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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체제& 유신 독재& 10월유신& 유신헌법====>>의의 &내용 &배경 & 실상

                                    


                         10월 유신(十月維新)





10월 유신(十月維新)은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박정희가 위헌적 계엄과 국회해산 및 헌법정지의 비상조치 아래 위헌적 절차에 의한 국민투표로 1972년 12월 27일에 제3공화국 헌법을 파괴한 것을 말한다. 

이때의 헌법을 유신 헌법이라 하며, 유신 헌법이 발효된 기간을 유신 체제, 유신 독재라고 부른다.


메이지 유신에서 이름을 따온 이 체제 하에서 대통령은 국회의원의 3분의 1과 모든 법관을 임명하고, 긴급조치권 및 국회해산권을 가지며, 임기 6년에 횟수의 제한 없이 연임할 수 있었다. 또한, 대통령 선출 방식이 국민의 직접 선거에서 관제기구(官制機構)나 다름없는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선제로 바뀌었다. 


유신 체제는 행정·입법·사법의 3권을 모두 쥔 대통령이 종신(終身) 집권할 수 있도록 설계된 1인 영도적(절대적) 대통령제였다.



내용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1. 대통령 직선제의 폐지 및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접 선거.
  2. 국회의원의 1/3을 대통령 추천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
  3. 대통령에게 헌법 효력까지도 일시 정지시킬 수 있는 긴급조치권 부여.
  4. 국회 해산권 및 모든 법관 임명권을 대통령이 갖도록 하여 대통령이 3권 위에 군림할 수 있도록 보장.
  5. 대통령의 임기를 6년으로 연장하고, 연임 제한을 철폐하여 종신 집권을 가능케 함.



유신의 배경과 성립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1963년 대통령에 당선된 박정희는 1967년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제3공화국 헌법은 대통령직을 1차에 한하여 중임이 가능하게 하였으나, 박정희는 1969년 3선개헌을 통하여 1967년에 이어 1971년 다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여러분께 다시는 나를 찍어달라고 하지 않겠다"고 말하며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회를 달라고 하였는데, 이에 상대 후보였던 김대중은 '박정희가 헌법을 고쳐 선거가 필요없는 총통이 되려 한다'고 주장하였다.


김대중을 가까스로 누르고 대통령에 3선된 박정희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하고 국회를 해산한 후 정당  정치활동의 중지 등 헌법의 일부 기능을 정지시키고,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이에 따라 계엄사령부가 설치되었고, 계엄사령부는 포고를 통하여 정치활동 목적의 옥내외 집회 및 시위를 일절 금지하고 언론, 출판, 보도 및 방송은 사전 검열을 받도록 하며, 대학들을 휴교시켰다.


이후 한태연, 갈봉근 등의 학자들과 김기춘과 같은 젊은 검사들이 만든 이른바 '유신헌법안'이 10월 27일에 '대통령 특별선언'에 따라 국회의 권한을 대행하게 한 비상국무회의에서 의결·공고되었고, 11월 21일 국민투표에 부쳐져 투표율 91.9%, 찬성 91.5%로 확정되어 12월 27일에 공포되었다.


유신 헌법안이 국민투표로 통과한 1주 후인 11월 28일, 박정희 정권은 대학에 대한 휴교조치를 해제하였으며, 12월 14일 0시를 기하여 계엄령을 해제하였다. 비상계엄을 해제한 다음날인 12월 15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실시되어 2,359명의 대의원이 선출었고, 12월 23일 박정희가 단독입후보한 가운데 대통령선거를 실시하여 찬성 2,357표, 무효 2표로 임기 6년의 제8대 대통령에 박정희가 선출되었다.


유신 체제의 종말



박정희 정권의 몰락을 가속화한 것은 부마항쟁이었다. 1979년 5월 말, 야당인 신민당 당수로 선출된 김영삼이 YH 사건에 개입하는 등 적극적인 민주화 투쟁을 전개하자, 박정희 정권은 공화당과 유정회의원을 동원하여 그 해 10월에 국회에서 김영삼을 제명하였다.


 이 사건으로 국내외 여론의 지탄이 더욱 높아지고, 마침내 부마항쟁으로 불리는 대규모 저항운동이 부산·마산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에 대한 처리를 두고 박정희의 최측근이던 중앙정보부부장 김재규와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이 각각 온건과 강경으로 맞선 가운데 10월 26일청와대 부근의 궁정동 안가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와 차지철을 총격 살해하였다. 이로써유신 체제는 끝나고, 이 사건의 합동수사본부장이었던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집권하게 된다



평가

소위 ‘(조국의 평화적 통일의 역사적 사명에 입각한) 한국적 민주주의’를 표방한 유신 체제는 전형적인 유사(사이비)민주주의 또는 장식적 입헌주의 체제였다. 유신 체제는 평양의 김일성 독재체제와 유사한 민주주의를 사칭한 전체주의 독재에 지나지 않았다.



대통령 1인이 행정, 입법, 사법부를 모두 장악하면서 삼권분립은 붕괴되었고, 무제한의 연임허용과 관제기구나 다름없는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선으로 종신집권을 가능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국의 모든 법관을 대통령이 직접 임명함으로써 사법권의 독립은 말살되었다.


 국민은 대통령선거권을 빼앗기고, 대통령은 헌법 효력까지 정지시킬 수 있는 긴급조치권을 이용해 언제든지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행위를 금지·처벌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국민의 기본권은 본질적으로 침해되었다.



김대중이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예견한 박정희식 총통제(總統制), 즉 유신체제는 긴급조치권과 헌법을 초월한 경찰정보기관의 공권력으로 유지된 1인 전제정치체제였다.


 나치 독일파시스트 이탈리아군국주의 일본에서 나타난 파시즘 체제와 유사하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민족주의적 요소가 없기 때문에 완벽한 파시즘이라고 하기는 어렵다는 반박이 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이 유신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내걸은 명분이 매카시즘을 뛰어넘는 반공주의였다는 점에서 파시즘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는 견해 또한 있다.





실상



유신헌법은 무엇이었나… 초헌법적 긴급조치, 삼권분립 부정, 세계사적 ‘헌정 파괴



10월 유신’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장기집권을 위해 헌법 효력정지, 국회 해산 같은 초법적인 조치를 거쳐 마련한 ‘박정희의, 박정희에 의한, 박정희를 위한’ 유신헌법에 기초하고 있다.

유신을 추진하는 과정과 형식, 내용 모두 위헌적 요소로 얼룩졌다. 비정상적인 유신체제를 끌고 가기 위해 긴급조치로 국민 기본권을 억압하는 ‘공포정치’는 필연적이었다. 전문가들은 “현대사의 오명인 유신체제를 지워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 ‘메이지 유신’에서 용어를 따온 10월 유신은 1971년 7대 대선에서 박 전 대통령이 야당 김대중 후보를 근소한 표차로 이겨 힘겹게 3선에 성공한 데 배경이 있다. 


위기감을 느낀 박 전 대통령은 10월17일 비상계엄을 선포한 ‘10·17 비상조치’로 유신체제 구축용 ‘친위 쿠데타’에 나섰다. 국회 해산과 정당활동 금지 등 정치활동을 못하게 한 뒤 비상국무회의에서 심의한 ‘유신헌법’을 11월21일 국민투표로 통과시켰다. 6년 임기에 연임을 포함해 12년을 추가 집권하는 게 가능하게 된 순간이다.



‘유신’ 국민투표 하는 박정희와 박근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운데)가 

1972년 11월21일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오른쪽), 어머니 육영수 여사와 함께 유신헌법 국민투표를 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1971년 ‘김대중에 신승’ 3선 직후
주변정세 이유로 비상조치 선포
헌법 무력화해 장기집권 틀 마련


▲ 국민 기본권 제약한 ‘긴급조치’ 남발
10·26 총성 후 군부정권으로 이어져
“나치헌법처럼 무효화 조치 필요”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31일 “이런 유신체제는 법치를 부인하고, 입법부와 국민주권을 부정했으며, 권력자(박정희)를 법과 제도 아래 두는 공화국 원리를 부정한 세계사적으로도 극히 드문 헌정 파괴행위”라고 규정했다.

절차상 ‘국민투표’를 거쳤다고 유신을 옹호하는 세력도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유신헌법이 위헌이라고 입을 모은다. 임지봉 서강대 교수(헌법학)는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어용단체가 국민주권을 대신해 대통령을 뽑게 하고, 의회와 사법부를 무력화시킨 유신헌법은 원천 무효”라고 말했다.

제3공화국 헌법하에서도 개헌에 필요한 국회의원 3분의 2 이상 의결 과정부터 외면했다. 당시 대통령에게는 국회해산권, 헌법 효력정지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국회를 해산하고 헌법 효력을 정지한 것은 위헌이자 무효라는 것이다.

유신헌법은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허가하거나 검열을 금지한 헌법 규정을 삭제하는 등 기본권도 제약했다. 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접선거를 하게 하고, 국회의원의 3분의 1(유정회 의원)을 추천하고, 국회 동의 없는 긴급조치권을 가졌다. 대법원장과 모든 판사를 대통령이 임명·보직·파면할 수 있게 했다.

유신헌법에 의한 긴급조치(1~9호)로 체제 비판·풍기문란을 빌미로 금지곡을 선정하고, 미니스커트와 장발을 단속했다. 

‘막걸리 보안법’은 이때 나왔다. 오종상씨는 1974년 버스에서 여고생을 상대로 정부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술을 마시다가 ‘박정희 왕국’을 비판한 한 광부도 1977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살아야 했다.

민청학련 사건(1974년),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1975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1979년) 등 체제 유지용 공안 사건들이 만들어지거나 왜곡됐다. 최종길 서울대 법대 교수가 1973년 10월 중앙정보부에서 고문을 받아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해 8월 재야 지도자로 긴급조치 1호의 첫 희생자인 장준하 선생도 의문사를 당했다.

정해구 성공회대 교수는 “장기집권용 유신체제는 박 전 대통령이 심복이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총탄에 쓰러지기 전에 스스로 출구를 찾기 어려운 체제였다”고 지적했다. 

임지봉 교수는 “전후 독일이 나치 헌법을 무효화했듯, 우리 국회는 지금이라도 유신헌법 무효선언이 필요하다”며 “유신은 헌정사에서 제외해야 할 헌법의 진공상태였다”고 말했다.

유신 40년째인 올해까지 논란이 이어지는 것은 사법부가 유신헌법에 ‘사망선고’를 내리지 못한 탓도 있다. 대법원은 2010년 12월 오종상씨에게 무죄를 선고하면서 긴급조치 1호는 위헌이라고 명시했다. 하지만 헌법재판소는 ‘유신헌법 자체의 위헌’ 여부를 놓고 제기된 소에 대해 아직 마침표를 찍지 않고 있다.

5·16 쿠데타와 유신의 나쁜 선례는 결국 전두환·노태우 군부독재 정권으로 모방됐고 박정희의 유산인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1980년 제5공화국이 출범했다. 대통령 직선제는 1987년 6월항쟁에서 시민의 힘으로 쟁취해서야 비로소 되찾았다.

18대 대선을 앞두고 유신 옹호론이 나오는 것 또한 ‘유신 40년, 민주화 25년’을 맞은 한국 민주주의의 냉정한 현주소다. 박명림 교수는 “우리 헌법 질서는 여전히 박정희 체제 속에 있다”며 “민주주의와 경제민주화,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등에 관한 근본적인 토론이 필요한 때가 됐다”고 말했다.



[기고]유신체제, 고문·테러·암살·세계 최저임금의 독재체제였다



박정희 유신체제’는 전형적인 개발독재다. 개발독재라는 말은 그냥 독재보다는 용서받을 수 있는 명분이 인정되는 것처럼 생각하기 일쑤다. 국민을 먹여 살리기 위한 독재라고 하니까 그렇다. 박정희 독재 아래서 국민들은 ‘먹고 살기 위한 고육책’으로 불법구금, 고문, 테러, 강제해직, 암살, 그리고 일상의 감시들을 감수해야 했던 셈이다. 독재정권의 그런 체제 폭력은 1977년부터 3년여간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비델라에 의해 자행돼 ‘더러운 전쟁’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더러운 전쟁’은 1960년대부터 이어진 한국의 박정희 체제가 훨씬 선배였다. 체제 폭력에서 박정희 정권은 부끄러운 세계 최고였다.


새누리당 대선후보 박근혜 의원의 최측근인 홍사덕 전 의원은 그런 박정희 유신독재가 “자기 권력을 위해서가 아니라 수출 100억달러를 위해 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발언은 박정희 정권 내내 수출신장과경제개발을 통치 이데올로기로 삼은 것과 같은 내용이다. 박정희는 3선개헌을 하면서도, 유신쿠데타를 하면서도 ‘선 경제성장, 후 민주주의’를 내세웠다. 그렇다면 성장 후에는 민주화를 했던가?

박정희 정권 아래서 연평균 경제성장률 10여%, 수출 100억달러 등과 같은 총량적 수치 외에 국민 실생활과 관련된 경제지표들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경제지표에 관해 공신력을 가진 세계자료은행(WDB)의 자료를 보면 박정희 정권 아래 성장 수치의 허상이 그대로 드러난다.

첫째, 실제 국민의 생활경제와 직결되는 인플레 및 소비자 물가지수에서 박정희 정권 시기는 역대 정부 중 최악이었다. 정권 별 연평균 물가지수를 보면 박정희 유신정권(1973~79) 15.6%, 전두환 10%, 노태우 7.4%, 김영삼 4.8%, 김대중 3.6%, 노무현 3.3%이다.

둘째, 국민 생활의 실상을 알려주는 중요한 경제지표가 실업률이다. 국가경제의 총량지표가 좋아도 실업률이 높으면 국가경제와 아무런 연관성을 갖지 못하고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다. 전두환 정권기인 1980년부터 제공된 각 정권 별 연평균 실업률을 보면 전두환 4.11%, 노태우 2.8%, 김영삼 2.6%, 김대중 4.8%, 노무현 3.6%이다. 박정희 시기는 전두환 때보다 더 안 좋아 역시 역대 정부 중 최악이었다. 김대중 정부기의 수치는 IMF 관리 사태 때문이었고 그것이 전 정권에서 물려받았음은 공지의 사실이다.


셋째, 박정희가 수출 100억달러를 이루기 위해 유신을 했다는 그 수출도 매년 적자였다. 유신독재 7년간 무역수지 적자가 연평균 213만8137.7달러로 출혈 수출이었다. 이것도 IMF사태 직전인 1990년대 초·중반 외에는 역대 최악이었다. 기업들이 적자수출을 감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수출 총량만 올리면 정부가 정책 금융지원의 특혜를 주었기 때문이다. 특혜 금융지원이란 국민부담으로 기업을 키우는 결과가 된다.

이런 지표들은 유신독재가 애초에 경제개발과 국민의 가난 추방보다도 박정희 자신의 종신집권이 그 본질적 목표였다는 의미로 종합된다. 그 과정에서 고물가, 고실업, 출혈 수출, 세계 최장 노동시간, 세계 최저 임금 등으로 국민의 피와 땀 위에 키워진 대기업들이 오늘날 국민의 삶에 어떻게 기여하고 있는가. 경제민주화와 사회경제적 신평등주의가 시대 과제로 등장한 대선정국에 ‘수출 100억달러’ 얘기는 참으로 시대착오적인 둔사(遁辭)가 아닐 수 없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8312149385&code=910100






대통령이 국회의원 직접 뽑겠다”





‘멸시와 자격지심의 원내 제1교섭단체.’ 1973년 6월1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수운회관에서 열린 유정회 현판식에 박정희(왼쪽)가 참여한 모습. 75 보도사진연감


⑪ 유신헌정 원내 보루 ‘유정회’

1971년 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이 크게 약진한 것은 박정희가 유신이라는 친위쿠데타를 단행한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영구집권을 꿈꾼 박정희에게 강력하고 도전적인 야당이 포진한 국회란 당파 싸움과 국론분열만 일삼는 비능률적인 공간이었다. 


박정희는 몰래 유신을 준비하면서 국회를 무력화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박정희가 고심했던 문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국회에서 안정적인 의석을 확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울 등 대도시에서의 참패, 즉 여촌야도 현상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유신헌법에서 대통령이 국회의원 3분의 1을 사실상 임명하도록 해버렸다. 


그리고 소선거구제 대신 중선거구제를 도입하여 도시에서도 여당후보가 야당과 동반 당선될 수 있는 길을 터놓아 여권이 언제나 3분의 2에 가까운 안정적인 의석을 확보할 수 있게 만들어 버렸다. 대통령이 국회의원 3분의 1을 임명하게 되면서 비례대표 성격의 전국구의원제도는 사라졌다.

대통령의 명령인 긴급조치로 입법권과 사법권을 통제할 수 있는 상황에서 3권분립이란 무의미한 것이었다. 유신체제에서 국회와 법원의 기능은 극도로 위축되었다. 제3공화국 헌법에서 국회에 관한 조항은 2장 ‘국민의 권리와 의무’에 이어 3장 ‘통치기구’에서 가장 앞에 배치되어 있었다.



 유신헌법하에서 국회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통령, 정부 다음의 6장으로 밀려났다. 회기도 정기국회의 회기는 120일에서 90일로 축소되었고, 임시회를 합하여 연 통상 150일을 초과하여 개회할 수 없다는 규정이 신설되었다. 이렇게 하는 게 박정희에게는 “국회를 활짝 열어놓고 떠들어대는 것보다 훨씬 능률적”으로 보였다. 유신쿠데타가 나던 당일도 야당이 열심히 하고 있었던 국정감사권은 유신헌법에서는 사라져버렸다. 국회를 없애지 않은 것만 해도 고맙다고 해야 할 지경이었다.

71년 선거에서 야당이 약진하자
박정희는 국회 무력화를 위해
의원 1/3을 직접 임명해 버렸다
임기는 선출직의 절반인 3년
정당도, 사회단체도 아니었다 

원내 제1교섭단체로 뜬 유정회는
여야로부터 모두 경멸당했으나
유신 비판을 막는 방패가 되어
고함과 드잡이로 활약했다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였다

전화기 앞 감격, 박정희 앞으로 감사전보를 치다

유신헌법 40조는 대통령이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을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일괄 추천하여 후보자 전체에 대한 찬반을 투표에 부쳐 선출하도록 했다. 형식적으로는 간선의원이지만 사람들은 ‘관선의원’이라 불렀다.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추천받은 국회의원의 임기는 지역구에서 선거로 선출된 의원 임기 6년의 절반인 3년이었다. 


국회는 지역구에서 선거를 거친 ‘민선의원’ 146명과 대통령이 임명한 ‘관선의원’ 73명으로 구성되었다. 유신정우회(약칭 유정회)는 이렇게 선출방식도 다르고 임기도 절반밖에 안 되는 73명의 ‘여권’ 의원들이 모인 교섭단체였다. 유신국회였던 9대와 10대 국회에서 의석수는 원내 제1교섭단체였지만,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편찬한 <대한민국정당사>에는 나오지 않는다. 박정희가 죽고 물거품처럼 사라진 유정회에 관한 연구는 놀라울 정도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1973년 2월27일 유신헌법에 따른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공화당은 73개 선거구에서 전원이 당선되었고, 신민당은 52석, 무소속은 19석, 신민당에서 선명야당을 표방하며 떨어져 나간 통일당은 겨우 2석을 얻었다. 구조적으로 야당과 야당 성향의 무소속을 합쳐 보아야 임시국회 소집요구 정족수인 3분의 1 의석조차 갖지 못하는 상황에서 신민당이 제 역할을 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선거 일주일 뒤인 3월5일 박정희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한 국회의원 후보자 73명과 예비 후보자 14명의 명단을 발표했다. 백두진, 김진만, 구태회, 김재순, 최영희, 현오봉 등 공천에서 탈락했던 공화당의 중진들 상당수가 구제되었고 국무총리 김종필도 비서실장 이영근 등 측근들과 함께 이름을 올렸다. 73명의 후보자를 청와대에서 직능별로 분류한 것을 보면 정치인 20명, 예비역 장성 8명, 전현직 고위공직자 16명, 여성 8명, 언론계 7명, 학계 7명, 교육계 3명, 기타 사회 각계 인사 4명 등으로 되어 있다. 유신헌법을 만드는 데 기여한 한태연과 갈봉근도 이름을 올렸다.

청와대 대변인 김성진은 1)범국민적 차원에서 여야를 초월 2)유신이념이 투철한 인사 3)국가관이 투철한 각계각층의 직능대표 4)전문지식을 대의정치에 생산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신진 및 중견 인사 5)농촌개발과 지역사회 발전에 모범이 되는 새마을지도자 6)국민교육에 헌신한 교육계 지도자 7)성실하고 능력 있는 각급 여성 지도자 등을 후보자로 정했다고 밝혔다. 후보의 선정은 청와대 비서실과 중앙정보부, 공화당이 각각 추천한 인물들을 비서실이 통합 정리하여 유력인사 100여명의 명단을 작성한 뒤 박정희가 직접 낙점했다고 한다. 



청와대는 극도의 보안을 유지해 가며 대상자에게 개별적으로 통보했다. 대상자에게 통보가 가던 2월 말에는 여권 인사 상당수가 전화기 앞에서 초조하게 기다렸으며, 후보 명단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통보받은 사람들 중에는 감격에 겨워 우체국으로 달려가 박정희에게 감사전보를 친 사람들도 꽤 되었다고 한다.

박정희는 유신쿠데타를 단행한 뒤 “구태의연한 국회 운영, 비능률적인 정당운영 방식을 지양해야 할 것”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동아일보>는 유정회 의원 선출에 대한 해설기사에서 “이제 국회는 정당 성격을 띠지 않는 유정회가 견인차 역할을 하고 기성 정당들이 객차 역을 맡는 새로운 형태로 운영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유정회는 국회의원 73명을 가진 원내 제1교섭단체였지만 정당도 아니었고 정강정책도 없었다. 그런 점에서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에서 이른바 ‘신체제’를 표방하면서 여러 정당들이 해산한 뒤 통합되어 출현한 대정익찬회와 유사하다. 물론 전국의 지방행정 구역에 상응하는 지부를 갖고 거대 ‘국민조직’을 표방한 대정익찬회와 회원의 자격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된 국회의원’으로 제한된 유신정우회를 동일한 차원에서 비교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박정희가 표방한 ‘한국적 민주주의’에 깔려 있는 정당과 의회에 관한 지독한 편견은 1940년대 초반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이 정당과 의회정치를 비효율적이고 비일본적인 방식이라고 깔아뭉개던 모습 그대로이다.

1974년 12월 국회에서 난투극을 벌이는 여야 의원들. 최다선인 정일형 의원은 임명직 국회의원인 유정회 의원들에게 온갖 수난을 당했다. 75 보도사진연감


1940년대 일본의 ‘대정익찬회’와 유사

공화당과는 별도의 교섭단체로 등록하기로 한 유정회는 “강령이나 정강정책 등을 나름대로 마련할 것을 구상하였으나 유정회의 조직상 성격이 정당이나 사회단체가 아니라는 점을 고려”하여 ‘유신정우회의 정치적 성격’이라는 ‘준강령’을 작성했다. 

이 문건은 공식 기구에서 확정하지는 않은 시안이었지만, 소속의원 전원에게 배포되어 활동의 지침이 되었다고 한다. 이 문건 역시 정당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정당은 “자체의 경직성에 개발도상국가에서 요청하고 있는 국가기능의 능률화”를 저해하고, “근시적 당리당략에 얽매인 정쟁의 폐습으로 국익을 역행”할 뿐이었다. 이 문건은 “유신헌정의 원내 보루”인 유정회의 기본 성격을 대통령이 “정당정치의 폐습을 탈피”하여 초정당적으로 국정을 다룰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고 강조했다.


 이 문건은 또 유정회와 “집약된 국민의 일반의사와 유신이념과의 발전적 조화점”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정회 소속으로 국회 부의장을 지낸 구태회는 “유정회는 어느 정당에도 귀속될 수 없는 일반의지의 집결체”라며 “파당으로 금을 그을 수 있는 어떤 계층이나 또는 어떤 지역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민족의 보통의사를 대변한다고 주장했다. 루소가 일반의지는 대표될 수 없고 인민의 대의원은 인민의 사용인에 지나지 않으며 일반의지의 대표자가 될 수도 없다고 말한 것은 유신체제에서는 통용될 수 없었다. 유신체제에서는 박정희의 뜻이 곧 일반의지였다.

유정회는 원내에서 의석수가 제일 많았지만, 단 한번도 제1교섭단체의 위상을 스스로 주장하지도, 인정받지도 못했다. 상임위원장 12자리를 배분할 때 신민당은 임명직인 유정회에 상임위원장 자리가 돌아가는 것을 반대했다. 유정회는 공화당보다 의석수가 많았음에도 공화당이 8석을 차지하고 유정회는 그 절반인 4석만을 배분받았다.



 공화당 의원들 상당수는 낙하산을 타고 왔으며 언제 자신의 지역구로 치고 들어올지 모를 유정회 의원들을 경계했고 능멸했다. 때로 공화당 의원들은 유정회 의원들에 대해 같은 여권이라는 동류의식을 느끼는 것보다 야당인 신민당 의원들에 대해 치열한 선거전을 치르고 당선된 것에 더 동질감을 느끼는 듯 보였다. 유정회에 관한 거의 유일한 공식기록인 <유신정우회사>는 9대 국회의 상임위원장 선출 당시 유정회가 상임위원장 자리에 집착한 것은 “감투싸움이라기보다는 원내에서 유정회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고 쓰고 있다.

공화당은 3년 임기의 유정회를 멸시하는 데서 위안을 얻었지만 국회와 정당정치의 위상이 한없이 추락한 유신체제하에서 공화당의 존재감이 살아날 수는 없었다. 공화당은 김종필, 백두진, 김진만, 구태회, 김재순 등 거물급이 유정회로 자리를 옮겼을 뿐 아니라, 여권 내에서의 무게중심이 확연히 청와대 비서실과 중앙정보부로 옮겨감에 따라 창당 이후 최악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이미 공화당도 유정회도 국회도 권력의 핵심에서 멀어져 있었다. 1974년 8월 신민당이 긴급조치 해제 건의안을 국회에 제출하자 공화당과 유정회는 긴급조치라는 성역을 사수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여 해제 건의안을 법사위원회에서 부결시켰다. 비록 육영수 여사의 피격이라는 큰 사건이 있었지만 며칠 안 돼 박정희가 긴급조치를 전격 해제하자 유정회와 공화당은 참으로 머쓱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정일형에게 욕설 퍼붓고 김영삼은 잘라버려

유정회의 위상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떨어졌음에도 그 자리를 노리는 사람은 많았다. 청와대 비서실장 김정렴에 따르면 유정회 의원을 시켜준다고 했을 때 “단 한 사람도 거절하는 이는 없었다”고 한다. 박정희는 관료들과 지식인들, 특히 가장 시끄러운 반대세력인 교수나 언론인들을 제어하는 데 유정회 국회의원 자리를 적절히 활용했다. 



예컨대 박정희는 조선일보에서 이종식, 김윤환, 동아일보에서 최영철, 한국일보에서 임삼, 경향신문에서 정재호, 서울신문에서 이진희, 주영관, 이자헌, 박형규, 동양통신에서 문태갑, 대한공론에서 서인석, 김봉기, 문화방송에서 함재훈, 김영수, 케이비에스(KBS)에서 김진복 등 주요 언론사의 정치부장, 논설위원, 편집국장이나 부국장급 인사들을 유정회 의원으로 대거 발탁했다. 이런 자리를 노리는 권력지향적인 언론인들은 언론사 내에서 자발적으로 유신에 협조하고 혹여라도 반체제적인 기사가 나갈까 내부검열관 노릇을 했다.

3년짜리 비정규직이었던 유정회 의원들 자신이 재임명에 목을 걸었다. 1976년 3년 임기가 끝나고 2기 의원을 추천할 때 1기 중 3분의 1에 가까운 23명이 탈락했다. 또 3년 후 3기 의원을 추천할 때는 2기 때의 두 배인 48명이 탈락하고 25명만 살아남았다. 한 언론인은 “체제의 방패역을 자임했던 유정회는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추악한 정치행태들을 연출해 보였다”고 평가했다. 첫 임기 2년차가 끝나갈 무렵인 1974년 12월 발생한 정일형 의원 발언 파동 때나 3년을 거의 채운 시점인 1975년 10월에 발생한 김옥선 의원 발언 파동 때 유정회 의원들은 맹활약을 했다. 



이들은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발언이 나오면 고함과 야유를 보내는 데 그치지 않고 단상으로 달려나가 발언자와 몸싸움을 벌이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정일형 의원이 고향 땅 선산에서 쟁기질하고 있는 전직 대통령의 모습은 자라나는 젊은이들에게 귀감이 될 거라며 박정희 대통령은 하야 용의가 없는가라는 발언을 하자 유정회의 지종걸은 원내 최고령 최다선인 정일형을 향해 “저런 ×새끼 봐라”고 욕설을 퍼부었고, 현역 육군중장에서 유정회 의원으로 옷을 바꿔 입은 송호림은 정일형을 떠밀었다. 


유정회 의원 중 가장 빨리 단상으로 돌진한 정재호는 ‘정비호’라 불리게 되었다. 야당 의원들은 “유정회 임기 3년이 가까워 오니까 볼만하구먼”이라며 혀를 찼다. 유정회 의원 중 혹시라도 소신발언을 하는 경우 청와대의 뜻이라는 표시로 총무단이나 누군가가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면 머쓱하게 발언을 중단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1978년 12월의 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은 의석수에서는 공화당에 뒤졌으나 득표율에서는 1.1% 앞섰다. 야당의 기세가 오르자 유신정권은 국회에서 신민당의 도전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뜻을 원 구성에서부터 밀어붙였다. 국회의장으로 유정회의 백두진을 내정한 것이다. 신민당은 지역구 출신을 제쳐두고 임명직인 유정회 의원이 국회의장을 맡는다는 사실에 격렬히 반발했다. 9대 국회 때는 유정회가 제1교섭단체였음에도 공화당의 정일권이 국회의장을 맡았기에 이런 갈등을 피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여권은 “원내 제1교섭단체가 내정한 의장후보를 비토했다는 것은 유정회의 생성모태인 유신헌법에 대한 모욕적인 도전장과 같은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 등이 중심이 된 강경파들은 국회해산도 불사한다는 설을 흘렸고, 유정회나 공화당은 이러한 강경 기류를 전혀 걸러내지 못했다. 백두진이 의장이 된 유신국회는 신민당 총재 김영삼 의원의 국가관을 문제 삼아 국회의원을 제명하는 폭거를 자행했다. 이것은 유신의 종말을 재촉했고 박정희가 죽은 뒤 유정회는 전두환의 5공헌법이 완성될 때까지 1년에 걸친 긴 장례절차 끝에 사라져버렸다.





박근혜가 배운 건 가장 나쁜 모습의 박정희였다




박정희의 1963년 대통령 선거 포스터. 생전에 세 번의 직선제 대통령 선거와 두번의 체육관선거를 치렀던 그는, 이제 딸을 통한 네 번째 직선제 선거를 통해 부활하려 하고 있다.


세상이 바뀔까 두려워하는 수구세력이 “세상을 바꾸겠습니다”라는 구호를 들고 나온 것은 웃어넘길 수 있다. 그러나 유신세력이 이번 대통령 선거를 과거 세력과 미래 세력의 대결이라면서 자신들을 지지해달라고 하는 데 이르러서는 그냥 웃어넘길 수 없는 모멸감을 느낀다. 혹자는 이번 선거를 박정희 대 노무현의 대결이라고 하고, 또 1차 티비 토론 이후에는 다카키 마사오 세력 대 김대중 · 노무현 세력의 대결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유신과 오늘’에서는 이번 대통령 선거를 박정희의 네 번째 대통령 선거라는 관점에서 그 의미를 짚어보도록 하겠다.


국가예산의 10%를 퍼부었던 1971년 대선

박정희는 1963년 8월 30일 전역식에서 눈물을 흘리며 “본인과 같이 불운한 군인이 또 다시 없도록” 운운하며 군복을 벗는 소회를 밝혔다. 20세기 지구의 곳곳에서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수많은 군인아저씨들은 거의 다 군복을 입고 통치했지만, 박정희는 군복을 벗고 선거를 치러야 했다. 


남북분단이 동서냉전의 대리전을 수행하던 현실에서 미국은 자신의 쇼윈도에 군복이 걸려있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군부 일각에서는 원래의 공약대로 군은 깨끗하게 원대 복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수도경비사령부 군인들은 군정을 연장하라고 데모하기도 하고, 박정희는 오락가락 갈팡질팡 번의에 번의를 거듭하다가 결국 군복을 벗고 대통령 선거를 치렀다. 박정희와 윤보선이 격돌한 제5대 대통령 선거는 역대 대통령 선거에서 15만 표로 가장 표차가 적은 손에 땀을 쥐게 했다. 

승부가 갈린 것은 윤보선이 박정희의 ‘여순반란 사건’에 관련된 좌익 전력을 거론하며 제기한 사상논쟁이었다. 사상논쟁은 윤보선의 기대와는 달리 역효과가 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전국에 널리 퍼져있던 좌익관련자들이 적극적으로 박정희를 지지해 여기서 승부가 갈린 것이다.

평생 권력을 움켜쥐고자 했던
박정희는 두 번의 임기뒤
삼선개헌안을 날치기 처리했고
유신쿠데타 통해 국민들이
대통령 뽑을 기회마저 빼앗았다

퍼스트레이디 박근혜가 배운 건
권력에 취해 비틀거리는
가장 나쁜 모습의 박정희였다
유신의 부활이냐 종말이냐
우린 그 선택의 갈림길에 서있다

1967년 5월 3일의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윤보선과 재격돌했다. 야당은 오랜 분열을 극복하고 신민당이라는 통일대오를 만들었지만, 후보로는 윤보선을 다시 내세웠다. 51세 박정희와 71세 윤보선의 대결, 가난한 농민의 아들임을 내세우는 박정희와 서울의 대부호 양반가의 후예 윤보선의 대결은 구도가 좋지 않았다. 


이제 막 경제개발계획이 궤도에 오르고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돈이 풀리면서 국내의 경제상황도 나쁘지 않았다. 아직 박정희의 독재가 본격화되기 이전이었고, 박정희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자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박정희는 4년 전 15만 표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이긴 윤보선에게 116만 표 차이의 대승을 거두었다.

 당시 제3공화국 헌법은 4년 중임의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었는데, 중임 임기가 끝나는 1971년에 55세가 되는 박정희는 권력을 내놓을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삼선개헌을 염두에 두고 한 달 여 후인 6월8일에 치러진 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개헌이 가능한 의석수를 확보하기 위해 초유의 부정선거를 자행했다.
 박정희는 이렇게 확보한 개헌가능 의석을 이용하여 삼선개헌안을 국회에서 날치기로 ‘처리’했다. 다른 신문들은 ‘통과’라 썼지만, 동아일보만은 언론의 자존심상 ‘통과’라는 말을 쓸 수 없어 ‘처리’라고 했다고 한다.

1971년의 제7대 대통령 선거는 비록 야당이 패배하긴 했지만, 역대 대통령 선거에서 가장 박진감 넘치는 선거로 꼽힌다. 대통령 선거를 1년여 앞 둔 시점에서 신민당 유진오 총재가 갑자기 뇌일혈로 쓰러졌다. 야당으로서는 1956년과 1960년 대통령 선거 당시 신익희 후보와 조병옥 후보가 갑자기 세상을 뜬 데 이어 또 다시 불행한 사태를 맞은 것이다.

 이때 신민당의 원내총무였던 42세의 김영삼이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왔다.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이 출마한 신민당 내 경선에서 40대 기수론을 주창한 김영삼이 예상대로 1위를 차지했지만, 과반수 득표에 실패해 2차 투표에 돌입했다. 여기서 이변이 발생해 2위였던 김대중이 후보로 선출되어, 박정희와 맞붙게 되었다. 박정희는 1967년의 6·8총선에서 김대중을 낙선시키기 위해 김대중의 지역구인 목포에서 국무회의를 열 정도로 김대중을 싫어했다.

 그런 김대중과 경쟁하는 것은 박정희의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했다. 이렇다 할 쟁점을 만들어내지 못했던 윤보선과는 달리 김대중은 예비군 폐지, 4대국 보장론, 대중경제론 등 참신한 공약을 쏟아냈다.

박정희는 사회의 구성이 고도화되면서 자연스럽게 분출되는 각계각층의 요구를 수용하고 조화시킬만한 능력도, 품성도 갖고 있지 않았다. 박정희가 본격적으로 지역감정을 이용한 것도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부터였다. 당시 중앙정보부 차장보로 박정희 측의 선거에 깊이 간여했던 강창성이 뒤에 고백한 것처럼, 이들은 “모든 부정을 저질러서 박 후보의 당선을 만든 것”이었다.


 1971년 국가예산은 5242억이었는데, 박정희 정권이 이 선거에 국가예산의 10퍼센트가 넘는 700억을 퍼부었다. 박정희는 이런 엄청난 부정을 자행하고도 정치신인에 가까운 김대중과의 표차를 94만 표밖에 벌리지 못했다. 1956년의 조봉암 때와 마찬가지로 김대중이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는 말이 떠돌았다.


유신체제 의전서열 2위와 최태민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큰 쟁점이 된 것은 총통제 문제였다. 김대중은 이번에 박정희의 집권을 저지하지 못하면 박정희가 총통제를 실시하여 영구집권을 꾀할 것이라고 주장했고, 박정희는 김대중이 유언비어를 퍼뜨린다면서 이번이 국민여러분께 자신을 찍어달라고 부탁하는 마지막 선거라고 호소했다. 역설적인 일이지만 박정희는 이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


 유신쿠데타를 통해 국민들에게서 대통령을 선출할 권리를 빼앗아갔기 때문에 더 이상 국민에게 자신을 찍어달라고 부탁할 일을 원천적으로 없애버렸다. 당시 국민학교에서도 반장은 학생들이 직접 뽑았는데, 국민들은 제 나라의 대통령을 뽑을 수 없었다.


 박정희는 1972년과 1978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두 번이나 더 대통령에 ‘선출’되었지만, 이것은 선거가 아니라 선거놀음일 뿐이었다. 1987년 6월항쟁에서 구호는 복잡하지 않았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로 민주쟁취” 16글자에 집약된 뜻은 한 마디로 내 손으로 대통령을 뽑자는 것이었다.

박근혜 후보를 흔히 유신공주라 부른다. 그런데 공주라는 말은 가끔씩 오해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1974년 여름 이후 박근혜는 유신체제에서 어린 공주가 아니라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수행했다. 왕비가 없는 상태에서 공주는 유신체제의 의전서열 2위로 유신체제의 핵심적인 구성부분이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권력의 정점에 섰다. 박근혜는 외모는 어머니 육영수의 온화한 모습을 많이 닮았지만, 속은 영락없는 박정희였다. 박근혜는 아버지로부터 권력의 생리와 운영방법을 배웠지만, 불행하게도 박근혜가 보고 배운 시기의 박정희는 권력에 취해 비틀거리는 가장 나쁜 모습의 박정희였다. 박정희도 처음부터 언로가 막혀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초기의 박정희는 부들부들 떨고 재떨이 집어 던질지언정 기자들하고 논쟁도 했고 대드는 기자들을 중용하기도 했다.


박정희가 그래도 기자들과 막걸리를 앞에 두고 때로 고성이 오가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시절이 있었던 반면, 박근혜는 처음부터 얼음공주였다. 선거의 핵심과제인 경제민주화의 상징으로 힘들게 모셔온 김종인 전 의원조차 가차 없이 잘라버리는 상황에서 박근혜의 눈이 발하는 레이저광선 앞에 모두들 침묵해버리고 만다. 최근 교통사고로 숨진 이춘상 보좌관의 죽음은 그가 박근혜 후보에게 그래도 불편한 진실을 전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측근이었다는 점에서 박근혜 후보에게는 치명적인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박근혜 후보와 관련된 여러 가지 부정적인 이야기의 90퍼센트 이상은 구국선교단 총재라는 최태민이라는 정체불명의 인물과 연관되어 있다.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바에 따르면 주한미대사 버시바우는 “최태민이 박근혜의 인격형성기에 박근혜의 몸과 영혼을 완전히 통제”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고 2007년 본국 정부에 보고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그 소문의 대부분이 박근혜 후보의 동생인 박근령 등 최측근이나, 박정희를 가장 열심히 찬양한 조갑제나 요새 TV토론에 보수진영을 대표하여 가장 빈번히 얼굴을 내미는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진 같은 사람의 취재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는 점이다.


박근혜는 박정희 사후 영남대 이사장에 취임했으나, 학생들의 반발로 곧 이사장 직을 사임하고 평이사로 내려앉았다. 영남대학은 영남학원 상임이사 김정욱, 곽완석 사무부처장, 손윤호 영남병원사무장, 조순제 영남투자전무 등 박근혜가 임명한 측근 4인과 이사진이 1인당 2천만 원이라는 거액(현재는 2~3억 가치)을 받고 30여명을 부정입학시킨 사실이 적발되었다. 이들과 이사진은 마땅히 감옥에 가야 하는 것이었으나, 박근혜와 측근들이 영남학원에서 영원히 손을 떼는 선에서 타협이 이루어졌다. 이때 박근혜와 함께 사임한 이사진은 상임이사 김정욱, 이사 김창환, 손미자 등인데, 이들은 모두 정수장학회의 이사를 지냈다. 


이들 중 정수장학회 이사장을 지낸 김창환은 최태민의 사촌, 조순제는 최태민의 의붓 아들, 손윤호는 최태민의 처남으로 알려져 있다. 영남학원 이사진에서 부정행위로 쫓겨난 자들을 박근혜는 정수장학회에서 여전히 이사로 기용했다. 현재 박근혜를 보좌하고 있는 보좌진들의 골격은 최태민의 사위인 정윤회가 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버시바우가 한국의 라스푸틴이라고 평한 최태민의 그림자가 박근혜가 흉탄에 어머니를 잃은 황망했던 어린 시절에 그치지 않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윤봉길 의사 80주기, 다카키 마사오를 생각한다

볼셰비키혁명을 촉발했다고 일컬어지는 제정러시아 시대의 괴승 라스푸틴은 황제까지 혹하게 만들었으나, 박정희가 최태민에 넘어간 것은 아니었다. 박정희의 비서실장이자 술 친구로 10 · 26 사건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인 김계원이 적나라하게 폭로한 것처럼 박정희는 “그 X(최태민)가 그 X(박근혜)를 홀렸다”며 최태민과 박근혜에 관한 보고서가 올라오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고 김계원에게 호소했다고 한다. 


최태민은 박정희보다도 5살이나 많았는데, 최태민의 존재는 박정희는 물론이고 비서실장 김계원, 민정수석 박승규, 정보부장 김재규 등의 골칫거리였다. 운명의 10월 26일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쏜 김재규는 항소이유서 보충서에서 10·26사건의 먼, 그러나 중요한 이유의 하나로 최태민 문제를 꼽았다. 박정희를 친형처럼 따랐던 김재규로 하여금 박정희의 통치능력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품게 만든 계기였던 것이다.


올해 대선일인 12월19일로부터 정확히 80년 전인 1932년 12월19일 일본의 처형장에서 벌어진 일. 일제는 윤봉길 의사의 눈과 이마를 헝겊으로 가린 뒤 10m 거리에서 딱 한 발의 총알로 이마 정중앙을 명중시켜 핏자국으로 일장기 모양을 만들었다.
박근혜는 “곳곳마다 새마을 사람마다 새마음”이라는 구호 아래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을 본 따 새마음 운동을 전개했다. 최태민이 부추긴 공주놀음에 푹 빠져 아버지 속을 지지리도 썩인 딸은 나이 지긋한 교장선생님이나 지역의 원로인사들을 모아 예행연습까지 시키며 몇 시간 씩 줄지어 세워놓고 효도에 대한 강연을 했다. 


시골에 가면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이 영애님 오셨다고 큰 절을 했다. 육영수는 말할 것도 없고 박정희도 이런 절을 받지는 않았다며 김재규는 왜 어린 박근혜가 노인들 절 받느냐고 탄식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최태민 문제로 골치를 썩으며 검찰에 수사를 지시하고 봉건시대의 임금마냥 최태민을 불러 친국을 행하는 등 최태민을 떼어 놓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다 썼으나 울며불며 난리 치는 박근혜를 이기지 못했다고 한다. “에미도 없는 게 시집도 안 가고 애쓰는 게 불쌍하다”는 박정희의 동정이 화를 키웠다면, 지금도 박근혜를 불쌍하다고 여기는 일부 대중들의 값싼 동정이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리고 있다.

18대 대통령 선거에서 핵심 과제는 경제민주화이다. 1948년 제헌헌법은 한 발 오른 쪽으로 가긴 했지만, 독립운동가들이 꿈꾸었던 나라의 모습을 온전히 담고 있다. 불행하게도 친일파들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제헌헌법은 국가보안법에 깔려 질식당하고 말았다. 대한민국 헌정사는 박정희라는 동일인물에 의해 1961년과 1972년 두 차례나 짓밟힘을 당했고, 민주주의는 크게 후퇴했다.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죽으면서 민주주의가 소생의 기회를 맞이했으나 또 다시 박정희의 경호장교였던 전두환, 노태우 일당에 의해 피비린내 나는 광주의 학살을 겪어야 했다. 1987년의 6월항쟁은 간신히 정치적 민주주의만을 회복했다. 안타깝게도 정치적 민주화의 과실은 일반 시민들보다도 재벌과 관료와 수구언론이 따먹어 버렸고, 한국사회는 신자유주의와 외환위기의 광풍 속에서 양극화의 나락에 빠지고 말았다. 6월항쟁으로부터 25년이 지난 2012년 한국사회는 다시 대통령 선거를 치른다.

 이명박이 가져온 역사의 퇴행은 한 발 더 나아가 박정희의 부활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우리는 박정희의 부활이냐, 정치적 민주화에 이은 경제민주화를 성취하느냐의 갈림길에서 2012년의 선거를 치르게 된다.

12월 19일은 윤봉길 의사의 80주기가 되는 날이다. 일제는 1932년 12월 19일, 일본 이시카와현 미고우시 육군공병작업장에서 가장 악질적이고 모욕적인 방법으로 윤봉길 의사를 처형했다. 일제는 25세의 청년 윤봉길의 무릎을 꿇려 낮은 십자가에 붙들어 매고는 눈과 이마를 헝겊으로 가렸다. 그리고 10미터 거리에서 딱 한 발의 총알로 윤봉길 의사의 이마 정중앙을 명중시켰다. 



피가 흘러나와 헝겊을 붉게 물들였으니 저들은 윤봉길 의사의 죽음으로 일장기를 그린 것이다. 박정희가 하필이면 자신이 롤모델로 삼았던 명치유신의 지도자 이토 히로부미가 죽은 날을 골라 자신의 제삿날로 삼은 것도 심상치 않은 우연이지만, 윤봉길 의사의 80주기 되는 날이 18대 대선일인 것도, 그 날이 다카키 마사오를 숭상하는 세력과 민주세력의 한판승부가 벌어지는 것도 범상치 않은 우연이다.






김기춘의 복귀…청와대 유신시대로 회귀





새로 임명된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가운데)이 5일 오전 청와대 춘추관에서 취임 소감을 밝힌 뒤 회견장을 나서고 있다. 오른쪽은 박준우 정무수석, 왼쪽은 홍경식 민정수석.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뉴스분석 박대통령, 청와대 전격개편

박근혜 대통령이 5일 청와대 비서실을 전격 개편했다. 허태열 실장을 경질하고 김기춘 전 법무부 장관을 새 실장에 임명했다. 박준우 전 유럽연합 대사를 정무수석, 홍경식 전 서울고검장을 민정수석, 윤창번 전 하나로텔레콤 대표이사를 미래전략수석, 최원영 전 보건복지부 차관을 고용복지수석 비서관에 임명했다.

인사의 초점은 단연 김기춘 실장이다. 박 대통령이 휴가지 모래밭에 ‘저도의 추억’이라고 쓴 지 1주일 만이다. 자신뿐 아니라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과도 인연이 깊은 구시대 인물을 발탁했다는 점에서 정가나 학계나 충격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현대사)는 “김기춘 실장은 정수장학회, 유신, 간첩조작, 지역감정 등 온갖 부정적인 요소의 화신으로 볼 수 있는 인물이다. 박 대통령이 역사를 거꾸로 되돌리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반역사적 인사다”라고 평가했다.

경남고와 서울법대를 나온 엘리트 검사 출신인 김 실장의 일생은 굴곡진 우리나라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는 1958년 서울법대에 들어가 5·16 쿠데타 직전인 60년 10월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다. 그 뒤 5·16장학회(정수장학회의 전신)가 주는 장학금을 받아 학업을 마쳤다. 이 인연으로 그는 나중에 정수장학회 장학생 출신들의 모임인 상청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김 실장은 1972년 법무부 검사 시절 유신헌법 초안 작성에 참여했다. 1974년부터는 중앙정보부에서 대공수사국 부장, 중앙정보부장 비서관, 대공수사국장을 지냈다. 그가 있는 동안 중정은 재일동포 간첩단을 비롯해 수많은 조작간첩 사건을 만들어냈다. 부장 비서관이던 1974년 8월 박 전 대통령 부인 육영수씨 저격 용의자 문세광에게 “<자칼의 날>을 읽었느냐”고 질문을 던져 입을 열게 한 무용담은 그의 자랑이다. 그는 박정희 정권 말기에 청와대 비서관도 지냈다.

김 실장은 중정 수사국장이던 1978년 ‘1·19 조처’를 기안해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을 중단시킨 일이 있다. 전방사단에서 대대장이 월북한 사건을 계기로 보안사의 권한을 축소시킨 것이다. 이 때문에 80년대 들어서는 한때 보안사 출신 신군부 실세들에게 견제를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비를 넘어선 그는 승승장구했다. 노태우 정권에서 법무연수원장, 검찰총장이 됐고, 1991년 5월부터 1992년 10월까지 법무부 장관을 지냈다. 이 시절 그의 부하들은 그에게 ‘미스터 법질서’라는 별명을 상납했다.

대통령 선거를 코앞에 둔 1992년 12월11일 전직 법무부 장관이던 그는 부산지역 기관장들을 불러 모아 김영삼 후보의 승리를 위해 지역감정을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른바 ‘초원복국집 사건’이다. 역설적으로 정권 탄생에 크게 기여한 그는 1996년 거제에서 신한국당 공천을 받았고, 내리 3선을 했다. 2004년 국회 법사위원장 시절엔 노무현 당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 의견서를 작성해 헌법재판소에 제출했다.

박근혜 대통령과의 공식 인연은 2005년 7월 시작됐다.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 대통령은 그를 여의도연구소장으로 발탁했다. 2007년에는 경선캠프에서 법률지원단장으로 활약했다. 인연은 더욱 깊어갔다. 김 실장은 원로모임 ‘7인회의’의 멤버다. 또 지난 7월1일엔 박정희 기념사업회의 초대 이사장을 맡았다.

역사적 관점 이외에도 이번 인사에는 큰 문제가 있다. 박 대통령이 공과 사의 영역을 뒤섞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여권의 한 인사는 “김 실장은 나이가 많지만 대통령의 입맛에 딱 맞게 보고를 할 줄 아는 사람이다. 매너가 깔끔하고 목소리를 높이는 일도 없다”고 치켜세웠다. 또다른 인사는 “2007년 대선을 앞두고 박 대통령이 대표를 그만두고 집에서 쉬고 있는데 김기춘 실장의 제의로 몇 사람을 불러 모아 함께 ‘충무 마리나’에 놀러 간 일이 있다. 어떻게 설득을 했는지 참 신기했다”고 회고했다.

박근혜 대통령과 김기춘 실장을 다 잘 아는 인사는 익명을 전제로 이런 말을 했다.

“아무래도 대통령의 의식이 1970년대 어린 시절에 머물고 있는 것 같다. 청와대 비서실장은 대통령 개인의 참모가 아니라 중요한 공직자다. 국민이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있어야 한다. 김 실장이 부패한 사람은 아니지만 국가운영의 큰 줄기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지혜나 식견은 부족하다. 무엇보다도 대통령이 잘못된 방향으로 갈 때 안 된다고 막아설 수 있는 정직성이 없다. ‘대통령 심기만 살피는 비서실장’과 ‘정치를 전혀 모르는 정무수석’을 앉힌 것을 보면 박근혜 청와대에 참모는 필요 없다는 것이다. 큰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