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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관소/문화사 &시사

[넥센감독 염경엽] 야구인생 ,,,선수시절, 지도자생활 ,,,



                염경엽(廉京燁)

                       

                           (1968년 3월 1일 ~ )





 전 한국프로야구 태평양 돌핀스와 현대 유니콘스의 내야수이자, 현재 넥센 히어로즈의 감독이다.


염경엽
Yeom Gyeong-Yeob
넥센 히어로즈 No.85
기본 정보
국적대한민국 대한민국
생년월일1968년 3월 1일 (46세)
출신지대한민국 대한민국 광주광역시
신장178 cm
체중64 kg
선수 정보
투구·타석우투우타
수비 위치내야수
프로 입단 연도1991년
드래프트 순위1991년 2차 1순위(태평양 돌핀스)
첫 출장1991년
마지막 경기2000년
계약금2억 원 (감독)
연봉2억 원 (2014년)
경력

선수 경력

지도자 경력

프런트 경력





[선수시절]


광주제일고, 고려대를 거쳐 1991년 태평양에 입단했지만 선수로서 이렇다 할 족적을 남기지 못한 채 2001년 은퇴했다. 태평양과 넥센의 전신 현대 유니콘스에서 내야수로 뛰었다




현역 시절 그는 수비가 좋았으나 , 타율 1할대,  통산 홈런이 5개밖에 안 될 정도로 타격이 약해 그다지 빛을 보지 못했다

통산 기록

연도소속타율경기타수득점안타2루타3루타홈런루타타점도루도실볼넷사구삼진병살실책
1991태평양0.17599285225093271251232224059
19920.1971022182643120158187018335412
19930.21386254205492067181321513646
19940.2121193493374151297301152834248
19950.162801541825100269922412629
1996현대0.0007220120000011630900
19970.000561290000002400200
19990.18095501792001105420313
20000.26184231361007110200312
통산0.195896144819728353753651108334122112082157





[지도자 생활]

현역 시절 그는 수비가 좋았으나 통산 홈런이 5개밖에 안 될 정도로 타격이 약해 그다지 빛을 보지 못했다. 은퇴 이후에는 바로 지도자로 활동하지 않고 스카우트 등 프런트로 우선 활동하였다가 2007년 현대의 수비 코치를 시작으로 지도자로 들어섰다. 



현대 유니콘스가 해체된 이후에는 LG 트윈스의 스카우터로 옮겼고 이후 운영 팀장으로 일했다. 

현대 유니콘스와 LG트윈스 운영팀에서 스카우트를 담당했다. ‘대어’를 낚는 안목이 있다는 평을 들었으나 LG트윈스 선수단 사이에서 파벌을 형성했다는 소문에 휩싸여 스스로 팀을 떠났다.





2011년 12월 16일 넥센 히어로즈에서 작전·주루코치 제의를 받아 작전·주루코치를 맡았고, 2012 시즌  도루 1위로 올려 놓은 공로로김시진의 후임으로  감독이 되었다.



염경엽의 넥센은 2008년 창단 이후 처음으로 2013년 포스트 시즌에 진출했고, 2014년 한국시리즈에 올랐다. 염경엽 역시 선수가 아닌 넥센 감독으로 야구 전성기를 맞이했다

넥센팬들 사이에서는 전술 싸움과 지략 대결에 뛰어나다고 해서 삼국지 제갈량에 비유한 ‘염갈량’이라는 별명으로 통한다.




실패자 염경엽, 히어로즈의 승자 리더십 만들다1할대 타자, 초라한 운영팀 생활...집념의 연구, 성과는 남탓 책임은 내탓



  
▲ 염경엽 넥센 히어로즈 감독

염경엽 넥센 히어로즈 감독은 이번 시즌에 프로야구판에서 유독 빛난다. 

김응룡 감독, 선동열 감독, 김시진 감독, 이만수 감독 등 선수시절 최고의 스타였던 감독들이 물러났다. 그러나 염경엽 감독은 첫 감독직을 맡은 지 2년 만에 우승에 도전하고 있다.

염 감독은 초라한 선수시절을 보냈다. 그런 그가 감독으로서 성공을 거둔 것이 놀랍다.

염 감독의 선수시절 통산 타율은 1할9푼5리로 2할을 밑돈다. 수비력은 높게 평가됐지만 타격실력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 염 감독의 통산타율은 역대 500경기 이상 출전한 타자들 가운데 최저이자 유일한 1할 대다.

염 감독은 넥센 히어로즈 감독이 되기 전 감독 경험이 한 번도 없었다. 짧은 수비코치 주루코치의 경험만 있을 뿐이다. 그는 현대유니콘스에서 은퇴한 뒤 코칭스태프가 아닌 구단 프런트에서 일했다. 그가 코치 생활을 한 것도 고작 3년 정도에 불과하다.

염 감독은 말 그대로 실패자의 삶을 살았다. 그는 승자의 빛나는 길을 걷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최고의 감독으로 꼽힌다. 

설령 올해 넥센 히어로즈가 우승하지 못해도 그가 올 시즌 최고의 감독임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통산 최저타율 기록한 선수시절

염 감독은 고등학교와 대학시절까지 수비가 좋고 발도 빨라 나름 유망주로 대접받았다. 그는 1991년 태평양돌핀스에 2차 1번으로 지명됐다. 그만큼 팀에서 기대를 걸고 있었던 선수였다. 

그러나 그에게 절실함이 없었다. 염 감독은 부친이 공무원 출신인 부유한 집안의 막내로 어려움 없이 자랐다. 주목받는 유망주로 인기가 높아지자 점점 훈련은 게을리 하고 유흥에 빠졌다. 그와 절친인 김기태 KIA타이거즈 감독이 우스갯소리로 “프로야구 사상 최초 야타족 출신”이라고 꼬집을 정도였다.

염 감독의 실력은 점점 하락세였지만 하위권을 맴돌던 태평양 돌핀스에서 주전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가 태평양을 인수해 유니콘스로 이름이 바뀌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현대 유니콘스는 고졸 최대어로 꼽히는 박진만을 잡았고 박진만은 곧바로 유격수 자리를 꿰찼다. 염 감독은 1996년 개막전 선발 엔트리를 박진만에게 내줬다. 염 감독은 “개막식에서 애국가를 부르는데 전광판에 내 이름이 없어 화장실에 가 펑펑 울었다”고 회상했다.

염 감독은 대수비와 대주자를 주로 맡는 백업요원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그 순간이 전환점이었다. 그는 선수로서 1년을 버틸 체력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더 이상 선수로서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을 깨달았다. 

그가 선택한 길은 공부였다. 염 감독은 코치로 제2의 인생을 성공하겠다고 다짐했다. 야구와 관련된 외국 서적을 자비로 번역해 읽었다.

지금도 유명한 그의 메모습관은 이때부터 시작했다. 감독과 코치들이 하는 말과 상황별로 느끼고 분석한 것들을 날마다 메모장에 기록했다. 이렇게 20년 가까이 기록해 온 메모들은 지금도 염 감독의 큰 자산이다.

  
▲ 염경엽 넥센히어로즈 감독




초라한 운영팀 말단 생활

염 감독은 2000년 현대 유니콘스가 우승한 뒤 이른 나이지만 떠밀리듯 은퇴를 결정했다. 통산 898경기 출장으로 1천 경기를 채우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코치를 목표로 한 이상 빠를수록 좋다고 생각했다.

현대 유니콘스 구단은 그를 프런트로 활용했다. 현대 유니콘스에서 선수가 프런트로 간 경우는 염 감독이 처음이었다. 그의 뛰어난 분석력은 운영팀에서 능력을 발휘했다. 처음에 구단은 2년 동안 운영팀으로 일하면 코치자리를 주겠다고 했으나 5년간 동안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2004년 현대 유니콘스가 마지막 우승을 차지했을 때 염 감독은 우승 축하연을 준비하러 롯데호텔까지 비를 맞고 뛰어가야 했다. 염 감독은 “현수막을 달고 우승 축하 동영상을 만든 뒤 한숨 돌리고 나니 내가 지금 뭐하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어 초라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염 감독은 언젠가 코치로 그라운드에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염 감독은 운영팀 말단 대리로 일하면서도 야구공부를 놓지 않았다. 밤늦게까지 남아서 경기결과를 정리하고 분석하고, 각 선수와 감독의 성향까지 꼼꼼하게 메모로 남겼다. 

김용휘 현대 유니콘스 단장은 당시 염 감독을 “머리가 비상하고 집념이 대단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그렇게 공부한 이유에 대해 “유니폼을 입고 싶었다”고 말했다. 코치가 돼 선수로서 보여주지 못했던 것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는 누구보다 강한 동기와 절실함을 품고 있었다.

염 감독은 코치가 되기 위한 투자의 시간으로 프런트 생활을 여겼다. 선수에서 프런트가 되니 1년에 몇 천만 원씩 돈을 까먹었지만 유학비로 생각했다. 염 감독은 “프런트 생활을 한 8년 동안 1년에 4개월은 외국생활을 했다”며 “다 합하면 2년 넘게 유학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밤새 상대 투수를 연구한 주루코치

염 감독은 2007년 현대 유니콘스에서 수비코치를 맡은 지 4년 만에 다시 2011년 LG 트윈스에서 수비코치가 됐다. 

LG 트윈스에서 수비코치를 맡던 시절에 프런트를 뒤에 업고 선수단 내에서 파벌을 형성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프런트로 오래 일하다가 코치로 부임한 점과 현대 유니콘스 출신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LG 트윈스가 부진한 이유가 프런트 탓이라는 주장에 염 감독은 희생자가 됐다. 염 감독은 LG 트윈스 팬들에게 ‘정치꾼’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결국 염 감독은 시즌을 마치고 친구인 김기태 당시 LG트윈스 감독이 제시하는 수석코치 자리를 박차고 넥센 히어로즈 코치로 자리를 옮겼다. 수비코치가 아닌 작전 및 주루코치였다.

넥센 히어로즈는 2012년 전체 팀도루 1위를 기록했다. 2011년 도루수 99개로 꼴지를 기록했는데 1년 만에 도루가 179개로 늘었다. 발이 빠른 선수만 도루를 하는 것이 아니라 거포들도 뛰었다. 

넥센 히어로즈의 중심타선 박병호와 강정호는 2012년 20-20클럽을 달성했다. 상대 배터리와 상황분석에 뛰어난 염 감독의 작품이었다.

염 감독은 코치로 일하면서도 공부를 멈추지 않았다. 염 감독과 함께 넥센 히어로즈 코치로 일했던 박흥식 코치는 “염 감독은 상대투수의 허점을 연구하느라 밤을 샜다”며 “틈만 나면 메모를 하고 선수들에게 주루법을 가르쳤다”고 말했다. 

  
▲ 염경엽 넥센히어로즈 감독


준비된 감독, 이장석의 선택


염 감독은 2013년 넥센히어로즈 감독으로 선임됐다. 지도자로서 경력이 많지 않고 감독을 해 본 적도 없는 염 감독을 선임한 데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장석 구단주는 “경험은 다소 부족할지 모르지만 변화에 알맞는 인물”이라며 “주저없이 선택했다”고 말했다.

당시 감독 선임은 이례적으로 이 구단주가 직접 인터뷰를 진행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이 구단주는 “야구에서 성적이 나려면 프런트의 지원과 현장의 움직임이 어우러져야 한다”며 “염 감독은 적잖은 프런트 경력이 있어 프런트쪽을 이해할 수 있는 감독”이라고 말했다. 이 구단주는 “소통이 잘 되는 것이 중요하다”며 “이 부분을 고려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구단주 말처럼 염 감독은 현장과 구단 양쪽 경험을 바탕으로 모든 문제가 소통에서 나온다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다. 그는 “구단 고위층이 감독의 선수기용이나 작전에 의문이 생긴다면 즉시 이유를 묻고 의문을 해소해야 한다”며 “이런 과정이 없기 때문에 오해가 커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염 감독은 프런트와 코칭스태프의 업무를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프런트의 일은 프런트가 하고 감독의 일은 감독이 한다는 확고한 철학을 지닌 김용휘 현대유니콘스 단장 밑에서 운영팀으로 일하면서 물려받은 유산 덕분이다. 

이 때문에 이 구단주와도 마찰 없이 잘 호흡을 맞춰가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염 감독은 “감독이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며 “단장을 바라보고 단장이 되기 위해 준비를 해 왔다”고 말했다. 그리고 염 감독의 철저한 준비는 그가 성공한 감독이 되는 데 밑거름이 됐다.




시합중 결코 자리에 앉지 않는 감독

염 감독은 선수관리를 철저히 한다. 

일부 감독들이 하듯 무조건 강도 높은 훈련을 실시하지 않는다. 휴식을 줄 때는 확실히 쉬게 하고 선수별로 필요한 훈련들을 맞춤형으로 진행한다. 

염 감독은 “훈련량이 너무 많으면 집에 돌아가 '오늘도 끝났네. 내일은 어떻게 하지' 라는 생각이 든다”며 “프로라면 선수들이 즐겁게 야구장에 나와 ‘내일은 또 뭐할까” 생각하도록 하고 싶다“고 말했다.

시즌 중 체력관리도 철저하다. 시즌 초반부터 주전급 선수들을 로테이션으로 출전시키며 체력이 소진되는 것을 막았다. 넥센은 결국 주요 선수의 부상없이 올 시즌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염 감독의 관리가 아니었다면 상대적으로 얇은 넥센의 선수층으로 정규시즌 준우승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염 감독이 선수들 몸 관리에 공을 들이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지난해 포스트시즌에서 선수단에 한알에 5만 원씩 하는 공진단을 1인당 10알씩 나눠준 일이 대표적이다. 팬이 염 감독에게 포도즙을 전달하자 감사하다는 의례적 인사 대신 “이것은 선수들이 먹어야 하는데”라고 말하곤 한다.

염 감독은 다른 감독들과 달리 경기 내내 덕아웃에 서서 경기를 지휘한다. 염 감독은 왜 경기 중 앉지 않느냐는 물음에 “선수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뛰는데 감독이라고 앉아있을 수 있겠느냐”며 “내가 감독하는 동안 앉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염 감독은 지금도 배우는 데 열중한다. 그는 “모든 감독이 내 스승”이고 “모든 책에서 배울 점이 있다”고 말한다. 염 감독은 넥센 히어로즈에 맞는 색깔의 야구를 만들기 위해 김성근 한화 감독의 세밀한 야구에 제리 로이스터 전 롯데 감독의 두려워하지 않는 야구를 접목했다.

김성근 한화 이글스 감독은 염 감독에 대해 “야구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하고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감독”이라며 “9개 구단 감독 가운데 가장 많이 고민하는 대단한 감독”이라고 평가했다. 김 감독은 평소 칭찬을 많이 하지 않는데 이례적인 극찬이다.

염 감독은 성과를 남에게 돌린다. 

염 감독은 지난해 넥센 히어로즈가 창단 뒤 처음으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뒤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만들어낸 것”이라고 말했다. 염 감독은 “전임 김시진 감독님이 젊은 선수들을 키워냈고 이장석 대표님도 트레이드로 선수구성을 잘 해줬다”며 “그런 것들이 밑바탕이 돼 만들어 낸 것”이라고 말했다.

염 감독은 좋지 않은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진다. 그는 “감독은 결과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라며 “그걸 두려워하면 감독이 아니다”고 말했다. 염 감독은 넥센 히어로즈가 좋은 성적을 거두는 데 대해 “나는 한 게 없다. 구단이 좋은 선수를 데려오고 코치가 정성껏 지도한 효과”라며 “무엇보다 선수들 스스로가 열심히 한 것”이라고 말했다. 

“난 결과가 안 좋을 때 책임만 지면 된다.” 염 감독이 자주 하는 말이다.



 비즈니스포스트 






염경엽 "통산타율 1할… 그 실패가 나를 만들었다"

[100℃ 인터뷰] "내일은 우승" 꿈꾸는 넥센 감독



넥센 염경엽 감독

승부사의 눈물은 뜨거웠다. 우승을 놓친 아쉬움, 지금까지 달려왔던 목표를 잃은 허무함 때문이었을까. 염경엽(46) 넥센 감독은 인터뷰 내내 자신의 ‘능력 부족’을 자책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염 감독은 올해 한국시리즈에서 창단 첫 우승을 이룰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여기고 승부수를 던졌다. 투수진의 약점을 상쇄하고자 선발 투수를 4명이 아닌 3명으로 돌리고, 필승조 3명도 전 경기 출격을 준비시켰다. 

하지만 투수진은 시리즈를 거듭할수록 과부하가 걸렸고, 타선도 침묵을 지켜, 넥센은 삼성에 2승4패로 무릎꿇었다. 6차전에서 승부가 끝나자 염 감독은 더그아웃을 빠져나가 눈물을 쏟았다


염 감독을 지난 17일 서울 목동구장 감독실에서 만났다. 야구계에서는 염감독이 선수로서 빛을 보지 못했지만 밑바닥부터 숱한 실패와 시행 착오를 딛고 사령탑으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는 평가다. 이에 대해 염 감독은 “현역 시절 프로에 입문하기 전까지 실패를 몰랐다. 

그러나 정작 프로에서는 실패했다. 야구를 너무 쉽게 본 탓이다”며 “지금까지 해왔던 야구인데 제2의 인생도 이렇게 끝내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언젠가 지도자가 되면 좋은 지식들을 전수해주고 싶어 늘 메모하고 연구했다. 어쩌면 타율 1할의 실패가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현역시절 프로 통산 타율이 1할대다. 타격이 바닥인 선수가 지도자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인가.

“타율 1할의 실패가 그래도 지금의 위치까지 올 수 있었던 발판이 됐다. 프로(1991년 태평양)에 올 때까지 후보 생활 한 번 안 해봤을 정도로 순탄한 과정을 거쳤다. 고교(광주제일고)때 청소년 대표팀을 했고, 대학 진학 때 연세대와 고려대 양 쪽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다. 그 때만하더라도 야구 선수의 최고 목표는 연세대, 고려대 입학이었다.


 프로에 와서도 신인 신분으로 주전 자리까지 꿰차면서 스스로 만족 했다. 더욱 성장을 하려고 노력해야 했는데 자만에 빠져 1할을 치게 됐고, 1996년 현대로 넘어가면서 박진만에게 주전 자리를 빼았겼다. 김재박 감독님을 많이 원망도 했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니 노력을 안 한 내 잘못이었다. 1997년부터 ‘제2의 인생을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 싶어 메모를 시작했다. 은퇴 이후 코치나 프런트를 하더라도 좋은 지식들을 전수해주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여러 감독님들, 다른 팀 코치님들이 모두 스승이다. 스승들의 가르침을 공부하고 연구해, 나만의 방식대로 바꿔 자료를 만들었다.”



-야구인으로서 라이벌을 꼽는다면.

“라이벌이라기보다는 아버지가 야구에 대한 열정이 매우 컸다. 특히 이종범과 많이 비교했다. 노력도 많이 하고,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는 종범이나, (김)기태와 같이 커왔던 영향이다. 아버지가 지적하는 부분은 늘 노력이었다. 나는 시키면 더 안 하는 성격이었다. 부모님 말씀이 잔소리로만 들렸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부모님 얘기가 다 맞았다. ‘왜 열심히 해야 되는지’를 알려주는 선생님이 있었다면 좀 더 나은 성적으로 프로무대에 ‘흔적’을 내고 은퇴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프런트 직원, 작전주루코치에서 넥센 감독으로 발탁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그건 모르겠다(웃음). 이장석 대표님이 결정을 한 거니까. 한 마디 물어봤다. ‘저를 왜 선택하셨습니까’라고 하니 ‘내 감(感)과 베팅’이라고 말씀하셨다.”


-넥센 감독 면접 볼 때 제시한 비전은.

“제가 생각하는 야구, 넥센이 가야 할 방향에 대해 얘기했다. 저랑 인터뷰하는 것 자체도 ‘나랑 왜 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감독 응시 원서를 낸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무엇을 준비하고 있었나.

“원서를 낸 적은 없다. 대표님이 제의를 했고, 인터뷰는 한번 했다. ‘당신한테 베팅을 건다’라고 했다. 단번에 감독 결정을 해줬는데 당황스러웠다. 김시진 전임 감독님을 찾아가 감독 제의를 받은 사실을 얘기했고, 김 감독님이 ‘무조건 해라, 네가 하는 게 가장 넥센한테 좋을 것 같고, 잘할 것 같다’고 좋은 말씀을 많이 해줬다. 그래서 자신감을 얻었다.”



-이장석 대표와는 주로 무엇을 의논하나.

“거의 감독실에 안 오신다. 한 달에 한번씩 티 타임을 하자고 해도 ‘잘하고 있으니까 감독님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말씀하신다. 가끔 본인 의견이 있으면 구단 직원을 통해서 얘기하고 나는 답변을 드린다. 대표님한테 좋은 아이디어를 받을 때도 있었고 채택해본 적도 있다. 채택된 건 말해줄 수 없다. 트레이드나 이런 것들은 구단의 재산이니까, 선수에 관련된 부분들은 구단이 다하고 현장에 관련된 거는 제가 다 담당한다. 트레이드 할 때도 의견을 물어보신다.”



-삼성과의 한국시리즈에서 다 잡은 3차전과 5차전을 놓치고, 결국 2승4패로 졌다. 두고두고 아쉬울 것 같은데.

“아쉬운 경기는 3차전과 5차전이다. 1승만 더 했어도 마지막 7차전까지 가서 재미있게 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모든 경기를 하면서 선수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다. 코칭스태프와 나의 잘못이다. 

선수들을 누가 가르치나. 내가 가르치는 것이고, 가르침에 있어서 뭔가 부족했기 때문에 그런 실수가 나오는 것이다. 이번 시리즈는 기본에서 졌다고 생각한다. 수비에서의 기본, 투수에서의 기본, 그 다음에 타격에서의 기본이 우리가 삼성에 밀렸다고 보기 때문에 우승을 못했다고 생각한다.

 기본이라는 것은 쉬우면서 어려운 것이다. 야구에서 기본은 좋은 습관이다. (5차전 수비 실책을 한)강정호가 공을 보고 잡아야 되는데 마음이 급하니까 공을 안보고 서두른 것이다. 2년 동안 얘기했지만 그것이 제대로 실천이 안 됐기 때문에 실수들이 나왔다.

 내년 우리 팀의 키워드는 ‘기본기’와 ‘실천’이다. 요 며칠 동안 생각한 것이다. 기본기라는 건 정말 중요한 것이라 더 강조할 것이다. 코치들이 더 잔소리를 해도 우리 팀이 가는 방향이니까 더 새겨듣고, 흘려 듣지 말라고 할 것이다.”


-시리즈 종료 후 선수들에게 어떤 말을 해줬는지.

“‘정말 열심히 해줬고, 여러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시리즈까지 갈 수 있었다. 우리한테 많은 경험이 됐고, 준우승이라는 아픔이 우리를 더 단단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게 진실이니까. 조직을 운영하면서 100% 다 만족시킬 순 없다. 30% 정도는 나에 대한 불만도 있을 테고, 그 불만도 이해해주길 바란다. 조직을 운영하다 보면 큰 틀에서 움직이니까 손해 보는 사람도 분명 있을 수밖에 없다.”






-한국시리즈 종료 후 기자회견에서 보인 눈물의 의미는.

“손에 거의 다 잡았던 우승을 놓쳐 아쉬움이 컸다. 정말 우리 팀이 강팀으로 가느냐는 기로에 섰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이기면 강팀이고, 지면 강팀이 아닌 건데 그 고비를 넘어서면 내년이 더 편할 수 있다고 봤다. 

한번 (우승을) 해봐야지 다음에 기회 왔을 때 더 쉬워질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놓친 것에 대한 섭섭함, 지금까지 해온 목표를 잃었다는 허무함, 당연한 것이지만 모든 것을 정말 쏟아 부으면서 한 시즌인데 결실을 못 맺은 것에 대한 억울함도 있다. 이것이 류중일 삼성 감독님과 나의 차이다. 감독의 능력 차이라고 생각한다.”



-내년 시즌에는 간판 유격수 강정호의 공백을 메워야 하는데 복안이 있다면.

“강정호가 빠지면 빈 자리가 15승 정도라고 생각한다. 감독의 능력으로 2, 3승을 메우고, 코치의 능력으로 2, 3승 그리고 주루 및 투수부문에서도 보완하면 좋은 시즌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시리즈에 실패한 것도 투수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투수 부분은 제가 2년 동안 성과를 못 낸 점이라서 책임져야 하고 내년에는 부족한 것을 좀 더 채우도록 할 것이다. 야수는 어느 정도 만들어진 단계인 만큼 투수만 만들어지면 페넌트레이스 1위를 할 수 있는 전력이 나올 것 같다.”


-사표를 늘 품고 다녔다고 했는데 실제 제출한 적도 있나.

“사표를 낸 적은 없다. 능력이 없으면 책임을 지는 거니까 경질에 대한 두려움은 없다. 제가 인정받지 못하면 조직에서 나오는 것이 마땅하다.”



-야구 하면서 받은 스트레스는 어떻게 푸는지.

“스트레스가 쌓이면 수국사(서울 은평구 소재) 주지스님인 호산 스님을 찾아간다. 나를 다스려야 다른 사람도 다스릴 수 있는 거니까. 절에서 인내와 기다림을 배운다. 또 절에 가면 마음이 편하다.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고 답변해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심리적으로 편해진다. 포스트시즌 때는 쉴 때마다 갔다. 차를 즐겨 마시는 것은 니코틴이 좀 걸러지라는 이유에서다. 또 커피를 많이 마시게 되면 카페인 섭취량이 늘어나니, 대신 차를 마신다.”


-염갈량이라는 별명이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본인은 어떤가.

“(팬들이) 좋게 봐주셔서 그렇게 얘기를 하는데 아직 완성체가 아니다. 한참 배워야 될 때다.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더 많은 노력이 있어야 별명을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 또 ‘조갈량’(조범현 KT 감독) 원조가 계신다. 우승 감독님이니까 그분과 똑같은 별명을 갖고 있는 것만해도 감사하고, 친한 감독님 중에 한 명이다. 응원도 많이 해주셨다.”


-염 감독의 스타일에 팬들의 관심이 많다. 쇼핑할 때 취향이 궁금하다.

“취향은 약간 세미 정장 스타일. 유행 안타고 딱 깔끔한 알마니 스타일? 대학 때부터 술을 안 먹어서 술 대신 스트레스 푸는 게 쇼핑이었다. 사는 것도 좋아하고, 좋은 것이 있으면 사서 놔뒀다가 지인들에게 선물한다. 싸면 많이 산다. 눈으로 다 보고 산다. 해외 직구는 안하고 미국 전지훈련을 가면 아웃렛 가서 산다. 쉬는 날 애리조나 서프라이즈에서 팜스프링까지 코치들을 데리고 차로 5시간 운전해 한꺼번에 다 사온다.”


-패션을 위해 몸매는 관리하는 것인가, 예민해서 살이 빠지는 것인가.

“살은 원래 잘 안 찌는 체질이다. 비 시즌 때 체력을 보충해야 한다. 곰의 인생과 같다. 겨울에 살을 찌워야 한다. 야구가 끝나면 밥맛이 돌아온다. 야구에 집중하면 밥 먹는 시간도 아깝고, 밥맛도 없다. 뭔가 했을 때 끝을 못 보면 해결이 돼야 다음 일을 할 수 있는 성격이다. LG 운영팀장을 할 때 외국인선수 스카우트를 하다 사흘도 굶어 봤다. 현역 시절에는 70㎏, 지금은 64㎏ 정도 나간다. 키는 177㎝다. 나도 내가 마른 게 싫다. 그래서 한약, 종합 비타민 등 약을 많이 먹는다. 종합 검진을 받으면 위궤양 말고는 큰 이상이 없다.”



-LG 프런트 시절 ‘정치꾼’(구본준 구단주와 친하다는 소문)으로 몰려서 딸이 실망했다고 하는데, 요즘 딸은 감독으로서 아빠를 자랑스러워하나.

“딸이 야구에 관심이 없다가 지금은 관심을 갖는다. LG때는 많은 오해를 받았다. LG가 성적이 안 좋았고,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는 시점이었다. 오해를 받고 있었던 터라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사표를 내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두 달 동안 사표 수리를 안 해줘서 기다렸다. ‘해외에 1년간 나가 있어라’는 말도 들었다. 결국 그런 오해를 푸는 것은 사표 던지고 나오는 것만이 답이었다. 당시에는 ‘내가 인생을 너무 열심히 살았나 보다. 그래서 이런 오해를 받고 있나’라고 생각했다. 내려놓고 싶었다. 1~2년 쉴 생각도 했다. 준비했던 자료를 가지고 책 한 권을 내고, 충전 시간도 가지려 했는데 내려놓으니까 러브콜이 왔다. 두산에서 적극적으로 왔다. 하지만 김시진 감독님을 버릴 순 없어서 넥센으로 왔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장석 대표님이 좋은 선수를 모아줬고, 김시진 감독님이 선수들에게 많은 기회를 줬다. (팀 완성도)3분의2 지점에서 제가 퍼즐을 맞추고 있고,나아가 완성한 다음 후임 감독한테 인수인계 하는 것이 원하는 방향이다. 김시진 감독님이 초석을 안 다져줬으면 어려웠을 것이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구단 운영 시스템이 좋다고 생각하면 내 밑에서 감독이 나올 거라고 생각한다. 과정 없이 이뤄질 수는 없다. 시스템이 가장 중요하다. 정착되면 그 팀의 컬러가 되고, 전통이 된다. 김시진 감독님에 이어 제가 전통을 만들어가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이제 팀은 7년 차다. 전통이 시작되는 가장 중요한 시기다.”


한국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