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한국사 교육] 고교생 69% “한국전쟁은 북침”…무너지는 우리 청소년 역사인식
서울신문·진학사 설문 조사
국내 고등학생 10명 가운데 7명이 한국전쟁을 ‘북침’으로 알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백범 김구 선생에 대해서는 ‘안경’을 가장 먼저 떠올리거나, 4·19 혁명과 5·18 민주화운동 등 근·현대사의 핵심적인 사건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학생들도 많았다.
서울신문이 입시전문업체인 진학사와 함께 최근 전국의 고등학생 506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10일 내놓은 ‘2013년 청소년 역사인식’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69%(349명)가 한국전쟁을 ‘북침’이라고 답했다. 현재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6종 모두 한국전쟁의 발발 형태를 ‘남침’으로 명시하고 있지만, 정작 학생들은 북침(北侵)과 남침(南侵)이라는 용어의 의미를 헷갈리거나 전쟁의 발발 원인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상당수 고교생들은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 단편적인 정보만을 알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김구 선생에 대해 간략하게 서술하라는 질문에는 응답자 대부분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독립운동’과 같은 개념을 연결하는 수준에 그쳤다. ‘도시락 폭탄’과 ‘손가락’, ‘도산’ 등 다른 독립운동가와 혼동하거나 ‘어린이날을 제정하신 분’이라는 황당한 답변도 나왔다. ‘민주화’의 정의를 묻는 질문에도 ‘잘은 모르지만 긍정적인 뜻’, ‘일베(일간 베스트 저장소)에서 나쁜 뜻으로 쓰는 말’로 답하는 등 뜻을 모르는 학생들도 많았다.
브루스 커밍스 교수는 《한국전쟁의 기원》 1·2권에서 이 전쟁이 지금까지의 통설처럼 단순히 소련과 북한의 남침으로만 설명되어서는 안되며, 여기에는 남한과 미국도 상당한 책임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특히 미국의 외교정책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강도 높은 비판을 가하고 있다. 또 한국전쟁은 일제시대이래의 한국사회 갈등과 모순에 그 역사적 연원이 있으며, 이것이 미·소간의 냉전 특히 미국의 38선 설정에 의한 분단으로 갈등이 증폭되면서 전쟁으로까지 이어졌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그는 비교역사사회학·세계체제론 등 방대한 역사·사회과학 이론을 동원해 정밀하게 자신의 논지를 규명해나갔다.
그는 이 저서로 인해 한때 한국 언론이나 일부 학계로부터 북침설논자라고 비판받고, 반한인사라는 이유로 학문적으로는 물론 정치적으로 남한정부나 보수적인 인사들로부터 ㅅㅇ당한 비판과 압력을 받아왔다. 그와 존 할리데이가 함께 만든 영국 BBC의 다큐멘터리 <한국 : 알려지지 않은 전쟁>은 MBC가 수입, 방영하려고 했으나 내용이 한국에 대해 비판적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한국에서 잘못 알려지거나, 또는 학문적으로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방영되지 못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저서 어디에서도 북침설을 주장한 바가 없으며, 《한국전쟁의 기원》 제2권의 18장-이 장은 이 책의 가장 중심적인 장이이기도 하다-은 약 3분의 1을 북침설을 비판하는 데 할애하고 있다. 최근 커밍스 교수는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는 일단 마치고, 한국의 통일문제나 동아시아 정치경제 및 국제적인 문제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특히 그는 현재 제3세계 민족을 무시하는 미국의 패권적 외교정책을 앞장서서 강도 높게 비판하는 미국 내 몇 안되는 비판적 지식인 그룹의 한 명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려대 평화연구소가 주최하는 ‘한반도 평화에 대한 국제학술회의’(3월30일)에 참석하기 위해 내한한 커밍스 교수는 짧은 체류기간 동안 한국전쟁토론회(3월29일)와 서울대 강연(3월31일)을 가졌다. 평화연구소 토론회와 서울대 강연은 일반과 언론에 알려졌으나 정작 그의 학문적 업적을 놓고 치열한 토론을 벌인 유일한 학술회의였던 ‘한국전쟁토론회’는 일반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이 학술토론회는 커밍스 교수의 주저인 《한국전재의 기원》 1·2권에 대한 학문적 검토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참여자는 사회에 최장집 교수(고려대), 발표에 박명림(고려대 정치학과 박사후보) 정해구(〃) 이종석(성균관대 정치학과 박사후보)씨, 토론에 강정구(동국대 사회학과) 손호철(전남대 정치학과) 교수 이삼성씨(민족통일연구원 책임연구원) 등이었다. 국내에서는 이미 상당한 수준의 연구성과를 발표, 주목을 받고 있는 이들은 비교적 진보적인 학자로 평가되고 잇다. 이밖에 약 30여명의 소장 교수, 사회과학자들과 대학원생들이 일반 청중으로 참석새 열띤 토론을 경청하였다. <편집자>
“미국인을 대상으로 쓴 책이었다”
이날 토론회의 첫 번째 주제는 관점의 문제로서 《한국전쟁의 기원》이 균형을 상실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즉 남한과 미국에 대한 비판은 강한 반면 북한과 소련에 대한 비판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문제가 지적됐다. 학문적 객관성을 보장받으려면 북한과 소련도 비판받아야 할 점은 당연히 비판받아야 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커밍스 교수는 자신의 저작에 그런 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동안 한국전쟁 연구가 너무 일방적으로 소련과 북한을 공격하고 남한과 미국을 옹호하는 데 초점이 놓여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남한도 문제가 많았으며, 특히 미국의 외교정책을 강력히 비판하는 데 초점을 맞췄기 때문일 것이라고 응답했다.
이 부분에서 《한국전쟁의 기원》이 사실상 그 문체나 용어, 그리고 내용상 많은 부분이 한국인보다는 미국인을 대상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 커밍스 교수는 “그점은 솔직히 인정한다”고 대답, 수긍하는 편이었다. 그는 자신의 작업이 미국의 외교정책이 얼마나 잘못외었고, 그것 때문에 한국인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당했는지를 밝히는 데 초점이 놓여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중·소 자료 없어 오류 범해”
다음으로는 연구대상, 그리고 이론적 불일치의 문제가 지적됐다. 《한국전쟁의 기원》이 총체사로서의 역사연구를 목표로 하는 야심만만한 대작임은 분명하다. 그러려면 중국이나 소련 부분도 연구를 해야 되는데 《한국전쟁의 기원》에는 미국 일본 대만 남한 부분에 너무 치중함으로써 반쪽 연구가 되지않았느냐는 것이었다. 특히 소련과 중국 부분을 연구하지 않고 어떻게 한국전쟁을 총체적으로 연구할 수 있겠느냐는 지적이었다. 또 《한국전쟁의 기원》 1권이 비교역사사회학적 접근을 한 데 반해 2권은 세계체제론으로 접근하여 두권 사이에 이론적 불일치가 보인다는 지적이 있었다. 이에 대해 커밍스 교수는 소련과 중국 부분은 자신의 책이 미국비판에 초점이 놓여 있었다는 앞에서의 대답으로 대신했으며, 이론적 불일치 문제에 대해서는 전체적으로 세계체제론적 시각에서 한국전쟁을 세계적 수준의 문제, 동북아시아 수준의 문제, 한국 내 문제의 세 차원에서 동시에 보려고 했다고 반박했다.
《한국전재의 기원》에는 구조를 통해 역사를 보는 세계체제론과, 관련 인물들의 음모를 중심으로 역사를 보는 음모이론 사이에 분명한 불일치와 이론적 단절이 보인다는 지적에 대해 커밍스 교수는 답변하기가 곤란했는지, 아니면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는지 답변을 하지 않았다. 그는 또 “북한의 주체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실제로 있었던 소련의 역할이나 북한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했다”고 지적하자 ‘비교’의 관점에서 연구, “당시 동유럽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에 비추어볼 때 북한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았다”면서 자신은 ‘민족제일·민족주체’를 강조하는 북한식 사회주의의 특성을 밝혀보려 한 것이라고 응답했다.
자료 면에서 “미국 자료와 미국에 있는 노획문서 중심으로만 연구가 이뤄졌으며 그것이 또 소련과 중국 부분을 해석하는 데 오류를 가져온 요인 중의 하나”라고 지적하자,커밍스 교수는 “중국과 소련의 자료는 최근에야 공개되고 있기 때문에 이용할 수 없었다”고 대답했다. 노획문서의 경우 그는 “이 시대의 남북한과 한국전쟁에 대한 어마어마한 자료가 워싱턴에 있기 때문에 이 자료를 직접 보지 않고 이 시대의 남북한사를 연구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분명하게 대답했다. 이밖에도 한국전쟁의 여러 부분에서의 해석상의 문제와 커밍스 교수가 채용하고 있는 이론 사이의 불일치가 지적됐으나 이부분에 대해서 그는 부분적으로 동의하지만 많은 경우 자신의 연구결과를 견지하는 응답이었다.
그의 저작에 나타나 있는 사실적 오류에 관한 지적 가운데 “1948년의 상황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남북협상에 대한 고찰이 없는 것이 아쉽다”는 부분에 대해 커밍스 교수는 “엘리트 정치보다는 대중들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그런 것은 자세히 다루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또 중국과 북한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있어 몇가지 사실적 오류를 지적하자 그는 “중국 공식자료의 신뢰성에는 문제가 있으며, 특히 연구를 할 당시 조·중 관계를 밝혀줄 수 있는 1차자료는 중국에서 나온 것이 거의 없었다”고 대답했다.
“한국 내에서의 연구 진전에 놀랐다”
커밍스 교수는 또한 20여개에 달하는 사실적 오류를 하나하나 페이지까지 들어가며 지적하자 “그러한 부분은 사실 한국 내에 있는 여러분들이 나보다 더 잘 알 것”이라면서 즉각 자신의 오류를 솔직히 인정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러나 그는 관점, 이론과 분석, 해석에서는 끝까지 물러서지 않는 학자적 완곡함을 잃지 않았다.
커밍스 교수는 총 4시간에 달하는 토론회를 마치고 “나의 연구가 한국에서 이렇게까지 큰 영향을 끼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면서도 “한국 내에서의 연구가 이렇게 많이 진전된 데 놀랐다”는 반응을 보였다.
커밍스의 한국전쟁 연구가 대단히 뛰어난 것이고 또 엄청난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연구는 기본적으로 ‘문제를 밖으로부터 본 것’임에는 틀림없다. 이 점에서 본다면 80년대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폭발적으로 일기 시작한 한국 현대사 연구에 힘입어 ‘문제를 안으로부터 본 시각’에 대해 그를 극복하는 것이 국내 연구자들의 과제라 하겠다. 이 때문에 지금이야말로 국내 젊은 연구자들의 분발이 더없이 요청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박상림 (고려대 박사후보·정치학)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 교수(49·사진)는 워싱턴대 교수를 거쳐 현재 시카고대 역사학과 교수로 있다. 그의 3권의 저서(한권은 존 할리데이와 공저 《한국 : 알려지지 않은 전쟁》)와 20여편에 달하는 논문은 대부분 한국관계를 다룬 내용들로 발표 때마다 학계·언론계의 주목을 받았다.
60년대 후반 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 한국에 온 것이 계기가 되어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해방의 정치 : 한국, 1945~1947>으로 75년 컬럼비아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그는 한국전쟁에 대해 20여년에 걸친 노력과 시간을 투입, 1·2권 합쳐 1천5백63쪽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한국전쟁의 기원》(1권 ‘해방과 분단국가의 수립, 1945~1947’ 6백6쪽·2권 ‘포효하는 폭포, 1947~1950’ 9백57쪽)을 각각 81년과 90년에 출간하였다. 이 저서로 그는 권위있는 학술상을 3개(제1권은 존 페어뱅크상 및 해리 트루먼상. 제2권은 퀸시 라이트상)나 수상함으로써 학문적 업적에 대한 인정은 물론, 이 분야에서 거의 무비의 위치에 올라선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http://www.sisa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27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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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상의 시는 퇴폐적으로 아름다웠지만, 실상은 너무도 잔인했다. 한반도의 전역은 사나이뿐만 아니라 남녀노소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세계 전사(戰史)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잔인한 민족상잔의 비극이었다.
3년의 한국전쟁에서 350만 명에 달하는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거나 크게 다쳤다. 한국전쟁은 막대한 민간피해를 야기한 처참한 전쟁이었다. 또 한국군 40여만 명과 북한군 50여만 명이 사상했다. 그렇다면 당시 우리민족의 20% 가까이가 한국전쟁에서 죽거나 다쳤다는 결론이 나온다. 더욱이 유엔군 16만 명과 중국군 90만 명이 희생되었다.
처참한 전쟁 끝에 너무도 많은 피의 대가로 대한민국은 지켜졌다. 미국을 비롯한 우방국들의 젊은이들과 함께 온 국민들이 합심하여 피 토하면서 대한민국을 지켰다. 대한민국이 살아남지 못했더라면, 오늘날 세계 첨단산업을 이끄는 활기찬 시장경제와 세계의 기적이라고 일컬어지는 빛나는 민주주의의 나라는 한반도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80년대 대학생, 브루스 커밍스에 속아
그런데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반세기 하고도 5년이 지난 현재, 우리의 현실은 대한민국을 피로써 지킨 이들에 대한 존경보다는 학문적으로 이미 한물간 수정주의적 시각이 판을 친다. 우리나라 학생들의 상당수가 한국전쟁이 북한의 침략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점을 알지 못한다. 우리의 교육현장에서 조차 한국전쟁의 참모습이 심각히 왜곡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4시 북한 공산군의 전면적이고 전격적인 남침에 의해 촉발되었다. 당시대를 살았던 분들에게는 너무도 명백한 사실에 대해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면 사실이 어떻게 왜곡되었는가?
전쟁을 일으킨 북한을 비롯 중국, 소련은 전쟁 직후 일제히 한국의 대규모 공격에 의해 전쟁이 발발했다고 주장해왔다. 공산국가 특유의 모략전(謀略戰)이었다. 북한의 전쟁박물관에는 소위 ‘북침설’의 근거로서 해주지역에서 한국군의 대규모 공격을 표시한 지도를 걸고 있다.
유럽과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이 ‘북침설’을 수용하여 한국전쟁을 분석해왔다. 그들의 논리는 단순했다. 공산세력은 평화 애호 세력이기 때문에 침략을 강행할 리 없으며, 한국전쟁은 모순에 가득찬 자본주의 제국 미국이 획책한 것이 틀림없다는 논리였다. 한국의 침공 뒤에는 미국이 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수정주의 시각이 국내에 열풍으로 다가온 것은 미국 학자 브루스 커밍스가 쓴 『한국전쟁의 기원』이란 책이 소개 되면서부터다. 80년대 독재에 대한 항거와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이 땅의 젊은이들은 기성세대의 말보다 커밍스의 파격적인 시각에 열광했다.
실체적 진실 외면한 수정주의 사관
커밍스는 미국측의 방대한 자료를 비판적 입장을 통해 분석하여 전쟁의 책임이 미국에 있다고 주장했다. 즉 전쟁 책임이 공산측에 있지 않고 전쟁을 유도하기 위한 미국의 음모에 그 책임이 있다는 것이었다. 또 한국군의 해주에서의 침공을 계기로 자극 받은 북한이 시대착오적인 상황에 놓인 남한을 해방시키고자 확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전쟁을 내전(civil war)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세운 틀 속에 부합하는 자료들의 비판적 해석을 통해 분석하는 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한국전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은 군부독재, 광주항쟁, 민주화운동 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종속이론과 함께 열풍으로 다가왔다. 경험에서 오는 기성세대의 생각과는 다르게 그들은 한국의 독재체제는 물론 전쟁의 책임이 미국에 있다는 인식을 믿게 되었다.
국내에는 여전히 한국전쟁에 대한 수정주의적 시각이 뿌리깊지만, 학문적으로는 이미 한물간 이론으로 한국전쟁의 책임에 관한 것은 명명백백히 들어나 있다. 수정주의 이론이 무너지는 계기가 된 것은 냉전붕괴였다. 그때까지 한국전쟁에 관한 연구는 전적으로 서방측 자료에 의존해왔으며, 공산측 자료는 천편일률적인 내용이었다.
그런데 냉전이 붕괴되자 소련의 관계자들은 진실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소련의 비밀자료들이 공개되면서, 더 이상 수정주의 시각은 설 땅을 잃게 된다. 특히 1994년 6월 러시아 정부는 216점의 한국전쟁관련 자료를 한국정부에 제공한다.
구소련 자료, 스탈린과 김일성의 음모 규명
한국전쟁은 북한과 소련, 중국의 합의 아래 치밀하게 계획된 침공이었다는 점이 낱낱이 밝혀지게 되었다. 한국전쟁에 대한 정통적 시각에서 짐작은 했지만 수수께끼로 남아있던 스탈린과 김일성의 음모가 명확하게 되었다.
커밍스는 냉전의 붕괴라는 환경 변화 하에 자신의 이론에 일부 수정을 가한다. 90년대 초 커밍스는 한국전쟁이 내란이기 때문에 누가 일으켰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97년의 신간에서 ‘한반도의 국지분쟁을 전면 전쟁으로 격상시킨 중대한 책임은 김일성에 있다’고 지적하여 김일성의 책임에 더 무게를 두는 쪽으로 자신의 논리를 수정했다.
그러나 커밍스는 여전히 ‘누가 한국전쟁을 시작했느냐’에 대해서는 좀 더 다양하고 풍부한 자료가 구비되어야 논의할 수 있다는 유보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지금까지 밝혀진 한국전쟁의 정설은 김일성이 스탈린을 설득하여 일으킨 전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구 소련에서 발굴되는 자료들은 점점 한국전쟁이 스탈린의 전쟁이라는 점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노회한 스탈린은 혈기왕성한 김일성을 북한에 보내 한반도 혁명을 준비시키면서 기회를 노렸다. 소련은 북한군에게 전차, 전투기 등 충분한 전쟁장비와 물자를 제공하는 한편 북한군을 훈련시키기 위해 고문단을 파견했다. 한국전쟁의 실제 작전계획은 스탈린의 지침에 따라 소련군 장성의 주도하에 만들어졌다.
모택동은 실전경험이 풍부한 인민해방군 소속 조선인 정예 2개 사단을 김일성에게 주었다. 이 조선족 부대는 침공의 주력부대가 되었다. 중국 공산화와 함께 남한을 방위선에서 제외시킨 미국의 소위 ‘애치슨 라인’이라는 전략환경 변화에 따라 스탈린은 드디어 김일성에게 전쟁개시를 허락한다.
중국군이 개입하기 전 한국전쟁의 초기 단계는 스탈린이 직접 모든 것을 지휘한다. 작전지침에서 북한지도부의 탈출문제에 이르기 까지 북한군의 움직임 하나 하나를 스탈린은 지시한다.
김일성, 한달간 모스크바 체류하며 침공지시 받아
2000년 러시아의 토르쿠노프(Anatory Vasilieveich Torkunov)교수가 쓴 『수수께기의 전쟁: 한국전쟁 1950-53』은 한국전쟁의 진실을 밝히는 핵심적 내용을 담고 있다.
토르쿠노프 교수는 한국전쟁이 명백히 소련, 북한, 중국의 합의하에 계획된 도발이었으며, 스탈린의 결정적 역할을 밝혀낸다. 이 책에는 한국전쟁의 준비, 개전 그리고 휴전에 이르는 과정에서 소련의 역할이 방대한 구 소련의 자료를 통해 파헤쳐져 있다.
특히 현재도 접근이 불가능한 러시아 대통령 문서관, 즉 과거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자료관에서 구소련 최고 레벨의 의사결정에 관한 자료에 대한 분석을 통해 한국전쟁 결정과 수행 과정에서의 소련의 역할을 철저히 해부하고 있다. 토르크노프의 책은 수정주의 시각이 얼마나 진실에서 벗어나 있는지 그리고 공산측의 모략에 말려들었는지 낱낱이 보여준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1950년 3월30일에서 4월25일까지 거의 한 달간 모스크바에 체류하면서 스탈린과 3차례의 회담을 통해 최종적으로 침공에 대한 결정과 작전지침을 받는다.
스탈린은 북한군의 대폭적 강화지원과 함께 다음과 같은 3단계의 작전을 지시한다. 우선 38선 부근으로 공격부대를 집결한다. 2단계로 북한이 평화통일에 대한 새로운 발의를 하고 이를 서울이 거부하면 옹진반도에서 진행되는 한국군 활동을 반격의 구실로 공격을 시작한다. 이는 누가 최초에 군사행동을 시작했는가를 은폐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3단계로 전선을 확대하여 전격전을 행하여 남측이 반격할 기회를 주어서는 안된다. 스탈린과 김일성은 1950년 여름까지 북한군의 총동원을 결정한다. 김일성의 모스크바 방문 직후, 스탈린은 모택동에게 전문을 보내 ‘조선측이 통일에의 착수를 제안한 것에 동의했다’고 밝힌 뒤 상세한 내용을 조선의 동지들이 전달할 것임을 알린다.
1950년 5월 13일 북경(北京)에 도착한 김일성과 박헌영은 모택동에게 소위 ‘해방계획’을 상세히 설명했고 모택동도 이에 동의한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은 발발한다. 이것이 반세기 가까이 숨겨져 있던 한국전쟁의 진실이다.
수정자의자들, 공산측 평화공세에 말려들어
커밍스를 비롯한 수정주의자들은 해주 주변 옹진반도에서의 국군과 유격대 활동을 들어 북침설을 주장하거나 내전이었기 때문에 누가 시작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는 주장을 펴왔다. 스탈린의 지시를 보면 공산측의 모략에 수정주의자들이 얼마나 잘 말려들었는지를 보여준다.
또 스탈린은 평화공세에 대한 중요성을 지적하고 있다. 남침의도를 은폐하기 위한 수단으로 북한은 통일협상을 제의한 것이다. 1949년 9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도 평양의 소련대사에게 김일성과 박헌영이 평화통일공세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점을 지적하고 이러한 운동을 적극적으로 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스탈린은 한국전쟁의 준비, 기획, 작전에 이르기까지 총감독의 역할을 했다. 스탈린은 김일성과 모택동을 전쟁의 전면에 내세우는 한편 자신은 막 뒤에서 감독의 역할을 했다. 스탈린의 역할에 있어서 결정판은 정전에 얽힌 비화이다. 전쟁의 시작을 지시한 것은 스탈린이었지만, 스탈린은 결코 정전을 지시하지 않는다.
결국 한국전쟁의 휴전이 결정된 것은 스탈린이 죽고 나서였다. 개전 1년후 늘어가는 피해 속에서 승산이 없음을 깨달은 모택동과 김일성은 휴전을 모색한다. 모택동은 김일성과 그의 부하인 임표 등을 모스크바에 보내 스탈린에게 휴전의 허락을 요청한다. 스탈린은 휴전 협상은 수용했지만 죽을 때까지 휴전을 인정하지 않았다.
전쟁은 3년이나 끌었고 그동안 수많은 남북한의 젊은이들이 삼천리 금수강산의 고지에서 피를 뿌리며 산화했다. 미국도 인적 물적 피해를 보았다. 그러나 가장 큰 피해는 신생 중국이었다. 남북한과 유엔군의 사상자를 모두 합친 것만큼 수많은 중국 젊은이들이 타국 땅에서 죽어갔다. 비정한 스탈린은 철두철미하게 소련의 이익만을 생각했던 것이다.
얼마 전 한 신문에서 보도한 강연회의 기사는 나를 무척이나 슬프게 했다. 커밍스의 강연이었다. 향후 북한은 박정희식 개발독재 모델로 가야하며, 갈 것이라는 지적이었다. 커밍스는 과거 박정희 정권에 대해 누구보다도 가차 없는 비판을 가한 인물이었다. 그의 비판이 정당한 것이었다면, 커밍스는 최소한 북한은 절대로 박정희식 모델로 가서는 안된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윤덕민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타계한 옐친, 한국전쟁 '북침설' 잠재웠다
[중앙일보] 입력 2007.04.25 04:50 / 수정 2007.04.25 05:58"스탈린이 남침 승인" 극비 문서
94년 모스크바에 간 YS에 전달
300여 종의 문서에는 49년 1월부터 53년 8월까지 소련 외무부와 북한 외무성 간에 오간 전문,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회의록 등 한국전쟁의 진실을 규명할 수 있는 극비 자료가 포함돼 있었다. 문서에는 김일성이 소련의 스탈린,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으로부터 남침 계획을 승인받고, 이들과 남침 시기 등에 대해 긴밀히 협의한 내용 등이 담겨 있었다. 김 대통령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 문서를 통해 친북 성향의 이데올로그들이 주장해온 북침설이나 수정주의가 허구였음이 명백히 드러났다"고 적었다. ('김영삼 대통령 회고록'298~299쪽)
지병인 심장병이 악화돼 23일 사망한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은 이렇게 한국과 인연이 깊다. 91~99년 대통령으로 재직하는 동안 세 차례나 한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을 정도다.
◆ 김일성의 남침기획 과정 소상히 담겨=옐친이 넘겨준 문서에 따르면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인 50년 5월 29일 김일성은 슈티코프 당시 평양 주재 소련 대사를 면담한 자리에서 "소련이 지원한 무기와 장비가 이미 대부분 북한에 도착했다"며 "6월까지 완전한 전투준비 태세를 갖추게 됐다"고 통보했다. 북한의 남침이 김일성의 기획과 소련의 지원으로 이뤄진 것임을 명백히 보여주는 자료였다. 이에 앞서 50년 5월 14일 스탈린이 마오쩌둥에게 보낸 특별전문에는 "국제정세 변화에 따라 통일에 착수하자는 조선인들의 제창에 동의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이에 마오쩌둥은 중국이 북한을 적극 지원하겠다는 뜻을 스탈린에게 전달했다는 내용도 나온다.
50년 9월 28일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을 수복할 당시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친필 서한을 보내 "북한군 자력으로는 38선 이북을 지킬 수 없다"며 소련이나 중국군의 즉각 개입을 간절히 요청한 사실도 드러났다. 스탈린은 51년 3월 3일 북한에 소련군 2개 항공사단과 트럭 6000대를 공급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 문서들은 현재 한국의 외교사료관에 보관 중이다.
93~96년 옐친 밑에서 대통령행정실장을 지낸 세르게이 필라토프는 "옐친 대통령은 말년에 그에 의해 이룩된 업적(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이 눈앞에서 무너지는 것을 보고 몹시 괴로워했다"고 밝혔다. 그는 "옐친은 그러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집권하는 동안 그의 정책에 간섭하지 않으려 애쓰며 공개적 비판을 삼갔다"고 말했다.
한편, 노무현 대통령은 24일 푸틴 대통령과 옐친 전 대통령의 부인에게 조전을 보내 위로의 뜻을 전했다.
석학 초청 특강 ’21세기에 다시 보는 해방후사 ③’
6.25 전쟁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들 – “북침설·함정설은 증거 불충분한 주장이며 폐기돼야 한다”
1980년대에 미국의 몇몇 역사학자들이 종래의 남침설을 뒤집고 남한이 먼저 북한을 공격해 6·25전쟁이 발발했다는 북침설을 제기했다. 이 이론은 한국 사회의 변혁운동과 맞물려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6·25전쟁의 실체는 무엇인가. 북한의 남침일까, 아니면 남한이 미국과 음모를 꾸며서 북한을 선제공격한 것일까. 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에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이정식 명예교수가 해답을 내놓았다. 지난 11월 23일 서울캠퍼스 오비스홀 111호에서 개최된 ‘2011 석학 초청 특강’ 세 번째 강연에서 이정식 명예교수는 “북침설은 증거가 허약하며, 확고한 증거로 증명할 수 없는 가설(hypothesis)은 폐기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연 첫 머리에서 이정식 명예교수는 북한 방문 때의 일화를 들려줬다. 북침설을 주장하는 영화를 관람한 뒤 북한 안내원에게 “누가 전쟁을 시작한 것이냐”고 묻자 “우리가 어떻게 미제를 이길 수 있는가. 미제가 먼저 공격했다는 증거가 많다”고 대답했다. 그의 말대로 북한에는 6·25 관련 자료가 많이 있다. 이른바 ‘노획 문서’다. 전쟁이 나자마자 서울이 함락되는 바람에 이승만 정부가 자료를 수습하지 못한 채 서둘러 피난을 가야 했기 때문에 고스란히 북한의 손에 넘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6·25 관련 자료는 미국에도 산더미만큼 쌓여 있다. 인천상륙 작전에 성공한 후 압록강까지 진격하면서 동사무소에서 수상 관저까지 샅샅이 뒤져 노획한 문서들이다. 문제는 자료들의 증거 능력이다.
“북침설은 가공의 문건에 기초한 상상력의 산물”
북침설은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이 경무대(지금의 청와대)에서 노획한 2개의 문서에 크게 의존하는 주장이다. 하나는 1949년 10월 20일 로버트 올리버(Robert T. Oliver) 교수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이고, 다른 하나는 이승만이 미국에서 한국으로 귀국하기 전 일본 도쿄에서 ‘이 대령(Colonel Rhee)’이라는 직함으로 워싱턴에 있는 굿펠로(Goodfellow) 대령에게 보냈다는 전보 내용이다.
로버트 올리버는 펜실베이니아대학(State College of Pennsylvania) 교수로 이승만의 자문역을 맡아 두 사람 사이에는 편지 왕래가 잦았다. 편지에는 이승만의 심정이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이승만은 “소련은 냉전에서 이기고 있으며, 공산주의자들이 세력을 더 키우기 전에 북한에서 공산당을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정식 명예교수는 “이승만이 북한을 공격할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미국의 입장은 달랐다”고 말했다. “로버트 올리버는 이승만의 생각이 미국의 지지를 얻지 못할 것이며, 북한을 공격하자는 얘기는 더 이상 꺼내지 말라는 답장을 보냈다”는 것이다. 또 “당시 이승만이 올리버 교수에게 쓴 편지는 워싱턴으로 보내졌으므로 북한이 가지고 있다는 편지는 사본에 불과해 증거 능력이 약하다”고 비판했다.
다음으로, 이승만이 한국으로 귀국하기 전 도쿄에서 극동미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을 만나 북침 계획을 꾸몄다는 ‘음모설’에 대해서는 “당시 맥아더는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미국 정부도 3차 대전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주장했다. 1945년 10월 13일 이승만이 도쿄에서 굿펠로 대령에게 보냈다는 전보와 관련해서는 “원본이 보관돼 있다는 후버기념도서관(Hoover Institution Archives)에 문의한 결과, 한 박스를 다 뒤졌지만 그런 전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회신이 돌아왔다”면서 “맥아더·이승만 음모설은 가공의 문건에 기초한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반박했다. 북침설을 뒷받침하는 주춧돌 한 개가 빠진 만큼 수정주의 역사학자들의 논리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6·25전쟁의 수수께끼와 관련해서 또 하나 등장하는 것은 이른바 ‘함정설’이다. 이승만이 미국과 짜고 북한이 남한을 공격하도록 함정을 팠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이정식 명예교수는 “전쟁이 난 후 불과 2개월 만에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해 정부를 제주도로 옮겨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는데 자신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들 정도로 위험한 함정을 파는 어리석은 사냥꾼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했다.
그렇다면 북한은 왜 지금까지도 북침설을 주장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이정식 명예교수는 “공산진영 내부 선전용”이라고 주장했다. 1950년 UN은 안보이사회를 열어 북한을 침략국으로 규정하고 최초의 UN군을 한국전쟁에 투입했다. 따라서 북침설이 입증된다면 이 모든 조처들이 무효화되는 것이다. “여러 가지 역사적 증거들은 북침설을 부정하고 있지만 그런 주장은 적어도 공산진영 내부를 설득하고 동원하는 데 효과가 있었다”고 이정식 명예교수는 분석했다.
미국은 왜 6·25전쟁에 참전했는가
강연이 끝난 뒤 대전에서 올라온 한 여학생은 “미국이 한반도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다면 왜 6·25전쟁에 참전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정식 명예교수는 “원래 강연 원고에 있었지만 시간이 모자라 설명을 생략했었다”면서 또 하나의 수수께끼를 풀어나갔다. “북한군이 예상외로 강했다는 점이 미국의 전략을 수정하게 만든 요인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훈련이 잘 된 북한군은 소련제 탱크와 전투기로 무장하고 개전 2개월 만에 파죽지세로 낙동강 전선까지 밀어붙였다. 1949년 남한에 주둔했던 미군을 철수시킬 때까지만 해도 미국은 남한이 소련에 점령당하는 것을 인정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침의 배후에 소련이 있으며 6·25전쟁이 세계 공산화의 전초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전쟁에 참여하게 됐다는 분석이다. 한반도를 막아내지 못한다면 제3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 한국전쟁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2시간 동안의 강연을 마치며 이정식 명예교수는 학생 청중들에게 학문의 자세에 대한 가르침을 들려줬다. “한국 현대사는 여러 가지 일들이 서로 연관돼 있어 어느 한 가지 수수께끼를 풀면 다른 것들도 풀릴 수 있다. 그렇지만 역으로 말하면, 어느 하나를 풀었다고 해서 ‘진실은 이것이다’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교훈이다. 이정식 명예교수는 “한국 현대사 관련 자료는 많은 부분이 전쟁 중에 불타 없어지고 당시를 경험한 증인들도 상당수가 사망했기 때문에 ‘궁핍한 역사’이며, 그렇기 때문에 온갖 설이 난무할 뿐 진실을 파악하기는 어렵다”고 전제한 뒤 “그럴수록 꾸준히 파고들어가는 학문적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2011 석학 초정 특강’ 마지막 강연 ‘6·25의 전화위복: 대한민국의 발전’은 오는 11월 29일 오후 3시 오비스홀에서 개최되며 강연이 끝난 뒤에는 라운드테이블이 이어진다. 패널은 김학준 단국대학교 이사장,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 이주영 건국대 명예교수, 도정일 후마니타스칼리지 대학장, 허동현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등 5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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