 물려준 재산이라는 삼성의 해명을 그대로 받아들여 조세포탈 혐의로만 기소됐고 이 회장이 경영에서 물러나는 결과를 낳았다. 신경영 선언 이후 직원들이 일하는 방식은 바뀌었지만 총수 일가가 그룹을 지배하는 방식은 바뀌지 않았고, 결국 누적된 고름이 한꺼번에 터져나왔던 사건이다.


여전히 악명 높은 무노조 원칙이나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의 백혈병 문제 또한 해결되지 않고 있다. 다만 이 회장이 쓰러지고 나서 14일 삼성전자 권오현 대표이사(부회장)가 반도체 공장 노동자들의 난치병 발병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로 한 만큼 진전이 있을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 회장이 이 문제를 자신이 삼성을 맡고 있는 동안 털고 가서 후계자에게 부담을 지우지 않으려고 하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이 회장은 신경영 선언 당시 “인간은 65살 전후면 노망기가 든다. 절대 실무를 맡으면 안 된다. 60이 넘으면 손 떼야 한다. 65살이 넘으면 젊은 경영자에게 넘기고 명예회장으로 물러나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이건희 회장의 나이는 72살이다.



이건희 회장 쓰러진 뒤 
그룹 승계구도 관심 쏠려 
안 그래도 지난해부터 착착 
후계 위한 밑그림 그려왔다


경영능력 미지수인 이재용 
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발행으로 
후계자 자리 확실히 했지만 
e삼성 실패는 아킬레스건 
그는 어떤 경영자가 될 것인가




이재용 시대, 준비는 돼 있는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과 부인 홍라희 리움관장, 장녀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재용 사장 등 가족이 29일 새벽(한국시간) 영국 런던 올림픽파크의 아쿠아틱스 센터에서 열린 2012 런던올림픽 남자 자유형 400m 결승을 참관하기 위해 수영장을 찾아 건너편에 있는 지인과 인사하고 있다.


지난해 삼성을 출입하기 전에는 그룹의 후계자 자리를 둘러싸고 3남매 사이에 치열한 암투가 벌어지고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룹 사정을 잘 아는 내외부 사람들은 그런 생각에 코웃음을 쳤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에버랜드 전환사채가 발행됐을 때 이미 삼성의 승계 문제는 끝났다는 것이다. 지금은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고 싶어도 그러기가 불가능한 구조라는 설명도 덧붙여졌다. 전환사채 발행이 1996년이니 이미 20년 가까운 예전부터 후계자는 정해졌다. 게다가 삼성은 지난해부터 에버랜드 사업 구조조정, 삼성에스디에스(SDS) 합병 뒤 상장 등 후계구도의 구체적인 밑그림을 그려오던 참이었다.


이건희 회장의 장남인 이 부회장은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하는 아버지에 비해 외부 활동이 잦은 편이지만 실제 그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여러 번 언론사와 인터뷰를 했고 에세이집까지 펴낸 데다 매년 신년사나 기념사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알려온 아버지와 달리 이 부회장이 속내를 털어놓은 적은 별로 없었다. 가끔 기자들을 만나도 단편적인 대답이나 아버지의 ‘뜻’을 전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2010년 <매일경제> 기자와 우연히 만나 당시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시는 걸 보면서 막중한 책임감과 함께 더 열심히, 더 겸손히, 더 지혜롭게 해야겠다고 느꼈다”고 한 것과 2009년 9월 캐나다 캘거리에서 열린 기능올림픽 당시 기자들이 ‘일이 많은데 힘들지 않으냐’고 묻자 “내가 피곤하다고 불평할 자격이 있겠는가. 운 좋게 좋은 부모, 훌륭한 선배(경영진)를 많이 만나서 이 자리에 있다. 삼성 경영자들은 기업에 헌신하고 충성심이 강하고 현명하다. 이분들과 수십만 명의 삼성 임직원분들이 함께해 잘해 주리라 믿는다. 물론 부담스럽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다”라고 한 정도가 그나마 자기 심경을 말한 얼마 안 되는 기록이다. 김용철 변호사는 <삼성을 생각한다>에서 이재용에 대해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을 잘 모른다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거나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고 적었다.


1968년생인 그는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한 뒤 일본 게이오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삼성전자에서 잠깐 일하다 미국 하버드대학 비즈니스스쿨로 유학 가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가 학업을 계속하는 사이 에버랜드 전환사채가 헐값으로 발행돼 이재용에게 우선 배정됐고, 편법 승계 논란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대법원은 이 사건에 2009년 최종적으로 무죄 판결을 내렸지만 이건희 회장에게 제일모직 주주들에 대한 배상책임은 인정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이 2012년 11월30일 ‘이건희 회장 취임 25주년 기념식’이 끝난 뒤 행사장을 나서고 있다. 그는 닷새 뒤 부회장으로 승진해 경영권 승계에 한발 다가섰다.


이 부회장이 미국 유학 중이던 1999년 이건희 회장이 폐암 수술로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고, 혹시라도 모를 사태에 대비해 당시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구조본)가 중심이 돼 추진한 프로젝트가 바로 ‘e삼성이다. 그리고 이 사업은 지금도 이 부회장의 아킬레스건으로 남아 있다. 


이 부회장이 대주주로 참여한 인터넷 사업체들을 동시에 출범시킨 ‘e삼성’ 사업은 닷컴 거품 붕괴와 함께 대부분 망했고, 이 부회장이 가진 지분은 삼성그룹 9개 계열사가 2001년 매입하면서 손실을 보전해줬다. 2008년 조준웅 삼성 특별검사팀은 구조본이 e삼성의 설립과 운영, 지분 처분에 조직적으로 관여했다고 결론 내렸지만 배임행위임을 인정하지 않고 불기소 처분한 바 있다. 이 부회장의 경영능력에 의문을 표하는 사람들이 항상 드는 사례가 이 ‘e삼성’ 사건이다. 삼성 쪽은 이재용 부회장은 대주주였을 뿐 경영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설명중이다.


이 부회장은 2001년 삼성전자 경영기획팀 상무보로 입사해 상무(2003), 전무(2007), 부사장(2009), 사장(2010), 부회장(2012)으로 파격적인 승진을 해왔다. 이건희 회장이 2008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을 때 잠시 해외마케팅을 맡기도 했지만 거의 대부분 운영 부문을 맡아왔다. 이 부회장이 삼성전자의 성장에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물론 차기 총수인 만큼 많은 부분에 관여했을 터이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지만 스마트폰이 세계 1위로 올라서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여전히 경영능력에 대한 의구심이 나오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


만일 삼성이 망하면 한국도 망할까? 노키아는 망하다시피 했지만 핀란드는 그렇지 않았다. 노키아는 한때 핀란드 수출의 25%를 차지할 정도로 절대적인 대기업이었다. 다만 삼성이 흔들린다면 우리나라 경제도 큰 생채기를 입을 수밖에 없다. 삼성의 승계 문제가 전국민적인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 부회장은 승계 과정에서 이미 편법 논란으로 한차례 상처를 입었다. 게다가 이건희 회장의 지분을 물려받는 과정에서 지분율이 더 낮아질 가능성이 높다. 안 그래도 순환출자구조로 낮은 지분율을 가진 총수가 제왕적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지적이 높은 삼성이다. 과연 이재용은 준비가 된 것일까. 이재용이 만들어갈 삼성은 어떤 모습일까


한겨레신문





#사견


삼성은 오래가지 못할것 같다 ,, 국제사회에서 부도덕한 기업으로 탐욕의제국으로 낙인찍힌 회사이다

삼성신화는 불법과 노동자 피눈물에서 나온것이다

미국처럼 독점방지법에의해 해체하고 , 재조직화해야한다


삼성은 결코 한국의 미래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