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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 대학살 (아시안 홀로코스트) 인류역사상 가장 끔찍한 범죄

                             
                              난징 대학살



중일 전쟁 도중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이 중국인을 학살한 사건이다. 
이로 인해 약 5만 내지 30만 명의 중국인들이 학살되었다. 

1937년 12월 13일부터 1938년 2월까지 6주간에 걸쳐 이뤄졌으며,1939년 4월에는 1644 부대가 신설되어 생체실험 등이 자행되었다. 

오늘날 중국에서는 이를 난징 대도살이라 부르고 있으며 일본에서는 난징 사건으로 불리고 있다. 

그래서 아시안 홀로코스트라고 불리기도 한다.




대학살 배경




1937년 7월 루거우차오 사건(마르코 폴로 다리, 노구교라고도 불린다.)으로 중국군과 일본군 사이에 무력 사건이 터지면서 중일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초기에 일본군은 베이징, 톈진 등 북부 주요도시들을 손쉽게 점령하고, 진격에 진격을 거듭하면서 일본군 수뇌부는 "단 3개월 안에 중국대륙을 점령하겠다"고 큰소리 쳤을 만큼 기세등등했었다.



그러나, 상하이 전투에서 2~3개월이나 전투가 장기화되었는데, 여기서 일본군이 예상한 것과는 달리 중국 국민당군의 저항이 상상 이상이었다.


 특히 상하이 전투에서 국민당군은 장제스(蔣介石)의 엘리트 직계군대가 투입되었고 이들의 저항이 상당히 격렬했던데다가 여기서 일본군은 오송 상륙 전투에서 무모한 작전을 펼치다가 상당한 피해를 입으면서 일본군은 중국군과 중국인들에 대한 적개심에 악이 받칠 대로 받쳐 있는 상태가 된다.






 그리고 11월, 일본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 어렵게 상하이를 점령하고, 예정도 없이 곧바로 중국 국민당의 수도인 난징을 향해 진격을 한다




대학살 전개



일본군이 난징으로 진격하는 동안 중국 국민당 정부는 수도난징을 버리고 충칭(중경)으로 옮긴다고 발표한다





그러나 중국군 사령관 탕셩즈(唐生智) 장군은 결사항전을 주장했고,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수도를 지키겠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난징성을 삼면에서 좁혀들어오는 일본군의 포위속에 국민당 주요관리와 부유층들은 재빨리 손을 써서 도시를 빠져나갔고, 중일전쟁 이전에 약 110만 명에 육박했던 난징은 도시를 빠져나가려는 시민들과 일본군을 피해 도시로 피난들어오는 피난민 등이 뒤엉켜 아수라장이었다.



 난징성을 포위한 일본군은 중국군 사령관에게 투항하라고 권고 및 경고를 했다. 그러나 난징성을 지키고있던 탕셩즈 사령관 휘하의 15만 명의 중국군은 투항을 끝내 거부했다. 중국군의 당시 전략은 도시 밖 요충지를 포기하고 난징성 안에 머물며 고립한 채로 방어하겠다는 전략 방식으로 나가려했었다



12월 10일, 일본군은 중국군에 "항복하지 않으면 피의 양쯔강을 만들겠다"고 최후통첩을 한다. 결국 역시 중국군은 끝까지 거부했고, 일본군은 전면적인 공격에 들어간다.





12월 13일, 일본군은 난징성을 점령하고 난징성 안으로 진격하기 시작한다. 


국민당 군대가 제대로 저항해보지도 못하고 무참히 무너진 이유에 대해서는 흐뜨러진 군기와 지휘관들의 부재 및 무능함에서 비롯되었으며, 여기에 단합이 안되었던 것에 큰 한 몫을 했다. 결국 중국군은 제대로 전투도 못해본 채로 뒤숭숭한 혼란속에 빠져있기만 했다.


그 무렵, 난징이 함락되기 직전 전날, 결사항전을 주장하던 중국군 사령관 탕셩즈는 자신의 휘하 중국군부대와 난징성에 고립된 시민들을 뒤로한 채, 양쯔강을 가장 먼저 건너 도망을 쳤다.


 여기서 피난가지도 못한 채 남아있던 50~60만의 난징 시민들과 중국군인들은 공황 상태속에서 4~6주간 일본군에 의해 처참한 대량학살을 겪게된다





6주간의 학살과 강간



탕셩즈 사령관이 도망가면서 난징성이 허무하게 일본군 수중에 들어오게 되자, 난징에 남아있던 시민들과 병사들에게 재앙이 닥쳤다. 






일본군은 백기를 들며 항복한 중국군 포로 뿐만 아니라 젊은 남자들을 색출하여 닥치는 대로 끌고가 성외곽 밖이나 양쯔강 하구에서 기관총 세례를 퍼부어,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만여 명이나 되는 단위로, 중국군 포로와 민간인 남자들은 일본군의 총검술 훈련용으로 되거나 목 베기 시합 희생물이 되기도 했다. 






여기에 적지 않은 중국인들은 총알을 아끼려는 일본군에 의해 산 채로 파묻혀서 생매장 당하거나 칼로 난도질당했다




난징의 한 광장에서는 천여 명의 사람들이 몇 개의 단위로 열로 구분되어 세워졌는데, 이들 가운데는 여자들과 어린아이등 수많은 민간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군은 이들에게 석유를 쏟자마자 곧바로 기관총을 난사했다. 






총탄이 사람들의 몸을 꿰뚫을 때 석유에 불이 붙었고, 시체더미는 산처럼 이루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후 난징대학살에 참가한 어느 일본군의 일기가 발견되었는데, 일기내용에서는 "심심하던 중 중국인을 죽이는 것으로 무료함을 달랜다."면서 "산 채로 묻어버리거나 장작불로 태워 죽이고 몽둥이로 때려 죽이기도 했다."고 적혀 있었다. 즉, 일본군들은 군인포로들이나 민간인들 가릴 것없이 무차별적으로 잔인하게 학살을 하였다.






이러한 잔인한 '인간 사냥'이 극에 달하면서 일본군은 여자들에게도 눈을 돌렸다. 이른바, '집단윤간', '선간후살'(先姦後殺, 먼저 강간하고 다음에 죽임)로 일본군은 여성을 성노리개로 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강간 후 참혹하게 살해했다. 





그 대상은 10살도 채 안되어 보이는 어린이부터 60, 70대 노파까지 그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또한, 일본군은 수녀와 비구니를 포함하여 난징에 보이는 여성들을 보이는 대로 능욕했다.







1938년 1월, 일본 외무대신 히로타 고키(廣田弘毅)가 주미 일본대사관에 보낸 비밀 전문 내용에는 다음과 같다.

특별소식: 믿을 만한 목격자들의 직접 추산과 신뢰도 높은 일부 인사들이 보내온 편지에 따르면 일본 군이 저지른 모든 행위와 폭력 수단은 아틸라왕과 흉노족을 연상시킨다. 최소 30만명의 민간인이 살육됐고, 많은 수는 극도로 잔혹하고 피비린내 나는 방식으로 살해됐다. 전투가 끝난 지 수주가 지난 지역에서도 약탈과 아동 강간 등 민간에 대한 잔혹 행위가 계속되고 있다.

당시 일본 외무부는 난징에서의 학살 사실을 숨기기 위해 난징에 있던 서방 외교관들을 불러 맛있는 음식과 공연을 제공하며 매수를 시도했다고 한다



난징 안전지대


독일 나치스당원이자 지멘스의 직원으로 난징에 근무하던 욘 라베는 외교관, 사업가 등 난징에 있던 다른 외국인들과 힘을 합쳐 '국제위원회’를 조직하고 자신의 자택과 대사관 부지 등을 중심으로 일본군이 들어올 수 없도록 '난징 안전지대’를 설정해 이곳에서, 피난하는 중국인들에게 음식과 머물 곳을 제공했었다. 


'난징 안전지대'에 전체 약 20만 명이 넘는 중국인들이 일본군들로부터 대피할 수 있는 은신처 및 음식을 제공받았다.

난징안전지대 구역은 모두 난징 주재 외국대사관과 난징대학교 주변에 설치되었다. 또한, 이러한 안전지대를 주도한 욘 라베는 자신의 소유지를 650명이 넘는 피난자들이 피신할 수 있도록 개방하였으며, 안전구역 내의 행정 책임자들은 끔찍한 학살로부터 중국인들을 보호하고자 노력했다



파나이 호 사건


파나이 호 사건은 1937년 12월, 난징 대학살이 한창 벌어지던 시기에 난징 인근의 양자강 유역에서 일본 해군(해군 소속 전투기)에 의하여 당시 난징인근 양자강 유역을 순찰중이던 미국 아시아함대 소속의 경비정인 파나이 호가 침몰당한 사건이다.

이 사건 이후 공식적으로 일본 정부에서 미국과 영국 정부에게 정중하게 사과하였고, 미국 정부에 배상금을 지불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100인 참수 경쟁







난징 대학살 시기인 1937년 11월 30일자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大阪每日新聞)과 12월 13일자 ‘도쿄 니치니치 신문’(東京日日新聞)에서 일본군 무카이 도시아키(向井敏明) 소위와 노다 쓰요시(野田毅) 소위가 일본도(日本刀)로 누가 먼저 100인을 참살(斬殺)시키는지를 겨뤘다는 사실이 보도되었던 것을 말한다.

종전 후 무카이, 노다 두 소위는 함께 난징에서 군사재판을 받았고, 역시 최후까지 자신이 민간인 학살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으나, 결국 육군 중장 다니 히사오(谷寿夫)와 함께 총살되었다





대학살 이후


1937년 12월 13일, 난징이 함락된 이후 6주간의 대학살이 계속되었고 1938년 봄에야 비로소 종결되었다. 그 후 일본군은 도시 전체를 완벽하게 통제하기 위한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일본정부는 난징에 있는 사람들을 피라미드형 위계질서에 따라 편재하는 방식으로 통제하는 방법을 고안했었다.

1938년 1월 1일, 일본은 새로운 시 정부인 '난징자치위원회'를 구성했다. 난징자치위원회는 도시의 행정, 복지, 금융, 상업, 치안, 교통 등을 담당하는 중국인 관리들로 구성되어 일본의 꼭두각시 역할을 했다.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의 통제 정책은 너무도 가혹하게 다뤘다. 1939년 4월에는 의학연구기관을 설치하고 마루타(통나무)같은 형식의 실험대상을 모아 생체실험 연구를 하곤 했었다. 이를 'Ei 1644부대'라 불리는데, 매주 10여 명의 사람들이 생체실험에 의해 희생당하고, 그 사체는 'Ei 1644부대'의 소각로에서 처리되었다.


이어서 1940년에는 왕징웨이(汪精衛)를 정부수반으로 친일 꼭두각시 정부인 왕징웨이 정권이 난징을 수도로 수립되었다. 그러나, 민중들은 왕징웨이 정권에 대한 지지가 거의 없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면서 Ei 1644부대 등 일본군, 일본인들은 중국 국민당군이 난징에 입성하기전 모든 데이터를 파괴하고 도주했다




전범재판


난징전범재판


난징전범재판은 1946년 8월~1947년 2월까지 난징에서 B급, C급 전범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이 재판에서 1천 명이 넘는 중국인들이 460여 건의 살인, 강간, 방화, 약탈에 관해 증언했었다.


재판이 계속되면서 감춰졌던 증거들이 속속 공개되었는데, 여기서 일본 신문에 보도된 '100인 참수 경쟁'의 노다 쓰요시 중위와 무카이 도시아키 중위가 재판받게 된다. 

두 사람은 '살인시합'을 벌인 장본인이었는데, 재판 도중 둘다 150명 이상을 죽였다는 사실을 일체 부인했으며 급기야 한 사람은 외국인 특파원이 멋대로 상상해 기사를 만들어 냈다고 주장했고, 다른 한 사람은 일본에 돌아갔을 때 아내를 놀라게 해주려고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 둘은 1947년 12월 18일 평결이 내려져 사형을 언도받는다.


또한 난징전범재판에서 다니 히사오 중장 역시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는 1937년 난징에 주둔한 일본군 6사단 육군 중장이었는데, 일본군 6사단은 난징 시내에서 온갖 많은 만행을 저질러왔던 부대였다. 

1946년 8월, 재판에 회부된 다니 히사오 중장은 난징으로 소환되었다. 그를 기소하기 위해 법의학 전문가들이 난징시내 근처에 있는 매장지를 파헤쳐 수천 구의 유골을 발굴했다.

1947년 2월 6일, 다니 히사오에 유죄판결이 내려지면서 3월 10일 다니 히사오 중장은 전쟁법 전쟁포로에 대한 대우에 관한 헤이그 협정을 위반하고 자신의 군대가 난징에서 30만 명 학살한 것에 동조한 혐의로 사형을 언도받으면서 공개총살이 집행된다.


극동국제군사재판

극동 국제 군사 재판은 제2차 세계 대전과 관련된 동아시아의 전쟁 범죄인을 심판한 재판이다. 도쿄 재판이라고도 한다.

 60여 명 이상의 전쟁 범죄 용의자로 지명된 사람 중 28명이 기소되어, 판결 이전에 병사한 사람 2명과 소추가 면제된 1명을 제외한 25명이 실형을 선고받았는데, 이중 난징 대학살에 관련된 전범들 가운데 당시 난징대학살 지휘관이었던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朝香宮鳩彦王)는 일본 황족이란 이유로 처벌을 면해, 재판소에 출석하지 않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난징대학살 당시 총책임자였던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는 사형판결을 받아 교수형을 당했고, 중일전쟁 당시 일본 외무성 장관이었던 히로타 고키(広田弘毅)도 사형을 선고받아 교수형에 처했다. 


하지만, 극동국제군사재판은 난징대학살 당시 주요 범죄자들이 단 한 명도 법정에 서지 않았다는 점이 한계다



살의 주요 책임자

  • 조 이사무 (1895년 1월 19일 ~ 1945년 6월 23일) - 난징전투 당시 아사카 야스히코의 참모. 난징대학살에 깊게 관여했고 포로 학살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 아사카 야스히코 (1887년 10월 2일 ~ 1981년 4월 12일) - 일본의 황족으로서 난징대학살 당시 일본군 현장 책임자. 모든 포로들을 죽이라는 명령서에 서명했다.
  • 마쓰이 이와네 (1878년 7월 27일 ~ 1948년 12월 23일)- 난징대학살 당시 총책임자. 그러나 난징 함락될 당시 병으로 전선에 있지 않았다.
  • 다니 히사오 (1882년 12월 22일 ~ 1947년 4월 26일) - 난징에 주둔한 일본군 6사단 육군 중장. 난징 함락 직후 항복한 중국군 포로와 비무장 민간인을 대대적으로 학살하도록 지시하였다.


위키백과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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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스 장 -The Rape of Nanking(난징의 강간)









난징의 강간은 사망자 수뿐만 아니라 이들이 죽음을 맞이한 참혹한 방식 때문에라도 기억되어야 한다. 중국인 남성들은 총검술의 연습 대상으로, 그리고 일본군의 목 베기 시합의 대상으로 희생되었다. 또한 2만~8만 명에 이르는 중국 여성들이 강간을 당했다. 








일본 군인들은 이 여성들을 강간했을 뿐 아니라 배를 가르고 내장을 들어내거나 가슴을 도려내고, 산 채로 벽에 못을 박기도 했다. 식구들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는 딸을, 아들은 어머니를 강간하도록 강요받았다. 





산 채로 매장하기, 거세하기, 신체 장기를 도려내기, 산 채로 불태우기 등이 다반사로 행해졌을 뿐 아니라 혀에 쇠갈고리를 걸어 사람을 매달아 놓거나 허리까지 사람을 파묻은 후 독일산 세퍼드들의 먹이로 삼는 일 등의 악마적인 행위가 벌어졌다. 그 광경이 너무나 역겨워 난징에 머물던 독일 나치들도 공포에 떨 정도였다. 


(난징강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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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잊혀진 홀로코스트 











2부 진실게임







   



 3부 증언 1937년 겨울



 







# 사견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과거를 되풀이 한다"-조지 산타야나


"대학살을 잊는 것은 두 번째 학살을 저지르는 것과 마찬가지다"-노벨 수상자 엘리 위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