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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관소/문화사 &시사

박정희 (1940 --1945) ==>>>. 만주군관학교 재학 시절 (1940 ~ 1942)

                

                            만주군관학교 재학 시절 (1940 ~ 1942)



                                                                                                           

                                                  "긴 칼 차고 싶어서 갔지.” 


                             

만주군관학교 지원서류에 혈서와 채용을 호소하는 편지


정희는 일제의 만주국의 군관으로 지원했지만 연령 초과로 1차에서 탈락했다. 



만주신문 1939년 3월 31일자를 증거로 내세운 민족연구소의 주장에 따르면 박정희는 만주군에 다시 지원하면서 지원서류에 혈서와 채용을 호소하는 편지를 첨부하여 제출함으로써 반드시 만주군에 들어가려고 했다고 하며, 혈서라고 알려진 인용문은 다음과 같다.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 



동봉된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첨부되어 있다.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1939년 3월31일치 <만주신문> 7면 기사 전문

혈서(血書) 군관지원 
반도의 젊은 훈도(訓導)로부터

29일 치안부(治安部) 군정사(軍政司) 징모과(徵募課)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 공립소학교 훈도(訓導) 박정희군(23)의 열렬한 군관지원 편지가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합격 증명서, 그리고 ‘한목숨 다바쳐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는 혈서를 쓴 종이와 함께 동봉된 등기로 도착해 담당자를 감격시켰다. 동봉된 편지에는

(전략) 일계(日系) 군관모집요강을 받들어 읽은 소생은 모든 조건에 부적합한 것 같습니다. 심히 분수에 넘치고 송구스러운줄 아오나 무리가 있더라도 반드시 국군(만주국군-편집자 주)에 채용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중략)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할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이 다하도록 충성을 다 바칠 각오입니다. (중략) 한 사람의 만주국 군인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일본 : 편집자 주)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도 바라지 않고.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후략)

라고 펜으로 쓴 달필로 보이는 동군(同君)의 군관지원 편지는 이것으로 두 번째이지만 군관이 되기에는 군적에 있는 자로 한정되어 있고, 군관학교에 들어가고자 해도 자격 연령이 16살 이상 19살까지이기 때문에 23살로는 나이가 너무 많아 동군(同君)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정중히 사절하게 되었다. (『滿洲新聞』1939.3.31.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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血書▶◁軍官志願 
 半島の若き訓導から

 二十九日治安部軍政司徵募課へ朝鮮慶尙北道聞慶西部公立小學校訓導朴正熙君(二三)より熱烈なる軍官志願の手紙が戶籍騰本、履歷書、敎練檢定合格證明書とともに"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と血書した半紙を封入、書留で送付されて?く係員を感激せしめた、同封の手紙には

 (前略)

 日系軍官募集要綱を拜讀しますと小生は凡ての條件に不適合の樣であります。甚だ僭濫にて恐懼の至と存じますけれども御無理を申しあげて是非國軍に御採用下さいませんてせうか

 (中略)

 日本人として恥ちざつだけの精神と氣魄とを以て一死御奉公の堅い決心でこざいます。しつかりやります。命のつ?く限り忠誠を盡す覺悟でこざいます。

 (中略)

 一人前の滿洲國軍人として滿洲國のため延いては祖國のため何で一身の榮達を欲しませう、滅私奉公、犬馬の忠を盡す決心でこざいます

 (後略)

 とペンで達筆に認めてあり同君の軍官志願の手紙はこれで二度目であるが軍官なるには軍籍のある者に限られてをり、軍官學校へ入れるにしても資格年齡十六歲以上十九歲であるため二十三歲では年が多過ぎるので同君には氣の毒ではあるが鄭重に謝絶することになつた=寫眞 朴君

 









박정희를 친일파로 분류하지 않은는 혈서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친일혈서를 작성했다는 만주신문 기사도 사전 발간 직전에 알게 돼 다시 거론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한편 박정희와 같이 교사생활을 한 유증선은 조갑제 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박정희에게 혈서를 쓰도록 권유했으며, 그 말을 들은 박정희가 즉시 시험지에다가 핏방울로 혈서를 썼다고 말했다. 조갑제도 "여러 사람들의 증언을 종합할 때 혈서설이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라고 평가했다.


'박정희 평전:가난에서 권력까지'를 쓴 이정식 경희대 석좌교수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박정희 혈서에 대해 "1939년과 1940년 당시 일본군에 입대하기 위한 혈서 제출은 일종의 유행이었다"라고 말했다. 



1940년4월1일 박정희는 만주국육군군관학교(신경군관학교)에 제2기생으로 입교하였다. 이때의 박정희의 동기생들 가운데는 5·16에 가담한 사람이 없었으나, 간도용정의 광명중학 출신의 선배 기수에서 5·16을 지지하게 되는 등, 이 때의 인맥은 박정희의 지지 기반이 되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http://ko.wikipedia.org/wiki/%EB%B0%95%EC%A0%95%ED%9D%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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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군관학교 입학



 박대통령은 자신에 대한 소년용 전기를 준비하고 있던 김종신 공보비서관 이 "각하는 왜 만주에 가셨습니까"라고 묻자 단순명쾌하게 이야기했 다. 
"긴 칼 차고싶어서 갔지". 


박정희는 1939년 10월 만주 목단강성에 있는 만군 관구사령부내 장교구락부에서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제2기 시험을 치렀다. 시험과목은 수학,일본어,작문,신체검사 등이었다. 

이 재기(작고·육군대령예편)도 같은 장소에서 시험을 치렀다. 이재기는 시험이 시작되기 직전에 만주군 대위가 국민복을 입은 청년을 데리고 들어오길래 시험감독관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청년이 수험생 자리 에 앉는 게 아닌가. 나중에 알고 보니까 대위는 간도특설대에 근무하 던 강재호였고 수험생은 박정희였다. 

다음해 1월4일자 만주국 공보에 '육군군관학교 제2기예과생도 채용고시합격자공보'가 실렸다. 
박정희 는 240명 합격자(조선인이 11명 포함된 만주계) 가운데 15등, 이한림 (전 1군사령관)은 봉천에서 시험을 치렀는데 20등이었다. 



박선생을 쫄쫄 따라다니던 5학년생 강신분 어유남 서광옥은 박선 생이 만주로 떠난다는 소식을듣고 하숙집을 찾아갔다. 울면서 매달리 는 이들에게 박선생은 "우리 조선사람은 조선사람으로서 할 일이 있 다"면서 선물들을 하나씩 나누어 주더라는 것이다. 박정희가 문경을 떠날 때는 많은 유지들과 학부모,학생들이 버스정류장에 나와서 전송 했다. 



박정희는 고향에 들렀다가 3월 하순에 구미역 북행선 플랫폼에서 어머니와 헤어졌다. 칠순 나이의 백남의는 박정희의 옷자락을 붙들면 서 "늙은 어미를 두고 왜 그 먼 곳에 가려고 하느냐"고 했다. 노안에 눈물이 맺히는 것을 뒤로 하고 박정희는 기차에 올랐다. 박정희가 뒤 돌아보니 그의 어머니는 흰옷그림자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들어 흔들고 있었다. 


박정희는 1940년4월에 만주제국 육군군관학교에 제2기생으로 입교했 다. 제2기생은 만계2백40명, 일계2백40명으로 구성되었다. 조선인 11명 은 만계에 포함되었다. 

박정희의 동기생은 이한림(1군사령관,건설부장 관 역임) 김묵(육군소장 예편) 이재기(작고·육군대령 예편) 이섭준(이 섭준·작고) 이병주(군내 남로당 수사 때 연루되어 숙청됨) 이상진(숙 청) 안영길(숙청) 강창선(숙청) 김재풍(재북) 김원기였다 



박정희의 동기생들 가운데는 5·16거사에 가담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오히려 박정희의 쿠데타를 저지하려고 한 사람이 있는데 당시 1군사령관 이한림 중장이었다. 

1기생은 13명으로서 12명이 간도 용정 에 있던 광명중학교 출신들이었다.

 이 선배기수에 박정희의 5·16을 지 지한 핵심인물들이 있었다. 이주일(최고회의 부의장·당시 2군참모장) 김동하(작고·해병대 소장) 윤태일(작고·육군중장, 서울시장) 박임항 (작고·당시 5군단장) 방원철(당시 육군대령)이 그들이다.

 김포주둔 해 병여단을 이끌고 선두에서 한강을 건넜던 김윤근여단장은 만주군관학교 제6기출신이었다. 박정희와 주한미군측의 화해를 도왔던 강문봉(육군중 장예편)은 박정희의 3년 후배(5기)였다.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 가지 않았더라면 5·16거사는 성공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만군인맥 은
 박정희의 단단한 기반이 되었다.



만주군관학교 1∼7기생출신 한국인들은 48명. 그들중 10명 정도는 5·16지지세력으로 분류된다. 이와 비슷한 인원이 좌익으로 기울어 여 순14연대 반란사건을 전후한 숙군수사 때 제거되었다. 

좌익과 우익이 공존하고 교차한 만주군관학교 인맥의 한가운데 있었던 것이 두 세계를 다 경험한 박정희였다. 


만군인맥은 끈끈한 인간관계에 바탕을 둔 강력한 결속력으로 유명했 다. 

이런 단결력과 함께 그들은 사회와 국가를 건설하고 개혁하겠다는 정치성향이 강했다. 일제에 의한 중국 대륙 침략에 있어서 첨병으로 뽑 혔다는점이 그들로 하여금 권력과 총구의 함수관계와 개혁과 군대의 역 할에 대하여 눈을 뜨게 만들었으며 현실을 직시하도록 했다. 

국가건설 과 사회개혁에 대한 열정은 같았지만 그 방법에 있어서 만군군관학교 인맥은 좌, 우로 갈렸던 것이다. 박정희와 몇 사람들은 먼저 좌익으로 기울었다가 환상이었음을 깨닫고 우익으로 전향한 경우이다. 
이 전향이 늦어 처형된 사람들도 6명이나 된다. 


만군인맥을 4년제 만주군관학교(신경, 지금의 장춘)의 전신인 2년제 봉천(지금의 심양)군관학교로 넓혀보면 봉천 5기 정일권(작고·육군참 모총장, 국회의장) 신현준(해병대사령관) 김백일(육군중장·작고), 9기 백선엽(육군참모총장)이 등장한다. 원용덕(육군중장·작고)은 만주 육 군군의 학교출신이다. 이들 만군인맥은 거의가함경도와 간도 출신들이 다. 


이들이 6·25동란 때는 공산군의 침력을 저지하는 지휘관들이었고 전후에는 한국군을 사실상 지배하였다. 함경도 출신 만군인맥은 경상도 출신 박정희를 뒷받침하여 5·16거사를 성공시키는 데까지는 함께 갔으 나 그 뒤의 권력투쟁에서 박정희-김종필 세력에 의해 거세되어(소위 '알라스카 토벌작전') 권력의 무대에서 퇴장한다. 


박정희의 만주행은 이러한 만군인맥과의 연결고리를 만들었을 뿐 아 니라 집권한 뒤에는 일본의 만주인맥과 제휴하는 고리가 되었다. 박정 희가 만주군관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있던 무렵에 만주국 총무청차장(산 업부차장)으로서 사실상 괴뢰국 경영의 실권을 쥐었던 기시 노부스케 (일본수상 역임)와 시이나 산업부 국장(자민당 부총재 역임)은 일본내 만주인맥의 중심으로서 한일 국교정상화에서부터 박정희 정권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다. 


인맥이나 인간의 성격은 무대가 되었던 지역의 성격을 닮는 면이 있 다. 도시는 영리함을, 농토는 성실함을, 초원은 활달함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1930∼40년대의 만주는 질풍노도의 시기로서 이 시대를 호흡한 사람들을 과감한 행동파로 만들었다. 

만군인맥의 공통점은 결속력, 친 화력,행동력, 그리고 정치지향으로 상징된다. 이종찬(육군참모총장) 이 형근(육군참모총장)으로 대표되는 일본육사출신들은 엘리트의식이 강하 고 깔끔하며 비교적 정치에 중립적인 성향을 보였다. 

일본육사에서도 2년을 보낸 박정희는 만군과 일군인맥의 성격을 공유하게 된 면이 있다. 
단정하고 사색적인 면은 일군인맥을 닮았고 정치지향과 행동력은 만 군적인 것이다. 


박정희가 자신의 운명을 바꾼 만주대륙을 처음 구경한 것은 1935년 대구사범 4학년 수학여행 때였다.
 이때 그가 어떤 충격을 받았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동급생들의 기행소감을 기준으로 하여 짐작은 할 수가 있다. 이성렬(82·전 김해여중 교장)은 이렇게 말했다. 

'만주를 우리 영토로 착각할 정도였다. 여권도 필요없고 검문검색도 없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대평원, 그것은 황량한 신천지였다. 신경 의 관동군사령부도 견학할 수 있었다.
 대포 탱크 같은 신예무기도 보여 주었는데 '까마득한 절망감'을 느꼈다. 일본의 세력이 이 광활한 대지 곳곳에 미치고 있음을 실감했다. 우리의 기를 꺾어놓겠다는 것이 이 수 학여행의 목적이었을지도 몰랐다. 

일본의 저력을 보라는 취지였을 것이 다. 지금 생각하면 이광수가 변절한 것도 이해를 할 수 있을 것같다. 그도 이런 일본을 상대로 어떻게 저항하란 말인가 하는 무력감을 느꼈 으리라. 대련의 기름짜는 공장을 견학했는데 꾸리(고력)라고 불리는 중 국인 노동자들이 나체상태에서 일하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식사하는 것을 보았는데 검은 빵을 손으로 뜯어서 입에 넣고 파를 춘장이라 불리 는 중국식 된장에 찍어먹는 것이 전부였다. 만주국을 세운 일제는 5족 협화를 부르짖었지만 대우는 일본인 다음이 조선인이고 한족과 만주족 은 그 뒤이고 몽골인이 최저였다. 우리는 착잡한 마음이 되어 대구로 돌아왔다'. 


박정희와 단짝이었던 김병희(전 인해대학장)는 "끝간 데 없이 계속 되는 수수밭과 붉게 타오르는 태양, 그리고 신경의 엄청난 신시가지 건 설이 인상적이었다"고 회고했다. 수학여행 경로에는 여순의 러일전쟁 전적지인 203고지 견학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의 노기 대장이 기관총 을 처음으로 실전에 동원한 러시아 수비대에 대해 수만 명을 희생시켜 가면서 점령한 고지였다. 


박정희가 발길을 내디딘 당시의 만주는 '동양의 서부'였다. 야망에 불타는 군인과 관료들, 만주철도회사 조사부와 같은 세계최대의 두뇌집 단, 관동군, 만주군, 팔로군, 장개석군, 마적, 김일성계 빨치산, 첩자, 아편 밀매자, 사기꾼 등 갖가지 모습의 인간군상이, 5족(일본족, 조선 족, 한족, 만주족, 몽골족)과 뒤엉켜 사는 이 넓은 대지에서 기회를 찾 아 나름대로의 꿈을 펴려고 좌충우돌하고 있었다.

 좋게 말하면 용광로 요 나쁘게 표현하면 쓰레기통이고 시궁창이었다. 야만, 음모, 살인, 방 화, 벼락출세, 떼돈벌기 등 비일상적인 사건이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 었던 만주는 박정희를 단련, 오염, 고무시키면서 안개처럼 그를 감싸게 되는 것이다. 



박정희대통령 인터넷 기념관
http://www.516.co.kr/client/news/nw_viw.asp?idx=4341&cpage=1&b_cate=1&m_cate=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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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만주군관학교 지원때 “목숨바쳐 충성” 혈서 사실로



민족문제연구소, 당시 신문 공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일제강점기 만주국 군관에 지원하면서 “죽음으로써 충성을 맹세한다”는 내용의 혈서를 써냈다는 당시 신문 기사가 발견됐다. 그동안 설로만 떠돌던 박 전 대통령의 ‘혈서 지원’이 객관적 방증으로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민족문제연구소(소장 임헌영)는 <친일인명사전>의 전면 공개(8일)를 사흘 앞둔 5일, 이 사전에 친일인사로 수록된 박 전 대통령 관련 내용을 공개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와 함께 박 전 대통령이 1939년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군관에 응모하면서 지원서류와 함께 ‘충성’을 다짐하는 혈서와 청탁 편지 등을 보냈다고 보도한 당시 <만주신문> 기사를 함께 공개했다.


만주국에서 일본인들이 발행한 <만주신문>은, 1939년 3월31일치 7면에서 ‘혈서 군관지원’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29일 치안부 군정사 징모과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 공립소학교 훈도(교사) 박정희군(23)의 열렬한 군관 지원 편지가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합격 증명서와 함께 ‘한목숨 다 바쳐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는 혈서를 넣은 서류로 송부되어 담당자를 감격시켰다”고 보도했다.


또 이 신문은 박정희 훈도가 편지에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라고 적었다고 전했다.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총장은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앞두고 박 전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씨가 ‘게재·배포 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는 등 정치 쟁점화하고 있다”며 “불필요한 논란이 정리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겨레신문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86102.html








만주국 위해 犬馬의 충성” 박정희 혈서 신문 공개



박정희 전 대통령이 혈서를 쓰고 만주군에 지원했다는 내용의 옛 신문기사가 공개됐다.

민족문제연구소는 1939년 3월 11일자 ‘만주신문’의 사본을 공개하고, 박 전 대통령이 당시 만주국 군관이 되기 위해 혈서까지 써가며 채용을 호소했다고 5일 밝혔다. 연구소는 8일 박 전 대통령 등이 포함된 친일인명사전을 발표할 예정이다. 만주신문은 일제시대 만주 지역에서 일본어로 발행되던 신문이다.

이 신문에 실린 ‘혈서(血書) 군관 지원, 반도의 젊은 훈도(訓導)로부터’라는 기사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은 연령 초과로 만주국 군관 선발에서 탈락하자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이라는 혈서를 써 편지에 동봉했다. 박 전 대통령은 편지에서는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라고 적었다.

연구소 관계자는 “박 전 대통령의 언행이 담긴 객관적인 사료를 공개해 불필요한 논란 확대를 막고, 이성적인 토론으로 전환하는 계기로 삼자는 것”이라고 기사 공개 배경을 설명했다.


국민일보| 기사입력 2009-11-06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05&aid=0000385462&






박정희는 血書를 쓰고 滿軍에 갔다'



나는 박정희를 '교사, 군인, 혁명가'라고 표현한다. 이 세 가지 이력과 性格이 한 몸에 통합되어 있다. 그는 국민들을 군대식으로 가르치고 국가를 혁명적으로 改造한 사람이다. 그가 문경 산골의 국민학교 교사직을 그만두고 군인의 길로 가지 않았더라면 혁명가는 될 수 없었을 것이다. 
  
  
  1998년 서울 강남구에 살고 있던 유증선 할아버지는 나이가 87세였지만 상당히 또렷한 기억력을 갖고 있었다. 그는 박정희와 함께 교사 생활을 했던 분들 중에서는 유일한 생존자이다. 지금까지 박정희 선생에 대한 증언들은 거의 전부가 제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자연히 과장과 오해, 그리고 미화가 있을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동료 교사 유증선의 증언은 객관적이고 좀더 정확할 것이다. 그의 증언을 요약해본다. 
  
  <내가 문경공립보통학교에 부임한 것은 1938년 4월 초로서 박정희 선생이 근무 중일 때였다. 나의 아내는 임신 중이라 친정으로 보내고 하숙집을 찾아야 했다. 그때 학교 숙직실은 박정희 선생이 이미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박 선생의 양해를 얻어서 한 방에서 同宿(동숙)했다. 당시 나는 50원의 월급을 받고 있었다. 생활비를 줄이려고 시작한 숙직실 생활은 아리마 교장이 개입하면서 중단되었다. 그는 점잖게 ‘숙직실은 숙직 교사들을 위한 것인데 두 분이 여기서 잠을 자면 곤란하지 않은가’라고 했던 것이다. 나는 짐을 싸들고 하숙집을 구해서 내려갔다. 박 선생은 김순아 여인의 하숙집으로 돌아갔다. 
  
  우리가 숙직실에서 가까이 지낼 때 박정희 선생은 도무지 말이 없었다. 그러나 할 말은 반드시 하는 사람이었다. 강직한 성품에서 나는 ‘이 사람은 군인이 되어야 할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가 바로 대쪽이었다. 남이 싫어하고 피하는 일도 자신의 판단에 따라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거침없이 자신의 소신을 밝히고 해치우는 것이었다. 나는 어떻게 이런 성격을 갖게 되었는지 신기했다.



 한번은 운동장에서 나를 옆에 세워놓고 기계체조를 해 보였다. 그는 가볍게 철봉을 잡더니 ‘大車輪(대차륜)’을 하는 것이었다. 철봉에 매달려 몸을 쉬지 않고 휘휘 돌리는 것이었다. 꼭 철봉에 붙어 있는 것같이 자유자재였다. 공부벌레들만 있다고 하는 대구사범에서 저런 운동을 언제 배웠는지 놀랄 따름이었다. 
  
  박 선생은 교사들과는 비사교적이었지만 희한하게도 어린이들에게는 다정다감하게 대하는 것이었다. 코흘리개들과도 사근사근 이야기를 잘도 하는 것이었다. 보통 교사들이 제자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것은 권위를 지키는 것이 교육상 더 유리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 선생은 반대였다. 소풍을 가면 박 선생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아이들과 어울려 웃고 노래 부르는 것이 꼭 어린아이 같았다>
  
  유증선 할아버지는 안동교육대학 국문학과 교수를 지낸 뒤 은퇴했다. 그는 박정희가 왜 만주군관학교에 갔느냐에 대해서 通說(통설)과는 다른 새로운 증언을 했다. 
  
  <1938년 5월경이라고 생각된다. 숙직실에서 같이 기거하면서 솔직한 이야기를 서로 털어놓을 때였다. 박 선생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저는 아무래도 군인이 되어야겠습니다. 제 성격이 군인 기질인데 문제는 일본 육사에 가려니 나이가 많다는 점입니다. 만주군관학교는 덜 엄격하다고 하지만 역시 나이가 걸립니다.”
  
  박 선생은 호적상의 나이를 고치기 위한 방도를 이야기하면서 형 박상희에 대해서도 주섬주섬 말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존재에 비해서 형은 굉장한 사람이라는 의식을 깔고 하는 말이었다. 
  
  “우리 형님은 지금 고향에서 면장을 하고 있소. 성격도 활달하시고, 저는 이렇게 작고 보잘 것이 없지만 형님은 체격이 크고 외모도 훤칠하시지요. 저는 형님을 존경합니다.”
  
  나는 박 선생에게 “그러면 그 형님의 도움을 받아서 호적을 고칠 수 있지 않느냐”고 했다. 박 선생은 며칠동안 고향에 다녀와서 나이를 고친 것으로 알고 있다. 그가 한 살 낮추었다고 말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것으로 문제가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신원조회를 하면 학교에 있는 박 선생의 기록과 호적이 서로 틀려 말썽이 생길 것 같았다. 나와 박 선생은 숙직실에서 밤새 고민했다. 우리가 연구한 것은 ‘어떻게 하면 만주군관학교 사람들이 환영할 수밖에 없는 행동을 취할 것인가’였다. 
  
  내가 문득 생각이 나서 “박 선생,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쓰면 어떨까”라고 했다. 그는 즉각 찬동했다. 즉시 행동에 옮기는 것이었다. 바로 옆에 있던 학생 시험 용지를 펴더니 면도칼을 새끼손가락에 갖다 대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설마 했는데 손가락을 찔러 피를 내는 것이었다.



 박 선생은 핏방울로 시험지에다 ‘盡忠報國 滅私奉公(진충보국 멸사봉공)’이라고 썼다. 그는 이것을 접어서 만주로 보냈다. 그때 편지가 만주까지 도착하는 데는 1주일쯤 걸릴 때였다. 한 보름이 지났을까, 누군가가 만주에서 발행되는 신문에 박 선생 이야기가 실렸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 그 혈서가 신문에 보도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때 만주에 가 있던 대구사범 교련주임 아리카와 대좌가 도와줘서 그 혈서건이 신문에 났는지, 아니면 만주군관학교에서 신문에 자료를 제공했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목적은 달성된 것이다. 



  
  그로부터 며칠 뒤 아리카와가 보낸 편지가 박 선생 앞으로 도착했다. 
  
  박 선생은 “아리카와 대좌가 그렇게 군인이 되고 싶으면 자기에게 한번 다녀가라고 했다”고 말했다. 그 며칠 뒤 박 선생은 만주에 다녀온 것으로 알고 있다. 아리카와를 만난 모양이었다. 그는 옆구리에 《동양사》 등 몇 권의 책들을 들고 왔는데 “한번 시험을 쳐보라고 했으니 해볼 수밖에 없지”라고 했다. 
  
  그 직후에 우리는 교장의 지시로 숙직실을 떠나 하숙집으로 옮겼던 것이다. 박 선생은 아마도 교장한테 다시 양해를 얻어 숙직실로 돌아온 것 같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이 숙직실에도 나폴레옹 초상화를 걸어놓은 박 선생이다. 붉은 망토에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말을 탄 나폴레옹이었다.


 내 아들 柳浩文(유호문·전 건설부 산업입지국장)은 1939년에 문경보통학교에 입학했는데 담임선생은 박 선생이었다. 이 해 가을에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에 입학 시험을 쳤다. 박 선생이 일본인 교장과 싸우고 만주로 떠났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싸운 일이 없다. 


내가 1939년 봄에 한 3주간 일본시찰 여행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그런 일이 있었다면 몰라도. 나는 박 선생이 만주군관학교로 떠날 때쯤, 즉 1940년 봄에 영주로 전근을 갔다. 그 뒤에 소식을 들으니 박 선생이 만주군관학교를 거쳐서 일본 육사를 졸업한 뒤에 긴 칼을 차고 문경에 들러 대환영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역시 가야 할 길을 갔구나’하고 생각했다. 5·16 혁명 직전에 그가 대구에서 2군 부사령관으로 있을 때 만났더니 그는 영어책을 읽고 있다가 불쑥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가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뭔가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될 기운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정치에 관심이 없어 그런 건 잘 모르겠습니다”고 말했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박 선생을 만난 것은 그가 죽기 석 달 전이었다. 내 아들과 제자들도 함께 청와대로 초청하여 옛날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대통령은 나를 보고 “어. 대머리가 되셨네요”라고 말하여 좌중이 폭소를 터트렸다>
  
  
  박정희 선생이 혈서를 써서 만주군관학교에 입학 시험을 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는 동료 교사 유증선의 증언은 지금까지의 통설과 상반된다. 통설은 박정희가 교장과 싸우고 교사직을 그만둔 뒤 만주로 갔다는 것이다. 


이런 통설은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있을 때 많이 유포되었다. 이 통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박정희가 ‘독립운동을 할 힘을 기르기 위해서 滿軍(만주군) 장교가 되려고 했다’는 신화로 발전하기도 했다. 
  
  여러 사람들의 증언을 종합할 때 혈서說(설)이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박정희는 대구사범 재학 때나 문경 교사 시절에 늘 군인이 되겠다는 꿈을 키워 가고 있었다. 교장과의 불화 때문에 충동적으로 군인의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오랜 집념의 실천이었다. 1962년에 당시 최고회의 의장 비서였던 이낙선 중령이 정리해둔 비망록에서도 비슷한 대목이 발견된다. 



  
  <원래 일본 육사는 연령초과였고 만주군관학교도 연령초과였으나 군인이 되고자 하는 일념에서 군관학교에 편지를 하였다. 그 편지가 만주 신문에 났다(이렇게 군관을 지원하는 애국 정신이 있다고…). 이 신문을 보고서 姜(강) 대위가 적극적으로 후원하게 되었고 그와의 상면은 만주의 여관에서였다. 그로부터 강은 박의 引導人(인도인)이 되었고, 강은 당시 시험관이었다. 강-울산인>
  
  이낙선 중령이 당시 취재한 내용도 유증선의 증언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그러면 신화는 어떻게 탄생했던가. 대구사범 동기생으로서 그때 문경과 가까운 상주에서 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권상하(전 대통령 정보비서관)의 증언. 
  
  <1939년 10월 아니면 11월에 박정희가 보따리를 싸들고 나를 찾아 왔다. 머리를 길렀다고 질책하는 視學(시학·장학사) 및 교장과 싸운 뒤 사표를 던지고 나오는 길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만주로 가서 대구사범 교련주임 시절에 자신을 총애해 주었던 아리카와 대좌를 만날 예정이라고 했다. 우리집에서 하룻밤을 잔 뒤 열차편으로 떠나는 정희를 전송했다>
  
  박정희는 권상하 이외에도 몇 사람들에게 비슷한 말을 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박정희는 1939년 10월에 만주군관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고 학교로 돌아와서 계속해서 근무하다가 다음해 3월에 만주로 떠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박정희가 아리마 교장을 패주었다느니 술상을 뒤엎었다느니 싸우고 갔다느니 하는 말들은 뒷받침되지 않고 있다. 


더욱 이상한 것은 1976년 2월 17일 대통령 공보비서관 鮮于煉(선우연)이 작성하여 박 대통령의 결재까지 받아둔 ‘대통령 이력서’의 내용이다. 이 자료는 박 대통령이 읽고서 교정을 본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자료는 박정희가 만주로 떠난 동기에 대해서 ‘道(도) 장학사가 나이가 많은 아리마 교장에게 불손한 태도를 취하는 것을 보고 혐오를 느낀 것이 교사직 사임 원인의 하나이다’고 했다. 


아리마 교장이 여기서는 동정의 대상으로 둔갑하고 있다. 박정희는 그러면 왜 이런 신화가 만들어질 소지가 있는 말을 했을까. 혹시 자신의 만주行(행)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스스로 꾸며낸 말이 아닐까. 박정희보다 네 살 위인 누님 박재희는 생전에 이런 증언을 남겼다. 
  
  “동생이 가끔 내 집에 와서는 ‘죽어도 선생질 더 못해 먹겠다’고 말하곤 했어요. 어느 날 밤늦게 동생이 또 저를 찾아왔습니다. 만주군관학교로 가기로 결심했다고 하는 거예요. 아버님과 상희 형에게 교사를 그만두겠다는 이야기를 꺼냈다가 호통만 들었다면서 만주로 갈 수 있도록 노자를 달라고 했습니다. 며칠 뒤에 돈을 받아서는 본가에 들르지도 않고서 만주로 갔지요.”
  
  박정희의 둘째 형 박무희의 장남 재석에 따르면 박상희는 동생이 안정되고 대우받는 교사직을 팽개치고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가려고 하는 것을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여러 번 경찰서와 감옥에 끌려간 적이 있는 항일투사 박상희는 동생의 변절을 허용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박정희는 이러한 비난에 대한 일종의 변명거리로서 일본인 교장 및 시학과의 충돌설을 꾸며내거나 과장하여 퍼뜨린 것이 아닐까. 


모든 신화에는 작은 근거가 있듯이 박정희의 신화도 작은 사실에서 출발했을 가능성이 있다. 박정희가 만주로 시험을 치러 간 시기에 어떤 사건이 있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제자 황실광은 박 선생보다는 다섯 살 아래로서 졸업한 뒤에도 박 선생한테 자주 놀러갔다. 1939년 10월 어느 날 하숙집에 갔더니 그는 화를 삭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너하고도 자주 만날 기회가 없을 것 같다. 나쁜 놈 같으니 센진(鮮人)이 뭐야, 센진이. 그래 놓고도 지서장을 불러와 화해를 하라니. 내가 다른 것은 몰라도 그런 것으로는 화해 못 한다.”
  
  박 선생이 전해준 사연은 아리마 교장이 視學을 접대하는 술자리에서 조선인을 모욕하는 발언을 했고 자신이 크게 반발했는데 이런 논리였다는 것이다. 
  
  “내선일체의 정신은 조선인과 일본인이 하나가 되어 美英鬼畜(미영귀축)을 몰아내자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당신들은 조선인을 차별함으로써 천황의 뜻을 어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朴교사가 천황을 들먹이면서 교장을 몰아세우자 아리마가 당황하여 일본 경찰을 중간에 넣어 화해를 꾀했다는 것이다. 이 정도의 충돌이 우연의 일치로 만주군관학교 시험 시기와 비슷한 때에 발생했기 때문에 ‘항일 의식이 강렬한 박 선생이 악질 일본인 교장과 싸우고 독립을 준비하기 위하여 만주로 갔다’는 과장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정작 박 대통령은 자신에 대한 소년용 傳記를 준비하고 있던 김종신 공보비서관이 “각하는 왜 만주에 가셨습니까”라고 묻자 단순명쾌하게 이야기했다. 
  
  “긴 칼 차고 싶어서 갔지.” 



  
  사소한 사연은 어쨌든 이 말이 박정희의 만주행 미스터리에 대한 가장 정직한 해답일 것이다. 


박정희는 1939년 10월 만주 무단장(牧丹江)성에 있는 만주군 6관구 사령부內 장교구락부에서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제2기 시험을 치렀다. 시험과목은 수학, 일본어, 작문, 신체검사 등이었다. 李再起(이재기·작고·육군 대령 예편)도 같은 장소에서 시험을 치렀다. 


이재기는 시험이 시작되기 직전에 만주군 대위가 국민복을 입은 청년을 데리고 들어오길래 시험 감독관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청년이 수험생 자리에 앉는 게 아닌가. 나중에 알고 보니까 대위는 간도 특설대에 근무하던 강재호였고 수험생은 박정희였다. 


다음해 1월 4일자 <만주국 공보>에 ‘육군군관학교 제2기 예과생도 채용고시 합격자 공보’가 실렸다. 박정희는 240명 합격자(조선인이 11명 포함된 만주계) 가운데 15등, 李翰林(이한림·전 1군사령관)은 봉천에서 시험을 치렀는데 20등이었다. 
  
  박 선생을 졸졸 따라다니던 5학년생 강신분, 어유남, 서광옥은 박 선생이 만주로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하숙집을 찾아갔다. 울면서 매달리는 이들에게 박 선생은 “우리 조선 사람은 조선 사람으로서 할 일이 있다”면서 선물들을 하나씩 나누어주더라는 것이다.


 박정희가 문경을 떠날 때는 많은 유지들과 학부모, 학생들이 버스정류장에 나와서 전송했다. 박정희는 고향에 들렀다가 3월 하순에 구미역 北行線(북행선) 플랫폼에서 어머니와 헤어졌다. 
  
  칠순 나이의 백남의는 박정희의 옷자락을 붙들면서 “늙은 어미를 두고 왜 그 먼 곳에 가려고 하느냐”고 했다. 老眼(노안)에 눈물이 맺히는 것을 뒤로 하고 박정희는 기차에 올랐다. 박정희가 뒤돌아보니 그의 어머니는 흰옷 그림자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들어 흔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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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칼 차고싶어 만주 간 '교사 박정희'





▲ '박정희 선생님' 박정희는 20세 되던 해인 1937년 3월 문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 꼭 3년간 교사로 근무했다. 사진은 1939년 봄 학교 맞은 편 신사 자리에서 여제자들과 함께 찍은 모습으로, 뒷줄 왼쪽 끝이 군관학교 시절 편지를 주고 받았던 정순옥씨.
ⓒ 정순옥씨 제공
1940년 봄 어느날 그 해 보통학교를 갓 졸업한 정순옥(문경보통학교 26회 졸업생, 97년 당시 71세로 서울 강동구 거주함)씨는 한 살 아래인 사촌여동생(당시 문경보통학교 6학년)으로부터 분홍비단 손수건과 편지 한 통을 건네받았다. 그가 동생에게서 건네받은 손수건은 문경서는 구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편지를 받아 겉봉의 발신자를 보니 '만주 신경 육군군관학교 제3구 4연대 박정희'라고 적혀 있었다. 낯익은 글씨에 반가운 이름이었다. 편지를 보낸 주인공은 보통학교 6학년 때 1년간 자신을 가르쳤던 '박정희 선생님'이었다. 편지에는 조선말로 "처마 끝에 참새같이 짹짹이던 너희와도 이제 마지막이다. 어디로 갈 지 모르겠다. 씩씩하고 훌륭한 조선여성이 돼 주시오"라고 씌어 있었다.

▲ 박정희의 문경보통학교 여제자 정순옥씨.(97년 촬영)
ⓒ 정운현
지난 97년 취재차 만났을 때 정씨는 반세기 가까이 전의 일을 마치 엊그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만주로 가신 뒤 박 선생님 한테서 평균 2개월에 한 통 꼴로 편지가 왔습니다. 한번은 다카기 마사오(高木正雄)로 창씨개명했다고 알려왔더군요. 또 더러 편지에 사진을 같이 부쳐오기도 했는데 한번은 칼을 든 사진도 보내왔었습니다. 군관학교에 가신 후 2년여 편지왕래가 있었는데 마지막 편지 때 쯤 '이제 본과는 일본으로 간다'고 쓰셨던 기억이 납니다." 

문경보통학교에서 훈도(교사)로 근무하며 비교적 안정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었던 '교사 박정희'는 왜 돌연 만주로 간 것일까? 그의 '만주행'은 박정희 개인의 역사는 물론 우리 현대사에서도 하나의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만주행이 없었다면 '군인 박정희'는 없었을 것이고, 또 이후의 '5.16'도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만주행에 대한 비밀은 아직도 완전히 밝혀진 것은 없다. 당사자인 박정희 그 자신이 밝힌 것은 생전에 비서관에게 한 마디 툭 던진 정도가 전부이며, 주변 사람들의 증언 역시 정연한 것은 아니다. 이제 그 진실의 모자이크를 하나씩 꿰맞춰 보자.

그간 나온 박정희 관련 연구서나 잡지 기사 가운데 박정희의 만주행을 언급하면서 자주 거론되는 단골메뉴는 '장발사건'이다. 이 이야기의 발단은 그와 대구사범 동기생인 권상하(97년 당시 81세)씨의 증언에서 비롯됐다. 다음은 권씨의 증언 요지.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9년 당시 일제는 조선인들에게 전의를 고양시키기 위해 교사들도 군인처럼 머리를 빡빡 깎게 했다. 복장도 국민복, 국민모에 각반까지 차고 다니게 했다. 그런데 그 시절 박정희는 머리를 기르고 있었다. 그 해 가을 마침 연구수업 시찰을 나온 일본인 시학(장학사)이 박정희의 긴 머리를 보고 "아직도 총력정신이 결여된 교사가 있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그날 저녁 시학을 위해 교장 관사에서 연 연회에서 이것이 다시 논란이 됐고, 이튿날 교장이 그를 불러 간밤의 행동을 질책하자 울컥한 끝에 교장을 두들겨 패고는 그 길로 짐을 챙겨 문경을 떴다."

▲ '교사 박정희'의 마지막 흔적 사진은 박정희가 (소화 15년)1940년 3월 31일부로 '의원 면 본관', 즉 본인의 희망으로 교사직에서 물러난 사실을 발령한 사령 원부.
ⓒ 문경군청 소장
권씨의 이같은 증언은 객관성이 상당히 결여돼 있다. 우선 당시 일개 평교사가 일본인 시학과 교장에게 그같은 행동을 하기가 현실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는 것이 그것이다. 

특히 당시 '교사 박정희'의 모습을 담은 여러 장의 사진을 살펴 봐도 그의 장발 모습은 찾을 수 없다. 반면 당시 장발은 그가 아니라 학생들이었다는 한 여제자의 증언이 있다. 박 교사 부임 당시 2학년이었던 이순희(97년 당시 70세)씨가 그 증언자다.

"머리가 긴 것은 박 선생님이 아니라 학생들이었습니다. 당시 동네에 바리캉이 한 두 개 뿐인데다 그걸 빌리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돈을 주고 빌리기도 쉽지 않았구요. 그래서 제 때 머리를 깎지 못해 머리가 긴 학생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일본인 교사들은 이런 사정은 제쳐놓고 무조건 머리가 긴 학생들에게 벌을 세우곤 했습니다. 이런 일로 박 선생님과 일본인 교사간에 언쟁이 더러 발생하곤 했습니다."


'장발 사건'은 권씨가 꾸며낸 이야기이거나 아니면 과장됐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대체 그를 만주로 이끈 것은 무엇인가. 필자와의 얘기 끝에 여제자 이씨가 실마리가 될만한 얘기 하나를 불쑥 꺼냈다. 

"어느 핸가 시학관이 학교로 시학을 온다고 연락이 와서 3학년 여학생들이 옷을 잘 차려입고 정류소 앞에 도열해 기다린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박 선생님은 학교에서 평소 좋아하던 나팔을 불고 있었는데 급사가 가서 내려오시라고 해도 듣지 않자 일본인 교사들이 가서 박 선생님을 집단 구타하였습니다.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박 선생님은 '내가 꼭 복수해 주겠다. 조선에는 사관학교가 없다.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굴로 들어간다'고 얘기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뒤에 들으니 박 선생님께서 졸업한 제자에게 돈을 빌려 김천서 하룻밤을 자고 만주로 갔다고 들었습니다." 

1932년 봄 구미보통학교를 졸업(11회)한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에 진학했다. 대구사범의 경우 당시 지방학생들은 전원 기숙사 생활을 했다. 대구-구미간을 열차로 오가던 박정희는 열찻간에서 당시 대구간호학교에 다니던 네 살 연상의 '누님'을 한 사람 알게 됐다. 

두 사람은 당시 학생사회에서 유행하던 S-B(Sister-Brother, 누나-동생)사이가 되었다. 이들의 인연은 박정희가 교사가 된 이후에도 계속됐다. 주인공 주현숙(재미, 97년 당시 85세)씨를 취재한 한 전직 언론인의 증언을 들어보자. 

"박 대통령은 문경 교사 시절 때도 '집(구미)보다 여기가 가깝다'며 토요일마다 예천 주여사 댁으로 놀러오곤 했답니다. 그 때 두 사람은 모두 결혼한 상태였는데 박 대통령은 '마누라가 미쁘다고(마음에 안든다고) 꼬집어대서 못살겠다'는 얘기를 자주 했답니다. 

그런데 언젠가(1939년말) 한번은 박 대통령이 놀러와서 '군인이 돼 높은 사람이 돼서 오겠다'며 일본군가, 혁명가를 부르더랍니다. 그리고 얼마 뒤 다시 와서는 '누님, 내일이면 헤이다이상(군인)이 되러 갑니다. 술 좀 사주십시오' 해서 술을 사주었는데 그 다음날 예천역에서 만주로 간다며 떠났답니다." 


앞에서 여제자 이씨가 언급한 '김천'은 어쩌면 '예천'의 잘못인지도 모른다. (참고로 66년 1월 27일 경북 예천역 광장에서 열린 경북선(예천~점촌) 재개통식에 참석한 박 대통령이 행사장에서 주씨를 만나는 장면을 담은 사진을 재미교포인 주씨의 아들이 지난 97년 필자에게 보내온 바 있어 두 사람의 '인연'은 확인되고 있다.) 

주씨의 증언을 살펴보면 그의 만주행에는 가정생활에 대한 불만도 한 요인으로 작용했음이 읽혀진다. 실지로 그는 첫 부인과 부부사이가 썩 좋지 않았다. 문경에서 교사로 3년간을 보내면서 그가 부모형제와 처자가 있는 구미 본가를 찾은 적은 거의 없었다. 

▲ 박정희가 하숙했던 하숙집 주인 아들 임창발씨.(97년 촬영)
ⓒ 정운현
지난 97년 문경 현지취재 때 필자는 박정희가 교사 시절 2년여 동안 하숙했던 하숙집 주인의 아들 임창발(97년 당시 78세)씨를 만났다. 그는 박 대통령보다 두 살 아래로 친구처럼 지냈다. 

임씨는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셔서 나팔을 부셨던 것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면서 "방학 때도 고향에 안가시고 우리집에 머무셨고, 또 만주 군관학교 생도시절 휴가 때도 본가로 안가시고 우리집에 계시다가 가셨는데 부인과 사이가 좋지 않으셨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만주행은 부인과의 불화로 인한 도피심리가 한 요인이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러나 여제자 이씨와 '누님' 주씨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일본인에 대한 복수심이 단초가 됐고, 여기에 군인이 돼 출세하겠다는 야심이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생전에 그는 터놓고 얘기를 나눴던 김종신(74, 부산문화방송 사장 역임) 비서관에게 "긴 칼 차고 싶어 (만주로) 갔지"라고 얘기한 바 있다.

여기서 박정희가 언급한 '긴 칼'은 권력의 상징어로 볼 수 있다. 즉 그는 당시 군국주의 하에서 최고의 권력집단이었던 군인을 평소 동경했고, 그래서 군인이 되기 위해 만주로 갔다는 얘기다. 그와 '긴 칼'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 한 토막이 있다. 증언자는 앞에 등장했던 여제자 이씨다. 

"박 선생님이 만주로 떠난 지 3~4년이 지난 어느 여름방학 때 박 선생님이 긴 칼 차고 문경에 오셔서 십자거리에 계신다는 얘기를 듣고 달려갔지요. 누런색 군복에 빨간 견장, 붉은 군모, 그리고 에리(목 컬러)에는 별이 하나 그려져 있더군요. 그리고 칼을 하나 차고 있었는데 칼끝이 땅에 닿을 정도로 길었습니다. 

하숙집으로 자리를 옮긴 후 박 선생님께서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문턱에 그 긴 칼을 꽂고는 무릎을 꿇고 앉아서 '군수, 서장, 교장을 불러오라'고 하시더군요. 그 때 세 사람 모두 박 선생님 앞에 와서 머리숙여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아마 박 선생님이 교사 시절 괴롭혔던 걸 사과하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 모두 그 장면을 보고 통쾌해 했습니다."


박정희의 만주행은 그것이 개인적인 울분에서 기인한 것이든, 아니면 시대상황이 빚어낸 시대사적 산물이든 동기 자체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의 만주행이 '교사 박정희'를 '군인 박정희'를 만들었고 이후 그가 '권력자 박정희'로 변신하는 하나의 단초가 됐다는 점이다. '군인 박정희'가 없었다면 '대통령 박정희'도 우리 역사에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 만주로 떠나기 직전 '교사 박정희' 1940년(소화 15년) 2월 7일 와다나베 경부 송별식 기념촬영 사진. 이 사진은 그가 만주행에 오르기 직전 찍은 사진으로, 붉은 원 안이 박정희 교사다. 당시 그의 머리칼은 짧고 단정한 편이다.

"전사 소식 접하면 향 한 대 피워주게"
만주로 떠나는 박정희 교사 환송식 장면

1940년 2월 중순경 박정희는 만주행에 올랐다. 당시 (일본)군에 가는 사람에게는 모두 환송식을 해주는 관행이 있었다. 그 역시 군인이 되려 군관학교로 가는 길이니 이에 해당됐다.

당일 행사는 문경보통학교 바로 옆에 있는 버스정류장 자리였다. 마침 봄방학이어서 환송식 행사에는 몇몇 동료 교사와 학생 5~6명이 모습을 보였고, 주민들도 더러 참석했었다. 이들은 길 양 옆으로 도열해 만주로 가는 박 교사를 환송했다. 

당시 전송식 행사장에 참석했던 오태구(문경보통 31회 졸업생, 97년 당시 69세)씨는 "학교에서 간단한 행사를 마치고 참석자 일행이 버스정류장까지 따라 나가서 길가에 도열해 박 선생님을 전송했다"며 "당시 박 선생님은 붉은 글씨가 씌어진 띠를 머리에 두르고 있었으며, 전쟁터에서 목숨을 지켜준다는 센닌바리(千人針)을 들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박 교사는 환송 나온 동료교사들에게 "전사 소식을 접하면 향 한 대나 피워주게"라며 짧고도 비장한 한 마디를 던졌다. 그리고 훌쩍이는 어린 제자들의 어깨를 다독이며 "섭섭해 하지 말아라. 긴 칼 차고 대장이 돼 돌아오겠다"고 위로했다. 만주에서 그로부터 편지가 제자들에게 날아든 것은 이로부터 대략 한 달 뒤였다.

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3696



박정희, 日학교 입학하며 혈서까지 쓴건 일종의…


박정희가 권력을 추구한 건, 가난의 기억 때문
이정식 경희대 석좌교수
영어판 『박정희 평전』 출간

이정식 미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 겸 경희대 석좌교수가 『박정희 평전』(영어명 Park Chunghee)을 냈다. 지난해 11월 경희대에서 열린 한국현대사 특강에 참석한 이 교수의 모습. 그의 뒤 배경은 이 교수가 강연자료로 쓴 사진이다. 6·25전쟁 발발 일주일 전 미 국무장관 덜레스(안경 쓴 외국인) 일행이 의정부 북방 38선 접경에서 북쪽을 살피고 있다. [사진 경희대]

이정식(81) 미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 겸 경희대 석좌교수가 미국 아마존닷컴(amazon.com)에서 『박정희 평전(사진)』(영어명 Park Chunghee)을 출간했다. 박정희(1917~79) 전 대통령이 태어나던 20세기 초반부터 1961년 5·16군사쿠데타 발생까지의 현대사를 ‘인간 박정희’를 중심으로 재조명했다.

 이 교수는 역저 『한국공산주의운동사』로 70년대 이미 세계 학계에 필명을 날렸다. 주변의 권유로 4년 전부터 이 책을 준비했다고 한다. 한국·중국·일본에 남아 있는 박 전 대통령 관련 장소도 답사했다. 일주일 후에는 전자책도 나올 예정이다.

 -총선·대선을 앞둔 미묘한 시점에 책이 나왔다.

 “난 전혀 그런 생각을 안 했다. 몇 년간 질질 끌다가 이제 편집이 끝났다. 나는 박 전 대통령에게 신세 진 일이 하나도 없다. 1950년대부터 미국에 거주하며 오히려 유신에 반대했다. 박 대통령 비판으로 유명한 잡지 ‘사상계(思想界)’ 미국 통신원도 지냈다. 유신이 시작한 72년부터 9년 동안 한국을 찾지도 않았다.”

 -어떤 점에 역점을 두었나.

 “그의 부친 박성빈의 시대로부터 5·16쿠데타까지의 한국과 주변국 역사를 살펴보고, 어떤 상황 또는 이벤트가 인간 박정희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하는 점에 주목했다.”

 -책의 부제인 ‘From Poverty to Power(가난에서 권력으로)’는 어떤 의미인지.

 “가난이 권력을 추구하게 만들었다는 말인데, 박정희는 빈곤이 자기의 스승이었다고 했다. 산꼭대기에 놓인 그의 생가를 가보면 그 말 뜻을 직감할 수 있다. 부친 박성빈은 양반집 장남으로 과거를 준비하다 동학에 가입해 사형을 당할 뻔했다. 그 일로 가문에서 쫓겨났고 처가의 묘지기로 전락했다.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는 머리가 좋아 대구사범에 입학하지만 식대를 못내 매년 40여 일씩 결석했다. 초등학교에서 1등 하던 학생이 대구사범 70명 중 69등으로 졸업한 배경이다. 이런 가난의 기억이 그의 앞날을 좌우했다.”

 -대구사범 졸업 후 보통학교 교사가 돼 비교적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었을 텐데, 왜 만주군 군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다녔을까.

 “어릴 때 꿈이 장교가 되는 것이었다. 학창시절 나폴레옹과 이순신 전기도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다 대구사범 동창들이 하나 둘씩 일본유학을 떠나는데 자신은 가난한 처지라 그럴 수가 없었다. 군관학교에 가면 장교도 되고 고등교육도 받는 일석이조로 생각했다고 본다.”

 -민족을 배신한다는 생각은 없었을까.

 “만군 사관학교에 입학한 해가 1940년이다. 당시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중국을 몰아붙였다. 일본의 동양제패를 의심하는 이가 거의 없는 상황이었다. 일본의 비밀문서를 보면 일본에 비협조적이던 한국인 대부분이 협조적으로 변했다고 되어 있는 시기다. 23세의 박정희 역시 이런 분위기에 잠길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입학원서와 함께 혈서까지 썼는데.

 “1939년과 1940년 당시 일본군에 입대하기 위한 혈서 제출은 일종의 유행이었다. 혈서를 쓴 한국 청년이 39년 첫 해엔 45명, 다음 해 40년에는 168명이었다. 그의 군관학교 입학이 혈서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일본을 적대시 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라, 그의 부친이 동학에 연루돼 묘지기로 연명하는 형편에서, 조선왕조가 계속됐다면 박정희가 어떤 교육을 받았을까. 일본은 그에게 교육을 시켜주었고, 장교가 될 기회를 주었다.”

 -박 전 대통령을 상당히 옹호하고 있다.

 “그렇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청년 박정희의 심정과 행동을 이해해 보자는 것이다. 그것이 옳았다 글렀다 하는 판단을 내리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나 역시 일제시대를 살아온 한 사람으로 당시 인물에 대한 이해가 우선 앞서는 건 사실이다.”

 -남로당원으로 활동한 경력은.

 “남로당에 가입한 것은 그가 어릴 때부터 의지해 왔던 셋째 형이 광복 직후 미군 치하의 경찰 총에 죽은 이후였다. 당시 한국 사람 대부분은 미군정에 실망했고 반대했다. 이런 상황에서 형의 친구였던 이재복 목사가 남로당 군사책임자로 있으면서 박정희 대위를 끌어드렸다. 미군정하에서 남로당은 불법단체가 아닌 합법단체였다.”

 -61년 쿠데타는 어떻게 평가하는지.

 “나는 당시 올 것이 왔다는 심정이었다. 이승만 박사는 너무나 노쇠했기에 주변의 인물들에게 좌지우지 되었고, 4·19혁명 이후 정권을 잡은 민주당 지도자들은 일찍 세상을 떠나거나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사회는 더할 나위 없이 혼란했다. 장준하씨와 김준엽 교수가 주도하던 잡지 ‘사상계 ’가 5·16을 지지한 건 그런 배경에서였다.”

◆이정식=1931년 평안남도 안주 출생. 한국 독립운동사와 공산주의운동사 연구의 기초를 놓았다. 33년 만주로 이주해 성장기를 보냈고, 48년 북한으로 귀환했다가 1·4후퇴 때 남하했다. 미군 장교의 도움으로 미국에 유학, UC버클리 대학원에서 ‘운명적 스승’ 스칼라피노 교수를 만났다. 『한국의 민족주의운동사』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와 함께 이승만·서재필·여운형 등 주요 현대사 인물 평전을 펴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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