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각국사 일연(一然, )
일연(一然, 속명(본명) 김견명(金見明), 1206년 ~ 1289년)은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의 승려로, 보각국사(普覺國師)라고도 한다. 속성은 김(金)씨, 본관은 경주(慶州), 속명은 견명(見明)이며, 처음의 자는 회연(晦然), 나중에 일연(一然)으로 바꾸었다. 호는 무극(無極)·목암(睦庵), 시호는 보각(普覺)이며, 탑호는 정조(靜照)이다.
경상북도 경산(慶山) 출신. 1214년(고종 1) 9세 때 해양(海陽) 무량사(無量寺)에 들어가 학문을 닦다가 1219년 대웅에 의하여 중이 되었다.
1227년 승과(僧科)에 급제, 1246년 선사(禪師), 1259년 대선사(大禪師)에 올랐다. 1261년(원종 2) 왕의 부름으로 상경, 선월사(禪月寺) 주지가 되었고 목우화상(牧牛和尙)의 법통을 계승, 1268년(원종 9) 조지(朝旨)를 받고 운해사(雲海寺)에서 선교의 대덕(大德) 1백 명을 모아 대장경 낙성회(大藏經落成會)를 개최, 그 맹주가 되었다.
1277년(충렬왕 3) 왕명으로 운문사(雲門寺) 주지에 취임, 1281년 왕에게 법설을 강조했고, 1283년 국존(國尊)으로 추대되어 원경충조의 호를 받고, 이 해 노모의 봉양을 위해서 고향에 돌아갔다.
다음해 조정으로부터 토지 백경(百頃)을 받아 경상도 군위(軍威)의 인각사(麟角寺)를 중건했고 궁궐에 들어가서 구산 문도회(九山門都會)를 개최했다. 그의 저서 <삼국유사>는 한국 고대의 신화와 민간설화를 수집하고, 특히 향가를 비롯한 불교 관계 기사를 수록, <삼국사기>와 함께 고대문학과 역사 연구에 귀중한 문헌이 된다. 이 밖에 <조정사원(祖庭事苑)>30권, <선문염송사원(禪門拈頌事苑)> 30권을 지었다.
삼국유사 (三國遺事 )
종 목 | 국보 제30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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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칭 | 삼국유사 권3~5 (三國遺事 卷三~五) |
분 류 | 기록유산 / 문서류/ 문서류/ 문서류 |
수량/면적 | 3권1책 |
지정(등록)일 | 2003.02.03 |
소 재 지 | 서울 종로구 |
시 대 | 조선시대 |
소유자(소유단체) | 곽영대 |
관리자(관리단체) | 곽영대 |
- 삼국유사는 활자본이며, 5권 2책으로 구성되었다. 편찬연대는 미상이나 1281년~ 1283년(충렬왕 7~9) 사이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현재까지 고려시대의 각본(刻本)은 발견되지 않았고, 완본으로는 1512년(조선 중종 7) 경주부사(慶州府使) 이계복에 의하여 중간(重刊)된 정덕본이 최고본이며, 그 이전에 판각된 듯한 영본(零本)이 전한다.
- 본서는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三國史記)>와 더불어 현존하는 한국 고대 사적의 쌍벽으로서, <삼국사기>가 여러 사관에 의하여 이루어진 정사(正使)이므로 그 체재나 문장이 정제(整除)된 데 비하여, <삼국유사>는 일연 혼자의 손으로 씌어진 이른바 야사(野史)이므로 제재나 문사가 <삼국사기>에 못 미침은 사실이나, 거기서 볼 수 없는 많은 고대 사료들을 수록하고 있어 둘도 없이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문헌이다. 즉, 그 중에서도 특히 고조선에 관한 서술은 한국의 반만년 역사를 내세울 수 있게 하고, 단군신화는 단군을 국조로 받드는 근거를 제시하여 주는 기록인 것이다.
그 밖에도 많은 전설 신화가 수록된 설화문학서(說話文學書)라고도 일컬을 만하여, 특히 향찰(鄕札)로 표기된 <혜성가> 등 14수의 신라향가가 실려 있어 <균여전>에 수록된 11수와 함께 현재까지 전하는 향가의 전부를 이고 있어 한국 고대 문학사의 실증에 있어서도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다. 육당(六堂) 최남선은 일찍이 본서를 평하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중에서 하나를 택하여야 될 경우를 가정한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후자를 택할 것" 이라고 까지 하였다.제 1의「왕력편(王曆篇)」은 신라시조(新羅始祖) 혁거세(赫居世)로부터 후삼국(後三國)의 고려 태조 통일에 이르기까지의 왕대(王代)와 영표(年表)를 도표식(圖表式)으로 정연하게 보이고 있으며, 그 위쪽과 말미(末尾) 부분에 중국의 역대 왕조와 연호(年號)를 표하여 시대적인 준거가 되게 하고 있다. 왕력(王曆)은 현재의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편(篇)으로 처리되어 있지 않지만 이는 부록으로써 단순한 연대표가 아니다. 즉 이에는 각 왕의 대수(代數), 즉위 연대, 존위년수(在位 年數), 릉(陵)의 명칭, 소재(所在), 화장기사(火莽記事), 왕모(王母)에 대한 기록, 왕비(王妃)에 관한 기술, 연호(年號)의 사용, 중국과의 교섭관계, 국호(國號)에 대한 설명, 사찰 건립, 수도(首都)의 옮김, 축성(築城), 제방(堤防), 시장(市場)에 대한 기록, 외침(外侵) 기사 등, 국가적인 중대 사건이 기록되어 있어 단순한 연대 대조표가 아니라 일연의 선대(先代) 역사에 대한 지식과 관점을 알 수 있는 한편의 저술이라 할 것이다.
제 2의「기이편(紀異篇)」은 고조선 이래로 후백제까지 이르는 우리 고대사의 광범위한 영역을 신이(神異)를 바탕으로 하여 1, 2권에 걸쳐 59항목으로 다루고 있다. 권 1은 단군조선(檀君朝鮮)의 고대사(古代史)로부터 신라의 통일 전인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대에 이르기까지의 요사(要史) 및 질문(秩文)을 왕조 중심으로 모은 36항목의 내용이 들어 있다. 권 2는 문호왕법민(文虎王法敏)에서 가락국기(駕洛國記) 등 통일이후 국망(國亡)까지의 신라를 중심으로 하여 백제와 후백제 및 가락 등에 대한 것을 권1의 예에 따라 수록한 23항목이 들어 있다. 특히, 가락국(가야)의 역사는 삼국유사 이외의 다른 사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제 3의「흥법편(興法篇)」은 삼국(三國)에서 불교가 공인되기까지의 불교 전래에 대한 기술로, 이에는 사실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여기도 설화적인 내용이 일부 들어 있지만 대부분 문헌자료에 의거한 것이다.
제 4의「탑상편(塔像篇)」은 불교신앙의 대상인 석탑(石塔), 범종(梵鐘), 불상(佛像), 사찰(寺刹)에 대한 기록이다. 이는 불교문화사(佛敎文化史)에 대한 것으로 기왕의 고승전(高僧傳)에 없는 내용이다. 여기에도 설화(說話)로 전하는 영험적인 내용을 일부 전하고 있으나 사지(寺誌), 금석문(金石文) 등을 통하여 비교적 구체성이 있는 내용을 전해주고 있다.
제 5의「의해편(義解篇)」은 불교 교리(佛敎 敎理)에 능통한 승려에 대한 전기이다. 그러나 종교적(敎宗的)인 철학에 능통한 자만이 아니라 이미 도에 통하여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한 고승 이야기, 공예(工藝)에 신통한 양지(良志)의 전기, 신이(神異)를 일으킨 고승의 영험 등이 다루어졌다. 고승전에서 자료를 취하면서도 설화를 함께 실었다.
제 6의「신주편(神呪篇)」은 고승들의 신통한 신술력(神術力)에 대한 설화를 모은 것이다. 이는 「기이편(紀異篇)」과 더불어 신이적(神異的)인 내용을 가장 많이 담고 있다. 하지만 「기이편(紀異篇)」이 왕(王)에 대한 설화가 주(主)라고 한다면 「신주편(神呪篇)」은 승려의 신이(神異)에 대한 설화가 주(主)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제 7의「감통편(感通篇)」은 지극한 신심(信心)이 인간적인 능력의 한계를 뛰어넘는 설화를 다룬 것이며 이 편(篇)도 신이(神異)로운 내용으로 일관되고 있다.
제 8의「피은편(避隱篇)」은 세속적인 부귀를 탐내지 않고 초연히 벗어날 수 있는 사람에 대한 기록으로, 여기에는 승려에 국한시키지 않고 화랑이나 일반 사람도 주제로 포함되어 있다. 기본사상은 모두 세속사(世俗事)를 영원한 것, 절대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 불교의 가르침과 일치함을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의 「효선편(孝善篇)」은 가정의 기본 윤리인 효가 불교에서도 존중되는 덕목이라는 것과 불교적인 선과 연결되는 것이 더욱 값지다는 점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보각국사 일연은 1206년에 태어나 1289년, 84세로 생을 마감하였는데 희종(熙宗), 강종(康宗), 고종(高宗), 원종(元宗), 충렬왕(忠烈王) 등 5대에 걸치는 이 시기는 내우외환(內憂外患)이 중첩된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
대내적으로는 의종(毅宗)년간에 발생한 무인정변 (武人政變)에 의해 문벌중심 (門閥中心), 문치편중(文治偏重)의 귀족 정권이 붕괴됨으로써 고려사회의 전개 방향이 크게 전환되는 시기였다.역사 또한 무인의 집권을 계기로 고려후기의 학자적 관료인 신진사대부 층이 추진세력으로서 새롭게 등장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이 무렵 고려 불교에서는 세력을 떨치던 교종(敎宗)이 쇠퇴하고 지눌 보조국사 (의종12, 희종6, 1158~1210)이 창도한바 조계종(曹溪宗)으로 대표되는 선종(禪宗)의 새로운 발전이 일어나고 있었다. 결국 무인(武人)의 정변과 집권은 폐쇄적인 문벌중심 지배체제를 구축하여 사회, 민중과 유리되는 현상을 야기 시켰으며, 심지어는 자기들의 권력유지를 위해 야만시 하던 여진족 금(金)나라에 신사(臣事)까지 하는 전통적 자주의식마저 상실한 유교적 전제정치가 이루어지던 고려 사회에 새로운 기류를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무인의 집권, 역시 사회와 역사의 전통적 무신귀족의 횡행이래 발달하기 시작한 사적 대토지 소유(私的 大土地 所有) – 농장은 이에 이르러 한층 더 급격히 성장하고 있었으며 남북각처에서는 농민 노예의 반란이 잇따르고 있었다.
국내 정치와 사회가 이렇게 불안한 가운데 무신정권은 최충헌에 의하여 어느 정도 안정기에 돌입했으나 이 때 고려사회는 국가적으로 가장 큰 환란(患亂)인 몽고족의 침입을 겪게 된다. 고종(高宗) 18년이래 계속된 몽고의 야만적인 침략과 지배로 인해 민중들은 몽고의 침략세력과 국내의 지배권력에 대한 싸움을 동시에 벌이는 이중의 항전을 전개해야 했으며 원종(元宗) 11년에 이루어진 몽고와의 강화(講和)와 개경천도(開京還都)는 무인정권의 종말과 몽고와의 전쟁 상태의 종결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원(元)의 간섭을 받기 시작한 뒤를 이어 고려에 강요된 일본정벌을 위한 경제적, 군사적 부담을 30여 년간의 항전(抗戰)과 몽고 지배로 인해 피폐할대로 피폐한 고려사회에 설상가상(雪上加霜)의 짐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적 수난을 겪는 동안 민족의 자주성을 지키려는 민족 공동체로서의 집단의식은 오히려 강화되고 있었고 현실적 수난을 민족의 자주적인 전통의식의 강조를 통해 극복해 보려는 역사의식 또한 고조되고 있었다.
이렇게 심화된 민족의식은 보다 지방적이며 보다 민중 속에서 성장해 온 신진사인(新進士人)층이나 신흥(新興)의 선승(禪僧)들에게서 더욱 구체적인 인식을 보이게 된다. 즉 지눌(知訥)로부터 혜심(慧諶) 등으로 이어지는 무신란(武臣亂) 이후의 조계종(曹溪宗)은 국난을 타개하려는 국민 의식 속에 새로운 힘을 불어넣는 계기가 되었으며, 동시대의 신진사인(新進士人) 이규보(李奎報(목종毅宗 22 ? 고종高宗 28, 1168-1241)는 고구려 창국(創國)의 영웅 동명왕(東明王)의 사적(事迹)을 읊으면서 '천하로 하여금 우리나라가 본래 성인의 도읍임을 알도록 하려함이라'고 그 동기를 밝히고 있기도 하였다. 이는 우리민족의 역사전통에 대한 강력한 주인의식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는 곧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의한 민족의식의 전승에서 빚어진 산물이다. 그것은 단순한 전승에서가 아니라 몽고를 상대로 한 30년 민족의 대항전 속에서 더욱 발전적으로 심화되고, 마침내 뿌리칠 수 없게 된 이민족(異民族)의 압제(壓制)라는 현실의 제약 하에서 신흥(新興)의 조계종(曹溪宗)과 일체(一體)관계에 있던 선승(禪僧) 일연의 손을 빌어 민족의 역사에 관한 일대 서사시를 낳게 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삼국유사 (三國遺事)》는 《삼국사기 (三國史記)》와 함께 현존하는 우리 고대(古代) 사적(史籍)의 쌍벽으로 일컬어져 왔다. 《삼국사기》는 왕명(王命)에 의해 사관(士官)이 저술한 정사(正史)로서, 체재(體裁)가 정연하고 문사(文辭)가 유창하며 화려하다. 이에 비하여 《삼국유사》는 선사(禪師) 한 개인의 손으로 이루어진 이른바 야사(野史)로서, 체재가 짜여지지 못했고 문사(文辭) 또한 박잡(駁雜)하다 하겠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에서 찾아볼 수 없는 많은 값어치를 지니고 있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마찬가지로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史書)이지만, 그 밖에 고조선·기자 및 위만조선(衛滿朝鮮)을 비롯하여 가락(駕洛) 등의 역사가 포함되어 있다.
특히 고조선에 관한 서술은 오늘날 우리들로 하여금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할 수 있고, 단군을 국조(國祖)로 받드는 배달 민족의 긍지를 갖게 해 주었다. 만약 이 기록이 없었던들 우리는 삼국시대 이전의 우리 역사를 중국의 사료(史料)인 〈삼국지(三國志)〉의 〈동이전(東夷傳)〉에 겨우 의지하는 초라함을 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삼국유사》는 당시의 사서 찬술의 규범에는 벗어나는 체재의 부정연(不整然)과 내용의 탄괴(誕怪)·잡다(雜多)함이 오히려 오늘날 이 책을 더욱 귀한 재보(財寶)로 여기지 않을 수 없는 소이(所以)가 되고 있다.
우선 《삼국유사》에는 단군 신화를 비롯한 많은 신화와 전설이 수록되어 있다. 실로 《삼국유사》는 우리의 신화와 원형적 옛 전설의 모습을 알게 하는 유일한 책으로 가위 설화 문학(說話文學)의 보고라 할 만하다. 게다가 이 땅 최고의 정형 시가(定型詩歌)인 향가(鄕歌) 14수가 실려 있어 〈균여전(均與傳)〉에 전하는 11수와 함께 주옥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으니 국문학상으로는 사서 이상으로 귀하게 전해지고 있다.
수록한 향가의 수는 비록 많은 것이 되지는 못하지만 향가를 집대성한 책으로 알려진 〈삼대목(三代目〉이 전하지 않는 지금, 《삼국유사》의 문학적 가치는 실로 절대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밖에도 《삼국사기》에는 빠져있거나 또는 고의로 빼버린 많은 사실들이 수록되어 있다. 불교에 관한 풍부한 자료와 신앙·사상·민속·일화 등 다방면에 걸친 내용은 모두가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물론 저자가 사관이 아닌 승려의 신분으로서 이 같은 책을 저술함에 있어, 더러는 인용서(引用書)와 그 내용이 같지 않은 것도 있고, 잘못 전해져 오는 것을 그대로 수집·수록한 것도 없지 않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이 책 자체가 그 서명(書名)이 말하듯이 일사 유문적(逸事遺聞的)인 것이기 때문에 불가피한 것이라 하겠다.
자료출처 : 대한불교 조계종 인각사 홈페이지 (www.ingaksa.org)
# 삼국유사전문
삼국유사 三國遺事 - Histopia - Histopia 한국사정보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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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읽기 11회] 일연의 삼국유사 1편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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