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명신이며 서예가, 화가, 시인이다. 자는 경우, 호는 인재(仁齋), 본관은 진주이다. 심온의 외손자이자 소헌왕후의 조카로 세종은 그의 이모부이며 문종, 세조 등은 사촌이다. 친동생으로 강희맹이 있으며 또다른 사촌으로 노사신, 박중선 등이 있다.
1441년(세종 23년) 문과 식년시에 정과 13등위로 급제하여 집현전 직제학 등을 지냈으며, 그림에 능했을 뿐 아니라 글씨도 잘 썼다. 세종이 옥새의 글씨를 맡길 정도로 당시에 그를 따를 만한 사람이 없었다.
세조 때에는 사육신 사건에 연좌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으나, 성삼문이 그의 뛰어난 재능을 아낀 나머지 변호해 주어 목숨만은 건졌다.
만년에는 시·서·화로 소일하였으나 천기(賤技)라 하여 타인의 청에는 응하지 않았다 한다.
그는 집현전에서 신숙주, 성삼문, 정인지 등과 함께 훈민정음에 대한 해석을 붙이는 일에 직접 참여하였으며 《용비어천가》에 대한 주석을 붙이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그는 시·글씨·그림의 3절로서 이름이 높았다. 대표작으로 《고사관수도》가 있으며, 저서로 《청천양화소록》이 있다.
# 고사관수도 (高士觀水圖)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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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들바람이 살랑살랑 불어 길다란 덩굴 몇 가닥을 흔들흔들 그네 태운다. 그러자 잔잔하던 물 위에도 결 고운 파문이 인다. 바위에 기대 편안히 엎드린 선비는 볼에 와 닿는 바람결이 흐뭇했는가, 아니면 마음 속을 스쳐 가는 상념 속에서 혼자만의 뿌듯함을 느꼈는가, 보일 듯 말 듯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앞머리가 벗어진 넓적한 얼굴의 선비는 이제 세상살이를 꽤 이해할 만한 지긋한 연배의 노인이다. 눈과 눈썹은 짙은 먹선으로 대충 쳐서 그렸으되 만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넉넉한 빛을 띠었으며, 사람 좋아 보이는 납작한 코와 인자해 보이는 입가와 수염 그리고 넓은 소맷자락에 인간사를 초탈한 듯한 여유로움이 번져 있다.
선비를 둘러싼 주위 배경은 단출하다. 뒤편으로 절벽이 있고 그 위에 뿌리 박고 자라난 나무를 휘감아 내려온 덩굴 몇 가닥과 큰 이파리 몇 개가 보일 뿐이다. 앞에는 잔잔하게 흐르는 물과, 물가에 자라난 갈대 같은 거친 물풀, 그리고 물 위로 솟아난 작은 바윗돌 셋이 전부다.
선비 아래 듬직한 바위는 툭툭 끊어지는 호쾌하고 대범한 먹선으로 윤곽선을 둘렀으며, 아래쪽으로는 시커멓게 거친 바림을 베풀었다. 그 선의 성질은 선비 옷의 윤곽선과 아주 닮았다. 즉 굵었다 가늘었다 변화가 많고 꺾여 나가는가 싶다가는 곧 끊어진다. 특히 선비의 다리 오른편의 바위 형태가 다리 모양과 거의 같아 보여, 화가는 마치 선비가 바위이고 바위가 곧 선비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 아래에 의자처럼 편편한 작은 바위가 하나 더 있다. 누구든지 와서 함께 해도 좋을 공간이다.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는 고요한 그림이다. ‘고결한 선비가 물을 바라보는 그림’이니 고요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바라보는 선비의 시선이 물의 흐름처럼 잔잔하지 않은가? 시선이 고요하고 그윽하므로 그림의 공간은 화면 바깥으로 안온하게 확장된다. 정작 화폭 속에 보이는 공간 자체는 아주 작은데도 느껴지는 것은 제한된 그 무엇이 아니다.
그렇게 보이는 화면의 대부분이 돌이다. 세상에 돌만큼 천성적으로 침묵을 좋아하는 것은 없다. 돌은 태초에 놓여진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서 거센 비바람과 매서운 눈서리에도 꿈쩍이지 않고 소리치지도 않는다.
저 바위를 닮은 노인의 시선을 보면 그 역시 성품이 바위처럼 듬직한 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 돌은 흙의 정기가 뭉친 것이다. 그러니 선비 또한 오랜 공부와 수양을 통해서 사람의 정기인 올바른 도(道)를 한 몸에 모두고 있음직하다.
선비는 오늘 한가로움을 얻었다. 그리하여 완전히 자연과 하나가 되었다. 선비가 자아내는 잔잔한 삼매경과 여유와 고요함이 너무 좋아서 나 또한 그림 속의 인물이 되고 싶다.
오주석(중앙대 겸임교수)josoh@unitel.co.kr
바위에 엎드려 물을 보는 선비… 쉼없는 수행을 말씀하시는군요! |
(1) 강희안의 ‘고사관수도’ - 물을 보며 배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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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슨 생각 하시나요?
선비 한 분이 바위에 엎드려 턱을 괴고 계시다. 배부른 큰 거북이 물가에 올라앉아 시간을 무시하는 양 편안하고 조용하게 거하시는 그 모습을 보노라면 보는 이의 마음도 누그러지고 어느덧 차분해진다. 그런데 궁금하다. 선비는 하염없이 물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그림 속 선비에게 다가가서 물어볼까. “저 옛날 송(宋)나라의 소동파(蘇東坡)가 적벽에서 노래하듯, 흘러도 다 흐르지 않는 물을 보라 하시며 우리의 생명도 저 물처럼 순간이 영원하다며 위로하고 계신가요? 혹은 동서고금 그러하듯 흘러간 과거를 바라보고 계신가요? 선비님은 아실 턱이 없겠으나 ‘흐르는 강물처럼’이란 미국영화가 있지요. 그 주인공 교수님이 세상에서 사라져간 동생과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그들과 함께했던, 수면 위로 반짝이는 추억을 바라보았듯이, 지난 시절 그 누구를 떠올리고 계시나요? 그런 것도 아니라면 무아지경이라던가요. 지난 세월도 다가올 걱정도 모두 떨치고 초월의 즐거움을 누리고 계시나요?”
# ‘물을 보다’ 이미지에 코드가 숨어있다.
이 그림 속 선비가 물을 보며 무엇을 생각하는지 물어보는 단순한 궁금증은 곧 ‘우리 선조들이 이 그림을 펼쳐 놓고 무엇을 감상하였을까?’라는 질문과 다름없다. 이러한 질문은 옛 그림을 이해하는 기본적 의문이며 감상태도이다. 산수화 속에 그려진 조그만 인물의 모습에는 선조들이 공유했던 생각과 감상이 응축되어 담겨있다. 근대기 이전의 옛 그림에서 화가의 개인적 체험이나 특별한 생각을 찾아내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 시절 그림에는 그림을 향유하던 계급에서 공유하던 생각의 코드가 약속처럼 전달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약속의 코드는 대개 그들이 섬기었던 성현의 말씀이거나 아끼며 암송하던 명시의 시구였다. ‘자왈(子曰·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로 시작되는 경전의 어록은 거듭 읽고 탐구하여 그 뜻을 바로 새겨야 했다. 성현의 말씀을 암송하고 행간의 뜻을 터득하는 것이 그 시절의 ‘공부(工夫)’였으며, 이 공부로 단련된 이후에야 관료로 출세하여 세상을 다스릴 수 있었다.
이 그림 속 선비가 취하고 있는 모습 ‘물을 보다’의 행위는 맹자(孟子)의 말씀에 등장하는 ‘관수(觀水)’를 떠오르게 하였다. ‘물’의 성질을 배우라는 말이야, 맹자뿐 아니라 공자도 그리하였고 노자와 장자도 그리하였다. 저 물을 보라 하신 공자의 말이나, 낮은 데로 흐르는 덕을 가르친 ‘노자’의 구절이 모두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우리 선조들의 글을 두루 보면 ‘맹자’에 전하는 ‘관수’ 즉 ‘물을 보다’라는 이 한 마디가 특별히 애호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물을 보다’라고 하면, 고려와 조선의 학자들이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맹자’의 다음 구절이었다.
물을 보는 데는 방법이 있나니, 觀水有術
반드시 그 여울목을 보아야 하느니라. 必觀其瀾
-『맹자』,「진심(盡心) 상(上)」
# ‘관수’와 ‘관란’으로 배우다
물을 봄(‘관수(觀水)’)에 그 여울목을 보라(‘관란(觀瀾)’)는 이 말은 무슨 뜻일까? 여기서의 여울목이란 물이 구덩이를 만나면서 급히 돌아 흐르며 물결이 일어나는 곳을 말한다. 맹자가 말하는 ‘관수’와 ‘관란’을 이해하려면, ‘맹자’ ‘진심 상’의 문맥을 앞뒤로 보아야 하고, 더하여 ‘맹자’ ‘이루(離婁) 하(下)’의 글도 함께 보아야 한다.
‘진심 상’을 보면, 물이 여울목을 흘러가는 것을 보라 한 뒤 또한 해와 달이 밝은 빛으로 구석구석 빈틈을 비춘다고 하였다. ‘이루 하’를 보면, 물이 근원에서 솟아나와 구덩이를 모두 가득 채우면서 밤낮으로 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서 바다까지 이른다고 하였다.
맹자가 이른 바의 물이란, 근본에서 솟아 나와 흐르다가 여울을 만나면 채우고 가는데 그 흐름에 빠뜨림이 없고 그 채움에 차별이 없으며 바다에 이르기까지 멈춤이 없다는 뜻이다. 학자가 인격을 수행하고 학문을 연마하는 태도가 이러해야 좋다는 비유의 표현이며, 너그러운 인성으로 성실하고 완벽하게 수양을 실천하라는 엄격한 가르침이다. 물이 이미 그러하니 물을 보며 배우라.
여울목을 보라는 뜻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여울목의 의미는 물결 즉 파란(波瀾)으로 집중하여 읽히기도 하였다. 부딪히며 일어나는 물결을 보는 것이 물을 보는 방법이라, 물결 이는 곳을 보아야 물의 본질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사람도 그러하여 그가 환란을 당했을 때를 보고, 집단도 그러하여 그들이 분란에 처했을 때를 보아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그 사람과 그 집단의 본질을 알 수 있다. 물의 본질은 어떠한가. 여울목을 보라. 온몸으로 부딪히며 물결을 일으킨 뒤 평온하고 유유하게 큰 줄기가 되어 너른 바다로 흘러든다.
유학자들이 말하는 ‘보다(觀)’의 행위는, 실상을 보면서 내면을 보는 것이며 드러난 것을 보면서 그 숨은 바를 보는 것이라, 보았으되 그 속의 이치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본 것이 아니다. 유학자는 수행을 위하여 세상을 성찰하여야 했다.
# 조선의 학자 강희안이 그렸다
이 그림의 왼편 상단을 보면 흰 글자로 드러나는 백문인장에 ‘인재(仁齋)’라는 두 글자가 큼지막하다. ‘인재’라는 호를 가진 강희안(姜希顔·1417~1464)이 그렸다는 뜻이다.
강희안은 15세기 조선의 이름난 학자였다. 한글창제에 기여한 집현전 관료학자였고, ‘양화소록(養花小錄·꽃을 키우는 방법)’을 지어 화초의 생태까지 자세히 살폈을 만큼 세상의 작은 만물에도 관심을 가지는 섬세한 성품의 소유자였으며, 그러한 관심으로 온갖 물상에서 천리(天理·하늘의 이치)를 살피고 제 마음의 성정을 도야한 유학자였다. 그는 또한 그림솜씨가 매우 뛰어났다. 그 시절 전문화가로 최고였던 안견(安堅·1447년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제작)과 여러 측면에서 맞수가 될 만한 문인화가를 꼽으라면, 강희안뿐이었다.
강희안은 1462년 중국 명(明)나라를 다녀왔고 이후에도 명나라 사신들과 그림을 주고받으며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그림들은 안견이 그리던 고전적인 산수화들과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는데 그 이유는, 그가 명나라의 새로운 화풍에 익숙하였고 사유적 차원의 주제를 즐겨 택하였기 때문이다.
물을 보는 선비의 모습을 주제로 하는 ‘고사관수도’는, 실로 강희안이라야 그렸음 직한 걸작이다. ‘인재’라는 커다란 인장을 강희안이 직접 찍었느냐 혹은 아니냐의 문제는 학계에서 분분한 논쟁을 불러일으키지만, 빛바랜 인장에 묻어나는 세월의 흔적을 간과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강희안의 그림일 수밖에 없다는 조선시대 선조들의 공인(共認)이며 우리 회화사의 개연성이기 때문이다.
# 명나라에도 유사한 이미지가 있었다.
중국 명나라의 회화문화가 폭넓게 반영된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에 ‘고사관수도’의 인물과 매우 흡사한 인물상이 실려 있다. 이 책은 17세기 중후반에 출간된 판화서적으로 그림 그리는 각종 방법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이 책에 ‘산수화 속에 그려 넣을 만한 인물상’의 표본을 정리한 파트가 있는데, 그 인물상 가운데 ‘고운공편심(高雲共片心)’이란 표제의 인물이 ‘고사관수도’의 선비와 유사하다.
‘고운공편심’이란 오언(五言)의 시구이다. ‘높이 뜬 구름에 한 조각 마음이 함께 하네’, 즉 내 마음 한 조각이 구름 따라 두둥실 피어오른다는 말이다. 낭만적 운치가 물씬 풍긴다. 이 구절은 당(唐)나라의 명필가 안진경(顔眞卿·709∼785)의 시라 하며 안진경체의 힘찬 필치로 적혀서 명나라에 유전하던 시구였다. 가을 저녁 근심 없으니 높은 구름이 내 마음과 함께 하노라는 내용의 시이다.
명나라에서 안진경 서체가 인기를 누렸고 청(淸)나라에 들어서도 공식글체로 사용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안진경의 이 시구가 청나라에서 판각된 서적에 거듭 수록된 것을 보면, 이 시구의 유행은 명나라의 문화였다고 판단된다. 정황을 미루어 해석하자면, 명나라 사람들은 안진경 서체를 좋아하게 되면서 안진경의 이 시구를 애호하였고, 바위에 엎드린 인물상을 이 시구의 이미지로 사용하였다.
그렇다면 바위에 엎드린 인물상은 무엇을 뜻하는 이미지로 해석되어야 하는가 다시 묻게 된다. 먼저 말하여둘 것은, 동일한 이미지라도 시간과 장소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사실이다. 바위에 엎드린 인물상도 그런 예이다. 이 인물상의 유래를 거슬러 찾자면 관음보살의 포즈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명나라에서는 당나라의 시상으로 사용되었고, 조선에서는 맹자의 말씀으로 표현되었다.
# 조선시대 선비들의 ‘고사관수도’
조선의 선비들은 ‘관수’와 ‘관란’의 가르침에 감응하는 시문들을 허다하게 남겼다. 그러나 ‘고운공편심’이란 시구를 애호하였던 흔적은 좀처럼 찾기 어렵고, 조선왕조의 관료선비가 보살의 뜻으로 산수화 속 인물을 감상할 턱도 없는 일이다. 따라서 ‘물을 보다’의 이미지로 조선의 선비들이 맹자의 말씀 ‘관수’를 떠올리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감상법이었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견지한 유학적 사유와 원칙에의 열정은 중국학자들의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하였다.
우리 선조들은 글방이나 누각에 이름 붙이기를 몹시 즐겼는데, ‘관수당’ 혹은 ‘관란정’ 등의 이름이 특별히 애호되었다. 고려시대 이곡, 조선초기 서거정 및 조선말의 문헌에서 두루 만나볼 수 있다. 퇴계선생 이황의 도산서원에는 ‘관수헌’이 있었고, 기대승은 ‘관수헌’을 시로 읊으며 맹자의 교훈에 감복하노라 하였다. 관수헌의 실제 용도는 선비들의 휴게실이었다고 한다. ‘독서’에 비할 때 ‘관수’란 휴식의 자세라, 물처럼 쉼이 없는 수행을 가르친다. 우리 어릴 적 뛰어다니던 교실마다 정직이며 성실이란 단어들이 붙어 있었던 것도 그러한 유풍일까.
‘고사관수도’는 이전에 ‘한일관수도(閑日觀水圖)’란 제목으로 불렸다. 휴식하는 날의 관수이다. 우리 옛 그림 속에는 물을 보는 선비상이 많다. 폭포를 바라보는 ‘관폭(觀瀑)’도 그 중의 하나이다. 물을 ‘관(觀)’하는 그림 속 선비는 은거자가 아니라 고귀한 신분의 현직관료들이다. 세상을 다스리며 유학자적 수행을 잊지 않으려는 뜻이 물을 보는 그림으로 소통된 까닭이다.
유학자의 관점과 열정으로 물을 보고 세상만물을 대하는 태도, 그것은 유학자의 안경으로 세상을 재해석하는 흥미로운 게임이었고 실천이 어려워도 매력적인 배움의 원칙이었다. 그러나 유가의 공부를 제아무리 오래 하여도 완벽한 물의 속성을 삶 속에 실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성현들이 물을 배우라고 이르고 또 일렀겠는가. 옛 선조들이 ‘관수’와 ‘관란’을 말하고 또 말하고 그림으로까지 그려 보았겠는가.
이 그림 ‘고사관수도’는 우리 선조들에게 인재선생 강희안의 가르침이라 보듬어진 그림이고, ‘관수’의 표현이라 사랑받은 그림이다. ‘고사관수도’에 엎드린 선비의 모습을 다시 바라본다. “아, 그 느긋하신 모습은 공평무사의 인자함과 빠뜨림 없고 쉼이 없는 완벽한 수행법을 가르치고 계셨군요. 자연의 물도 정녕 그렇지 않거늘, 그런 사람이 세상에 있을 리 만무하지요. 그래서 옛 분들의 마음이 붙들렸던 게지요.”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2110901033130025004
‘고사관수도’ 강희안 작품 아니다?
장진성 교수 “16세기 후대화가 그림” 주장
“절벽·잡초·넝쿨 등 화풍 명나라 광태사학파와 비슷 조선화가가 창조적으로 변형”양팔을 턱에 괴고 연못을 지그시 바라보는 도인을 그린 15세기 선비화가 강희안(1417~1464)의 <고사관수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사진)는 조선초 대표적인 문인화로 이름높다. 작가가 확인되는 몇 안 되는 조선초 그림으로도 꼽히는 이 명작의 작가가 강희안이 아닌 16세기 후대 선비화가라는 주장이 나왔다.
장진성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조교수는 지난 28일 열린 한국미술사학회 월례 발표회에서 발제논고를 통해 “<고사관수도>는 그림의 양식상 16세기 중국 절파 화풍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작품”이라며 “그림의 저자와 연대에 대한 기존의 통설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강희안의 호인 ‘인제’(仁齋)가 새겨진 인장이 그림에 찍혀 있다는 점을 중시해 이 그림을 15세기 강희안의 대표작으로 해석해 왔다.
장 교수는 ‘조선 중기 절파 화풍과 광태사학파’라는 논고에서 <고사관수도>를 강희안 작품으로 볼 수 없는 근거를 동시기 중국 그림 양식과의 비교를 통해 색다르게 설명한다.
16세기 명나라에서 유행한 ‘광태사학파’라는 직업 화가 집단 일부의 그림들과 필묵법, 구도 등에서 <고사관수도>가 빼어닮은 듯한 특징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광태사학파는 ‘미치고 사악한 화가 일파’라는 뜻이다. 거친 붓질, 강한 흑백 명암 대비 등을 특징으로 하는 명나라 절파 그림풍을 바탕으로 더욱 광포하고 극단적인 필묵과 기괴한 구도를 즐겨 쓴다 하여 붙은 별칭이다.
장 교수는 특히 이들의 일원인 장숭, 장로의 그림 속 표현들이 <고사관수도>의 구도, 필묵법과 매우 비슷하다는 점을 지목한다. 일례로 <고사관수도> 오른쪽 화면 위에 보이는 절벽과, 암벽에서 보이는 잡목·잡초와 아래로 흘러내려 힘차게 뻗어나가는 넝쿨들은 화가 장로의 화풍을 수용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또 화면 왼쪽 아래의 갈대·바위 표현은 같은 광태사학파 화가인 장숭의 강한 영향을 엿볼 수 있다고 고찰했다.
그는 “<고사관수도>는 바위 표현의 경우 두터운 윤곽선을 두른 뒤 내부를 비워두는 필묵법이 구사되는데, 이는 장숭 그림에서 자주 보이는 양식적 특징”이라며 “장숭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갈대와 작은 바위들이 <고사관수도>에 그대로 보이는 점도 흥미롭다”고 설명했다.
<고사관수도>와 절벽과 수목 배치 구도 등이 비슷한 작품으로 평가되는 16세기 초 중국 화가 장로의 <어부도>(왼쪽·일본 소장). 오른쪽 확대한 도판들은 <고사관수도>의 아랫부분과 16세기 초 중국 화가 장숭의 <어주독서도>(베이징 고궁박물원 소장)의 아래 세부다. 굵은 윤곽선의 바위, 돌과 우거진 갈대 등의 연못가 묘사가 매우 비슷하다. |
학계 전문가들은 대체로 “설득력 있는 회화 양식사적 근거를 갖춘 주장인 만큼 재미있는 논쟁감이 나왔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림에 찍힌 강희안 인장이 과연 후대에 만들어 찍은 것인지도 논란거리가 될 전망이다.
회화사 권위자인 안휘준 서울대 명예교수는 “참신한 논거를 제시했지만, 이미 15세기 조선에 절파 화풍이 들어온 것이 분명하고 강희안 도장도 조선초 찍은 것으로 보여 제작 시기를 늦춰 봐야 한다고 단정하기란 쉽지 않다”며 “그림 속 인물의 특징이나 붓질법 등에 대한 심층적 논의 등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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