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선엽
백선엽 白善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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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포트후트 기지에서의 백선엽 | |
출생 | 1920년 11월 23일 (92세) 일제 강점기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 |
거주지 | 대한민국 |
국적 | 대한민국 |
별칭 | 아호는 우촌(愚村) |
학력 | 만주 봉천군관학교 졸업 대한민국 군사영어학교 1기 |
직업 | 교사 군인 정치인 외교관 기업인 사회운동가 |
배우자 | 노인숙, 주광숙 |
자녀 | 슬하 2남 2녀 |
부모 | 백윤상(부), 방효열(모) |
친척 | 백복엽(친누나) 백인엽(친아우) 백희엽(사촌 누나) |
백선엽 白善燁, 1920년 11월 23일 ~ )은 일제 강점기의 교육자, 군인이자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인, 외교관, 기업인, 교육인이다.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제9기로 졸업하여 만주국의 장교로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하였으며 만주군 중위로 있을 때 1945년 광복을 맞았고, 해방 직후에는 고당 조만식의 비서로 활동하였다.
이내 소련군이 이북 지역에 진주하게 되자, 1945년 12월에 월남하게 된다. 1946년 군정기 남조선국방경비대에서 활동하였고, 1949년 제5사단장이 되었으며 1950년 한국 전쟁에 대한민국 국군 장군으로 전쟁에 참전하였다.
1950년 제1사단장으로 승진한 뒤, 줄곧 전쟁에 참전하다가 1952년의 휴전 회담 때 한국측 대표단의 한사람으로 휴전문서에 조인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예편 후에는 중화민국·프랑스·캐나다 대사 등의 외교관을 지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군 부문에 수록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군경력
한국전쟁 중인 1950년 10월 동평양에서 작전을 지휘하는 백선엽 | |
별명 | 호는 우촌(愚村) |
복무 | 만주국 대한민국 육군 |
복무 기간 | 1940년 ~ 1960년 |
최종 계급 | 만주군 중위/대한민국 육군 대장 |
지휘 | 대한민국 육군 5 연대장 5 사단 1 사단 2 군단 1 군 육군참모총장 합동참모총장 |
주요 참전 | 태평양 전쟁 한국 전쟁 |
서훈 내역 | 2005년 캐나다 무공훈장, 2010년 코리아소사이어티 밴 플리트 상 |
기타 이력 | 대한민국 육군 대장, 교통부 장관 |
# 박정희 관련
만주군관학교
남로당 적발과 숙군 작업
국군 1사단장 시절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국방경비대가 정식으로 국군으로 재편되면서 그는 국군 제5연대장과 육군본부 정보국장을 거쳐 1950년 4월에 개성을 관할로 하는1사단장(당시 계급 대령)으로 부임하여 1951년까지 사단을 지휘하였다.
육본 정보국장 재직 중이 발생한 여순 14연대 반란사건(194810)이후 공산 게릴라 소탕 및 숙군 사업을 지휘하였다.
이때 같은 만주군 출신으로 남로당 프락치로 활동하던 중 체포 처형위기에 처한 박정희(당시 소령)의 목숨을 구해준다.국방부는 1948년 12월 15일, 육군본부정보처 소속이던 백선엽 등 8명의 중령을 대령으로 특진발령하였다.
이후 그는 남로당 빨치산의 토벌과 군내 좌경 인사 숙군 작업에도 주력한다. 이때 김창룡의 강경책과 달리 좌익 혐의자 중 단순가담자를 선별하여 가벼운 징계를 내릴 것을 건의하여 성사시킨다.
숙군 과정에서 체포된 박정희 소령을 만났을 때 박정희는 한번만 살려달라며 이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거듭 부탁했다.
박정희의 재능을 아깝게 생각한 그는 박정희에게 전향을 권고한다. 백선엽은 숙군 과정에서 검거되었던 박정희의 구명에 대해서 적극적이었다. 당시 박정희는 육군사관학교 좌익 용의자의 한 사람으로 검거되어 사형 선고까지 받은 상태였다.
1949년 초 어느 날 방첩대의 김안일 소령은 백선엽에게 박정희 소령이 조사 과정에서 군내 침투 좌익 조직을 수사하는데 '적극 협조했다'는 점을 들어 박정희를 만나 줄 것을 부탁했다. 박정희를 만난 백선엽은 도움을 부탁하면서도 시종 의연한 자세를 잃지 않았던 그를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옥석을 가리기 힘들었던 만큼 무리한 일이 없었다고 자신할 수는 없지만, 바로 1년 후에 터지는 동족상잔의 대 전란을 앞두고 적어도 군내의 좌익 조직을 일소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으로서도 다행이다
박정희를 남로당의 총책으로 본 김창룡 등은 박정희를 숙청하려 했으나 그는 박정희의 구명에 적극적이었다.
백선엽은 정보국 고문관인 이드 미 육군 대위에게 부탁하여, 하우스만 미육군 대위와 로버츠(William Roberts) 미육군 준장에게 박 소령의 구명을 요청했고, 육군 본부에 재심사를 요청하여 박정희에 대한 형 집행정지 조치를 얻어냄으로써 그를 불명예 제대시키는 선에서 문제를 매듭지었다.
그 후 그는 국군 내부의 반대와 일부 장교들의 비난을 감수하고, 박정희가 문관 신분으로 정보국에서 근무하도록 배려했다.
공식 보직이 부여되지 않은, 편제외 인원으로 비편제 군무원 자격으로 근무하던 박정희에게는 급여가 없었으나, 백선엽은 동료, 부하 장교들을 설득하여 장교들의 월급에서 일부 각출하여 박정희의 문관 월급으로 주었다.
백선엽은 어머니를 옥중에서 잃고, 연인과도 사별하여 의기소침한 박정희를 독려하여 동기를 부여한다.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박정희는 기적적으로 회생하여 현역으로 복귀하여 정보국 제1과장으로 전쟁에 참여한다.
1942년 12월에 만주군관학교를 제9기로 졸업하고 견습군관을 거쳐 1943년 4월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했다. 자무쓰 부대에 배속되었다가, 그 뒤 간도특설대에 발령되어 3년 동안 근무 하였다.
1943년 12월 러허성에(열하성)서 간도특설대 기박련[2] 소속으로 팔로군 공격작전에 참가했다. 간도특설대는 1938년 12월 1일 기존에 있던 조선인 국경감시대를 폐지하는 대신에 창설된 기구였으며 사령부는 간도성(젠다오 성) 연길(延吉, 옌지) 부근 명원구에 있었다.
보병 기갑 혼성 부대로 출발한 이 부대는 당초 360명으로 발족되었으나 나중에는 800명 가까이 늘어났다 한다. 부대장은 일본인 장교였으나 중대장의 반 수와 소대장 이하 전 사병은 조선인이었다.
이 부대는 1938년 12월 창설 직후 간도, 길림, 통화 일대에 출몰하는 안창길(安昌吉), 양정우(楊靖宇), 진한장(陳翰章), 최현(崔賢) 등의 반만 항일(反滿抗日) 세력의 토벌에 투입되었다.
간도특설대는 일제의 패망으로 해산할 때까지 동북항일연군과 팔로군에 대해 모두 108차례 토공(討攻) 작전을 벌였다.
백선엽의 간도특설대에서의 구체적 역할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백선엽이 남긴 회고록에 그의 활동 내역이 일부 보인다. <<군과 나>>에 따르면, 백선엽은 간도특설대에서 김찬규(金爛奎), 송석하(宋錫夏), 김석범(金錫範), 신현준(申鉉俊), 이용(李龍), 임충식(任忠植), 윤춘근(尹春根), 박창암(朴菖岩) 등과 함께 근무했다
#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백선엽(1920년~ 생존)은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군인의 길을 택하여 1940년 만주국군 봉천군관학교 제9기로 입학하여 이듬해 12월 봉천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 동부 파오칭[寶淸]에 있던 보병 제28단에서 견습사관을 거쳐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 하였다.
그 후 약 1년간 자무스[佳木斯]에서 신병훈련대 소대장으로 근무한 다음 1943년 2월에 만주 간도성 명월구에 있던 항일무장 독립세력을 탄압하던 간도특설대로 전임되어 해방될 때까지 항일무장세력에 대한 탄압활동과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하였다.
1. 백선엽은 1942년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한 이래 1945년 일제의 패전에 이르기까지 만주국군 장교로서 일본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하였다.
그중에서도 1943년 2월부터 만주지역 항일무장 독립세력을 무력으로 탄압하던 간도특설대에서 이들에 대한 탄압활동을 전개
하였고, 또 1944년부터 1945년에 걸쳐 간도특설대원으로서 일본군의 ‘대륙타통작전’의 일환으로 열하성으로 들어가 기동(冀東)지역에서 중국군 팔로군을 ‘토벌’하는 작전에 종사하였다.
또 1945년 봄부터 일제의 패전 당시까지 연길지역 국경수비 임무에 종사하는 등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하였다.
백선엽의 이러한 행위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10호 “일본제국주의 군대의 소위(少尉) 이상의 장교로서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에 해당한다. 이상의 내용을 근거로 하여, 백선엽의 행위를 <특별법> 제2조 제10호에서 규정하고 있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한다.
(출처 :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Ⅳ-7권 835페이지 ‘판단’ 부분
"백선엽의 행위를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한다"
"1941년부터 1945년 일본 패전 시까지 일제의 실질적 식민지였던 만주국군 장교로서 침략전쟁에 협력하였고, 특히 1943년부터 1945년까지 항일세력을 무력 탄압하는 조선인 특수부대인 간도특설대 장교로서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함"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4-7권 821페이지 나.친일반민족행위 개요)
▲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 결정현황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 결정현황 자료 중 '백선엽'에 대한 현황자료, 선정/결정란을 보면 이의신청이 있었으나 기각되었음을 알 수 있다. | |
ⓒ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기 |
"백선엽(1920년~생존)은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군인의 길을 택하여 1940년 만주국군 봉천군관학교 제9기로 입학하여 이듬해 12월 봉천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 동부 파오칭(寶淸)에 있던 보병 제28단에서 견습사관을 거쳐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그후 약 1년간 자무스(佳木斯)에서 신병훈련대 소대장으로 근무한 다음 1943년 2월에 만주 간도성 명월구에 있던 항일무장 독립세력을 탄압하던 간도특설대로 전임되어 해방될 때까지 항일무장세력에 대한 탄압활동과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하였다.
1. 백선엽은 1942년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한 이래 1945년 일제의 패전에 이르기까지 만주국군 장교로서 일본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하였다. 그중에서도 1943년 2월부터 만주지역 항일부장 독립세력을 무력으로 탄압하던 간도특설대에서 이들에 대한 탄압활동을 전개하였고, 또 1944년부터 1945년에 걸쳐 간도특설대원으로서 일본군의 '대륙타통작전'의 일환으로 열하성으로 들어가 기동(冀東)지역에서 중국군 팔로군을 '토벌'하는 작전에 종사하였다. 또 1945년 봄부터 일제의 패전 당시까지 연길지역 국경수비 임무에 종사하는 등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하였다. 백선엽의 이러한 행위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0호 "일본제국주의 군대의 소위(少尉) 이상의 장교로서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에 해당한다.
이상의 내용을 근거로 하여, 백선엽의 행위를 <특별법> 제2조 제10호에서 규정하고 있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한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4-7권 835페이지 라.판단)
http://ko.wikipedia.org/wiki/%EB%B0%B1%EC%84%A0%EC%97%BD
# 최근
자문위원장 자리 ‘위인설관’ 의혹
백씨 ‘친일반민족행위자’인데도
이름 딴 ‘한미동맹상’ 시상 강행
* 백선엽 : 전 육군참모총장
국방부가 군사편찬연구소 자문위원장인 백선엽(93) 전 육군참모총장에게 지난 10년 동안 차량과 운전병, 보좌관 지원 등 과도한 특혜를 줘온 것으로 드러났다. 30일 국방부는 2009년 정부가 공식 선정한 ‘친일 반민족 행위자’인 백 전 총장을 기리는 제1회 ‘백선엽 한미동맹상’도 시상했다.
30일 김광진 민주당 의원이 국방부와 산하 군사편찬연구소로부터 제출받은 ‘군 업무용 고정 배차 및 차량 운행 일지 현황’을 보면, 백 전 총장은 2003년 11월부터 현재까지 국방부 근무지원단에서 운용하는 업무용 에쿠스 승용차를 운전병과 함께 지원받아 평일과 주말 내내 개인 전용 차량으로 이용해왔다. 이는 업무용 군 차량의 개인적 사용을 금지한 국방부의 ‘군 승용차 운용 훈령’을 위반한 것이다.
또 백 전 총장은 지난 10년 동안 국방부로부터 개인 보좌관도 제공받았다. 현역 중령 신분으로 백 위원장을 돕던 이아무개 보좌관은 2010년 전역한 뒤 계약직 4급 서기관(대령급)으로 재임용돼 백 위원장을 보좌하고 있다. 군사편찬연구소장의 정식 보좌관이 7급 군무원에 불과한 점을 고려할 때 과도한 특혜로 보인다.
이런 파격적인 특혜에도 불구하고 군사편찬연구소 자문위원장으로서 그의 활동은 부실했다. ‘자문위원 활동 내역’ 자료를 보면, 백 전 총장은 2003년부터 10년 동안 자문위원장으로 일했지만, 원고 감수 등 본연의 업무를 수행한 것은 모두 20여차례에 불과했다. 실제 그의 주요 활동은 외부 강연과 행사 참석이었다. 자문위원장 업무와는 무관한 활동이었다.
김광진 의원은 “국방부는 2003년 백 전 총장이 ‘6·25전쟁 50주년기념사업회 위원장’을 마치자, 바로 군사편찬연구소 자문위원장 직책을 신설해 맡겼다. ‘위인설관’(어떤 사람을 위해 관직을 만든) 의혹이 짙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위용섭 국방부 공보과장은 “백 전 총장이 요청하면 차량을 지원할 수 있으나, 차량 이용 가운데 규정을 위반한 사례가 있어 보인다. 보좌관은 연구소에 편성된 인원”이라고 해명했다.
한편 이날 ‘60주년 한미 동맹의 날’ 축하잔치를 연 국방부는, 민족문제연구소 등 역사·독립운동 단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백 전 총장의 이름을 딴 제1회 ‘백선엽 한미동맹상’ 시상식을 열었다. 첫 수상자는 6·25전쟁 때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을 막아낸 미국의 월턴 워커 장군이다. 백 전 총장은 일제 말기 만주에서 독립운동가들을 토벌하던 만주군 소속 ‘간도특설대’에서 활동해, 대표적 민족반역자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최현준 기자 haojune@hani.co.kr
부정축재자’‘친일파’백선엽,국민혈세로 운전병딸린 고급차 개인보좌관‥국방부,10년간 파격 특혜
안충모 기자2013.09.30 22:17:13
국방부가 군사편찬연구소 자문위원장인 백씨에게 지난 10년 동안 차량과 운전병, 보좌관 지원 등 과도한 특혜를 줘온 것으로 드러났다. 30일 국방부는 2009년 정부가 공식 선정한 '친일 반민족 행위자'인 백 전 총장을 기리는 제1회 '백선엽 한미동맹상'도 시상했다.
30일 김광진 민주당 의원이 국방부와 산하 군사편찬연구소로부터 제출받은'군 업무용 고정 배차 및 차량 운행 일지 현황'을 보면, 백 전 총장은 2003년 11월부터 현재까지 국방부 근무지원단에서 운용하는 업무용 에쿠스 승용차를 운전병과 함께 지원받아 평일과 주말 내내 개인 전용 차량으로 이용해왔다. 이는 업무용 군 차량의 개인적 사용을 금지한 국방부의 '군 승용차 운용 훈령'을 위반한 것이다.
또 백 전 총장은 지난 10년 동안 국방부로부터 개인 보좌관도 제공받았다. 현역 중령 신분으로 백 위원장을 돕던 이아무개 보좌관은 2010년 전역한 뒤 계약직 4급 서기관(대령급)으로 재임용돼 백 위원장을 보좌하고 있다. 군사편찬연구소장의 정식 보좌관이 7급 군무원에 불과한 점을 고려할 때 과도한 특혜로 보인다.
이런 파격적인 특혜에도 불구하고 군사편찬연구소 자문위원장으로서 그의 활동은 부실했다. '자문위원 활동 내역' 자료를 보면, 백 전 총장은 2003년부터 10년 동안 자문위원장으로 일했지만, 원고 감수 등 본연의 업무를 수행한 것은 모두 20여차례에 불과했다. 실제 그의 주요 활동은 외부 강연과 행사 참석이었다. 자문위원장 업무와는 무관한 활동이었다.
김광진 의원은 "국방부는 2003년 백 전 총장이 '6·25전쟁 50주년기념사업회 위원장'을 마치자, 바로 군사편찬연구소 자문위원장 직책을 신설해 맡겼다. '위인설관'(어떤 사람을 위해 관직을 만든) 의혹이 짙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위용섭 국방부 공보과장은 "백 전 총장이 요청하면 차량을 지원할 수 있으나, 차량 이용 가운데 규정을 위반한 사례가 있어 보인다. 보좌관은 연구소에 편성된 인원"이라고 해명했다.
한편 이날 '60주년 한미 동맹의 날' 축하잔치를 연 국방부는, 민족문제연구소 등 역사·독립운동 단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백 전 총장의 이름을 딴 제1회 '백선엽 한미동맹상' 시상식을 열었다. 첫 수상자는 6·25전쟁 때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을 막아낸 미국의 월턴 워커 장군이다. 백 전 총장은 일제 말기 만주에서 독립운동가들을 토벌하던 만주군 소속 '간도특설대'에서 활동해, 대표적 민족반역자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독립군 탄압 백선엽 상, 이순신 장군 통곡한다"
서울=뉴시스】 박문호 기자 = ‘한미동맹의 밤‘이 열린 30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한남동 하얏트 호텔 앞에서 평통사(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회원들이 백선엽 한미동맹상 반대 공동 평화행동을 하고 있다.
이날 ‘한미동맹의 밤’ 행사에는 6·25전쟁에서 공을 세우고 한·미 군사동맹에 이바지한 백선엽 씨(92.예비역 육군 대장)가 자신의 이름을 따 제정한 ‘백선엽 한미동맹상’을 한국전쟁에 참전한 월턴 워커(Walten Walker) 장군의 손자 형제에게 직접 수여할 예정이다.
이에 평통사는 “일제 강점기에 항일무장조직을 토벌하는 간도특설대에서 활동한 백선엽 씨를 기념하는 상은 민족정기를 훼손하는 수치스러운 일이다.”라고 주장했다.
이박사와 이작가의 이이제이 54회 : 백선엽 특집
이이제이 55회 백선엽 특집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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