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安重根, 1879년 9월 2일 ~ 1910년 3월 26일)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의병장, 정치사상가이다. 어려서안응칠(安應七)이라는 아명으로 불렸으며, 천주교 세례명은 토마스이다. 본관은 순흥(順興), 고려조의 유학자 안향(安珦)의 26대손이다.
우덕순, 조도선 등과 소수의 결사대를 조직, 만주의 각 역 근처에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등의 하차 시 저격을 준비하였으며, 하얼빈역에 잠입하여 역전에서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는 이토를 사살하고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타이지로[森泰二郞], 만철 이사(滿鐵理事) 다나카 세이타로[田中淸太郞] 등에게 중상을 입히고 현장에서 러시아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체포 후 대한의군 참모중장이자 특파독립대장이라고 밝혔다.
동학 농민 운동 당시 아버지 안태훈이 동학군을 정벌하는 데 함께 참여하였고, 구한 말에는 학교 설립과 교육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을 하였으며 한때 복권 사업과 비슷한 채표회사(彩票會社)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05년 대한제국을 사실상 일본 제국의 속국으로 만든 제2차 한일 협약이 체결된 것에 저항해, 독립 운동에 투신한 그는 사상적 측면으로는 동양평화론자이기도 했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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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 1879년9월 2일(음력 7월 16일)황해도 해주부 광석동에서 부친 안태훈, 모친 조마리아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남.
6세 1884년안씨 일가 해주에서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이주함. 조부 안인수가 설립한 서당에서 한학교육을 받음.
8세 1886년동생 정근 출생.
11세 1889년동생 공근 출생.
13세 1891년여동생 성녀 출생.
14세 1892년조부 안인수 별세.
16세 1894년황해도 재령군 거주 향반 김홍섭의 딸 아려(17세)와 결혼함. 황해도 지역 동학군에 대항해 부친 안태훈이 조직한 신천의려군 선봉장으로 출전하여 용맹을 떨침. 부친의 초청으로 청계동에 온 백범 김구와 상면함.
18세 1896년부친 안태훈, 동학당으로부터 빼앗은 군량미 문제로 천주교 종현(명동)성당으로 피신하였다가 청계동으로 귀향함.
19세 1897년안중근을 비롯한 안태훈 일가가 홍석구 신부(J.Wilhelm, 빌렘)로부터 ‘도마(Thomas)’로 세례를 받음.
가계도
안중근이 민권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일제에 의해 을사조약(乙巳條約)이 강제 늑결(勒結)되어 국권이 박탈 된 후부터다.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 빌렘 신부를 도와 선교활동을 전개하면서 민권의식이 싹트게 되고, 활동 영역도 교회와 자신의 향리에 한정되지 않고 황해도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당시의 시대상황에 비추어보면 민권운동은 그 자체가 선교활동이었으며 교세 신장에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동포를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전개하면서 안중근은 민족의 수난과 고통을 외면한 채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는 교회의 선교정책에도 비판의식을 갖게 되었다. 인간의 영혼과 육신, 현세와 내세, 그리고 개인과 사회를 총체적으로 구원하고자 하는 신앙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안중근은 천주교 사상을 통해 근대 민권의식을 성숙시켜 나갔으며 천주교 교리를 통해 모든 인간이 가장 존엄하고 평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시 한국 사회는 중앙정부의 부패와 지방 관리들의 가렴주구(苛斂誅求)로 인해 민중의 생존권이 크게 위협받고 있었다. 안중근은 어떻게 하면 ‘당당한 문명국을 이룩하여 민권의 자유를 얻을 것인가’를 숙고하였으며 당시 수구파 정권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 태도를 보였다.
열성적인 교회활동과 견고한 신앙심으로 안중근은 자신의 향리에서 민중과 천주교 신자들의 총대(總代)를 맡아 활동 하였으며 그의 행동 목표는 문명독립국 건설과 민권자유 획득에 있었다.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 성장하였던 안중근은 개화파의 실각과 함께 그의 집안에는 천주교가 개화문명에 대한 또다른 매개체로 채택되었다. 그의 천주교 수용은 개화문명을 위함이었으며 동포들과 힘께 천주교를 통하여 한국을 문명국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유교적 소양과 개화지식을 토대로 천주교 신앙을 수용하였고, 천주교회와 그 신앙을 기반으로 민권운동을 전개하였다.
1894년 황해도 동학군의 소요 시 이들을 토벌하고 노획한 군량미 문제로 탁부대신 어윤중, 전 선혜청 당상민영준으로부터 상환 압력을 받아 곤궁에 빠진 부친 안태훈 진사는 명동성당으로 피신, 프랑스 신부들의 도움을 받아 몇 개월 동안 머물렀다. 이 기간 부친은 성서를 탐독하고 신부들의 강론을 들으면서 천주교 신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신앙에 정진하였다.
1896년 군량미 문제가 해결되자 안태훈은 교리사 이종래(바오로)를 대동하고 「천주교교리문답」과「12단」등 120여 권의 교리서를 가지고 청계동을 비롯한 7개 마을에서 신앙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이에 안진사는 매화동 본당 빌렘 신부에게 공소 설치를 청원하고 빌렘 신부로부터 본인을 비롯한 가족과 청계동 주민 33인이 세례를 받았다. 부친 안태훈은 세례명 베드로를 받고, 모친은 마리아, 안중근은 도마, 부인은 아네스라느 세례명을 받았다(1897년).
이때 안중근의 나이는 19세로 천주교신자로서 가장 신앙심이 두텁고 모든 일의 중심을 천주교에 두고 열심히 교리를 배우고 성당의 복자로서 신부를 도와주면서 전도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안중근의 자필 「안응칠 역사」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천주교에 대한 내용이었다. 하느님은 전지·전능·전선·지공지의해서 세상을 심판하고 영혼이 상벌을 받는바, 상은 천당의 영원한 복이고 벌은 지옥의 영원한 고통이라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사람의 목숨은 오래 살아야 백 년을 넘기지 못하는 것이 운명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귀하고 천한 사람을 가릴 것 없이 사람이란 누구나 알몸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알몸으로 저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간다’는 바로 그 말입니다.(···) 만일 사람들이 하느님의 천당과 지옥을 보지 못했다 하여 천당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하면, 이는 마치 그 사랑하는 아들(유복자)이 그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 하여 아버지가 존재 한다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고, 소경이 하늘을 보지 못한다고 해서 하늘에 해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 지금 세계 문명국의 박학다식한 지성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세상에는 옳지 않게 전하는 무리 또한 대단히 많은데 이는 예수께서 미리 제자들에게 예언하신 것으로 ‘후세에 반드시 위선자들이 있어 내 이름으로 민중을 현혹시킬 것이니 너희들은 삼가 그러한 잘못에 빠져들지 말라,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문은 그리스도교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도마 안중근은 짧은 일생을 살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품 안에서 대한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하여 살신성인한 참 가톨릭 신앙이었다.
일본은 1907년 7월<헤이그 밀사사건>을 빌미로 한국의 초대통감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정미조약(丁未七條約)을 강요하며 군대를 해산하는가 하면 산림과 광산 그리고 철도를 빼앗는등 한국의 식민지화를 강력하게 추진하면서 또 하나의 단계적 조치로 소위 ‘차관정비’ 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또한 일제는 항일계몽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1907년 7월 27일 신문법(新聞法)을 공포하여 언론, 출판의 검열을 강화하고 집회결사의 자유를 제한하였다.
안중근은 고종황제가 퇴위되고 군대가 강제해산 당하자 동지들과 함께 그에 대한 방책을 협의하였다. 안중근은 이 때 항일계몽운동의 적극적인 방략으로 의병을 일으켜서 독립전쟁을 준비하자는 ‘독립전쟁전략’ 을 주장했으며 그 전략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골자로 되어 있다.
1. 일본제국주의는 그 팽창과정에서 5년 안으로 반드시 러시아, 청국, 미국의 3개국 중 어느나라와 든 전쟁을 벌이게 될 것이다.
2. 이러한 전쟁은 일제에게도 힘겨운 전쟁이 될 것이며 한국으로서는 큰 기회가 될 수 있다.
3. 이 때에 만일 한국인이 미리 준비가 없다면 일본이 패전하여도 한국은 또다시 다른 외국 도적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4. 한국민족은 오늘로부터 의병을 계속 일으켜 큰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힘을 길러서 스스로 국권을 회복하고 자주독립을 공고하게 해야 할 것이다.
5. 만약 큰 기회를 포착하여 독립전쟁을 전개했다가 혹 패전하더라도 최악의 경우에는 세계각국의 공론을 모아 독립을 보장받을 희망이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요지의 안중근의 독립전쟁전략은 1907년 당시 상황으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왜냐하면 당시 국내의 의병운동은 현대식 병기의 절대부족과 의병들의 군사훈련 부족으로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안중근은 국내에서의 항일 계몽운동을 중단하고 국내에서의 전략에 대한 한계점을 느끼고 의병부태를 창설하기 위해 러시아 땅 블라디보스톡을 향하여 망명의 길을 떠나게 되는데 이 때 안 의사의 나이 29세였다.
안중근은 북간도를 거쳐 한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러시아령 연해주에 도착, 의병조직에 참여하여 이범윤, 김두성 등과 의병을 양성하고 다음해 30세 되던 1908년 봄 김두성을 충독, 이범윤을 대장으로 한 대한국 의군창설에 성공한 안중근은 참모중장으로 선임되어, 독립특파대장의 이름을 띠고, 치열한 항일투쟁을 결행하기 시작하였다.
「(왼쪽부터)안의사가 자주찾은 한인 집단거주지역 / 안의사가 국내진공작전시 넘나들던 핫산 부근의 두만강변 / 두만강변의 요충지인 회령(會寧)」
그 당시 나는 이런 논리를 밝혔다.
우리의 병력은 2~3백명밖에 안된다. 적은 강하고 우리는 약하니 적을 가벼히 여겨서는 안된다. 더구나 병법에 이르기를 ‘아무리 백번 급한 일이 있다 하여도 반드시 만전의 방책을 세운 다음 큰 일을 꾀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들이 한번의 의거로 성공을 거둘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그러나 한번에 이루지 못하면 두번, 두번에 이루지 못하면 세번, 그렇게 네번, 열번에 이르고 일백번을 꺾어도 굴함이 없이 금년에 못 이루면 내년, 내년에 못 이루면 후년, 그렇게 십년 백년이 가고, 또 만일 우리 대에서 목적을 이루지 못하면 아들 대,손자 대에 가서라도 반드시 대한국의 독립권을 회복하고야 말리라는 각오가 있어야 한다.
「안중근자서전중에서」
그 해 7월에 안중근은 의병 200여명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함경도 경흥고을에서 일본 군경과 세차례의 교전끝에 50여명을 사살하고 그대로 일군의 주요기지인 회령으로 진격하여 일본 수비군을 격퇴하는 등 13일동안 30여차례 교전을 했는데, 안중근은 이때 잡은 포로들을 국제공법과 인도주의를 들어 석방하였으나, 의병들 중 반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결국 이 작전은 정예 일본군들의 “토벌작전”에 밀려 고군분투했으나 탄환이 떨어지고 부하들도 흩어져 중과부적으로 참패하고,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장마속 산길을 헤맨끝에 한달 반 만에야 연해주 본영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이렇듯 의병투쟁은 일본군의 반격을 받아 어려움을 겪을 때가 많았다. 그럴 때 동요하는 부하들에게 안중근은 다음과 같은 시로 격려했다.
그 다음해 정월(기유년 1909년)엔치야 방면으로 돌아와 동지 12명과 상의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이제까지 일을 이룩한 것이 없으니 남의 비웃음을 면할 길이 없소. 생각건대 특별한 단체가 없다면 무슨 일이든 목적을 이루기가 어려울 것이오. 오늘 우리들은 손가락을 끊어 맹세를 같이하여 표적을 남긴 다음에 마음과 몸을 하나로 뭉쳐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 목적을 달성하도록 하는 것이 어떠하오”라고 하였더니 모두가 좋다고 따랐다.
이에 열두 사람은 제가끔 왼손 무명지를 끊고 그 피로써 태극기의 앞면에 네 글자를 크게 쓰기를 ‘대한독립’이라 하고는, 다 쓴 다음에 ‘대한독립만세’를 일제히 세 번 불러 하늘과 땅에 맹세하고 흩어졌다.
- 안중근, 「안응칠 역사」에서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의 취지문(趣旨文)
오늘날 우리 한국 인종(人種)이 국가가 위급하고 생민(生民)이 멸망할 지경에 당하여 어찌하였으면 좋은지 방법을 모르고 혹 왈 좋은 때가 되면 일이 없다 하고, 혹 왈 외국이 도와주면 된다 하나 이 말은 다 쓸데없는 말이니, 이러한 사람은 다만 놀기를 좋아하고 남에게 의뢰하기만 즐겨하는 까닭이라. 우리 2천만 동포가 일심단체(一心團體)하여 생사를 불고한 연후에야 국권을 회복하고 생명을 보전할지라. 그러나 우리 동포는 다만 말로만 애국이니 일심단체이니 하고 실지로 뜨거운 마음과 간절한 단체가 없으므로 특별히 한 회를 조직하니, 그 이름은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라. 우리 일반 회우(會友)가 손가락 하나씩 끊음은 비록 조그마한 일이나 첫째는 국가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빙거(憑據)요, 둘째는 일심단체하는 표(標)라. 오늘날 우리가 더운 피로써 청천백일지하(靑天白日之下)에 맹세하오니 자금위시(自今爲始)하여 아무쪼록 이전 허물을 고치고 일심단체하여 마음을 변치 말고 목적에 도달한 후에 태평동락을 만만세로 누리옵시다.
러시아 일반 관리들이 호위하고 오는 중에 맨 앞에 누런 얼굴에 흰 수염을 가진 한 조그마한 늙은이가 이같이 염치없이 감히 천지 사이를 횡행하고 다니는가.
‘저것이 필시 이등 노적일 것이다’ 하고 곧 단총을 뽑아 들고 그 오른쪽을 향해서 3발을 쏜 다음, 생각해 보니 십분 의아심이 머릿속에서 일어났다. 내가 본시 이토의 모습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만일 한 번 잘못 쏜다면 큰일이 낭패가 되는 것이라, 그래서 다시 뒤쪽을 향해서, 일본인 단체 가운데서 가장 의젓해 보이는, 앞서가는 자를 새로 목표하고 3발을 이어 쏜 뒤에 또다시 생각하니, 만일 무죄한 사람을 잘못 쏘았다 하면 일은 반드시 불미할 것이라 잠깐 정지하고 생각하는 사이에, 러시아 헌병이 와서 붙잡히니 그때가 바로 1909년
음력 9월 13일 상오 9시 반쯤이었다. 그때 나는 곧 하늘을 향하여 큰 소리로‘ 대한만세’를 세 번 부른 다음, 정거장 헌병 분파소로 붙잡혀 들어갔다.
- 안중근,「안응칠 역사」에서
「의거의 순간」
1909년 10월 26일 9시 30분경,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 응징하는 안중근 의거 장면도(박영선 화백)
오른쪽,『 도쿄일일신문』에 게재된 의거 직후 안중근 의사가 체포되는 장면을 그린 삽화
의거의 이유
내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은 한국 독립전쟁의 한 부분이요, 또 내가 일본 법정에 서게 된 것은 전쟁에 패배하여 포로가 된 때문이다. 나는 개인 자격으로서 이 일을 행한 것이 아니요, 대한국 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서 행한 것이니 만국 공법에 의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이토 히로부미 죄상 15개조
1.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요
2. 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요
3.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요
4.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요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요
6.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요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요
8. 군대를 해산시킨 죄요
9. 교육을 방해한 죄요
10. 한국인들의 외국유학을 금지시킨 죄요
11.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요.
12.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요
13.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한국이 태평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요
14. 동양평화를 깨뜨린 죄요
15. 일본 천황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라
「안응칠 역사」 중에 기술된 15개조의 「이토 히로부미 죄상
부슬비가 내리는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안중근의 사형은 뤼순 감옥에서 행해졌다. 안은 전날 밤 고향에서 보내온 옷을 입고 예정된 시간보다 일찍 간수 4명의 경호를 받으며 형장으로 불려나와 교수대 옆에 있는 대기실로 갔다. 당일 입은 옷은 상하의 모두 한국에서 만든 명주옷이었다. 저고리는 흰색이고 바지는 검은색이어서 흑백의 분명한 대조가 아무래도 수분 후면 밝은 데서 어두운 곳으로 갈 수밖에 없는 수인의 운명과 같아 보는 이로 하여금 일종의 감개를 느끼게 했다.
집행을 언도하고 드디어 미조부치 검찰관, 구리하라 전옥형무소장, 소노키 통역, 기시다 서기가 교수대 앞에 있는 검시실에 착석하자 안이 대기실에서 끌려 나왔다. 구리하라 전옥은 안에게 “금년 2월 24일 뤼순 지방 법원의 언도와 확정명령에 따라 사형을 집행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소노키의 통역이 끝나자 안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으나 구리하라 전옥은 다시 한 번 안에게 “뭔가 남길 말이 없느냐”라고 물었다. 안은 “아무것도 남길 유언은 없으나 다만 내가 한 이토 히로부미 사살은 동양평화를 위해 한 것이므로 일한 양국인이 서로 일치협력해서 동양평화의 유지를 도모할 것을 바란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간수가 반 장짜리 종이 두 장을 접어 안의 눈을 가리고 그 위에 흰 천을 씌웠다. 안의 최후가 일각일각 다가왔다.
재판 당초부터 언도 이후까지 안을 정중하고 친절하게 대했던 관헌은 안이 최후의 순간을 맞을 때는 마음껏 최후의 기도를 하도록 허락했다. 안은 전옥의 말에 따라 수분간 묵도를 했고 기도가 끝나자 수명의 간수에 둘러싸여 교수대로 향했다. 교수대의 구조는 마치 2층집 같아서 작은 계단 7개를 올라가면 화로방 같은 것이 있는데 안은 조용히 걸어서 한 계단 한 계단 죽음의 길로 다가갔다. 그때의 감정이나 얼굴색은 흰옷과 어우러져 더욱 창백했다. 드디어 안이 교수대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자 옥리 한 명이 그의 목에 밧줄을 감고 교수대 한쪽을 밟으니 바닥이 ‘꽈당’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10시 15분 안은 완전히 절명했다. 거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11분이었다.
최후의 유언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르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안중근 의사 최후의 유언,뤼순 옥중에서, 1910년 3월 9,10일」
동포에게 고함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삼 년 동안을 해외에서 퐁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도달치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이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유한이 없겠노라.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英雄’ 으로 친송받는 안중근 의사가 옥중에서 집필한 미완성 유고(遺稿)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은 안 의사가 국권회복운동을 하면서 세운 지표(指標)로 독립운동의 기초적 배경이 된 사상체계다.
‘동양평화론’은 서문(序文) 전감(前鑑) 현상(現狀) 복선(伏線) 문답(問答)으로 나눠져 있으며 그 가운데 안 의사는 서문과 전감 일부만을 집필했을 뿐 나머지는 일제가 서둘러 사형을 집행함으로써 미처 완성 하지 못하고 순국하셨다.
안 의사는 서문에서 ‘合成散敗 萬古定理’ 즉 합하면 성공하고 흩어지면 패한다는 것은 만고(萬古)의 정한 이치임을 설명하고 약육강식과 적자생존 논리 속에서 서구열강이 약소국을 제물화 하는 시대적 상황과 같은 인종끼리 전쟁이란 폭력을 통해 패권을 장악 하려는 일본의 침략정책을 통렬히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전감은 다섯 가지 항목으로 나누어 첫째, 청일전쟁의 성격을 규명하고 둘째는 제정 러시아의 극동정책과 일본의 과실(過失)문제를 다루고 셋째는 러·일전쟁의 원인과 당시 서구열강의 태도와 한국의 입장을 설명하고 넷째는 러?일 강화조약을 미국 영토인 포츠머스에서 체결한 이유를 지적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제의 대륙침략에 대한 경종의 순 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상의 서문과 전감에 대한 요약설명만으로는 ‘동양평화론’전체내용을 이해 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러나 안 의사가 1910년 2월 17일 관동도독부 히라이시(平石) 고등법원장과의 면담기록인 ‘聽取書’ 내용 중에는 안 의사가 쓰고자했던’동양평화론’부분에 대한 기록이 일부 남아 있다.
1.동양의 중심지인 뤼순(旅順)을 영세중립지대로 정하고 상설위원회를 만들어 분쟁을 미연에 방지하고
2.한 중 일 3개국이 일정한 재정을 출자하여 공동은행을 설립하고 공동화폐를 발행하여 어려운 나라를 서로 돕고
3.동북아 공동 안보체제 구축과 국제 평화군을 창설할 것과
4.로마 교황청도 이곳에 대표를 파견하여 국제적 승인과 영향력을 갖게 하자는 것 등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00전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행복을 추구하고자 했던 안 의사의 ‘동양평화사상’은 유럽지역의 EU와 환태평양국가의 APEC, 그리고 오늘날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동아시아 공동체론에도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아직까지도 주변 강대국들의 군비증강과 북핵 문제로 안보불안이 조성되고 우리 민족의 숙원인 남북통일문제 등이 해결되지 않은 가운데 당시 안 의사의 평화사상은 후세를 삼고 있는 우리 모두의 값진 교훈이 되고 있다
애천/애족/애인사상
안중근은 교육가이며 애국계몽은동가로 민족정기의 화산이며 천주교를 전도하는 종교사상가로 그리고 일제의 군경과 직접 맞서 싸운 의병지휘관으로 항일운동에 헌신하였으며 나아가 우리나라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처단한 위인으로서 우리나라 근현대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업적을 이룩하였다.
안중근이 이러한 실천적이고 과감한 의거의 결행은 ‘동양평화론’이라는 그의 독특한 사상과 그의 애천(愛天), 애족(愛族), 애인(愛人) 의 3애정신 이 바탕에 있었기 때문이다. 3애정신은 유교사상, 개화사상, 기독교사상으로 복합된 사상체계다.
특히 민족 항일운동에 몸바친 애국애족의 정신은 그가 죽음을 초개와 같이 생각하고 여러 번 생사의 갈림길에서 죽음의 고비를 넘긴 과정에서 싹텄던 것이다.
첫번째소년시절 서당친구들과 봄꽃놀이를 갔다가 천애절벽에서 꽃을 꺾으려다 실족, 떨어졌으나 나뭇가지를 붙들고 살아났으며
두번째친구 6~7인과 노루사냥을 갔다가 구식 6연발총이 발사가 안 되어 조사해보니 총구멍에 탄환이 박혀 쇠꼬챙이로 이를 쑤셔 총알을 빼내는 순간 꽝 하고 터지면서 쇠꼬챙이가 오른손을 뚫고 하늘로 솟았는데 이 때의 놀라움은 꿈에서도 진땀을 흘렸다.
세번째만인계장으로 채표회사 출표기계의 고장이 발단이 되어 군중들이 몽둥이와 돌을 던지면 달려들어 목숨이 위태로울 때 허봉(許鳳)이라는 의인(義人)에 의하여 탈출할 때이고
네번째의병전쟁 중 참패하여 초근목피로 20일동안 연명해 가면서 연해주로 귀환할 때와
다섯번째1908년 연해주에서 계몽활동 중 어느 산골짜기에서 6~7인의 일진회 회원을 만나 그들에 의하여 구타당하고 탈주한 경우 다.
이러한 생사의 고비를 넘기면서 그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청년으로서의 건전한 양식을 갖게 되었다. 이와 함께 안중근이 자라오면서 그가 갖게 된 애천(愛天), 애족(愛族), 애인(愛人) 정신은 동양평화사상에 귀착되어 자신의 삶을 일체화 시킨 그의 독특한 동양평화론을 제창하게 되었다고 본다.
안중근이 1907년 노령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청년회에 가입하여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한국독립을 굳건히 하자는 내용의 연설을 하면서 지방을 두루 돌아다녔는데 당시 러시아의 동포들은 안중근의 연설에 감동하여 이를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다음 해인 1908년 3월 21일 해조신문에 ‘인심을 결합하여 국권을 회복하자’는 내용의 글을 기고했다.
인심결합론
대저 사람이 만물보다 귀하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삼강오륜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세상에 처하되 첫째는 몸을 닦고 둘째는 집을 정돈하고 셋째는 나라를 보호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몸과 마음을 서로 합하여 생명을 보호하고 집은 부모와 처자에 의해서 유지되고 나라는 국민상하의 단결에 의해서 보존되는 것이어늘 슬프다. 우리나라는 오늘날 이 같이 참담한 경지에 빠졌으니 그 까닭은 다른 것이 아니라 서로 화합하지 못한 것이 제일 큰 원인인 것이다.
이 불화하는 병의 원인은 교만 병이다. 하 많은 해독이 교만으로부터 생겨나나니 소위 교만한 무리들은 저보다 나은 자를 시기하고 저보다 약한 자를업신여기며 동등한 자는 서로 다투어 아랫사람이 안 되려하니 어찌 서로 결합함을 얻을 수가 있을 것인가.
그러나 교만을 바로잡는 것은 겸손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이 만일 각각 겸손함을 주장삼아 자기를 낮추고 남을 공경하여 남이 자기를 꾸짖는 것을 달게 받으며 자기가 남을 꾸짖는 것은 너그러이 하고 자기 공을 남에게 양보한다면 사람이 짐승이 아니어늘 어찌 서로 불화할 리가 있겠느냐
옛날에 어느 나라 임금이 죽을 적에 자식들을 불러 경계해 말하되 “너희들이 만일 내가 죽은 뒤에 형제끼리 마음을 합하지 못하면 쉽게 남의 꺾임이 되려니와 마음을 합하기만 하면 어찌 남들이 꺾을 수 있으리오” 하였었다.
이제 고국 산천을 바라보니 동포돌이 원통하게 죽고 죄 없는 조상의 백골마저 깨뜨리는 소리를 참아듣지 못하겠다.
깨어라 연해주(노령)에 계신 동포들아! 본국의 이 소식을 듣지 못 했는가 당신들의 일가친척은 모두 대한 땅에 있고 당신들의 조상의 분묘도 모국산하에 있지 않단 말인가 뿌리가 마르면 가지 잎새도 마르는 것이니 조상의 같은 피의 족속이 이미 굴욕을 당했으니 내 몸은 장차 어떻게 하리오 우리 동포들아! 각각 “불화” 두자를 깨뜨리고 “결합” 두 자를 굳게 지켜 자녀들을 교육하며 청년자제들은 죽기를 결심하고 속히 우리 국권을 회복한 뒤에 태극기를 높이 들고 처자권속과 독립관에 서로모여 일심단체로 육대주가 진동하도록 대한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기약하자
안중근의사가 1908년 3월 8일 노령 블라디보스톡 해조신문(海朝新聞)에 인심을 결합하여 국권을 회복하자는 제목으로 기고했던 글을 이은상 씨가 번역
옥중 한시
안중근은 이미 의거 전에 단지동맹과 장부처세가를 지어 자신의 의거 결행 의지를 확고리 결심 하고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 죄악 15개조가 일본인에 대한 경고였다면 ‘장부처세가’ 는 우리들 후손에게 남긴 안중근의 피에 맺힌 격동기였다.
안중근 의사와 우덕순, 유동하의 의거 기념사진
안중근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명시한 것으로 영웅은 때를 만나야 나는 법이로되 때가 와도 영웅이 없으면 허사라는 것이다. 망국 직전의 위기를 맞았음에도 구국의 영웅이 나지 않는다면 나라는 망하는 것이 아니냐는 뜻이다.
또한 의거의 표적인 이토 히로부미가 꼭 죽어야 할 당위성을 명시했다. 「 분개히 한번 감이여 반드시 목적을 이루리로다」역사를 오도하는 자 이토를 안중근은 쥐 같은 도적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이 의거를 계기로 우리 민족이 용기를 잃지말고 하루 속히 독립을 이루어야 한다고 격려하고 있다.
동포여 동포여 속히 독립을 이루어야 한다고 격려하고 있다 「 동포여 동포여 속히 대업을 이룰지어다 」이 구절은 의거의 최종 목표가 대한독립이라는 것을 밝힌 것인데 가만히 앉아 있어서는 이 대업을 이루지 못할 것이니 모두가 궐기 하라는 것이다.
1. 백인당중유태화보물
제569-1호
百忍堂中有泰和
백 번 참는 집안에 태평과 화목이 있다.
중국 당(청) 고종이 운주 장공예(張公藝)의 집 당호(堂號)로, 9대가 한집에 화목하게 산 것을 칭찬하며 지어 준 글이다.
2. 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
보물 제569-2호
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
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친다.
3. 연년세세화상사 세세년년인부동
보물 제569-3호
年年歲歲花相似 歲歲年年人不同
해마다 계절 따라 같은 꽃이 피건만 해마다 만나는 사람들은 같지 않네.
4. 치악의악식자 부족여의
보물 제569-4호
恥惡衣惡食者 不足與議
궂은 옷, 궂은 밥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더불어 의논 할 수 없다.
『논어』 이인(里仁) 편에서 인용
5. 동양대세사묘현 유지남아기안면 화국미성유 강개 정략불개진가련
보물 제569-5호
東洋大勢思杳玄 有志男兒 豈安眠和局未成猶慷慨政 略不改眞可憐
동양대세 생각하매 아득하고 어둡거니 뜻 있는 사나이 편한 잠을 어이 자리, 평화시국 못 이룸이 이리도 슬픈지고 정략(침략전쟁)을 고치지 않으니 참 가엾도다.
6. 견리사의 견위수명
보물 제569-6호
見利思義 見危授命
이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바쳐라.
『논어』 헌문(憲問) 편에서 인용
7. 용공난용 연포기재 보물 제569-7호
庸工難用 連抱奇材
서투른 목수는 아름드리 큰 재목을 쓰기 어렵다.
『통감(通鑑)』에 자사(子思)가 위왕(魏王)에게 말한 내용에서 인용
8. 인무원려 난성대업
보물 제569-8호
人無遠慮 難成大業
사람이 멀리 생각지 못하면 큰일을 이루기 어렵다.
『논어』 헌문(憲問) 편에서 인용
9. 오로봉위필 삼상작연지 청천일장지 사아복 중시
보물 제569-9호
五老峯爲筆 三湘作硯池 靑天一丈紙 寫我腹中詩
오로봉으로 붓을 삼고 삼상의 물로 먹을 갈아 푸른하늘 한 장 종이 삼아 뱃속에 담긴 시를 쓰련다.
10. 세한연후 지송백지부조 보물 제
569-10호
歲寒然後 知松栢之不彫
눈보라 친 연후에야 잣나무가 이울지 않음을 안다.
『논어』 자한(子罕) 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에서 인용
11. 사군천리 망안욕천 이표촌성 행물부정
보물 제569-11호
思君千里 望眼欲穿 以表寸誠 幸勿負情
임 생각 천리 길에 바라보는 눈이 뚫어질 듯하오이다. 이로써 작은 정성을 바치오니 행여 이 정을 저버리지 마소서.
12. 장부수사심여철 의사림위기사운
보물 제569-12호
丈夫雖死心如鐵 義士臨危氣似雲
장부가 비록 죽을지라도 마음은 쇠와 같고 의사는 위태로움에 이를지라도 그 기풍은 구름 같도다.
13. 박학어문 약지이례
보물 제569-13호
博學於文 約之以禮
널리 글을 배우고 예법으로 몸단속을 한다.
『논어』 옹야(雍也) 편에서 공자가 한 말이다.
14. 제일강산
보물 제569-14호
38.6㎝×96.6㎝, 원 김양선 목사 소장으로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 기증,
보물 지정일: 1972. 8. 16.
15. 청초당
보물 제569-15호
37.6㎝×67㎝, 민병기 소장, 보물 지정일: 1972. 8. 16.
16. 고막고어자시
보물 제569-16호
孤莫孤於自恃 스스로 잘난 척하는 것보다 더 외로운 것은 없다.
39.7㎝×74.9㎝, 한중호 소장, 보물 지정일: 1972. 8. 16.
17. 인지당
보물 제569-17호
仁智堂 어질고 지혜로워야 한다는 뜻의 당호.
37.6㎝×67㎝,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보물 지정일: 1972. 8. 16.
18. 인내
보물 제569-18호
26.8㎝×72.1㎝, 김성섭 소장, 보물 지정일: 1972. 8. 16.
19. 극락
보물 제569-19호
33.2㎝×68.2㎝, 원 강신종 소유로 안중근의사기념관에 기증, 보물 지정일: 1972. 8. 16.
20. 운재
보물 제569-20호
32.8㎝×67.8㎝, 안중근의사기념관 소장, 보물 지정일: 1972. 8. 16.
21. 욕보동양 선개정략 시과실기 추회하급
보물 제569-21호
欲保東洋 先改政略 時過失機追悔何及
동양을 보호하려면 먼저 정략을 고쳐야 한다. 때를 놓쳐 실기하면 후회한들 무엇하리요.
22. 국가안위 노심초사
보물 제569-22호
國家安危 勞心焦思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애태운다.
유묵 오른쪽에 증(贈) 안강(安岡) 검찰관이라 씌어져 있다. 이는 친절하게 대해 준 당시 뤼순법원 검찰관 야스오카에게 증정한 것이다. 야스오카 사후 장녀 우에노(上野)가 소장하다가 1976년 도쿄 국제한국연구원을 거쳐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에 기증했다.
23. 위국헌신 군인본분
보물 제569-23호
爲國獻身 軍人本分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다.
안중근 의사를 경호했던 일본군 헌병 지바 도시치(天葉十七)에게 써 준 유묵이다. 제대 후 지바는 안 의사의 인품과 사상에 감복하여 이 유묵을 일본에 가지고 가 사진과 함께 정성으로 모셨다. 그의 사후 미망인과 양녀 미우라(三浦)가 봉안하다가 구리고마의 다이린지(大林寺)를 거쳐 1980년 도쿄 국제한국연구원을 통하여 안중근의사기념관에 기증되었다.
24. 천여불수 반수기앙이 보물 제569-24호
天與不受 反受其殃耳
만일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벌을 받게 된다.
『춘추』 의전(春秋義戰)의 ‘天與不取 反受其咎’와 같은 뜻이다.
25. 언충신행독경 만방가행
보물 제569-25호
言忠信行篤敬 蠻邦可行
말에 성실과 신의가 있고, 행실이 돈독하고 경건하면 비록 야만의 나라에서도 이를 따르리라.
26. 임적선진 위장의무
보물 제569-26호
臨敵先進 爲將義務
적을 맞아 먼저 전진하는것이 장수의 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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