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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관소/문화사 &시사

[추사 김정희 ] 생애 * 작품 *평가 & 발자취

                             김정희(金正喜)


                                                       1786년 ~ 1856년)

                                                   






김정희(金正喜, 1786년 ~ 1856년)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서예가, 금석학자, 고증학자, 화가, 실학자이다. 


본관 경주이고, 자는 원춘(元春), 는 완당(阮堂)·추사(秋史)·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노과(老果)·농장인(農丈人)·보담재(寶覃齋)·담연재(覃硏齋)·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등이다. 



노론 북학파 실학자이면서 화가, 서예가였다. 한국 금석학의 개조(開祖)로 여겨지며, 한국과 중국의 옛 비문을 보고 만든 추사체가 있다. 그는 또한 난초를 잘 그렸다.


1809년(순조 9) 생원이 되고, 1819년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에 급제하고 세자시강원설서, 예문관검열을 지냈다. 


그뒤 삼사의 언관을 거쳐 효명세자의 사부로써 보도하였으며, 1823년 규장각대교가 되었다가 충청우도암행어사로 나갔다. 


그뒤 의정부의 검상(檢詳), 1836년(헌종 2년) 성균관대사성과 병조참판,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830년 생부 김노경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다가 순조의 배려로 풀려났으나 헌종이 즉위 초, 김정희 자신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 1840년(헌종 6)에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1848년 석방되었다.


 

1851년(철종 2)에 헌종의 묘를 옮기는 문제에 대한 영의정 권돈인의 예론(禮論)으로 예송 논쟁  이 벌어지자  이에 연루되어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1853년 풀려났다.



추사와 완당이라는 호를 많이 사용했으나 그밖에 100여개 넘는 별호를 사용했다.

귀양을 가고 풀려나기를 반복하여 일생 동안 귀양살이가 도합 13년이나 되었다.


호는 추사(秋史)·완당(阮堂)·예당(禮堂)·시암(詩庵)·노과(老果)·농장인(農丈人)·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 2010년까지 확인된 것만 540여 종에 이른다


 

당색으로는 노론으로 외척이었지만 벽파나 탕평당에 들지 않고 북학파가 되었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친족이었고, 양어머니 남양홍씨를 통해 남연군과 이종사촌간이 된다. 



실학자 박제가의 문인으로 연암 박지원의 학통을 계승하였으며, 흥선대원군 박규수, 효명세자는 그의 문인들이었다.





화풍



그의 그림 화풍(畵風)은 대체로 소식에게서 비롯된 시, 서, 화 일치의 문인 취미를 계승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제2의 직업으로 볼 만큼 전문적으로 하였다. 


그림에서도 서권기(書卷氣)와 문자향(文字香)을 주장하여 기법보다는 심의(心意)를 중시하는 문인화풍(文人畫風)을 매우 존중하였다. 


또한 그는 필묵의 아름다움을 주장하여 꾸밈없는 고담하고 간결한 필선(筆線)으로 심의(心意)를 노출하는 문기(文氣) 있는 그림을 많이 그렸다.


그는 난(蘭)을 잘 쳤다. 난 치는 법을 예서를 쓰는 법에 비겨서 그는 "'문자향'이나 '서권기'가 있는 연후에야할 수 있으며 화법(畵法)을 따라 배워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그의 화풍은 조희룡(趙熙龍), 허유(許維), 흥선대원군 이하응, 전기(田琦), 권돈인 등의 문인들을 통해 배출, 계승되었다



평가



김정희는 많은 사람과 알고 지냈다. 신위, 오경석, 민태호, 민규호, 강위 등 중인 계층과 양반 사대부 계층등을 이끄는 거대한 학파의 지도자였다. 



그의 문하생이 많아 “추사의 문하에는 3천의 선비가 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들은 19세기 후반 개화 사상가로 이름을남기게 되며, 대원군의 정책도 북학에 기초한 실학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학문에서는 고증학에 뜻을 두어 중국의 학자들과 문연(文緣)을 맺어 고증학을 수입하였고, 금석학 연구로 북한산의 진흥왕 순수비를 고증하는 등 고증적인 공로도 크다.


서예·도서·시문·묵화에서 독창적이며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묵화에서는 난초·대나무·산수화 등도 잘 그렸다.한편 그에게 금석학을 배운 유명한 인물로는 오경석이 있고, 난초를 배운 이는 이하응이 있다.


그리고 지인에게 난초를 그려 줄 때 별호를 다르게 할 때가 잦아 한국의 위인 가운데 가장 많은별호를 가지고 있다. 


추사는 그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별호로서 서호(書號)이다.


추사 연구의 디딤돌을 마련한 사람은 일제시기 경성제국대학 교수를 역임했던 역사학자 후지츠카 지카시(藤塚鄰, 1879~1948)이다.


그는 최초의 전문적인 추사연구가라 할 수 있다. 보기 드문 "추사매니아"이기도 하다. 


추사의 인격과 학문에 매료되었던 후지츠카는 한 · 중 · 일 국경을 넘나들며 추사와 관련된 자료들을 광범위하게 수집하여 문집 등 기초자료의 부실을 보완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추사체]











[ 그림 ]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 )









세한도








세한도 - YouTube

www.youtube.com/watch?v=jk26ifBDuvQ
2010. 1. 3. - 업로더: wizard414

추사의 '세한도'와 사마천 '사기' 속의 공자by sangsang madang 308 views; 6:03. Watch Later 내 방은 눈물로 물들 ...









[제주에서 서울까지..추사가 남긴 흔적들]




기획취재> 추사 김정희의 발자취를 찾아-1


추사체의 창시자이자 금석학-역사학에 족적 남긴 학자


제주 유배지부터 예산-과천까지, 지자체 곳곳에 기념관



추사 김정희는 현대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추사체' 명필로 널리 알려져 있다. 1786년에 태어나 1856년에 생을 마친 김정희는 조선후기 문인학자로서 찬사 받는 추사체뿐만 아니라 금석학, 역사학, 불교학에 차(茶)까지 조예가 깊은 인물이다.


지금 김정희를 높게 평가하는 실력의 기원을 보면, 기구하기 까지 했던 그의 일생을 살펴보게 된다. 특히나 8년을 머물렀던 제주 서귀포시 대정에서의 유배는 추사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지적 수준의 깊이를 더하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이다.


추사의 흔적은 그가 태어나고 묻힌 충남 예산군부터, 체계적인 설명을 들을 수 있는 경기도 과천시 추사박물관, 서울시 강남구 봉은사-전라남도 해남군 대흥사-무안군 초의선사 등의 사찰과 제주도 대정읍 제주추사관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 충남 예산군에 위치한 김정희 묘.

 

▲추사가 머물렀던 장소에서 그를 만나다



충청남도 예산군은 추사가 태어난 고향이다. 현재 이곳에는 생가와 무덤이 나란히 붙어있어 추사 삶의 처음과 끝을 만날 수 있다. 김정희가 중국에서 가져온 씨앗이 자랐다는 백송은 지금까지 남아있어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고, 고택에서 멀지 않은 화암사에는 추사의 친필로 바위에 새겨진 필적암각문이 남아있어 눈길을 끈다.



경기도 과천시 추사박물관은 올해 6월 3일 개관하면서 시민들과 만난 지 이제야 두 달을 바라보고 있지만, 자료나 구성은 상당한 수준을 자랑한다. 벼루 모양을 본뜬 박물관 외형부터, 추사 연구에 있어서 독보적인 위치에 오른 일본 학자 후지츠카 치카시의 기증 자료, 추사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 머물렀던 과지초당까지 한 곳에 모여있다.



   
■ 과천시 추사박물관.



서울시 강남구 봉은사, 전라남도 해남군 대흥사에는 추사체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는 현판이 있다. 특히 세상을 뜨기 3일 전에 남긴 글씨에, 자만심으로 걸려있던 다른 이의 현판을 떼고 자신의 것을 걸었다가 유배 뒤에 다시 바꿨다는 이야기까지 스토리텔링을 접할 수 있는 소소한 재미가 숨어있다. 전라남도 무안군 초의선사에서는 추사의 동갑내기 평생지기였던 초의가 어떻게 살아왔고 추사와 어떤 인연을 이어왔는지 살펴볼 수 있다.



제주도 대정읍 추사유배지는 그가 55세 나이로 죽음 직전에 겨우 살아남아 8년간 유배생활을 했던 장소가 복원돼 있으며, 현대적인 건물로 지은 제주추사관은 다양한 기증품과 현판, 편지, 세한도 사본 등이 전시돼 있다. 뛰어난 자연을 둘러보며 걷는 유배길은 제주만이 가질 수 있는 작품이다.



 

▲고통 속에 빛났던 추사의 삶



비록 수백 년 전 인물이지만, 추사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강렬하다. 증조할아버지가 영조대왕의 사위였고, 아버지가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자신 또한 병조참판 등 관직에 오르며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온 추사는 안동 김씨 세력가들의 모함을 받아 모진 고문 끝에 제주도로 귀향을 보내진다. 그것도 유배지 가시울타리 안에서만 생활하는 가혹한 '위리안치'라는 형벌을 받는다.



   
■ 죽기 얼마전에 쓴 추사의 글씨가 새겨진 현판. 서울시 강남구 봉은사에 걸려있다.


낯선 풍토에 건강도 약화되고 유배 중에 아내를 잃는 큰 슬픔과 외로움을 겪는 시련의 시간이었지만, 추사는 학구열을 불태우며 세한도라는 생애 최고의 작품을 탄생시키는 등 고난을 딛고 일어서는 의지를 보였다.




   
■ 추사고택 인근 화암산에 새겨진 추사의 글씨.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보면 "이런 과정(유배)에서 추사는 박규수의 말대로 '남에게 구속받고 본뜨는 경향이 다시는 없게 되고, 여러 대가의 장점을 모아서 스스로 일가를 이루게 된 것'이다. 입고의 출신의 새로운 경지를 이렇게 제주도에서 이룩한 것"이라고 평했다.


조선 후기 최고의 문인이자 학자로 인정받는 높은 수준의 경지는 고통을 견디고 견디며 만든 정제물인 셈이다. 때문에 그가 머물렀던 지역마다 뜻을 기리는 기념관이 생길 만큼 현대 들어 평가받고 있다.


앞으로 <서귀포신문>은 예산군 추사고택, 과천시 추사박물관, 강남구 봉은사-해남군 대흥사-무안군 초의선사, 서귀포시 추사유배지 등 추사의 흔적이 세워진 장소를 둘러보며 삶을 되돌아보고, 각 지자체가 운영하는 기념관의 특징도 비교하며 서귀포 추사유배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해본다.

 










추사의 뿌리 간직한 대갓집 고택에는..'

<2> 추사의 삶의 흔적


추사 김정희 선생의 발자취는 그의 고향인 충남 예산에서 시작한다. 김정희가 나고 자란 추사고택을 비롯해 고조부 김흥경의 묘소 앞에 심었다는 백송, 화암사 병풍바위에 새겨놓은 글자 등 추사와 관련된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예산군 문화관광해설사 김선자(51.여)씨는 "그의 뿌리가 모두 여기 있다"는 말로 시작점에 섰다는 설레임을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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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솟을대문 사이로 보이는 추사고택


▷ 김정희가 나고 자란 추사고택 = 충남 예산군 용궁리에 있는 추사고택은 추사의 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이 영조의 둘째 딸인 화순옹주와 결혼하면서 영조로부터 하사 받은 53칸 규모의 집이다. 당시 충청도 53개 군현에서 한 칸씩 건립비용을 부담해 지었다고 한다. 현재의 고택은 1976년에 그중 일부만 복원된 모습이다.



추사고택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에 자리 잡은 사랑채와 먼저 마주한다. 'ㄱ'자 남향집인 사랑채는 남쪽에 한 칸, 동쪽에 두 칸의 온돌방이 있고, 나머지는 대청과 마루로 되어 있다. 사랑채 댓돌 앞에는 화단이 있는데 네모난 돌기둥이 하나 새워져 있다. 김정희가 직접 제작했다고 하는 이 돌기둥은 해시계로 쓰였다. 약 1m 높이의 돌기둥에는 석년(石年)이라는 글자가 새겨져있다. 이는 김정희의 아들 김상우가 추사체로 써서 새긴 것이라고 한다.




   
▲ 사랑채의 모습


   
▲ 사랑채 화단에 세워진 해시계


사랑채보다 한 단 높은 곳에 지어진 안채는 'ㅁ'자 모양으로 6칸의 대청과 2칸의 안방, 그리고 건넌방, 부엌, 광 등을 갖추고 있다. 안방과 건넌방 밖에는 각각 툇마루가 있고 부엌 천장에는 다락으로 돼 있다.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 있는 6칸 대청은 흔치않은 규모의 마루이다.


 이 같은 건축구조는 중부지방과 영남지방에 분포돼 있는 이른바 '대갓집' 형이다. 솟을대문과 사랑채를 비롯해 안채 기둥에는 조선을 대표하는 서예가의 고택답게 수많은 주련들이 감싸고 있다.




안채에서 나와 수선화 씨앗이 뿌려진 화단 옆 계단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김정희가 세상을 떠난 뒤 아들 김상무가 세운 영당이 있다. 조금 높은 곳에 위치해 있는 터라 탁트인 경관을 볼 수 있는 영당에는 김정희의 초상과 추사영실(秋史影室)이라는 현판이 세워져 있다. 김정희 평생의 벗 권돈인은 영당 세우는 일을 돕고 추사체로 추사영실이라는 현판을 직접 썼다. 


또, 김정희의 제자였던 이한철에게 대례복을 입은 김정희 초상을 그리게 했다. 권돈인은 이 초상화에 찬문을 쓰고 김정희를 추모하는 여덟수의 시를 지어 김상무에게 줬다. 현재 초상화의 원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현판의 원본은 간송미술관에 있다.



   
▲ 안채로 들어가는 길


   
▲ 추사 김정희의 묘



▷ 백송, 화암사 병풍바위 등 흔적 남아= 고택 주변에는 추사 김정희의 묘가 자리해있다. 1937년 이장해 두 부인 한산이씨와 예안이씨와 함께 3인이 합장돼 있다. 추사의 증조모인 화순옹주와 부군인 월성위 김한신의 합장묘도 있고 그 옆에는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리고자 정조가 내린 열녀문이 위치해 있다.



추사의 업적을 재조명하기 위해 지난 2008년 건립된 추사기념관에는 추사의 탄생부터 추사체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선생의 일대기를 볼 수 있는 상설전시관을 비롯해 기획전시실, 다목적영상실, 다목적 체험실 등이 갖춰져 있다.



   
▲ 추사박물관



   
▲ 추사박물관



김정희가 25세때 중국에서 들여와 고택 인근 고조부 김흥경의 묘소 앞에 심은 백송은 여전히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원래 밑에서부터 세 가지로 갈린 수형이었는데 서쪽과 중앙의 줄기가 고사했고 현재는 동쪽 줄기만 남아 있다. 예산의 백송은 천연기념물 제106호로 지정됐다. 백송공원도 조성돼 있다.



추사 집안의 개인 사찰이었던 오석산 화암산에도 그의 흔적이 남아있다. 화암사 대웅전 뒤편에는 높이3~4m, 길이 30여m인 병풍바위가 자리잡고 있다. 그는 이 바위에 詩境(시경)이라는 예서 글씨와 天竺古先生宅(천축고선생댁)이란 글자를 새겨놓았다.




   
▲ 고조부 김흥경의 묘소 앞에 심은 백송

 

▷ 추사밥상 등 추사 관련 문화사업 개발 = 예산군은 지난 2010년부터 예산 향토산업추진단을 구성해 추사 김정희 선생의 문화유산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향토문화사업을 개발, 추진하고 있다. 추사서체 개발, 추사스토리 발굴, 추사관련 상품 디자인 개발 뿐만 아니라 추사문화상품 개발업체 지원, 홍보.체험관 시설 등을 추진하고 있다.


  

추사의 일생을 어린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쉽고 재미있게 풀어나가는 '동화&만화책' 문화사업과 예산 지역의 다채로운 식자재를 활용해 소박하고 서민적인 추사 김정희의 이미지와 접목시킨 '추사밥상'이 대표적이다. 또, 다양한 체험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추사향토자원을 기반으로 한 추사 체험프로그램과 사과와인, 삽다리 전통한과, 쨈 등 다양한 추사문화상품을 개발하고 있다.




   
▲ 화암사 병풍바위에 새긴 추사의 글자


문화관광해설사 김선자씨는 "추사 고택에 1박 2일 동안 머물며 추사 선생의 전통문화 및 지혜를 배울 수 있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며 "고택과 그 주변일대에 대해 스토리텔링을 접목한 추사길 개발도 이뤄질 예정"이라고 전했다. <한형진.박소정 기자>





[추사의 모든 것을 이곳에 담다 ]


3. 추사의 예술혼 엿보다 / 경기도 과천시 추사박물관





추사박물관은 2013년 6월 3일 경기도 과천시 추사로 78(주암동) 일대에 지어졌다. 과천은 제주도만큼이나 추사 김정희 삶에서 의미가 있는 장소로서, 삶의 마지막 순간을 이곳에서 보냈다.



충남 예산군, 제주도 등 추사를 매개로 한 전시공간이 들어선 지역과 비교하면 과천시 추사박물관은 가장 후발주자에 속한다. 하지만 추사의 마지막을 헛되이 여기지 않겠다는 듯이, 박물관은 알찬 구성을 자랑한다.




   
■ 추사박물관 옆에 자리잡은 과지초당. 추사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장소다.



▲ 마지막이자 가장 빛났던 4년



   
■ 추사박물관에 전시된 불이선란도.

김정희는 1849년 서귀포 대정에서 8년 3개월여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서울 용산으로 보금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1851년(철종 2) 7월 진종조례론의 배후발설자로 지목받아 또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떠난다. 1년 만에 북청유배를 마치고 돌아온 장소가 바로 과천이다.



추사가 머무른 과천 과지초당(瓜地草堂)은 김정희의 생부 김노경이 지은 별장으로 알려졌으며, 현재도 건물이 남아있다. 1837년 김노경이 별세하자 3년 상을 치르며 이곳을 찾았다.

1852년 10월 9일 과지초당에 도착해 1856년 10월 10일 세상을 뜨기 까지, 추사가 4년 동안 머문 시간은 생을 정리하는 동시에 마지막 예술혼을 펼친 시간이다.



이 시기에 남긴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죽음을 3일 앞두고 쓴 현판 ‘판전’(板殿)이다. 과천에서 머지않은 서울시 강남구 봉은사에 걸려있다. “꾸밈이 없는 졸박한 글씨에서 김정희 말년의 청정무구한 심상을 엿볼 수 있다”, “한 점의 속된 기운이 없는 글씨” 등의 평가를 받는 글씨다.


노년의 과천생활 가운데 그린 것으로만 알려진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는 추사의 완숙미를 고스란히 담아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선 몇 개로 그려낸 난과 독특한 붓놀림으로 써낸 글씨는 파격적이면서 개성 넘치는 추사체의 마지막 단계임을 느끼게 해준다.


 

▲ 박물관 이상을 향하는 박물관



추사와 관련한 시설 중 가장 최근에야 알려진 추사박물관이지만 그 준비과정은 상당한 기간을 올라간다. 1996년 6월 ‘과천 추사 관련 유적 조사 보고서’가 발간되며 추사와의 인연을 처음 맺기 시작한 과천시는 2004년 4월 추사연구회를 창립하고 같은 해 유적복원 및 학예관 건립 타당성 조사 연구를 진행하며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한다.




   
■ 과천시에 지어진 추사박물관.


특히 추사 서거 15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 및 추사글씨 귀향전 개최(2006년 11월), 대표적인 일본 추사연구가 후지츠카 치카시의 아들인 아키나오 선생을 방문해 관련 자료 일체를 기증(2006년 2~8월) 받는 등 내적인 요소를 충실히 갖추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한 점이 눈길을 끈다.




   
■ 추사박물관 건물의 백미인 불이선란도. 벽면에 새겨져 비가 오는 날에 더욱 멋진 모습을 자랑한다. 여기에 박물관 외형은 벼루 모양을 구조로 설계될 만큼 공을 들였다.
건축비 115억원, 총 212억원을 들여 개관한 추사박물관에는 현재 추사 관련 자료 1만5000점을 소장하고 있다. 전시시설은 추사의 생애와 학예로 구분해 삶과 예술의 흔적을 모두 확인할 수 있게 배려했다. KBS 한국의 유산 프로그램 중 추사 편도 이곳에서 협조를 받아 촬영할 만큼 전시 수준을 인정받았다.


디지털 추사 글씨그림 그리기, 탁본체험 등 6개 상설 체험프로그램을 기초로 어린이, 저학년의 눈높이에 맞춘 프로그램, 일반인이 참여하는 아카데미 및 유적답사전시해설 등 15개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전담인력 또한 별도의 팀제로 꾸려져 박물관장, 학예연구사 2명 등 모두 6명이 추사박물관을 위해 근무하고 있다. 문화해설사도 상시 운영 중이다.



탄탄하게 축적된 자료를 근간 삼아 누구나 쉽게 추사라는 인물을 알 수 있게 노력하는 추사박물관은, 6월 3일 개관 이후 한 달 만에 약 4300명이 방문했고 지역 단체 및 학교를 중심으로 방문접수가 늘어가고 있다.

앞으로 소장 작품을 늘려가고 관련 기관과의 교류를 넓히며 추사 대표박물관으로서 입지를 굳혀나갈 예정이다.


<한형진-박소정 기자>



 

   
■ 후지츠카 치카시 선생이 소유했던 세한도 복제본이 전시돼 있다.


 

   
■ 추사박물관은 일본 학자 후지츠카 치카시의 추사 연구자료를 1만점 이상 보관하고 있다.


 

   
■ 추사박물관 내 전시공간.

 




   
■ 김정희의 자호인이 나열돼 있다.


 

   
■ 유배시절을 설명하는 부스에 걸려있는 세한도.



 

   
■ 전시공간.



 

   
■ 전시부스를 설명하는 권오택 추사박물관 팀장.



   
■ 탁본체험 공간.


 







 [70년 동안 벼루 열 개, 천 자루의 붓 닳도록..' ]

 <4> 천재 예술가의 면모





추사 김정희는 엄청난 노력파였다. 과천에서 말년을 보내던 추사가 친구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 여실히 드러난다. "제 글씨는 비록 말할 것도 못 되지만 70년 동안 벼루 열개를 갈아 구멍을 내고 천 자루의 붓을 닳게 했습니다."



김정희는 '추사체'란 독특한 글씨체를 남긴 조선 대표 서예가이면서도 금석학 등 학문연구를 비롯해 그림, 시 등 여러 분야에서 업적을 남긴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는 이야기들이 곳곳에 가득하다.




   
▲ 해남 대흥사에 가면 현판 글씨에 얽힌 일화가 있다. 현재 대웅보전에는 원교 이광사의 현판이, 그 옆에 백설당에는 추사 김정희의 무량수각 편액이 걸려있다.

■ 옛 글씨를 찾아서= 어린시절, 추사는 짧은 기간이지만 북학파 학자인 박제가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박제가는 김정희가 6살 때 입춘대길이라 써서 대문에 붙인 글씨를 보고 아이의 스승이 되겠다고 자청해 인연을 맺었다는 일화가 있다. 박제가와의 인연은 추사가 청나라의 고증학과 새로운 문물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됐다. 


추사는 24살때 동지부사로 가는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자제군관자격으로 꿈에 그리던 연경(현재의 북경)에 가 청나라 석학 옹방강과 완원을 만나 스승으로 삼았다. 40여일 동안 머물면서 학문적인 교류를 하면서 금석학에 몰두하게 됐다.




   
▲ 추사가 쓴 대흥사의 무량수각 편액


조선으로 돌아와서는 삼국시대부터 고려, 조선에 이르는 옛 비석들의 글씨를 조사하는 등 금석학 연구에 매달렸다. 그 결과 31살때 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를 찾아내 비석에 남아있는 68자를 판독, 신라의 진흥왕이 한강 이북까지 영토를 넓힌 일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임을 확인하고 세상에 알렸다. 원래는 북한산 비봉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비를 보존하기 위해 경복궁에 옮겨 놓았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 초의선사 유적지에 있는 초의의 동상
명필 현판 떼어낼만큼 기세등등했지만= 전남 해남 대흥사에 가면 현판 글씨에 얽힌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추사는 54세때 제주로 유배를 가던 중 친구 초의선사를 만나기 위해 전남 해남 대흥사에 들렀다.
추사는 당시 남도의 명필로 꼽히는 원교 이광사의 대웅보전 현판을 보더니 촌스럽다며 떼어내라고 했다. 그 대신 자신이 써준 무량수각 현판으로 바꾸라고 했다. 추사는 유배를 떠나면서도 나약한 모습을 보이기는 커녕 기세가 당당했다고 한다.


하지만 8년 3개월간의 제주 유배생활을 끝마친 추사는 달라져 있었다. 다시 대흥사에 들러 초의선사를 만난 추사는 자신이 쓴 현판을 올려다보고는 명필 원교의 글씨를 못 알아보았으니 대웅보전의 자신이 쓴 편액을 내리고 다시 원교의 현판으로 걸라고 했다. 


지금은 대흥사 대웅보전에 원교 이광사의 현판이, 바로 옆 백설당에는 추사의 현판이 걸려 있다. 또, 추사가 쓴 무량수각 편액 바로 옆에는 해사 김성근이 쓴 백설당 편액이 함께 걸려있어 조선후기의 명필의 필체를 한 눈에 볼수 있는 쏠쏠하다. 특히, 해남군은 토요일과 일요일 대흥사 내에 문화관광해설사를 배치해 방문객들이 관련설명을 들을수 있도록 하고 있다. 




 
초의선사에게 선물한 명선동갑내기인 추사 김정희와 초의선사의 우정은 애틋했다. 두 사람은 30세 때 한양에서 처음 만나 평생의 벗으로 이어왔다. 초의는 제주로 유배간 추사를 위로하기 위해 그가 좋아했던 차와 서신을 수시로 보냈다. 또, 추사가 아내의 죽음을 당했을 때에는 이를 위로하기 위해 직접 제주에 찾아가 6개월을 함께 지내며 상처를 위로했다.



초의는 15세에 출가해 해남 대흥사에서 구족계를 받았으며, 39세에 일지암을 중건해 40여년 동안 수행했다. 불교 선지식은 물론 시, 서, 화에 모두 능했던 초의는 추사 뿐만 아니라 다산 정약용 등 당대의 석학들과 교류하며 교분을 나눴다. 




   
▲ 초의선사 유적지



   
▲ 추사가 초의에게 선물했다는 명선이라는 글씨



   
▲ 초의선사 유적지 내에 있는 추사 김정희의 완당전집과 유묵을 탁본한 탁본집



다성(茶聖)이라 일컫는 초의는 추사에게 차를 보내주고 다도의 우정을 쌓았다. 추사는 초의선사에게 차를 선물 받고 보답으로 백석신군비(白石神君碑)의 탁본을 모범으로 삼아 명선이라는 호(號)를 지어 보냈다. 명선은 현존하는 추사 글씨 중 가장 크며 추사의 대표 서예작품으로 꼽힌다.

초의가 태어난 무안군 삼향면 왕산리에 조성된 초의선사 유적지에는 평생에 지음이 되었던 추사 김정희의 완당전집과 유묵을 탁본한 탑본집, 명선 등 추사의 글씨들이 전시돼 있다.

 

<한형진.박소정 기자>





[추사를 ‘추사’로 완성시킨 섬 ]


5. 추사의 제주 유배생활




추사 김정희가 현대 시대에도 널리 인정받는 이유 중 하나는 독특한 글씨인 추사체다. 많은 전문가들은 그의 삶에서 추사체를 완성시킨 순간이 제주섬에 갇혀있던 8년 3개월이라고 평가한다.


아내를 잃고 병에 시달리며 몸과 마음이 고통 받았지만 아픔을 토양삼아 한 단계 높은 글씨를 완성했고 불후의 명작으로 불리는 <세한도> 등의 작품도 세상에 남겼다.



그의 대정 유배생활은 현재 제주추사관, 추사유배지, 추사유배길로 남아있다. 단순하지만 현대적인 느낌으로 지어진 건물과 다양한 작품이 인상적인 추사관, 그가 머물렀던 제주옛집, 추사와 제주의 인연을 길로서 풀어낸 유배길까지. 눈과 발로 김정희를 만날 수 있는 장소가 바로 서귀포 대정이다.




 

▲가혹했지만 빛나는 8년 3개월


   
■ 제주추사관에 전시된 추사 흉상

김정희가 대정으로 귀향가게 된 원인은 당시 정치권력이던 안동 김씨 세력의 음모 때문이다. 군신사이를 이간질한다는 이유로 능지처참을 당한 윤상도라는 인물에 대해, 윤상도와 그 아들의 상소문을 추사가 작성했다고 안동 김씨 세력이 주장하면서 헌종 6년(1840) 9월 4일 제주도로 유배를 보내진다.



한 달 동안 이동하며 10월 2일 대정현에 도착한 추사. 그에게 내려진 형벌은 ‘위리안치’로서 죄인이 머무는 집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가시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유폐시키는 중형이다.


낯선 곳에서 홀로 지내는 형벌이 가져다주는 정신적인 고독감, 여기에 기후와 생활여건이 전혀 다른 곳에 놓이면서 육체적으로도 힘든 시간을 보낸다.



양진건 제주대학교 교수의 ‘제주 유배길에서 추사를 만나다’에는 “실체 추사는 눈병, 다릿병, 소화불량증을 호소했다. 환갑에 가까운 몸으로 이역의 제주도에서 적응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기침과 혈담으로 고생했고 특히 눈의 아픔을 호소했다”고 설명한다. 여기에 유배 2년차에 부인 예안 이씨가 사망하기 까지 한다.



심신이 고단한 삶이었지만 동갑내기 친구인 초의선사와 친구 권돈인, 제주목사 장인식, 제자인 소치 허련, 서자 상우 등이 다방면으로 도움을 준다. 여기에 이한우, 강도순, 강도휘, 이시형 등 제주도에서 거느린 제자들과도 많은 교류를 가졌다. 대정향교에 써준 의문당(疑問堂)이란 현판은 지금도 제주추사관에 남아있다.



유배 5년차에 들어 현재 국보 제180호로 지정된 세한도를 완성했다. 더불어 수많은 책을 읽고 글씨를 쓰며 실력을 갖춰간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는 “추사가 자필로 쓴 장서 목록을 보면 약 7000권을 헤아린다. 추사는 이 책들을 제주도로 가져와 보았다”고 설명했다.


답사기에 실린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평안감사 박규수의 설명을 보면 “만년에 제주도 귀향살이로 바다를 건너갔다 돌아온 다음부터는 남에게 구속받고 본뜨는 경향이 다시는 없게 되고, 여러 대가의 장점을 모아서 스스로 일가를 이루게 된다”고 나온다.


고단하고 가혹했지만 추사를 추사로 만들어준 귀향생활은 8년 3개월인 헌종 14년(1848) 12월 6일 마치게 된다.



   
■ 제주추사관.


 

▲추사가 살았고 걸었던 그 곳을 만나다


대정읍 안성리 1661-1번지(추사로 44)에는 제주추사관, 추사유배지 및 추사유배길의 시작점이 모두 모여있다. 2010년 5월 13일 개관한 추사관은 국비 50%를 지원받아 75억 4000만원을 들여 지하 2층, 지상 1층의 1193.9㎡ 규모로 지어졌다.

지난해 6만명, 올해는 8월까지 4만 5425명이 방문하는 서귀포 대표 관광지 중 한 곳으로 자리 잡고 있다.



   
■ 대정 유배 당시 대정향교에 써줬다고 알려진 현판.

지난해 기획전, 강연회 각 1회씩을 개최하고, 올해는 5월 13일부터 두 달 동안 기획전 ‘대정현에 그가 있었네’를 열었다.


소장품은 총 106점으로 보물이 26점, 서간 및 탁본이 80점이다. 과천시 추사박물관이나 충남 예산군의 추사고택보다 작품 수에 있어서는 월등히 앞선 수준이다. 특히 추사 본인의 작품 뿐만 아니라 제자, 가족, 지인, 스승 등 연관된 인물들의 작품까지 두루두루 만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세한도는 복제본과 함께 자세한 작품 설명까지 곁들여져 있어 눈길을 끈다.



   
■ 세한도 복제본과 자세한 작품설명.

2011년 ‘서귀포김정희유배지’로 명칭이 바뀌었고 사적 제487호로도 지정된 추사유배지는 1948년 헐렸던 것을 1984년 강도순 증손의 고증에 따라 다시 지은 제주옛집이다. 김정희가 머무를 당시 소소한 이야기가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옛 선조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있게 보고 만질 수 있어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 김정희가 유배 당시 머물렀던 집.


새로운 문화콘텐츠로 평가받는 추사유배길은 2010년 7월 1일부터 올해 4월 30일까지 추진되는 ‘제주유배문화의 녹색관광자원화를 위한 스토리텔링 콘텐츠 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제주대학교 산학협력단(총괄책임자 양진건)이 주관해 만들어졌다.



   
■ 추사유배길.


   
■ 추사유배길 코스.



추사와 제주를 잇는 다양한 주제들로 인연의 길, 집념의 길, 사색의 길 등 세 가지 길이 제주추사관에서 뻗어나간다. 한가로운 농촌 풍경과 곳곳에 설치된 전각, 시비 등의 조형물이 어우러지며 온몸으로 추사를 이해할 수 있다.

앞으로 서귀포시는 추사 작품 구입 및 추사 관련 학술자료를 더욱 확보해 나가고, 제주대학교 산학협력단은 유배길 체험프로그램 운영 및 보완 작업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http://www.seogwipo.co.kr/news/articleView.html?idxno=90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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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만화 한국위인전 김정희 - YouTube

www.youtube.com/watch?v=CCF5AVcY8vQ
2013. 3. 21. - 업로더: Tongu Bat
역사만화 한국위인전 김정희. Tongu Bat·904 .... [추억의만화영화]한국사위인전 45추사 김정희by 동영상 풀빵 723 views; 14:59 ..





지식채널e.130123.문화유산 시리즈 - 추사 김정희의 봉은사 판전 - YouTube

www.youtube.com/watch?v=ookyENCNH7U
2013. 1. 28. - 업로더: jihoon kong
지식채널e.130123.문화유산 시리즈 - 추사 김정희의 봉은사 판전. jihoon kong·190 videos. SubscribeSubscribedUnsubscribe 353 ...







선양반의 엄정함, 추사고택 on Vimeo

vimeo.com/24100340
2011. 5. 23.
추사고택은 추사 김정희가 태어나고 유년시절을 보낸 전통 한옥이다. 추사의 증조부가 지은 집으로 우리나라 양반문화의 정갈한 분위기를 잘...





curatorsim의 문화유산답사 - 추사유배지와 전시관 - YouTube

www.youtube.com/watch?v=psitCSF5mck
2012. 11. 11. - 업로더: 준용 심
추사유배지는 추사 김정희선생이 제주에 남긴 유배 문학의 커다란 문화적 가치 뿐만 아니라 그가 남긴 금석학과 유학, 서학의 의미는 역사적·학술적 ...









추사 김정희 그림-동영상 - 세계최고화질 4HD 판도라TV

channel.pandora.tv/channel/video.ptv?ch_userid...
2010. 5. 10.
추사 김정희 그림.. ... 추사 김정희 그림-동영상: 5years ago · 970 시청. 01:22. 공유하기. 가슴에 묻어 두고 싶은 글.. 5years 






추사 - 풍랑의예술.mpg - YouTube

www.youtube.com/watch?v=uVOxnVIKIfw
2011. 6. 25. - 업로더: sookheemoon
추사 김정희의 생애중 제주에서의 유배생활과 새한도와 추사체가 탄생한 배경. ... [추억의만화영화]한국사위인전 45추사 김정희by 동영상 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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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유배길에서 추사를 만나다 | Fac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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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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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유배길에 추사를 만나다..wmv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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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5. 30. - 업로더: reyyoung27
이 책은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을 위해 노력하고 방황하던 추사 김정희의 유배생활을 담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