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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관소/문화사 &시사

노무현 & 부림사건(종합정리) ==>>> '‘내 삶을 바꾸었던 바로 그 사건""

                             한 인간이 변화 한다는 것?






물질적 풍요로운 평범한 변호사길에서 힘들고 험한 인권변호사로 변화
나의 생각에는 한시대 아픔을 안고가야 하는 운명적성격 과 시대정신이다

 

‘노무현이  이야기한 "" 내 삶을  바꾸었던  바로 그 사건""



노무현은 나중에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의 인생이 바뀌었다고 회고하며, 당시 학생들이 “얼마나 고문을 당하고 충격을 받았는지 처음엔 변호사인 나조차 믿으려 하질 않았다. 공포에 질린 눈으로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는 모습을 보자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라고 하였다.


노무현 전환점이된 부림사건을 정리해 보았다






# 노무현 & 부림사건 



돈 잘 버는 변호사와 부림사건


1978년 5월, 판사를 그만두고 부산에서 변호사로 개업하였고, 세무·회계 전문 변호사로 명성을 쌓았다.이후 주로 조세 및 회계 사건 등을 통해 높은 수임료를 받았다. 당시 평범한 동료 변호사들처럼 지역의 경제인과 어울리며 요트를 즐기는 등 여유로운 생활을 했다.



그러나 민청학련 사건 변론으로 이름이 높았던 김광일 변호사가 1981년 부림 사건의 변호에 참여하라고 권유했고, 이를 수락함으로써 본격적인 인권 변호사 활동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1982년에는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의 변론에 참여하였고 1984년 부산 공해문제 연구소 이사를 거쳐 1985년에는 부산 민주시민 협의회 상임위원장을 맡게 되면서 시민운동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그해 자신의 사무실에 노동법률 상담소를 열기도 했다.


 또 1987년에는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부산 본부 상임 집행위원장을 맡아 6월 민주항쟁에 앞장섰다. 그 해 8월 22일의 거제도 대우조선 사건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가 사망하자 이상수 등과 함께 사인 규명 작업을 하다가 9월에 제삼자 개입, 장식(葬式) 방해 혐의로 경찰에 구속되었다.


 이어 1987년 11월에는 변호사 업무정지 처분을 받았다.




안기부 직원을 가르치다


한편 노무현은 자신을 감시하던 안기부 직원에게 광주항쟁 비디오와 노동운동 관련 자료들을 보여주면서 강의하였다. 안기부 직원 이화춘은 이러면 우리가 당신을 잡아가야 된다면서 오히려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노무현은 안기부 직원들에게 민중, 노동운동 관련 비디오, 자료들을 태연히 보여주었다.



안기부에 들어와 8년 동안 미국 자료를 수집하는 내근 업무를 하던 이화춘은 85년 5월 안기부 부산지부로 파견돼 법조를 담당하게 됐다. 전임자는 "'문제 변호사'가 네 명 있는데 이들의 동향을 파악하는 것이 당신의 주요 임무"라고 말했다. 이들 네 명은 노무현, 김광일, 문재인, 이흥록이었다. 



인사차 찾아간 이화춘과 점심을 같이하던 노무현은 4시간 동안 노동.학생운동 사태 등 시국을 논했다. 8년간 미국 자료만 들여다봤던 이화춘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이에 노무현은 "당신같이 무지한 정보 요원은 처음 봤다. 당신 큰일났다"고 걱정했다. 李씨가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라고 묻자 盧변호사는 "교육을 받아야겠다"며 밤에 집으로 오라고 했다.


광주항쟁 테이프를 보여주더군요. 일어서려는데 盧변호사가 소설가 황석영씨가 집필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란 광주항쟁 기록집을 주더라고요.

 
— 이화춘의 회고



노무현이 보여준 자료들을 보고 안기부의 직원들은 당황해했다. 이화춘 등은 "이러면 내가 당신을 잡아가야 한다"며 뿌리치자 노무현은 "나중에 잡아가더라도 일단은 읽어보라"고 했다. 다음날 아침 盧변호사가 전화를 걸어 독후감을 물었다.


 이화춘은 "광주사태의 참혹상에 충격을 받아 밤을 꼬박 새웠다"고 답했다. 이화춘과 안기부 직원들은 노무현과 문재인 변호사가 같이 운영하는 '노동문제연구소' 겸 변호사 사무실을 출입했다. 사무실은 늘 학생.노동자로 붐볐다. 李씨의 '기관원 의식'은 무뎌져 갔고, 그와 노무현은 서로의 애환을 챙기는 관계로 발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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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림사건 



부림 사건


부림 사건(釜林事件)은 부산의 학림 사건이라는 의미에서 부림이라는 명칭이 붙여졌으며 신군부 정권 초기인 1981년 9월 공안 당국이 사회과학 독서모임을 하던 학생과 교사, 회사원 등 22명을 영장 없이 체포해 불법 감금하고 고문해 기소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당시 부산지검 공안 책임자로 있던 검사 최병국이 지휘했다. 당시 김광일문재인 변호사와 함께 변론을 맡았던 노무현은 이 사건을 계기로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됐다



사건 개요



이 사건 관계자들은 “영장없이 체포·구속되어 대공분실에서 짧게는 20일부터 길게는 장장 63일 동안 몽둥이 등에 의한 구타와 ‘물 고문’ ‘통닭구이 고문’ 등 살인적 고문을 통해 공산주의자로 조작됐다.


 독서모임이 반국가단체의 찬양활동으로 조작됐고 술집에서 두 사람이 만난 것이나 친구 개업식에 선물을 들고 찾아간 것도, 망년회를 한 것이 모두 현저히 사회불안을 야기시킬 우려가 있는 집회로 규정되어 처벌됐다”고 주장했다.



당시 이 사건은 국가보안법이 정권의 안보를 위한 도구로 쓰이는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대표적인 사례로 지목되어 노무현김광일 등이 무료 변론에 나서기도 했다. 이 사건은 김영삼 정권이 들어선 이후 ‘전두환 정권 초기 저항세력에 대한 탄압으로 조작된 사건’이란 정치적 면죄부를 받았으나, 법률적으로는 여전히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으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부산지법은 2009년 8월에 피해자들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당시 피해자들의 진술

《부산민주운동사》 에서 밝힌 당시 사건 피해자들의 현재의 진술은 다음과 같다. 

  • 김모씨(33·상업) - 부림사건은 20여명이 관련된 부산지역 최대의 국가보안법 조직사건으로 영장없이 불법구금과 고문 등으로 완벽하게 조작된 사건이다. 사건의 수사책임자가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에서 일하는 것은 부적절 하다고 판단해 총선 연대에 낙천명단에 포함시켜달라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 ㅅ모씨(26·농협근무) - 대공분실에 끌려가 통닭구이, 몽둥이로 맞는 고문을 당했다. 당시 최병국 검사가 대공분실로 찾아와 수사를 지휘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당시 검사가 관련자들에게 3년에서 10년의 중형을 구형한 것으로 보면 사건 조작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 당시 시대 상황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면 최소한 반성과 용서를 구하는 것이 도리가 아닌가.

  • 최모씨(당시 피의자 최모씨 부인) - 당시 남편이 사건을 끝까지 부인하자 최병국 검사는 “사건을 인정한다는 반성문을 쓰면 당신 남편만 빼주겠다”고 회유했지만 뿌리쳤던 경험이 있다. 최 검사가 사건 조작의 책임자이다.

  • 고모씨(26·교사) - 관련자들 중에는 재판을 받기 위해 법원에 가서야 처음 상견례를 한 사람들까지 있을 정도로 서로 거의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경찰은 우리 모두 그들의 각본 속에 끼워 넣어 하나의 사건으로 만들어 냈다. 당시 몇 명이 다방에 앉아 얘기 나눈 것까지 ‘반국가단체 고무·찬양’으로 몰아붙여 징역 10년에서 3년까지 중형을 구형했다.


위키백과





#   부림사건, 한 인간이 변화한다는 것


글쓴이: 김상철


노무현 대통령은 저서 <여보, 나 좀 도와줘>에서 1981년 부림사건의 변론을 맡은 일을 “내 삶에서의 가장 큰 전환점”이라고 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돈 잘 벌던 변호사는 인권변호사, 재야운동가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부림사건 변론을 맡으면서 겪은 충격과 변모과정은 노 대통령도 적지 않게 언급했습니다. 이에 대한 고호석 씨의 구술은 그 과정을 직접 지켜본 인사로서 일련의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1981년 9월 부산에서 발생한 부림사건은 당시 반독재투쟁의 중심이었던 학생들을 용공혐의로 대거 구속함으로써 이들을 대중들과 격리시키기 위해 조작한 대표적인 용공사건이었습니다.



부산지역 민주인사들이 이적 표현물을 학습했다는 이유로 정부전복집단으로 매도되어 총 22명이 구속됐고 혹독한 고문에 시달렸습니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민주주의연구소 엮음, <한국민주화운동사 3>). 고호석 씨는 22명의 구속자 가운데 한명이었습니다.


고호석 씨는 구술 인터뷰에서 어느 날 변호인 접견으로 시작된 일련의 만남을 이야기합니다. 변호사 노무현은 발톱이 썩어 빠져버릴 정도의 모진 고문을 당한 청년들을 목도하며 엄청난 충격을 받고 이들의 공소장에 나오는 책들을 하나하나 다 읽으며 공소사실의 터무니없음을 절감합니다. 구술의 한 대목입니다.

 


노무현 변호사님은 우리와 재판을 시작하고부터는 우리와 한 편이었어요. 거의 공범 수준이 돼가지고 변론을 한 거지요.



그러다보면 우리는 비교적 차분한데 노 변호사님이 검사의 공소사실, 질문 이런 거에 대하여, 또는 판사의 언급에 대하여 ‘어떻게 그게 말이 됩니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이러면서 감정적으로 격앙이 되면서 막 큰 소리를 내기도 하고 그래서 판사한테 제지를 당하기도 하고 그랬거든요. 정말 한 번씩은 막 이렇게 열변을 토하다가 자기감정을 삭이지 못해서 고개를 푸욱 숙이고 잠시 말을 이어가지 못하는 그런 장면들도 있었어요.


 

세속의 변호사는 그렇게 함께 분노하고, 행동했습니다. 나중엔 피해자 가족들이 노 변호사 때문에 판사에게 밉보여 형량을 더 많이 선고받지 않을까 걱정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노 대통령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던 변화의 순간, 고호석 씨의 구술을 통해 직접 접해보시기 바랍니다.




부림사건 재판과 노무현 변호사의 변모과정(1)










부림사건 재판과 노무현 변호사의 변모과정(2)



 




노무현재단








돈 잘 버는 변호사와 부림사건


   








팩트TV] 이작가의 결정적 순간 26회-조세변호사가 맡은 운명적사건, 부림사건 1부










이작가의 결정적 순간 27회-조세변호사가 맡은 운명적사건, 부림사건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