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민(崔太敏)


1912년 5월 5일 ~ 1994년 5월 1일)



 






 한국 종교인이다. 1949년 이전에는 주로 치안당국에서 근무를 하였으며, 1975년 4월 29일 박근혜의 후원으로 대한구국선교회를 조직하였고, 자신은 총재가 되었으며, 박근혜는 명예총재가 되었다. 


후에 이 단체는 1976년 12월 10일 구국봉사단, 1979년 5월 1일 새마음봉사단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비리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70년대 당시 한국의 정보기관이던 중앙정보부에서 최태민에 대하여 조사를 하고 보고서를 작성하였다고하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인사 청탁

인용.1

75.9.15 2군 이모 대령의 부인 김OO에게 국방부 장관에게 청탁하여 이OO을 준장으로 진급시켜준다고 하고 그 대가로 200만원 수수. 76.6.4 H사 사장 김OO에게 서울시장에게 청탁하여 서울시 비상유류 저장탱크 공사를 맡게 해준다고 하고 그 대가로 5000만원 수수. 76.10 초순 한국소방기구공업협동조합 이사장 이OO에게 내무부 차관에게 청탁하여 소방기구 신규제조 허가를 억제해주고 동 기구검정권을 동 조합에 주도록 해준다는 조건으로 200만원 수수.

인용.2

76.8 전 중앙정보부 강원지부장 김OO의 부인 박OO에게 남편을 중정에 복직시켜준다고 하고 그 대가로 2차에 걸쳐 150만원 수수. 76.9 초순 S관광 대표 진OO에게 대덕-연기 지역구 차기 공화당 국회의원 후보 공천을 받게 해준다고 하고 76.9.17~12.10 5회에 걸쳐 500만원 수수.

인용.3

77.3.24 H사 K회장에게 구국봉사단 부산지단장에 임명해준다고 하고 그 대가로 200만원 수수. 75.9.27 H사 사장 K회장에게 대한화재보험협회에 청탁하여 동 협회 청사 신축공사를 맡게 해준다고 하고 그 대가로 7000만원 수수…”


의혹


최태민은 각종 비리 의혹과 함께 박근혜와 막역한 관계 내세워 재산을 축적하였고, 이를 자녀에게 상속하였다는 의혹이 있다.


실제로 최태민의 딸인 최순실 부부는 강남의 200억 원 빌딩의 소유주이고, 여섯번째 딸 부부는 150억 원 규모의 부동산 소유주이다.최태민과 박근혜 사이에 숨겨둔 아이가 있다는 의혹이 있으나, 현재까지 밝혀진 것은 없다. 이 의혹을 제기한 백은종은 명예훼손으로 고발당한 상태이며 재판이 진행 중이다.


경력

  • 1975년 4월 29일 대한구국선교회(1976년 12월 10일 구국봉사단, 1979년 5월 1일 새마음봉사단으로 개칭) 총재
  • 1963년 5월 민주공화당 중앙위원
  • 1955년
    • 경남 양산군 개운중학교(비인가 학교) 교장
    • 대한농민회 조사부 차장
    • 전국 불교청년회 부회장
    • 한국복지사회 건설회(임의단체) 회장
  • 1951년 3월
    • 사단법인 대한비누공업협회 이사장
    • 대한행정신문사 부사장
  • 1950년 7월
    • 육군 제1사단 헌병대 비공식 문관
    • 해병대 비공식 문관
  • 1949년 6월 육군 제1사단 헌병대 비공식 문관
  • 1947년 4월 인천경찰서 경위 (사찰주임)
  • 1947년 3월 대전경찰서 경사
  • 1945년 9월 강원도경 소속 경찰
  • 1942년~1945년 8월 황해도경 순사


가족







위키백과








                        [ 최태민 ? ]




이름 7개, 부인 6명, 승려 목사 ‘최태민 미스터리’






지난 40년 가량 박근혜(60)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에는 최태민(1912~1994)과의 관계에 대한 의혹이 자주 따라붙었다.


1974년 어머니 육영수가 총탄에 쓰러진 뒤 ‘퍼스트레이디’ 구실을 하던 박근혜는 ‘새마음봉사단’을 대외활동의 중심으로 삼았다. 최태민과 함께 운영했던 단체다. 사이비종교 ‘교주’였다는 설도 있어 최태민의 전력이 불분명하던 터에, 아버지 박정희도 20대의 딸이 그에게 현혹됐다고 생각해 불만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80년대 후반 전두환 정권이 끝나고 대외 활동을 재개한 박근혜는 최태민과 함께 새마음봉사단의 후신인 근화봉사단을 꾸린다. 동생 근령(58)과 대립했던 1990년 육영재단 분란의 배경에도, 최태민과 그의 딸 최순실(56)의 전횡 논란이 있었다.


1998년 국회의원이 된 뒤에는, 최태민의 사위(최순실의 남편) 정윤회(57)가 비서실장이란 호칭을 달고 등장한다. 2004년 박근혜가 당 대표가 되면서 정윤회는 종적을 감췄지만, 2007년 경선 때도, 지금도 그가 박근혜의 비선 조직을 이끌며 핵심 측근으로 활약중이라는 소문이 무성하다.


유신말기 새마음봉사단 함께 운영


교계에선 “사이비” 구설수


“부인 6명·이름 7개”


박 “의혹 제기됐지만 실체 없었다”





‘6명의 부인, 7개의 이름’






최태민은 흔히 목사로 불린다. 1975년 4월 대한예수교장로회 종합총회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은 뒤부터 생긴 호칭이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와 전두환의 합동수사본부를 거치며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수사자료’를 보면, 그는 불교 승려가 된 적도 있었고 천주교 세례를 받기도 했다. ‘태민’이란 이름도 각종 가명을 포함해 7번째 이름이다.


1912년 황해도에서 태어난 최태민은 1942~45년 황해도경의 순사였다. 해방 뒤 남쪽에 둥지를 튼 그는 이름을 상훈으로 바꾸고 강원도, 대전, 인천에서 경찰로 일했다. 이후 최태민은 군으로 자리를 옮겨, 육군과 해병대에서 ‘비공식 문관’으로 일했다.


최태민은 1951년 군을 떠나며 이름을 봉수로 바꾸고, 대한비누공업협회 이사장, 대한행정신문사 부사장 등을 지냈다. 전쟁이 끝난 뒤 1954년엔 김아무개씨와 결혼했다가, 김씨가 그를 여자 문제로 고소하자 부산 금화사로 도피했다. 곧장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됐고, 이름을 퇴운으로 바꿨다. 1년여 뒤 김씨와의 문제가 잠잠해지자 산에서 내려와 부산에서 전 부인 임아무개씨와 다시 결합했다. 



‘수사 자료’는 임씨가 5번째, 김씨는 6번째 부인이라고 표기했으나, 1~4번째 부인은 등장하지 않는다. (<월간조선>(2007년 7월호)은 별도의 자료를 인용해 최태민이 6명의 부인으로부터 모두 3남6녀를 두었다며 가계도를 제시한 바 있다.)


임씨와 결합한 뒤 경남 양산에서 개운중학교를 설립해 교장에 취임한 최태민은 2년 만에 교장을 그만두고, 이후 몇가지 직책을 지냈다. 1965년엔 천일창고라는 회사의 회장으로 있다가 유가증권 위조혐의로 서울지검이 그를 입건하자 도피했다. 도피중이던 1969년엔 공해남이란 가명으로 등장해 서울 중림동 성당에서 영세를 받기도 했다.


70년대 들어 최태민은 서울과 대전 일대에서 난치병을 치료한다는 등 사이비 종교 행각을 벌였다. 불교, 기독교, 천도교를 종합했다는 교리를 내세웠고, 방민이란 가명을 쓰면서 ‘원자경’, ‘칙사’ 또는 ‘태자마마’라는 호칭을 자처했다.


■ 박근혜와의 만남


최태민이 박근혜를 처음 만난 것이 이 무렵이다. 최태민은 1974년 육영수 사망 직후 박근혜에게 편지를 보냈다. <김형욱 회고록>은 편지 내용을 이렇게 전한다.

“어머니는 돌아가신 게 아니라 너의 시대를 열어 주기 위해 길을 비켜 주었다는 것, 네가 왜 모르느냐. 너를 한국, 나아가 아시아의 지도자로 키우기 위해 자리만 옮겼을 뿐이다. 어머니 목소리가 듣고 싶을 때 나를 통하면 항상 들을 수 있다. 육 여사가 꿈에 나타나 ‘내 딸이 우매해 아무 것도 모르고 슬퍼만 한다’면서 ‘이런 뜻을 전해달라’고 했다.”


이른바 ‘현몽(죽은 이가 꿈에 나타남)’이다. 최태민은 이를 부인했다. 그는 <가정조선>(1990년 10월호) 인터뷰에서 “‘현몽’ 등의 말이 대학 교육을 받은 박(근혜) 이사장에게 먹혀들 것 같아요?”라며 “‘현몽’이나 정식으로 접견 신청 내용 따위는 쓰지 않았다. ‘위로 말씀을 전하며 기회 있으면 한번 만나주시길 바랍니다’는 말로 끝맺었다”고 말했다. 박근혜도 현몽설을 부인했다. 어쨌건 박근혜는 1975년 3월6일 최태민을 청와대로 불러 대화를 나눴다. 이 자리에서 최태민은 외부 활동을 적극 권한 것으로 전해진다.


박근혜를 만난 뒤, 최태민은 목사 안수를 받는다. <월간중앙>(1993년 11월호)은 “(목사 직을) ‘돈 주고 샀다’는 것이 교계 관계자들의 중론이나 이 사실이 확인된 적은 없다. 분명한 한가지는, 목사 안수는 받았지만 신학대학이나 교단이 인정하는 신학교에서 신학교육을 받은 적은 없다는 점”이라고 전했다. ‘태민’이라는 ‘마지막 이름’을 얻은 것도 이 즈음이다.


최태민 목사는 ‘대한구국선교단’을 발족하고 스스로 총재에 취임한다. 5월 임진강에서 연 ‘구국기도회’에는 2000여명이 운집한 가운데 박근혜도 참석했다. 최태민의 즉석 제안으로 박근혜는 명예총재로 추대됐다.


 이후 박근혜는 구국선교단 행사에 자주 모습을 드러냈고, 1976년 구국선교단은 ‘구국봉사단’으로, 2년 뒤인 1978년엔 다시 ‘새마음봉사단’으로 이름을 바꾼다. 바로 박근혜의 퍼스트레이디 경력의 핵심인 새마음운동의 본산이다.


최태민에 대한 ‘수사자료’엔 “형식상 모든 업무는 박근혜가 관장하였으나 실질적으로 비공식 고문격인 최태민이 전권을 위임받아 행정부, 정계, 경제계, 언론계 등 각 분야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 봉사단 관계자는 “한마디로 미니 청와대였다”고도 했다. 최태민 주위에선 각종 이권 개입과 횡령, 사기 및 융자 알선 등 권력형 비리, 그리고 온갖 여성과의 스캔들 의혹이 들끓었다.


소문은 박정희 전 대통령 귀에도 들어갔다. 민정비서실과 중앙정보부 보고를 잇따라 받은 박정희는 1977년 9월 직접 최태민을 심문했다. 이른바 ‘친국’(임금이 직접 죄인을 심문함)이다. 


대통령 서재에서 진행한 친국엔 중정의 김재규 부장과 백광현 국장이 동석했다. 박근혜도 참석해 “그런 일 없다”며 최태민을 옹호했다는 설도 있다. 박정희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검찰에 넘긴 뒤 검찰 판단에 따르겠다”고 했다. 하지만 최태민은 새마음봉사단의 명예총재(총재는 박근혜)를 맡는 등 10·26 때까지 박근혜의 옆을 지켰다.

‘박정희 친국’ 뒤에도 살아남아
전두환 시절도 육영재단 등 활동
박 “어머니 돌아가신뒤 힘들었을 때
바로설수 있도록 도와준 고마운 분”



10·26 뒤 합수부 조사받고도 박근혜 곁에



10·26 뒤 김재규는 항소이유보충서에서 최태민을 언급한다


“본인이 결행한 10·26 혁명의 동기 가운데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중요한 것 한 가지는, 총재 최태민, 명예총재 박근혜양으로 되어 있는 구국여성봉사단 문제이며, 본인은 최 목사의 부정행위를 상세히 조사해 박대통령에게 보고했지만 박대통령은 근혜양을 그 단체에서 손을 떼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근혜양을 총재로 최태민 목사를 명예총재로 올려놓았다.”


1976년 박근혜(오른쪽) 대한구국선교단 명예총재가 최태민 목사와 함께 구국단체결연 단합대회에 참석한 장면.

최태민은 합수부가 진행하는 수사를 받는다. 전두환의 지시로 수사를 맡았던 당시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은 <신동아>(2007년 6월호) 인터뷰에서 “(최태민을) 강원도로 보내 활동하지 못하도록 했다. 조용하게 자숙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강원도에 그리 오래 두지는 않았다. 


구체적 비리 혐의는 기억나는 것이 없고, 그가 기업체로부터 돈을 뜯어낸 것으로 확인된 게 얼마나 되는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박근혜의 연루 의혹은 없었다.”고 말했다. 새마음봉사단은 1980년 11월 강제해산 당한다.

박근혜는 육영재단과 영남대 등을 통해 사회활동을 이어간다. 최태민도 다시 등장한다. 박근혜는 1983년 1월 육영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3년 뒤 1986년부터 육영재단의 어린이회관에선 최태민의 전횡이 입길에 올랐다. <여성중앙> 1987년 10월호를 보면, 최태민에게 우선 보고를 해야 이사장(박근혜) 결재를 받을 수 있었으며, 최태민의 5번째 딸 최순실도 회관 운영에 개입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 무렵 재단 잡지사 기자들의 파업과 직원들의 농성도, 모두 ‘외부 세력’이라고 표현된 최태민·최순실 부녀의 간섭이 원인이 됐다. 분란은 1990년 11월15일 박근혜가 동생 근령에게 이사장직을 넘길 때까지 계속됐다. 물러나는 박근혜는 “내가 누구에게 조종받는다는 것은 내 인격에 대한 모독”이라며 최태민의 전횡 의혹을 일축했다.

최태민은 이후 서울 역삼동 자택에 칩거한 것으로 전해지며, 1994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1994년 노환으로 세상 떴으나
5번째 딸의 남편 정윤희씨
박 ‘미래연합’ 창당때 비서실장
최태민, 사후에도 여전히 ‘그림자’



대이은 ‘충성’

최태민 사후에도 그의 그림자는 박근혜 곁에 남았다. 최순실의 남편 정윤회가 박근혜의 정계 입문 때부터 등장했다. 


그는 ‘비서실장’으로 불렸다. 2002년 박근혜가 한나라당을 탈당해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을 때도 자리를 지켰다. 박근혜가 한나라당 대표가 되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곁을 떠난 것으로 알려진 2004년 6월~2006년 5월에는 국회 입법보조원으로 등록했다. 


박근혜의 정치 입문 초기에 정윤회와 여러 차례 직접 만났던 한 전직 기자는 “최순실은 박근혜가 장충동에 살던 시절부터 말동무로 지낸온 것으로 들었다”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박근혜 의원실의 보좌진을 구성한 것도 정윤회인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박근혜는 2007년 후보 검증 청문회에서 정윤회의 등용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1998년 보궐선거에서) 대구 달성구에 국회의원으로 처음 나왔을 때다. 개인적으로 캠프를 차려 선거를 치르려니 전혀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상대 후보가 안기부 기조실장으로 실세의 기세가 등등했고 위협적인 상대였다. …그런 상황에서 정윤회씨가 돕겠다 해서 순수하게 도운 것이다. 그게 인연이 돼 국회의원 됐을 때 입법보조원으로…, 이후 당 대표 때 그만뒀다.”


2007년 7월 이명박 캠프에선 ‘박근혜의 국회 보좌진이 최태민과 친인척 관계다’, ‘박근혜 캠프의 홍윤식 전문가네트워크 위원장과 정윤회가 밀접한 관계다’ 등의 의혹을 제기했다. 전자에 대해선 해당 보좌진이 즉각 부인했고, 후자에 대해선 홍윤식이 최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지금까지 정윤회를 만나본 적도 없고 얼굴도 모른다”고 말했다.

박근혜는 최태민에 대해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힘들었을 때 흔들리지 않고 바로설 수 있도록 도와준 고마운 분”이라고 말한다. 각종 의혹에 대해선 “의혹은 많이 제기됐지만 실체가 없었다. 한가지라도 사실이었다면 내가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겠나”라며 일축한다.


그러나 박근혜가 다시 대통령에 도전하는 오늘도 정윤회의 이름은 여의도를 떠돈다. 친박 내부에선 친박끼리 “내가 모르는 보고서가 올라간다”며, 정윤회 라인을 의심한다. 반대파는 박근혜나 친박의 결정이 이상하다 싶어서 또 정윤회 라인을 의심한다. <한겨레>는 각종 의혹에 대한 해명을 듣고자 6월부터 다양한 경로로 정윤회와의 접촉을 시도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 2007년 경선 시기부터 많은 기자들이 그를 만나고자 했지만 성공한 바 없다. 




한겨레신문



■ 최태민 수사 자료?

1980년 전두환 지시로 수사…2007년 한나라 경선서 흘러나와
최태민 1990년 유일한 인터뷰 “이름 7개씩이나? 터무니 없다”

최태민
최태민(사진)이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90년 육영재단 분규 때다. 당시 기사를 보면, 최태민의 나이가 69살, 71살, 78살로 들쭉날쭉이다. 그때까지도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는 방증이다.



<월간중앙>(1993년 11월호)은 ‘박근혜-최태민, 20년 커넥션’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김재규가 항소이유보충서에서 10·26 사태의 한 동기로 최태민·박근혜씨의 관계를 거론하고, 그의 비행을 알고 있는 몇몇 사람이 ‘정리’를 권유하자 전두환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은 이학봉 수사국장에게 특별조사를 지시했다.

지금까지 그의 신상에 대해 알려진 내용은 대부분 당시 수사 결과에 근거한 것”이라며 최태민의 전력과 박근혜와의 관계를 다뤘다. 이 ‘수사자료’는 공개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다가, 2007년 한나라당 경선 과정에서 물위로 떠오른다.

<신동아>는 2007년 6월 “중앙정보부가 작성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했다는, 최태민 관련 수사보고서인 ‘최태민 관련 자료’를 최근 입수했다”며 그 내용을 상세히 전했다.


 같은달 27일에는 당시 대통합민주신당의 대선 경선 후보였던 이해찬의 누리집 게시판에 ‘안기부’라는 이용자가 신동아 자료와 같은 제목의 피디에프(PDF) 파일을 올려놓았다.

최태민의 유일한 인터뷰인 <가정조선> 1990년 10월호에서, 그는 수사자료에 대해 “1977년에 작성된 수사기록이다. 수사 결과 내가 기소된 뒤 기소중지되거나 불기소 등으로 처리됐던 게 아니라 아예 그냥 없었던 일로 처리된 것으로 알고 있다”며 내용을 전면 부인했다. ‘6번의 결혼, 7개의 이름’에 대해서도 그는, “이름이 7개씩이나 된다는 것은 터무니 없다”며, 해방 뒤 38선 이남으로 오면서 호적 정리가 되지 않아 이름과 결혼 기록에 문제가 생긴 것이라고 했다.

최태민 쪽은 1977년 9월 본인이 위출혈로 병원에 입원중일 때 사실상 병실에 감금된 상태에서 수사가 진행돼, 기록도 강압에 의해 작성됐다고 주장했다. 김외현 기자







박근혜 후보 옆에 드리워진 '최태민 목사'의 그림자들






기사 관련 사진
▲  1977년 1월 19일 최태민 총재가 새마을 국민운동본부 발족에 따른 기자회견을 열었다.
ⓒ 연합뉴스


지난 2007년 당시 한나라당 대선후보 당내 경선에서 박근혜 후보를 가장 곤혹스럽게 했던 것은 최태민 목사를 둘러싼 각종 의혹이었다. 

최 목사는 1994년 사망 전까지 사기와 횡령, 권력형 이권개입 등 끊임없는 논란을 부른 인물로, 육영수 여사 서거 이후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던 박 후보를 등에 업고 각종 이권을 챙겼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최 목사 사후에는 그의 가족들이 다시 한 번 세간의 구설에 올랐다. 최 목사의 사위인 정윤회(57)씨는 박 후보가 정치권에 입문한 1998년 이후 실제로 수년간 박 후보 주변을 맴돌았다. 정씨의 아내이자 최 목사의 다섯째 딸인 최순실(56)씨는 수백억 원대의 자산가로 알려져 최 목사가 비리를 통해 축적한 부를 물려받았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박 후보는 최 목사 가족과 관련된 일체의 의혹을 부인했다. 2007년 당내 후보 검증위 청문회에서 박 후보는 최 목사와 그의 가족과 관련된 의혹들을 "음해성 네거티브 공세"라고 일축하면서 "의혹이 많이 제기됐지만 제가 아는 한 실체가 없지 않나 생각한다"고 답변한 바 있다. 

최순실, 새마음대학생 전국회장 지내는 등 '새마음운동'에 관여 

하지만 5년이 지난 현시점에서도 최 목사 일가를 둘러싼 세간의 의혹은 여전하다. 의혹은 최 목사와 최순실씨가 지난 1980년대 박 후보가 이사장으로 있던 육영재단 운영에 실질적으로 관여해 전횡을 했다는 것과 재산형성 과정, 정윤회씨가 여전히 박 후보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 등으로 정리된다. 

최순실씨는 대학생 시절부터 박 후보와 아버지 최 목사가 의기투합해 1977년부터 전국적으로 펼친 '새마음운동'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단국대를 다녔던 최씨를 전국새마음대학생 총연합회장으로 기억하는 이들도 있다. 

최씨는 1980년대부터 강남구 압구정동과 신사동에서 학원과 유치원, 아동교육관련 사설연구소를 운영했으며, 2000년대 초반에는 온라인 유아교육 사이트도 운영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최태민 목사와 최순실씨가 육영재단 운영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는 의혹이 처음 제기된 것은 지난 1987년 9월, '외부 세력이 재단 운영에 개입해 재단활동이 설립목적에 어긋나게 사기업화하고 있다'며 육영재단 직원들이 농성에 돌입하면서부터다. 당시 육영재단 직원들이 지목했던 외부세력이 바로 최 목사 일가였다. 

1990년 8월에는 청와대 민정수석실에 박 후보의 두 동생인 박근영(후에 서영으로 개명), 박지만씨가 '사기꾼 최태민을 엄벌해 최씨에게 포위당해 있는 언니 박씨를 국가원수 유족의 보호 차원에서 구출해 달라'고 쓴 탄원서가 전달되기도 했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청와대 하명사건을 담당하는 이른바 '사직동팀'에 최 목사에 대한 내사를 지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여성중앙> 1987년 10월호에 따르면, '최 목사에게 우선 보고해야 박근혜 이사장의 결재를 받을 수 있었으며, 딸 최씨도 어린이회관 운영에 개입했다'는 증언이 나온다. 일각에선 최순실씨가 1987년 어린이 생활교육기관으로 어린이회관 안에 개원한 '근화원' 운영과 육영재단이 발행하던 어린이 잡지 <어깨동무>와 <꿈나라> 편집에도 관여했다는 의혹 등을 제기하기도 했다.

기사 관련 사진
▲  1990년 11월 7일 고 박정희 대통령·육영수여사 기념사업회장직과 재단법인 육영재단 이사장직을 돌연 사퇴, 재단운영권을 둘러싸고 동생 근영씨와 알력이 있는 듯한 추측을 불러 일으켰던 고 박 대통령의 장녀 근혜씨가 서울 성동구 능동 어린이회관 내 문화관 1층의 재단이사장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이사장직 사퇴이유와 심경 등을 털어놓고 있다.
ⓒ 연합뉴스



최태민 사위 정윤회가 2004년 이후 사라진 이유 

최순실씨의 남편 정윤회씨는 연세대 71학번으로 알려졌다. 그는 1998년 박 후보가 정치에 입문할 때부터 함께해 2004년까지 사실상 비서실장 역할을 수행했다. 2002년 박 후보가 당시 한나라당을 탈당해 한국미래연합을 창당, 총재로 취임했을 때는 총재비서실장을 맡았다. 지난 2007년 대선 경선에서는 '논현동팀'(일명 '강남팀')이란 비선팀을 이끌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심지어 지난 4·11 총선 공천 당시 정씨가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거나 그가 현재 '문고리 권력'으로 알려진 박 후보의 보좌진들을 추천했다는 설도 있다. 

정씨는 1990년대 중·후반 서울 강동구 명일동에서 '얀슨' 제과점을, 강남구 청담동에서 '풍운'이라는 일식당을 운영했다. 박 후보는 지난 2007년 검증청문회에서 정씨와의 관계에 대해 "(1998년 보궐선거 당시) 국회의원으로 처음 나왔을 때 상대 후보(엄삼탁)가 안기부 기조실장 출신으로 기세가 등등한 상황에서 정씨가 순수하게 도운 것"이라며 "그게 인연이 돼 돕다가 2004년 당대표 때 그만뒀다"고 했다. 

또 박 후보는 "(정씨가) 최 목사의 사위란 것을 알았다"며 "1998년 대구 달성 보궐선거 당시 정씨가 돕겠다고 해서 순수한 인연이 됐고 이후 입법보조원으로서 도와준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하지만 정씨는 2004년 이후 박근혜 후보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것이 박 후보 캠프 측의 해명이다. 

정씨는 박 후보의 해명대로 지난 2004년 이후 공식석상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과정에서 그의 이름이 다시 불거졌다. 이명박 후보 쪽에서 "정씨가 논현동팀을 이끄는 배후실세"라며 "박 후보와 정씨의 관계를 밝히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박 후보 주변을 오랫동안 조사해온 정치권의 한 인사는 "정씨가 2004~2005년께 공식석상에서 사라진 것은 이후 박 후보의 대선 준비를 하기 위해서일 것"이라며 "정씨가 '강남팀'을, 홍윤식씨가 마포팀을 이끌며 대선을 준비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인사는 "정씨는 박 후보의 보좌관 겸 비서실장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며 "특히 박 후보가 지난 2002년 방북했을 때 정씨를 비서실장으로 데려갔다는 얘기가 있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정씨는 박 후보의 유일무이한 측근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인사는 "그동안 박 후보는 유일한 혈육인 박근영과 박지만을 불신해왔고, 박지만의 경우 2004년 서향희 변호사와 결혼하고 나서야 박 후보로부터 인정받았다"며 "그런 상황에서 정씨 부부가 모종의 역할을 해온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유치원 운영 성공만으로 수백억 재산 일구었다? 

최 목사 일가와 관련된 논란 가운데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재산 관련 의혹이다. 강남구 신사동과 강원도 평창 등에 현재 수백 억원대 규모의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는 정윤회·최순실 부부에 대해 정치권 일각에서는 과거 최태민 목사가 부정 축재했던 재산을 물려받은 것이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최순실씨는 32살 때인 1988년 7월 다른 2명과 공동명의로 신사동 640-1번지에 661㎡(200평) 규모의 땅을 사들였고, 1988년 12월과 1996년 7월에는 공동지분을 차례로 사들여 단독소유주가 됐다. 2003년 7월엔 이 땅에 지하 2층 지상 7층 규모의 미승빌딩을 지어 현재까지 보유하고 있다. 이 건물의 시가는 160~200억원대로 추산된다. 또 <월간조선> 2007년 7월호는 최순실씨가 27살 때인 1983년 서울 역삼동의 대지 149.1㎡(45평)를 산 적도 있다고 보도했다. 

정씨 부부는 평창군 용평면 도사리 일대 17만 9234㎡(5만4218평)의 부동산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 2004년 6월 매입한 이 땅은 모두 8필지이며 임야 11만410㎡(3만3399평), 목장용지 6만8589㎡(2만748평), 그리고 대지 235㎡(71평)로 이뤄져 있다. 현재 이 땅은 30억 원대에 거래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007년 대선후보 경선 당시 최태민 목사의 의붓아들(최 목사의 다섯 번째 부인의 전 남편 아들)인 조순제씨는 "최 목사가 1975년 박근혜 후보를 처음 만날 당시에는 서울 불광동의 쓰러져 가는 단칸방에서 전화도 없이 살았다"고 폭로했다. 당시 조씨는 수백억 원대 재산가로 알려진 최 목사의 친인척들이 박 후보와 최 목사가 만나기 전까지 가난했었다며 "박 전 대표는 최 목사 유족의 재산형성과정을 모를 리가 없다"고도 주장했다. 

당시 박 후보는 "어떻게 육영재단 돈을 빼서 착복할 수 있겠느냐"며 "천부당만부당하고 말도 안 된다"고 최 목사 일가의 비리 의혹을 부인했다. 최순실씨도 검증위에 낸 서면답변서를 통해 "유치원 운영이 잘 돼서 강남에 부동산을 보유하게 됐으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 박 후보 측 김재원 의원도 "2007년 정씨 부부의 재산을 역추적해 보니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게 아니라 강남에서 운영하던 유치원이 성공하면서 재산을 불린 것으로 확인됐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최순실씨의 강남 부동산 취득 시점이 20~30대였다는 점에서 유치원 운영 성공만으로 거액의 부동산을 사들였다는 해명을 쉽게 납득하기 힘들고, 정씨 부부의 평창 땅 매입 시점이 정씨가 박 후보 보좌관을 지낼 때 이뤄진 것이라면 박 후보 핵심 측근이 땅 투기를 했다는 의혹이 제기될 수 있다. 

심지어 정씨 부부가 박 후보의 숨겨놓은 재산을 관리해왔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정씨 부부의 빵집·식당·유치원 경영은 이러한 재산관리를 숨기기 위한 위장술이라는 시각이다. 


오마이뉴스




“김재규의 최태민 보고서, 적나라 성관계 적시”<서-김 정치토크> ‘근령-근혜 싸움’, ‘5촌 살인사건’ 등 다뤄


나는 꼼수다’ 김용민 PD는 4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보고했던 최태민씨의 여자 관련 자료들에는 자세한 신상정보와 구체적인 성관계 내용이 나온다”고 말했다.


김 PD는 이날 업로드한 팟캐스트 ‘서영석-김용민의 정치토크’ 10회에서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 3일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 전 대통령에게 직접 올린 최태민 목사 관련 ‘중앙정보부 보고서’를 입수했다면서 이같이 소개했다.


해당 내용은 미주한인신문 <선데이저널> 등에서 보도됐으며 2007년 대선 당시 이해찬 전 총리의 홈페이지 ‘해찬광장’ 코너에도 게재됐었다. ‘위험경보! 박근혜 측근 정치’란 주제로 마련된 10회 ‘정치토크’는 지난 1일 충북 청주에서 북콘서트 형식으로 진행됐다.


‘최태민 보고서’에서 김 PD는 특히 여자 관련 추문 부분을 자세히 읽어줬다. 김 PD는 “27살 전 총재 비서와, 45살 전 부총재와, 31세 전 부단장과, 41세 전 여군국장과, 40세 전 ○○병원 간호과장과, 24세 전 ○○병원 경리담당과, 42세 전 사무총장(과부)과...그 외에도 5명 더 있다”고 적시된 여성들의 신상을 나열했다.


이어 김 PD는 “이 여성들과의 구체적인 성관계 내용이 나온다”면서 “영등포 옥호불상 여관, 세검정 옥수장, 신촌 신성여관 및 대전시내 에덴여관 등에서 전후 10회에 성교 이런 것 나온다”고 소개했다.

  
▲ 미주한인신문 <선데이저널>에 게재된 내용 일부 캡처

이에 서영석 정치평론가는 “당시 구국여성봉사단이라는 단체가 있었는데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대행하던 시절 박 후보는 이 단체의 명예총재 역할을 했다”면서 “박근혜의 스타일이 책임지는 자리에 오르면 최측근들에게 다 맡기고 감시‧감독을 안 한다”고 말했다.


서 씨는 “그러면 측근들은 박근혜의 이름을 빌려서 호가호위를 하면서 온갖 부정을 저지른다”면서 “영남대가 대표적 사례이다”고 지적했다.


서 씨는 “구국여성봉사단도 거의 관여를 안 하고 최태민 목사(당시 총재)에게 다 맡겼다가 여자 관련된 소문들이 막 나니까 김재규가 소문을 다 수집하고 관련자들의 진술을 받아서 보고서를 만들어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갖다 준 것”이라고 보고서의 배경을 설명했다.


서 씨는 “머리가 아픈 박 전 대통령은 최태민과 못 붙게 막으라고 최필립(현 정수장학회 이사장)을 보냈다”며 “그때 이후로 박근혜는 지금도 공조직을 믿지 못한다”고 말했다.


“중앙정보부, 보안사, 검찰, 경찰 등에서 ‘최태민은 나쁜 X이고 영애의 명예에 누를 끼친다’는 보고가 올라오니까 박근혜는 본능적으로 공조직을 불신하고 싫어하는 트라우마를 안게 됐다”는 것이다. 


“이후 최태민의 사위였던 정모씨가 구성해놨던 당시 20대 비서진들이 40대가 되어 지금도 박근혜 후보 주변에 포진해 있다”면서 소위 최측근 보좌관 ‘4인방(안봉근, 이재만, 故 이춘상, 정호성)’을 지적한 뒤 “박 후보는 단 한 번도 이들을 감독한 적이 없다”고 또다시 같은 문제들이 불거질 가능성을 제기했다.


아울러 서영석 정치평론가는 이번에 시사IN 주진우 기자의 보도로 다시 관심을 모으고 있는 ‘박근혜 후보 5촌 조카간 살해사건’과 관련 육영재단을 놓고 박근령-박근혜 자매가 벌였던 싸움, 박근령씨(한국재난구호 총재)의 남편 신동욱 교수와 박지만씨(EG 회장)간의 ‘청부살인 의혹’ 싸움 등에 대해 설명했다. 




선데이저널 전문전체보기 바로가기 http://www.sundayjournalusa.com/article.php?id=17192




서영석, 김용민의 정치토크 10회 - 위험경보! 박근혜 측근 정치





  










["박근혜-최태민, 박정희의 골칫거리"]





<월간조선> 최신호에서 박 대표의 유신시절 행적 상세 보도

 


 

<조선일보>의 자매지 <월간조선>이 최신호에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유신시절 행적을 상세히 보도해 눈길을 끌고 있다.

 

<월간조선> 사장을 역임했던 조갑제 기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일대기를 월간지에 연재해왔는데, 11월호 연재물의 주제는 박 대표와 최태민씨의 '밀착'.


최씨(94년 별세)는 1975년 당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던 박 대표를 도와 구국봉사단, 새마음봉사단을 만든 장본인으로, 유신 말기 이권에 개입한 혐의로 정보기관의 조사를 받기도 했다.

 

청와대의 골칫거리 - 박근혜와 최태민 밀착.jpg

▲ <월간조선> 11월호가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퍼스트레이디 시절 행적을 보도했다.

ⓒ2005 월간조선

 

<월간조선>에 따르면, 선우련 청와대 공보비서관(97년 별세)은 생전의 비망록에서 77년 9월 12일 박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박 대표를 불러 최씨의 혐의를 친국(親鞫)하는 광경을 묘사하기도 했다. <월간조선>은 이날의 정황을 뒷받침하는 면담일지도 제시했다.

 

"최태민 보고가 올라올 때마다 가슴 찢어지듯 아팠다는 박정희"

 

박 대표와 최씨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1975년 1월경. 최씨가 박 대표에게 육영수 여사를 언급하는 편지를 보냈고, 박 대표가 편지를 다 읽은 뒤 최씨에게 연락을 취했다. 박 대표는 최씨의 권유로 최초의 사회활동(구국여성봉사단 명예총재)을 하게 됐다.

 

구국여성봉사단 활동이 본격화되며 봉사단 총재였던 최씨에게 힘이 실렸고, 박 대표도 퍼스트레이디 시절 김정렴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최씨에 대한 지원을 직접 부탁했다.


최씨가 모 건설업자에게 융자를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해 내용을 알아보면 최씨와 관련이 있는 업자였다는 것이다. 김 실장은 박 대통령에게 "큰 영애가 필요한 돈이 있다고 하면 저에게 얘기해달라, 소리 안나게 돈을 만들어 각하에게 드리겠다"고 건의했고, 박 대통령도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최씨가 뇌물을 수수하고 이권에 개입한다는 보고가 끊이지 않았고, 최씨 문제가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도 자주 거론되었다. 김치열 행자부(당시 내무부) 장관이 그를 지원했다는 얘기도 나온다.


 

박 대통령이 단호한 조치를 내리지 못하자 중앙정보부가 나섰다. 선우련 청와대 공보비서관(97년 별세)은 생전의 비망록에서 "박 대통령이 77년 9월 12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박 대표를 불러 최씨의 부정부패와 뇌물수수 혐의에 대해 친국(親鞫)을 했다"고 기술했다.


 

박 대통령이 며칠 뒤 선우 비서관에게 ▲최태민을 거세하고 ▲구국봉사단 관련단체를 모두 해체하고 ▲최씨가 향후 박 대표와 청와대 주변에 얼씬도 못하게 하라는 세 가지 지시를 내리자 박 대표는 낙담한 표정으로 눈물을 지었다고 한다.

 

선우 비서관이 며칠 뒤 박 대통령에게 "영애의 체면이 깎이니 구국여성봉사단만이라도 계속하게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호소하자 박 대통령은 "(근혜가) 최태민을 가까이 안하게 할 수 있나? 최와 근혜를 접근시키지 않는다는 조건을 붙여서 허락하겠다"고 답했다.

 

박 대통령은 "내가 그간 최태민과 관련한 보고가 올라올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네"라고 말해 최씨 문제가 권부의 적잖은 골칫거리였음을 시사했다. 기사를 쓴 조갑제 기자는 "어머니를 잃고서 퍼스트레이디 역할에 재미를 붙인 딸에게 매정하게 대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심정이 잘 드러나있다"고 평했다.

 

선우 비서관은 박 대통령이 피살된 후 '최태민 거세'가 흐지부지되자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에게 최씨를 박 대표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전두환은 최씨를 강원도 인제로 쫓아냈지만, 최씨는 80년대 육영재단 고문을 맡는 등 94년 별세하기 전까지 박 대표의 측근으로 남았다.

 

박 대표 "나를 많이 도와주신 분, 그래서 음해도 많았다"

 

그러나 박 대표는 자신과 최씨를 둘러싼 의혹들을 철저히 부인하고 있다. 혹시라도 최씨에 대한 질문만 나오면 "그런 질문을 하는 저의가 뭐냐"는 반문이 터져나온다. 박 대표는 지난해 7월 25일 <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최씨에 대한 질문을 받자 다음과 같이 답했다.

 

"그분이 저를 많이 도와주셨다. 저에게는 고마운 분이고 그래서 음해도 많이 받았다. 돌아가신 지가 벌써 10년 가까이 됐다. 정권이 몇번 바뀌는 동안 친척까지 이 잡듯이 뒤지고 조사도 많이 했지만 아무 것도 드러난 것이 없지 않은가."그러나 조 기자는 "박 대표는 지금까지 일관되게 최씨를 전폭적으로 변호하면서 그에 대한 부정적인 정보는 음해라고 말하고 있다, 이제부터는 증거를 찾아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3월 27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도 "박 대표가 1970년대 후반기에 최태민이란 이상한 사람을 구국봉사단 총재로 썼다가 최씨가 수많은 스캔들을 일으켜도 그를 끝까지 감쌌던 적이 있다"며 "박 대표는 한번 믿어버린 사람에 대해서는 객관적인 평가를 안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고 꼬집었다.


월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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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진우의 현대사 14회 - 박근혜와 최태민, 너무나 끈끈한 우연의 일치들






 







 최태민 특집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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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민 미스테리 ?
























Posted by 가난한 여행자 가난한여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