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보관소/문화사 &시사

신응수 대목장(숭례문 복원 도편수) ==>> 법적& 도의적 책임 없나?

                                        

                               

                         신응수는 누구?











 

궁궐 대목장의 맥 이은 ‘우리 시대 마지막 도편수’

신응수씨의 고향은 충남·북의 경계인 충북 청원군 오창면이다. 충남 병천중학교에 입학해 20리길을 걸어다녔다. 9남매 중 여덟째. 집안 형편 때문에 진학을 포기하고 17살 때 상경했다. 목수였던 사촌형을 따라 공사판을 떠돌았다.

서울 신촌의 봉암사 절 복원공사장에서 대목장인 이광규씨를 만났다. 목수들의 잔심부름과 함께 물을 데우고 연장을 갈았다. 망치질부터 끌질, 대패질을 배우며 이씨의 칭찬을 들었다. 1962년 이씨는 그를 숭례문 중수 공사장에 데려갔다. 거기서 스승의 스승인 조원재씨를 만났다. 조씨는 1906년 덕수궁 중건과 창덕궁 내전 복원에 참여했던 ‘궁궐 목수의 전설’인 최원식의 제자였다.

숭례문 공사에서 조씨는 도편수, 이씨는 부편수였다. 워낙 무서워서 모두들 옆에 가기를 꺼렸다. 힘들어서 대패질을 대충대충 하면 멀리서도 금방 알아채고 큰소리로 야단을 쳤다. 막내인 신씨는 잔심부름을 도맡아 했다.

도편수 조씨가 잔꾀를 부리지 않고 묵묵히 일하는 그를 눈여겨봤다. 자신의 집에서 지내게 하면서 한옥 도면을 가르쳐줬다. 본격적인 대목의 길로 이끈 것이다. 군 제대 후 스승들과 함께 오대산 월정사 대웅전, 진주성 촉성문, 서울 숭인동 청룡사 대웅전, 용인 호암장 신축 공사 등에 참여했다.

70년 불국사 복원공사 때 이광규 도편수가 그를 불러 먹칼을 줬다. “먹을 그어라.” 먹칼은 먹줄과 함께 대패질을 끝낸 나무에 자르고, 파고, 조각하는 자리를 표시하는 도구다. 목수가 먹칼을 준다는 것은 그를 후계자로 인정하고 부편수를 맡긴다는 뜻이다. 5년 뒤 수원성 복원공사에선 도편수를 맡겼다. 불과 서른다섯 살의 젊은 목수로서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신씨는 최원식-조원재-이광규로 이어지는 궁궐 대목장의 맥을 계승했다.

그후 서울 삼청동 총리공관, 서울 필동 한국의 집, 경주 안압지 건물, 단양 구인사, 부여 삼충사, 울산 동축사, 유성 현충원 현충문, 부여 무량사 극락전 보수 공사 등을 지휘했다. 삼성 이병철 회장의 승지원, 청와대 상춘재와 대통령 관저, 경주 안압지 임해전, 유관순 추모각 등 수많은 한옥도 그의 솜씨로 세워졌다. 창경궁과 창덕궁의 주요 전각을 보수하는 등 대부분의 고건축 문화재들도 그의 손을 거쳤다. 




91년엔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인 ‘대목장’이 됐다. 같은 해 경복궁 복원정비 사업의 도편수를 맡아 20년 동안 90여동의 궁궐 전각을 복원했다.




 숭례문 복원 공사를 총지휘하는 도편수로 뽑히는 등 ‘우리 시대 최고의 목수’로 인정받고 있다. 대통령 표창, 만해예술상, 옥관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천년 궁궐을 짓는다> <목수> <경복궁 근정전> 등 세 권의 책을 냈다.


여성동아








#  올해 초 ( 2013년 5월 )




숭례문 복구 지휘 도편수 신응수 대목장



300~400년 된 소나무에 1000년 넘을 새 생명 불어 넣어”



삼백년, 사백년된 소나무를 천년 넘게 이어가도록 새 생명을 불어넣는 일, 그것이 목수가 하는 일입니다. 


숭례문 복구도 그런 마음가짐으로 최선의 노력을 다했어요.


천년이 가도 살아남을 수 있는 숭례문을 목표로 복구공사에 임했죠.




신응수 대목장.
숭례문 복구 도편수인 신응수 대목장.
숭례문 복구공사의 도편수 신응수 대목장(71)은 화마의 아픔을 딛고 일어선 숭례문의 늠름한 위용을 국민들에게 선뵐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복구는 철저한 고증이 바탕이 돼야 하죠. 전통기법 그대로 기본을 살리는 게 중요해요. 조선초기 모습을 그대로 살리는 데 주안점을 뒀어요.”

숭례문 복구공사의 도편수(목조 건축의 총감독)로서 복구작업을 지휘한 신 대목장은 경주 불국사·수원 화성·창덕궁·경복궁·광화문·숭례문까지 한국의 대표적인 문화재와 전통 건축물 복원에 거의 다 참여했다.

그는 스무 살 때인 1962년 부편수였던 이광규 선생 밑에서 서울 숭례문 중수공사를 시작으로 숭례문과 첫 인연을 맺었다. 1962년 그는 스승 이광규 씨와 함께 숭례문 중수 공사에 참여했고, 그 현장에서 도편수인 조원재 씨를 만났다.

당시 숭례문 중수 공사에는 조 씨가 도편수로, 이 씨가 부편수로 참여했다. 이제 그는 스승들의 가르침을 따라 도편수로서 이번 숭례문 복구에 참여하게 된 것. 그 소회는 남달랐다.

“장인은 자기 이름 석 자에 사명감을 갖고 임해야 해요. 세월이 가도 내 이름 석 자가 사라지지 않고 후대에 새겨질 수 있도록 매 순간 최선을 다했죠. 스승들의 가르침을 본받아 최선을 다한 숭례문 복구라 더욱 의미가 깊어요.”

신응수 대목장은 “국민 다수가 화재 당시 숭례문이 모두 타 버렸다고 알지만 이는 오해”라며 “복원이 아닌 ‘복구’가 맞는 말”이라고 바로 잡았다.

오는 4일 숭례문 복구 기념식을 앞둔 그는 지금 “최선을 다했다”며 “이번 숭례문 복구를 계기로 국민 모두가 각자 문화유산에 주인 의식을 갖고 내 재산이라는 생각으로 아껴야 한다”고 밝혔다. 

숭례문 복구 기념식을 앞두고 막바지 준비에 한창인 지난달 24일 숭례문 현장에서 신응수 대목장과 나눈 일문일답이다.

신응수 대목장은 “주인의식을 갖고 문화재를 사랑해주길 바란다”고 밝혔다.
숭례문 복구공사의 도편수인 신응수 대목장.

- 목수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1958년,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인 충북 청원을 떠나 사촌형이 있는 서울로 올라왔는데 취직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시골로 내려가지 않고 목수인 사촌형을 따라다니며 일을 시작한 게 나무를 처음 접한 계기가 됐다. 20살 때 이광규 선생님을 봉은사 절 공사장에서 만났는데 1962년도에 숭례문 중수 공사 때 다시 뵙게 됐다. 남다른 인연 아닌가.(웃음) 숭례문 중수 공사 때 조원재 선생님을 만났다. 당시 조 선생님 방 한켠에서 도면을 그리며 일을 배웠다.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은 이광규, 조원재 두 분 선생님 덕분이다.



- 복구공사가 마무리 됐다. 소감이 남다를 것 같다.

이광규, 조원재 두분은 내 인생에서 중요한 가르침을 주신 스승이다. 50년 전 스승들이 중수를 했고 제자가 다시 책임졌으니 더욱 어깨가 무거울 수 밖에 없었다. 최대한 전통방식을 고수하며 조선 초기 때 느낌을 살리려고 노력했다. 앞으로 후대에 길이길이 전해졌으면 좋겠다.


- 숭례문 복구에서 가장 주안점을 둔 부분은?

기본을 살리는 복구가 핵심이었다. 기초자료를 토대로 최대한 전통 그대로 복구하려고 노력했다. 옛 형식 그대로 복구하기 위해 많은 고증을 거쳤다.


- 복구공사에서 기술적으로 가장 신경 쓴 부분은?


처마다. 처마의 선은 궁궐의 생명이나 다름없다. 처마는 한옥의 미적인 면과 구조적인 면의 완성도를 좌우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궁궐은 온화하면서도 품위가 있어야 하고 웅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신응수 대목장은 이번 숭례문 복구를 계기로 국민들이 좀 더 문화재에 대한 주인의식을 갖고 문화재를 사랑해주길 바란다고 전했다.
신응수 대목장은 이번 숭례문 복구를 계기로 국민들이 좀 더 문화재에 대한 주인의식을 갖고 문화재를 사랑해주길 바란다고 전했다.
- 목재의 기본이 나무 아닌가. 소나무를 구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다고 들었다


어떤 건물이든 목재 공사가 가장 중요하다. 좋은 목재를 고르기 위해 우리나라 소나무를 사용했다. 쉽게 부패하지 않고 오래가기 때문이다. 좋은 목재는 소나무, 속이 붉고 나이테가 촘촘한 적송이다. 특히 적송은 수명이 길어 훌륭한 재목이 된다. 하지만 구하기 쉽지 않다. 나무를 공수해오는 것 부터 베고 목재를 일일이 손으로 다 다듬었다. 아기 다루듯 소중히 다뤘다. 국민들이 기증해주신 나무들도 감사하게 잘 쓰였다



공사 중 어려웠던 점은 없었나.

이번 복구 공사에는 막대한 인력이 투입됐고 많은 사람들의 수고가 있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항상 현장에서 함께 했다. 복구 과정에서 이런저런 오해도 많았고 어려움도 많았지만 모두 묵묵히 자신의 일들을 해냈다. 숭례문 도편수인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구슬땀을 흘리며 숭례문 복구에 힘을 쏟았다. 국민들도 숭례문 복구의 보이지 않는 곳에는 끊임없이 노력한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 숭례문 이외에도 경복궁 등 주요 전통 건축물 공사에 참여했다. 건축물을 공사할 때 가장 염두해 두는 점은.

축물이 어떻게 하면 오래갈 수 있는 지, 그것을 가장 우선시한다. 즉 생명력이다. 랜시간 그 품위와 위용을 잃지 않고 국민들에게 사랑받는 건축물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 한평생 목수로 살아왔다. 이번 숭례문 복구를 통해 얻은 것이 있다면.


열 여섯부터 이 일을 시작했다. 벌써 56년이 흘렀다. 한 평생 최선을 다해 한 길을 걸어가는 것, 자기 이름 석자를 걸고 일을 한다는 것, 죽어서도 자기 이름을 남길 수 있는 것이 장인정신이라 생각한다. 후대에 내 이름 석자 남기는 것, 후대에 부끄럽지 않게 매순간 최선을 다하는 것. 숭례문 복구도 그런 마음가짐으로 임했다.


- 4일 숭례문 복구 기념식을 앞두고 국민들에게 전할 말이 있다면.

문화재를 진심으로 내 것과 같이 아껴주고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내 집이라는 생각을 갖고 주인의식을 가지길 바란다.

2013.05.03 문화체육관광부 국민소통











우리 민족의 얼, 숭례문 중수한 신응수 대목장



5월 4일이면 국보 1호 숭례문이 국민 앞에 공개됩니다. 막바지 복구 작업이 한창인 숭례문에는 다양한 무형문화재 보유자들이 참여했는데요. 그 중심에는 이번 복구 공사에서 도편수를 맡은 신응수 대목장이 있습니다. 


숭례문 복구 공사는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전통방식에 따라 이뤄졌어요.

 목재로는 100년 된 소나무가 사용됐는데요.


 대목장을 만나 새 단장한 숭례문의 복구 과정에 대해 여쭤봤습니다.




"참담했지. 정말 참담했어요."


2008년 2월 10일은 그에게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날입니다. 그날 저녁 무렵 국보 1호 숭례문이 불길에 휩싸였는데요. 놀란 가슴에 한달음에 현장으로 달려간 그의 눈앞에서 숭례문의 기왓장이 무너져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우두커니 서서 밤새 숭례문을 지켜보았어요. 


그에게 숭례문은 각별한 공간이었습니다. 목수로서 전통문화유산보수작업에 눈을 뜨게 해준 곳이기 때문인데요. 1963년 스무 살이던 신응수 대목장은 숭례문 중수 공사에 참여한 인연도 있었습니다. 


당시 숭례문은 6·25전쟁을 겪으며 심하게 훼손돼 있었습니다. 어깨너머로 목수 일을 배우던 청년은 스승인 이광규 선생을 따라 역사적인 공사의 일원이 됐어요. 당시 공사의 도편수는 조원재 선생이, 부편수는 조 선생의 제자인 이광규 선생이 맡았습니다.


평생을 외길 목수 인생을 걸어온 그지만 지나온 길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신응수 대목장은 "고된 일을 어떻게 해냈을까 스스로 놀라울 때가 있다."며 "어린 친구들에게 내가 했던 일을 시키라면 안쓰러워서 못 시킬 것 같다."고 합니다. 고된 일 속에서 그를 지킨 건 자긍심이었습니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자신의 이름 앞에 떳떳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게 그를 이끈 신조입니다. 

특히 문화유산을 복원하는 일에 있어서 그의 이러한 신념은 확고했어요.


숭례문


복구 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지난 4월 24일 서울 종로구 창성동 사무실에서 신응수 대목장을 만났습니다


복구 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지난 4월 24일 서울 종로구 창성동 사무실에서 신응수 대목장을 만났습니다.


Q 50년 전 숭례문 중수 공사에 참여하고 이번에 또다시 복구 공사에 참여하게 돼 감회가 남다를 것 같아요.

"어깨가 무거웠죠. 하지만 1963년 준공할 때 당시 모습을 똑같이 재현한다는 각오로 열심히 임했어요."


Q 이번 복구 과정에서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무엇인가요?

"어떤 건물이든 목재 공사가 가장 중요하죠. 목재 공사에 따라 기와를 얹고 단청도 만들어요. 특별히 주안점을 둔 부분은 없어요. 다만 50년 넘게 이 일에 종사했으니 ‘어떻게 하면 오래갈 수 있을까’를 많이 고민한 것 같아요. 정성을 다했습니다. 우리 전통 목조건축은 ‘정성’ 그 자체예요. 대들보에서부터 지붕, 추녀 등을 잇는 모든 부속물들을 못 하나 없이 일일이 깎고 끼워 맞췄지요. 목재 하나를 자를 때에도 전기톱이 아닌 진짜 도끼를 가져다가 잘랐어요."


Q 어떤 목재 가사용됐나요?

"전부 우리나라 소나무를 사용했어요. 강원도 삼척에서 베어온 100년 된 소나무 10본에 국민들이 기증한 나무도 사용했어요. 강릉에 보유하고 있는 목재소에서 나무를 주로 공수해왔지요."


Q 전통 건축물을 복원할 때 목재 선택 기준이 있나요?

"영동지역에서 나는 소나무가 좋습니다. 우리 건축물, 특히 궁궐 건축물의 힘을 받아내기 위해서는 적송이 으뜸이죠. 그런데 궁궐에 쓰이는 나무는 200년에서 300년은 자라야 훌륭한 재이 되기 때문에 구하기가 어려워요. 국내에서 적송이 나는 곳은 강원도 양양에서 경북 울진에 이르는 백두대간 줄기뿐인데, 이곳에서 나는 적송이 곧고 수명도 길죠."


Q 전통 건축물을 복원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어떤 것인가요?

"고증과 실측, 그리고 경험이에요. 재료도, 기법도 마찬가지죠. 당시 기록된 방법에 따라 복원을 해야지 현재의 기준을 적용해서는 안 돼요. 자칫하면 기본을 손상할 수 있어요."


Q 대목장이 생각하는 장인정신은 무엇인가요?

"자기 이름 석 자에 사명감을 갖는 것입니다.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장인은 특히 그래요. 세월이 가도 내 이름 석 자가 사라지지 않고 후대에 새겨질 수 있도록 매 순간 최선을 다해야 해요. 무엇을 하든 항상 '내 집을 짓는다.'는 자세로 임하고 있습니다. 이번 숭례문에는 '도편수 신응수'라는 이름이 새겨지겠지만, 사실 여기에는 수많은 장인들이 참여했어요. 이들의 이름이 깃들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도 장인의 자세인 것 같아요"


Q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데 있어 우리나라는 국민적 관심이 아직 많이 부족한 듯합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숭례문이 불에 타면서 그나마 관심이 모아졌지만 아직 멀었어요. 앞으로 복원될 문화유산들이 많은데 지금 같은 관심으로는 부족해요. 문화유산은 우리 민족의 정신이자 관광자원이고 보물이잖아요? '문화융성'라는 말이 많이 언급되는데, 문화유산을 아끼고 보존하려는 자세가 문화융성을 이루는 기초가 아닐까 싶네요."


Q 앞으로 꿈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요?

"계획한 건 많은데 잘 안 되고 있네요. 먼저 빠른 시일 내에 자료전시관을 만들고 싶어요. 경주의 황룡사를 복원하는 것도 꿈이에요. 황룡사를 복원해 우리나라가 한때 문화강국이었다는 것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로 삼으면 좋겠네요."


Q 마지막으로 국민에게 이번 숭례문 복구를 맞아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국민 모두가 주인의식을 가졌으면 해요. 내가 숭례문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할 때 애정을 가지고 꾸중도 하고 지적도 할 수 있는 법이에요. 모든 문화유산이 내 재산이라는 생각으로 아끼고 관심을 가져야 해요."



문화재청









# 11월초 ( 2013년 11월 )




숭례문 복원에 엉터리 목재 … 기둥·추녀 갈라지고 틀어져



홍보성 사업비 24억 쓰면서
목재값은 2억3400만원 들여
"제대로 된 나무 공급 안 돼
덜 마른 것 써 곳곳에 균열"

숭례문 2층 문루의 동쪽 기둥이 위아래로 1m 이상 길게 갈라져 있다. 다른 기둥의 균열부가 안쪽까지 단청 안료로 채색된 것과 달리 나무의 속이 하얗게 드러나 보인다. 전문가들은 “건조 과정에서가 아니라 단청 채색이 끝난 뒤 갈라지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표면은 말랐지만 안쪽에는 여전히 수분이 많이 남아있어 그 차이로 인해 변형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종근 기자]

국보 1호 숭례문은 대한민국의 얼굴이다. 숭례문 화재로 국민의 상실감은 컸다. 숭례문 전통방식 복원은 단순한 문화재 복구 차원을 넘어 국민의 박탈감을 보상해 주는 상징적 의미까지 있었다. 그런데 졸속·부실공사로 또다시 실망을 주고 있다.

 단청의 균열·박락 현상으로 불거진 숭례문 부실 공사 의혹이 전방위로 확산되고 있다. 부실하거나 값싼 일부 자재를 구입했고 정부 노임단가보다 낮은 임금으로 공사한 것으로 밝혀졌다. 원칙 없는 전통공법을 적용했으며, 목재 갈라짐이 심각하다는 점도 확인됐다.

 본지가 단독 입수한 ‘숭례문 공사 결산 내역’ 자료 가운데 ‘주요 재료 구입비’에 따르면 단청 안료 구입비 1억800만원은 전체 복구 예산 242억원의 0.4%에 지나지 않았다. 단청 부실의 핵심 원인으로 꼽히는 아교 구입비는 390만원으로 0.01%에 불과했다. 또 단청안료는 흰 조개가루를 화학염료로 염색한 수간분채(水干粉彩) 10종을 사용했다. 천연안료로 복원한다는 문화재청의 발표와 차이가 있었다. 안료를 납품한 가일아트 김현승 사장은 “문화재청과 협의하던 초기만 해도 안료 구입비가 5억~6억원 책정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홍창원 단청장을 통해 수간분채를 납품하라는 연락이 왔다”고 말했다.

전통안료업체인 서울 인사동 구하산방 홍수희 대표는 “수간분채 값은 최고급 천연석채의 10% 수준이다. 국보 1호 보수에 왜 가장 좋은 안료를 쓰지 않았는지 모르겠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문화재청은 “원자재는 공공표준 단가를 기준으로 구입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반면 홍보성 사업에는 많은 돈이 들어갔다. 2009~2012년 기념행사, 관련 영상물 제작, 관리운영비·용역비, 숭례문 전시관 보조금 같은 항목엔 자재비의 두 배 가까운 24억원이 지출됐다. 숭례문 주변정비에도 38억원이 쓰였다.

 특히 목재가 단청에 이어 또 다른 문제로 떠올랐다. 덜 말린 목재가 공급됐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가장 중요한 부재인 목재에는 전체 예산의 0.9%인 2억3400만원이 소요됐다.

 지난 1일 본지 취재진은 숭례문 목재를 조사했다. 화재가 집중돼 새 목재를 많이 사용한 2층 누각의 4개 기둥 가운데 하나는 이미 수직으로 깊고 넓게 갈라져 속이 드러났다. 조선시대 주요 공사에 목재를 공급했던 삼척 준경묘에서 공급받은 금강송이다. 동남쪽 모퉁이의 추녀와 사래(추녀 끝에 잇댄 짧은 서까래)도 갈라져 안이 보였다. 문루 입구 위쪽의 평고대(처마 끝에 가로로 놓은 오리목)와 개판(널빤지) 사이도 벌어졌다.

 익명을 요구한 목조전문가 C씨는 “잘 안 말린 목재를 써서 일어난 일이다. 앞으로 더 갈라지고 틀어져 보기 흉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목재 공사를 책임졌던 신응수 대목장은 5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도편수(都邊首·현장 목공 책임자)가 일찍 임명되지 못해 제대로 된 나무가 공급되지 못했다”며 “내가 나무의 물기를 검사할 수도 없었고, 설령 덜 말랐다 하더라도 어떻게 마르기를 기다릴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문화재청은 “정부 표준 시방서에 나온 24% 함수율을 기준으로 공사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목재전문가 최원철(채우림 대표)씨는 “보통 목조주택도 함수율을 19%로 잡아 비틀림과 갈라짐을 막는데 5%나 덜 건조시킨 나무를 쓸 수 있게 만든 것은 문제”라고 말했다.

 신 대목장은 또 “시공사인 명헌건설을 통해 목재공사를 13억2300만원에 도급받았지만 거기서 나무 값은 빼야 했고, 책정된 목공 노임 10만원이 평균 일당 15만원(2012년 정부 기준 단가는 14만1000원)보다 낮은 데다 그마저 제때 받지 못했다”며 “그래서 2011년 가을 한 달 반가량 공사를 거부했고 아직도 돈을 다 못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앞으로 목재 부문에서 부실이 속출할 가능성을 예고한다. 단청공사도 정부 노임 단가는 2012년 기준 14만원이지만 도급 단계를 거치며 훨씬 낮아져 5만원의 저임으로 했다는 말까지 나온다. 이런 문제에 대해 본지는 시공사인 명헌건설에 계속 문의했으나 답이 오지 않았다.

◆특별취재팀=안성규·이영희·이승호 기자, 사진 박종근 기자, 김종록 문화융성위원·작가·객원기자, 김호석 한국전통문화대 교수, 이수곤 서울시립대 교수,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소장


중앙일보






숭례문 어디까지… 벗겨진 단청·갈라진 기둥 이어 “기와 동파 가능성”



문화유산정책연구소 소장 “물 흡수율 아주 높아 위험”
ㆍ총체적 부실 공사 의혹 확산

숭례문(남대문)의 단청이 벗겨지고, 목재가 갈라진 사실이 확인된 데 이어 동파 가능성 등 기와의 부실 문제도 제기됐다. 사실상 맥이 끊긴 전통공법의 재활용에 따른 문제를 보완할 충분한 실험과 검토 없이 공기에 맞추기 위해 공사를 강행하는 등 숭례문의 총체적 부실 복구공사 의혹이 확산되고 있다.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황평우 소장(문화재전문위원)은 7일 “기와를 굽는 제와 분야 전문가들을 만난 결과 숭례문 복원에 사용된 기와가 높은 물 흡수율에 따른 동파 가능성이 있고, 탈색 문제도 지적된다”고 설명했다.

황 소장은 “문화재청은 숭례문 기와가 전통 기와라는 이유로 물 흡수율이 10~14%인데도 사용을 허가했지만 공장제 기와의 흡수율은 9%”라며 “겨울철 동파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숭례문 2층 문루 기둥 단청 벗겨짐 현상 등 부실 복구공사 논란이 일고 있는 숭례문(남대문)의 2층 문루 기둥 가운데 동쪽 기둥이 위아래로 깊고 길게 갈라져 있다. |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그는 또 “기와의 변색·탈색이 전문가들 사이에 거론돼 왔는데 이는 기와를 구울 당시 높은 온도를 맞추지 못했기 때문으로, 제대로 된 전통 수제기와라고 할 수 없다”며 “40여년간 맥이 끊긴 전통기와를 충분한 검토 없이 불과 2년 만에 생산, 사용한 것이 근본적 문제”라고 지적했다.

숭례문 복구공사가 완료된 지난 5월 이후 숭례문관리사무소가 작성한 7~9월 ‘관리일지’에는 ‘1층 기와, 시공 때보다 많이 퇴색되고 있음’ ‘1, 2층 기와 색상 변색’ 등이 기록돼 있다. 한 기와 전문가는 “흡수율이 높은 것은 동파 가능성은 물론 기와 밑 목재에도 영향을 미친다”며 “전통기와는 높은 온도에서 구워 색깔이 청회색인데 숭례문 기와는 낮은 온도에서 구워서인지 검은 회색이라는 지적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형준 제와장(6월 작고)과 작업을 같이한 전수조교 김창대씨는 “끊긴 맥을 다시 복원하니 오해나 걱정이 있을 수 있다”며 “기와 색깔은 불 온도로 조절이 충분히 가능했고, 물 흡수율은 문화재 수리 시방서상 기준을 충족시켜 문제가 없다”고 했다.


숭례문은 복구공사 이후 단청 벗겨짐 현상이 계속 확산되는 데다 2층 문루의 기둥과 추녀, 추녀 끝의 짧은 서까래인 사래 등의 목재도 갈라져 속이 드러나고 있다. 덜 마른 목재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복원공사를 책임진 신응수 대목장은 “이미 공급될 목재가 정해진 뒤 뒤늦게 도편수(목공사 책임자)가 되면서 나무 건조상태 등을 확인할 수 없었다”며 “공기에 맞추느라 전문가로서 만족할 만큼 시간적 여유는 없었다”고 말했다.

문화재청은 이날 부실 시공 논란에 대해 대국민사과를 한 뒤 “단청과 기와, 목공사·석공사 등의 부실 우려에 대한 조사도 철저히 해 원인 분석과 개선 대책을 수립, 시행하겠다. 우선 12월에 단청 문제의 원인 분석 결과 등을 공개, 의견을 수렴하겠다”고 밝혔다.



경향신문






숭례문 복원 도편수 신응수 대목장 "시간·예산 부족 … 제대로 공사 힘들었다"















충분한 시간을 갖고 엄선된 나무를 사용하지 않은 게 문제다.”

 도편수(공사책임자)로 숭례문 목공을 이끌었던 신응수(71·사진) 대목장. 복구업체인 명헌건설과 13억2000만원 공사 도급 계약을 맺고 목공에 참여했던 그는 5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 나무가 왜 안 좋았나.

 “문화재청이 도편수를 빨리 정하지 않아 그렇다. 문화재청과 도편수가 어떤 나무를 사용할지 상의하고 검증해야 했는데 내가 도편수로 임명된 것은 화재 2년 뒤다. 목재 공급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나무 때문에 내내 문화재청과 싸웠다. 그러나 시간과 재료의 한계가 있었다. 민간도 나무를 기증했는데 좋지 않은 것도 많아 골라 썼다.”



 - 어떤 목재가 문제인가.

 “원칙적으로 기존의 숭례문 목재를 최대로 썼다. 불에 덜 탄 1층은 90% 이상 옛 목재를 썼다. 많이 탄 2층에 새 나무가 주로 들어갔다. 그러다 보니 나무가 뒤틀어지면서 이음새 부분이 많이 벌어졌다. 2층의 갈라진 기둥은 준경묘에서 가져온 금강송이다. 송진이 뭉친 옹이를 못 본 건 잘못이다. 내가 직접 보수하겠다고 했는데 문화재청은 국정감사가 끝나고 하자며 미뤄서 일을 키웠다.”



 - 전통 방식으로 하려면 나무를 제대로 건조해야 한다고 지적했어야 했다.



 “제대로 건조되려면 7~10년 걸린다. 그렇게 기다릴 수 없었다. 주는 대로 써야 했다. 목재의 수분이 얼마나 있는지(함수율)를 나는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전통 방식의 복구를 해야 했지만 그러려면 충분한 시간과 예산이 필요하다. 1962년 보수 때는 그랬다. 하지만 이번엔 시간과 예산은 당시의 반에 지나지 않았다. 제대로 된 공사가 되기 힘들었다.”



 - 공사 중 노임 문제가 왜 발생했나.

  “제대로 집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도급 과정에서 애초 예산보다 줄어 줄 돈이 모자랐던 거다. 그래서 나는 계약 당시 받은 3억6000만원을 돌려주고 내 돈 수억원을 노임으로 내려 했다. 그런데 문화재청이 막았고 명헌도 제대로 정산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2011년 11월 한 달간 공사 거부가 있었다.”(취재팀이 명헌건설에 이틀에 걸쳐 전화했지만 연락이 없었다)

◆특별취재팀=안성규·이영희·이승호 기자, 사진 박종근 기자, 김종록 문화융성위원·작가·객원기자, 김호석 한국전통문화대 교수, 이수곤 서울시립대 교수,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소장



중앙일보







# 사견



신응수 대목장,  정치인 같은 말과 행동을 하네?

5월과 11월말 이 완전히 다르네


문제점이 발견되면 공사 중지 해야했다

그리고 국민에게 알려야했다

숭례문 도편수로서 최소한 양심이다 .



4대강 공사에 참가한 건설업자 하고 같은 분류 인것 같다

결국은 돈이다


숭례문을 두번 불태우는 꼴이 되었다

한번 미친 노인네 에게 ,  궁궐 도편수 에게,,,,,



 신응수가  복원한 다른 문화재도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