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집안
증조부 김진후
1821년 8월 21일 충청도 면천군 범서면 솔뫼마을(송산리, 현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에 위치한 작은 마을)에서 김제준(金濟俊, 1796년 ~ 1839년, 세례명 이냐시오,기해박해가 일어난 1839년 9월 26일 서소문밖 형장에서 참수로 순교.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와 고 우르술라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고조부 김진후(金震厚, 1738년~1814년, 세례명 비오) 이후 집안 대대로 천주교를 믿었다. 김진후는 본래 하급관리였다가 며느리의 모범적인 행실을 보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1791년(신해박해)에 체포되어 1801년(신유박해) 때 배교하여 유배되었다가 1805년 해미읍성으로 압송되어 사형처결을 받았다. 배교한 잘못을 뉘우친 김진후는 해미읍성에서는 형리들을 감화시켰다고 전해질 정도로 신앙의 절개를 지켰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형은 집행되지 않았으며, 충청도 해미읍성에서 10년 동안 옥살이를 하다가 1814년에 옥에서 죽었다.
김종한
김대건의 작은 아버지이자 김진후의 세째 아들인 김한현도 1816년 대구감영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는데, 감옥에서 형님에게 보낼 글을 쓸 기회를 얻자 "사람이 천주님을 위해 순교하는 것이 영광입니다."라고 말하였다고 전해진다. 동생의 뒤를 이어 김제준(이냐시오)도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하였다.
미리내 마을
이렇듯 극심한 박해를 피해 식구들은 뿔뿔이 흩어져야 했고, 김대건은 7살 때까지 고향인 충청도 면천에서 살다가 가족들과 함께 경기도 용인의 산골인 미리내 마을로 피신하였다. 당시 용인 미리내 마을에는 박해를 피해 온 천주교회 신자들이 옹기 판매로 생계를 유지하며 복음을 전하는 천주교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는데, 현재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은하수 마을을 성지로 삼고 있다.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 성인)의 영향으로 천주교 신앙을 갖게 된 김대건은1836년 청소년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기 위해 미리내 마을을 방문한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모방(Maubant) 신부의 배려로 한양에서 라틴어 등의 기초적인 신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모방 신부는 김대건의 집안 내력을 듣고는, 김대건을 천주교 신부로 키울 생각을 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모방 신부가 아니라 정하상이 천주교 사제가 될 것을 권했다는 주장도 있다.가톨릭 다이제스트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정하상은 김제준에게 김대건이 훌륭한 사람으로 자라도록 할 것이라고 설득했다.
출신
김대건의 신분에 대해 평민이라는 주장이 있다.김수태(안드레아) 충남대 국사학과 교수는 2012년 '김대건 가문의 신분에 대한 재검토'라는 주제 논문에서 김대건의 신분은 평민이라고 주장했다. 제3대 천주교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는 1846년 11월 3일자 서한에서 "김 안드레아는 조선의 남쪽에서 다스리던 한 옛 왕가(가야)의 후예라고 한다.
… 현 왕조는 400년간 존속돼 오는데 안드레아의 가족 등 여럿은 '종의 신분같이 낮은 계급'에 속해있고, 그들은 왕족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다"고 기술한다. 제5대 조선대목구장 다블뤼 주교도 「순교자 비망기」에서 '서민(평민) 집안'이라고 명시한다는 것이 그 근거이다
신학생 시절
한양에서 라틴말과 성직자로서의 마음가짐을 배우는 기초 신학공부를 마친 후에 김대건은 평신도 신학자인 정하상(바오로)의 도움으로 1836년 12월 최양업(토마스), 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유학 중에 병으로 1838년 11월 별세) 등과 함께 조선을 떠났으며, 만주와 요동을 거쳐서 1837년 6월 7일 목적지인 마카오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마카오 주재 파리 외방전교회의 선교사들은 조선에서 온 신학생들에게 직접 신학, 철학, 지리, 역사, 라틴어, 프랑스어 등을 가르쳤다. 조선 신학생들의 스승이었던 르그레즈와 신부는 "조선 소년들은 훌륭한 사제에게 바람직스러운 것, 신심, 겸손, 면학심, 스승에 대한 존경 등 모든 면에서 완벽하다"고 대견해했다.
마카오 신학교에서의 신학생들의 공부는 하느님의 일을 하려는 사람은 학문을 성실히 해야 함을 말하는 교회사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민중항쟁 등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지만 공부는 꾸준히 진행되었다.
신학생 시절 김대건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상당히 성숙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다.
“ | 네로 황제가 로마 제국을 통치하던 시기에 많은 그리스도인이 박해받았습니다. 집에서 사자를 키우던 어느 그리스도인도 잡혀갔고, 경기장에서 사자와 마주쳤습니다. 사람을 보고 달려들던 사자는 갑자기 조용해졌습니다. 가만히 보니 그 사자는 그리스도인이 키우던 사자였습니다. 자신을 키우던 주인을 보고 조용해진 것입니다. 사자도 제 주인을 알건만, 왜 사람들은 천주님을 못 알아보는 것일까요? | ” |
가톨릭 잡지 가톨릭 다이제스트에 의하면 김대건은 마카오 신학교 시절 그를 가르친 교수들이 만약 신학생이 되지 않았다면 화가가 되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학문과미술 모두 뛰어난 박식가이었던 것이다. 김대건,최양업,최방제 신학생이 공부하던 시절은 서양 제국주의와 민족주의로써 저항하는 동방 민중들간의 대립과 투쟁이 있던 시대였다.
그래서 마카오에서의 민중운동으로 필리핀 롤롬베이의 도미니코 수도회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물론 필리핀에서 공부한 이유는 천주교가 뿌리내린 나라이기 때문이다. 1842년 조선 잠입을 시도한 그는 의주 검문소의 검문이 심해서 실패했으며, 마카오의 민중 반란을 피해 청나라로 옮겨서 신학 공부를 계속하였다
사목과 순교
성직자가 되다
김대건은 1844년 부제서품을 받았다. 부제 때 조선에 잠시 들어온 김대건 부제는 당시 돈 146원선박을 구입하여 ‘라파엘호’라 명명하고 1845년 4월 30일 신자 11명과 함께 제물포항(현 인천항)을 떠나 상하이로 갔다.
1845년 8월 17일 상하이의 금가항(金家港)교회에서 세번째 천주교 조선교구장인 장조제프 페레올 주교의 서품성사 집전으로 사제 서품을 받았다. 1845년 8월 31일 조선 입국을 위해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Daveluy) 신부를 모시고 함께 갔던 신자들과 함께 라파엘호를 타고 상하이 항을 떠났다.
출항한 지 3일 만에 서해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9월 28일 제주도 용수리 포구(현재 제주도 한경면 용수리)에 표착하게 되었다. 여기서 2∼3일 정도 배를 수리하고 음식 등을 준비하여 10월 1일 포구를 떠난 김대건 신부 일행은 10월 12일 금강 하류의 나바위에 무사히 도착했다. 즉, 김대건은 1845년 10월 조선에 도착하였다. 12월까지 한양과 경기도일대에서 기해박해 당시 교회 지도자들인 선교사들의 순교로 교회가 무력화된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사목을 했으며, 남편과 사별한 후 거지꼴을 면하지 못하던 어머니를 위로했다.
순교
임금이 희정당(熙政堂) 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사학 죄인(邪學罪人)김대건(金大建)을 효수(梟首)하라고 명하였다.
김대건은 용인(龍仁)사람으로서 나이 15세에 달아나 광동(廣東) 에 들어가서 양교(洋敎)를 배우고, 계묘년(1843년, 헌종 9년)에 현석문(玄錫文)등과 결탁하여 몰래 돌아와 도하(都下)에서 교주(敎主)가 되었다.
이 해 봄에 해서(海西)에 가서 고기잡이하는 당선(唐船)을 만나 광동에 있는 양한(洋漢)에게 글을 부치려 하다가 그 지방 사람에게 잡혔는데, 처음에는 중국 사람이라 하였으나 마침내 그 본말(本末)을 사실대로 고하였다.
포청(捕廳)에서 한 달에 걸쳐 힐문하였는데, 그 말하는 것이 교활하여 양박(洋舶)의 강한 것을 믿고 협박하여 말하기를, ‘우리나라에서 마침내 그 교(敎)를 금할 수 없을 것이다. 은전(銀錢)[을 흩어서 경외(京外)에서 흔하게 쓰는 재화는 다 양한이 책중(柵中)에서 실어 보낸 것이다.’하였다.
또 스스로 말하기를, ‘양외(洋外)[의 제번(諸蕃)의 말에 능통하므로, 천주교 신부(神父)로서 각국을 위하여 통사(通事)한다.'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현석문과 아울러 같이 주벌(誅罰)하였는데, 현석문은 신유년(1801년, 순조 원년)의 사도(邪徒)로 처형된 현계흠(玄啓欽)의 아들이다.
천주교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가 조선에 들어오도록 힘쓰던 김대건은 경기도 연평도 앞바다에 항로가 있음을 알아내었다. 그러나 1846년 6월 15일 항로를 그린 지도를 중국으로 가는 중국 어선에 넘겨주려다가 연평도 부근에서 순찰하던 관헌들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중국어선을 관헌에서 징발하는 것에 항의하다가 신분이 드러났다고 한다. 학식이 출중하여 옥중에서 몇몇 대신의 부탁으로 세계 지리에 관한 책을 만들었고, 영국에서 만든 세계 지도를 라틴어 실력을 발휘하여 우리말로 옮김과 함께 색칠하기도 했다.
김대건이 옮긴 지도는 헌종에게 바쳐졌다. 일부 대신들은 김대건의 박학다식함을 아깝게 생각하여 구명운동을 벌였으나, 김대건이 신학공부와 사목을 위해 외국인들과 접촉한 사실로 처벌해야 한다는 영의정 권돈인의 주장에 따라 그해 9월 15일 조선에서 금하던 천주교를 믿는다는 죄로 참수형을 선고받았고, 이튿날 새남터에서 천주교 사제로 참수되어 순교의 길을 걸었다.
양심수의 시체는 3일이내 가족이 찾아갈 수 있는데, 김대건의 시체는 새남터 모래밭에 가매장되었다. 이민식이라는 천주교 신자가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수습하여 경기도 안성에서 장례를 치렀다. 프랑스 해군의장 밥티스트 세실 제독은 김대건을 구하기 위해 조선으로 항해해 왔으나, 김대건이 순교하기 전까지 조선에 도착하지 못하였다.
당시 그의 유언은 “주교님, 어머니를 부탁드립니다.”였다. 당시 천주교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에게 어머니의 안위를 부탁한 것이었다. 또한 순교하기 전 하느님을 경외하고 죄를 짓지말라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박해받는 신자들을 격려하였다.
“ | 나는 이제 마지막 시간을 맞았으니 여러분은 내 말을 똑똑히 들으십시오. 내가 외국인들과 교섭한 것은 내 종교와 내 하느님을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천주를 위해 죽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내게 시작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죽은 뒤에 행복하기를 원하면 천주교를 믿으십시오. 천주께서는 당신을 무시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벌을 주시는 까닭입니다. | ” |
— 김대건, 참수형을 당하기 전에 한 말 |
장례
신봉승 사극작가에 따르면 김대건은 1846년 새남터(현재 서울 노량진)에서 12명의 사형집행인에 의해 참수되었으며 목이 군문에 걸렸다. 이를 군문효수라고 한다. 본래 양심수의 시체는 3일이내 가족이 찾아가도록 되어 있지만 김대건의 시체는 가매장되었다. 비밀리에 천주교 신자인 이민식이 김대건의 시신을 미리내 성지(경기도 안성)로 옮겼다. 1960년 7월 5일 김대건의 시신은 혜화동의 가톨릭대학교안의 교회에 이장되었다.
시성
1857년 교황 비오 9세가 김대건을 가경자로 선포하였으며, 1960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는 그를 복자로 선포하였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성인으로 시성하였다. 현재 한국 천주교회의 성직자들의 수호성인으로 모셔지고 있다.
영성
김대건은 하느님을 가리켜 임자라고 불렀다. 하느님은 세상을 만든 임자이기 때문에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면 이 세상에 난 보람이 없고, 그분을 배반하면 차라리 이 세상에 아닌 난 것만 못하다는 것이 김대건의 영성이었다.
열정
김대건은 몸이 약한 사람이었다. 마카오 신학교에 다니던 때에 선생들이 "김대건 신학생이 천주교 사제가 될 수 있을까?"라고 걱정했고, 세실 제독의 제안으로 통역을 할 때에는 감기에 걸렸다. 그런데도 성직자로 살아내었음은 김대건이 열정이 많은 사람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몸이 약하다는 단점을 열정으로 이겨낸 성직자들로는 성 바울과 존 웨슬리가 있다.
가족 관계
- 증조부 : 김진후 (순교)
- 조 부 : 김한현 (순교)
- 아버지 : 성 김제준 이냐시오 (순교)
- 어머니 : 고 우르술라
- 솔뫼 _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탄생지
- 김대건 신부님의 탄생지이며 김씨 집안의 4대 순교자가 살던 신앙의 못자리이다.
김대건 신부님과 그의 아버지 성 김제준 이냐시오, 그리고 당고모인 성 김 데레사의 탄생지이기도 하다. 증조 할아버지인 김진후(비오 1814년 순교), 작은 할아버지 김종한(안드레아 1816년 순교), 아버지 김제준(이냐시오 1839년 순교), 그리고 김대건 신부(안드레아 1846년 순교) 등 4대의 순교자가 살던 터로 김대건 신부의 신앙이 싹튼 곳이다.
면천 고을 솔뫼로 불리던 이 곳에서 김대건 신부님은 1821년 8월 21일에 태어났다. 충남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에 위치한 솔뫼는 소나무 숲이 청청하다고 하여 솔뫼(松山)라 불린다.
김대건 신부님의 증조 할아버지인 김진후(비오, 일명 운조)는 50세에 영세한 이후 ‘내포 지방의 사도’라고 불리는 이존창(루도비코)에게서 복음을 전해들은 뒤 벼슬을 버리고 신앙생활에 전념하다가 신해, 신유 박해 때 체포, 10여년을 옥살이하다 해미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이후 김진후의 셋째 아들 김종한(안드레아, 일명 한현)이 순교했고(1816년), 1839년에는 다시 둘째 아들 김택현의 아들 김제준(이냐시오)이 순교, 1846년에는 김제준의 아들 김대건 신부가 순교함으로써 김대건 신부님의 가문은 32년 사이에 4대가 순교하는 영광의 가문이 되었고, 솔뫼는 ‘신앙의 못자리’로, ‘한국의 베들레헴’으로 불리게 되었다.
- 골배마실 _ 성소의 꿈을 키우며 소년시절을 보낸 곳
- 김대건 신부님이 소년 시절을 보낸 곳이며, 김제준(이냐시오)성인과 김대건 신부님의 신앙이 잠들어 있는 골배마실은 김대건 신부님의 소년시절의 향취가 남아있는 곳이며, 성소의 꿈을 키우던 장소이다.
골배마실에서 김대건 신부님의 그의 나이 15살 때에 신학생 후보를 찾아 헤매던 모방 신부님의 눈에 띄어 장래 조선 교회를 이끌 목자의 재목으로 선택된다.
골배마실은 사제가 되기 위해 마카오로 유학을 떠날 때까지 몸과 마음을 준비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이다. 지금 골배마실은 그 흔적이 없다. 다만 김 신부님이 살던 집터만이 골프장(양지 컨트리 클럽) 한쪽에 보존돼 그의석상과 제대, 초가집과 어머니 고 우술라의 모습을 새긴 부조만이 남아 있다. 또 하나 김대건 신부님이 어릴 적 손길이 닿았다는 늙는 고욤나무 한 그루가 다른 나무들 사이에 무심하게 서 있을 뿐이다.
골배마실이라는 지명은 옛날부터 첩첩산중인데다 뱀과 전갈이 많이 나오는 지역이라서 뱀마을, 즉 ‘배마실’이라고 부르던 동네에서 시작되는 산골짜기 안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은이 성지 _ 세례받고 신학생으로 선발된 성소의 요람
- 은이 마을은 박해시대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자들의 눈을 피해 모여 살게되면서 시작된 교우촌으로, ‘은이’(隱里)란 글자그대로 숨어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은이 공소는 1836년 4월, 조선 최초의 선교사 모방 신부님이 소년 김대건에게 ‘안드레아’라는 세례명으로 세례성사와 첫영성체를 주고 신학생으로 선발한 곳이다.
또 사제 서품을 받고 귀국한 김대건 신부님이 1845년 11월경부터 이듬해 부활 대축일까지 약 6개월간 기거하면서 사목활동을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곧 김대건 신부님의 첫 사목지이며, 조선땅에서는 처음으로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했고, 체포되기 직전 공식적으로 최후의 미사를 드렸던 곳이다.
- 마카오 _ 사제수업을 위해 유학생활을 하던 곳
- 중국 광동성 중산현 남부, 주강 삼각주에 자리 잡고 있는 항구 도시로, 1557년 포르투갈인이 거주권을 획득한 이래 포르투갈 동양무역의 근거지가 되는 장소였다. 동시에 가톨릭의 극동지역 선교의 전초지가 되었던 곳이다.
1565년 예수회가 이 곳에 본부를 두어, 성 바오로와 성 요셉의 두 신학교를 설립, 성직자를 양성하였고 예수회가 일본 및 중국에 대한 선교를 가능케 하는 데 큰 공을 남겼던 곳이다.
그리고 1732년에는 파리외방전교회 경리부가 이곳에 자리를 잡고 중국을 위시한 조선 선교를 위한 물자 조달과 성직자들의 교황청과의 서신 연락을 담당했던 곳이다.
1831년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브뤼기에르 주교님을 비롯하여 거의 모든 성직자들이 이곳을 경유하여 조선 입국을 시도하였다. 특히 브뤼기에르 주교님과 함께 조선 입국을 원했던 모방 나 신부님이 이곳을 경유, 서양인 성직자로서 1835년 처음으로 조선 입국에 성공한 후, 그 이듬해인 1836년 한국인 사제 양성을 위해 김대건(안드레아), 최양업(토마스), 최방제(프란치스코) 세 소년을 마카오로 유학을 보내게 된다.
이들 세 소년은 파리외방전교회 경리부장 르그레즈와 신부의 지도를 받으며 1842년까지 6년간 이 곳에서 수학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세 사람 중 최 프란치스코는 이 곳에서 병사하였다.
머나 먼 타국 땅에서 김대건 신부님과 최양업 신부님이 조선 복음화를 위한 사제 수업을 받았던 유서 깊은 장소이다.
- 필리핀 롤롬보이
- 김대건 신부님과 최양업 신부님의 동상이 건립 된 곳으로 필리핀 마닐라에서 약 4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곳은 그 당시 도미니코 수도회의 농장이 있었던 장소로 1836년 15살 되던 때에 최방제와 최양업과 마카오에서 유학하던 중 1839년 4월 마카오 민란으로 피난하여 라틴어와 신학을 공부하던 유서 깊은 곳이다.
1985년 오기선 신부님이 현지를 답사하여 개인 소유였던 이곳이 도미니코 수도회 농장이었던 것을 확인된 후 소유주인 모데스따, 멘도사 할머니에게 동상 부지를 제공해 줄 것을 간청하여 승낙을 얻어낸다.
그 후 김대건 신부님 동상은 김수환 추기경님과 말롤로스 교구장 알마리오 주교님 그리고 윤공희 대주교님, 김남수 주교님, 오기선 신부님을 비롯한 현지 교민, 많은 순례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1986년 5월 22일 건립 되었다.
- 소팔가자(小八家子)성당 _ 김대건 신부님의 부제 서품 장소
- 소팔가자는 중국 장춘에서 약 1시간 30분 거리에 있다. 마카오에서 유학하던 김대건 신학생은 통역관으로 프랑스 해군 세실제독과 남경조약 체결에 참석차 1942년 3월 26일 프랑스 메스트르(Maistre)신부님과 프랑스 군함을 타고 마 카오를 떠나 마닐라를 경유하여 중간 기착지인 현재 대만의 탐수진 항구를 거쳐 1842년 7월 담수진을 떠나 상해에 도착, 남경 조약에 참석하게 된다. 그 후 10월 11일 청나라 목선을 타고 그달 25일 요동 지방의 대장하에 도착, 요동 서남 끝에 있는 백가점에 체류하다 가 제3대 조선교구 주교로 임명된 페레올 주교님이 머물던 내몽고 소팔가자로 갔다.
이곳에서 조선 교우들의 박해 상황을 전해 듣고 김대건과 메스트르 신부님은 조선으로 입국할 계획을 세웠으나 만주 교구 방(Verolles)주교님의 만류로 포기하였다.
소팔가자는 후일 김대건, 최양업 신학생이 부제품을 받은 장소이며 여덟 가족이 정착해 처음으로 마을을 형성하면서 소팔가자라고 불렸다.
- 상해 진쟈샹(金家巷 김가항) 성당 _ 김대건 신부님의 사제 서품 장소
- 중국 상해의 진쟈샹 성당은 한국 교회의 첫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1845년 8월 17일 제3대 조선교구장이신 페레올 주교님으로부터 사제품을 받은 유서 깊은 곳이다.
서품식은 페레올 주교님의 주례로 다블뤼 신부님을 비롯하여 서양인 신부 4명과 중국인 신부 1명이 공동으로 집전하였다.
성당 안에 있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기념 경당에는 김 신부님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진쟈상 성당으로 발음되는 金家巷 성당은 17세기 명나라 숙종(162-43)때 중국 화동지역 최초의 성당으로 건립된 후 1841년에는 남경교구 주교좌 성당으로 지정되었고, 중국교회 동부지역 복음화의 산실임과 동시에 한국 교회와도 많은 인연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진쟈상 성당은 김씨 성을 지닌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아 붙여진이름이다. 말 그대로 김씨들이 모여 사는 골목이라는 뜻이다.
- 헝탕(橫塘 횡당) 신학교 성당 _ 김대건 신부님의 첫 미사 봉헌지
- 사제로 서품된 김대건 신부님이 서품 7일 뒤인 1845년 8월 24일 첫 미사를 봉헌한 헝탕 신학교 성당으로 현재는 상해에서 35Km 거리에 위치해 있으며, 현재는 납골당 성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 제주도 용수 성지 _ 귀국선 라파엘호가 풍랑으로 표착한 포구
- 제주도 서쪽 한경면 용수리 포구는 김대건 신부님이 상해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서해 바다로 귀국하는 길에 풍랑을 만나 표착했던 곳이다.
부제 때 일시 귀국했던 김대건 신부님은 선박을 구입(라파엘 호라 명명)하여, 1845년 4월 30일 이 배를 타고 제물포항(현 인천항)을 떠나 상해로 가게 된다. 그리고 동년 8월 17일 진쟈샹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님으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고, 8월 31일 조선 입국을 위하여 페레올 주교님, 다블뤼 신부님, 김대건 신부님 그리고 교우 및 선원 등 14명이 승선한 라파엘 호는 상해 항을 출발하였다.
그러나 출발한 지 3일만에 서해 바다에서 풍랑으로 표류하다가 9월 28일, 제주도 용수리 포구에 표착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2-3일 동안 배를 수리하고 음식 등을 준비하여 10월 1일, 그곳을 떠난 일행은 10월 12일, 금강 하류 강경 황산포 부근에 도착하였다.
- 나바위 성지 _ 사제 서품 후 한국 땅에 도착한 것을 기념하여 설립한 성당
- 나바위 성지는 전라도 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본당의 하나로 김대건 신부님이 1845년 조선교구 3대 교구장이신 페레올 주교님, 다블뤼 신부님 그리고 11명의 조선 교우들과 서해를 통하여 강경 부근 황산포에 상륙한 것을 기념하여 지은 성당이다.
본래 화산(華山)이라는 이름은 산이 너무 아름다워 우암 송시열이 붙여준 이름이 라고 한다.
전북 익산시 망성면 화산리에 위치하여 예전에는 화산 성당이라 불리웠던 이 곳은 김대건 신부님 일행이 한국 땅을 밟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베르모렐 신부님이 1897년에 설립해 1906년 성당 건물을 완공하였다.
- 새남터 성지 _ 많은 성직자, 지도자들이 치명한 순교 성지
- 김대건 신부님, 처음 한국에 들어왔던 외국인 신부인 중국인 주문모 신부님, 최초로 한국에 들어왔던 성 앵베르 주교님, ‘기해일기’의 현석문(가롤로) 성인을 포함하여 아홉 분의 성인 유해가 모셔있는 곳이 새남터이다. 새남터는 본래 노들 혹은 한자로 음역해서 사남기(沙南基)라고 불리웠다. 새남터는 서울시 용산구 이촌동의 철도 공작창 인근으로, 새남터 성당 남쪽 150-200m 지점에 있다. 일부에서는 그 위치를 원효로 4가 부근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새남터’는 이 지역이 북쪽 한강변의 노들 나루터 인근에 위치한 얕은 모래 언덕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조선 초기부터 군사들의 연무장과 국사범과 같은 중죄인의 처형장으로 이용되어 왔다.
그리고 새남터가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지로 이용되기 시작한 것은 1801년의 신유박해 때부터였다.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님이 의금부에서 군문 효수형의 판결을 받고 이곳으로 옮겨져 4월 19일(양력 5월 31일) 처형당함으로써 이곳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당시 주문모 신부님의 머리는 장대에 매달렸고, 그 시신은 닷새 동안 백사장에 버려졌다가 군사들에 의해 몰래 이장됨으로써 찾을 길이 없게 되었다.
이후 새남터는 성직자들을 비롯하여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신자들의 처형장이 되었다.
- 미리내 성지 _ 성 김대건 신부님과 페레올 주교님의 묘소가 있는 박해시대의 교우촌
- 미리내는 순우리말로 ‘은하수’라는 뜻인데,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 미리내를 한자로 미리천(美里川)이라 표기하고, 이것과 산촌(山村)의 이름을 따서 미산리라고 하게 되었다.
이 산골에 미리내란 명칭이 붙여지게 된 것은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모여들어 교우촌을 형성하기 이전부터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 이 교우촌은 박해가 계속되는 동안 충청도 지방의 신자들이 미리내 산속으로 옮겨 살면서 훗날 공소와 본당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곳이 특히 순교 사적지로서의 의미를 갖게 된 것은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 김대건 신부님의 시신이 교우들에 의해 미리내로 옮겨져 안장되면서였다. 당시 김대건 신부님의 시신은 순교한지 40일 만에 비밀리에 거두어져 용산 우체국 뒤편의 와서(瓦署, 일명 왜고개)에 안장되었다가 10월 26일 서 야고보, 박 바오로, 한경선, 나창문, 신치관, 이 사도 요한, 이민식 등에 의해 발굴되어 미리내로 옮겨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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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전]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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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신부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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