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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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49년 1월 12일 (64세) 일본 교토 부 교토 시 |
직업 | 소설가 |
국적 | 일본 |
활동 기간 | 1979년 ~ 현재 |
장르 | 초현실주의, 마술적 사실주의 |
주요 작품 | 노르웨이의 숲 해변의 카프카 |
서명 |
무라카미 하루키(일본어:
생애
1949년에 일본 교토 부 교토 시에서 태어나 효고 현 아시야 시에서 자랐다. 하루키의 아버지는 불교 승려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오사카 출신 상인의 딸이었다. 하루키는 부모로부터 일본 문학에 관해 배웠다.
어린 시절부터 서양 문화의 영향을 받았는데 특히 서양 음악과 서양 문학에 심취했다. 커트 보니것이나 리처드 브로티건과 같은 미국 작가들의 여러 작품을 읽었는데 이런 바탕이 하루키를 다른 일본 소설가들과는 차별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와세다 대학 문학부 연극과에 입학하여 드라마를 공부했는데, 대학에서 아내인 요코를 만났다. 하루키의 첫 직업은 레코드 가게 직원이었는데,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의 주인공인 와타나베 도오루 역시 소설 속에서 레코드 가게 직원으로 나온다.
대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도쿄 도의 고쿠분지 시에서 '피터 캣'이라는 커피점(저녁에는 재즈바)을 개업해서 운영하였다. 가게는 아내와 함께 1974년부터 1981년까지 운영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의 주제와 이름은 대개 클래식 음악에서 참고한 것이 많다. 2012년에는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된 적도 있었으나, 중국의 소설가 모옌이 수상자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수상에 실패했다.
첫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하루키가 처음으로 소설을 쓴 것은 29살 때였다. 첫 소설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였는데, 야구 경기를 보다가 소설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전해진다. 1978년 야쿠르트와 히로시마와의 경기를 도쿄 메이지 진구 야구장에서 보던 중, 외국인 선수였던 데이브 힐튼 선수가 2루타를 치는 순간 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작품
한국어 책 이름 | 일본어 책 이름 | 한국어 출간일 | 일본어 출간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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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 風の歌を聴け | 1979 | |
1973년의 핀볼 | 1973年のピンボール | 1980 | |
양을 쫓는 모험 | 羊をめぐる冒険 | 1982 | |
중국행 슬로보트 | 中国行きのスロウ・ボート | 1983 | |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 | 1983 | ||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 世界の終りとハードボイルド・ワンダーランド | 1985 | |
빵가게 재습격 | パン屋再襲撃 | 1986 | |
노르웨이의 숲 | ノルウェイの森 | 1987 | |
댄스 댄스 댄스 | ダンス・ダンス・ダンス | 1988 | |
TV피플 | TVピープル | 1990 | |
먼 북소리 | 遠い太鼓 | 1990 | |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 国境の南、太陽の西 | 1992 | |
태엽 감는 새 연대기 | ねじまき鳥クロニクル | 1995 | |
밤의 원숭이 | 1995 | ||
렉싱턴의 유령 | レキシントンの幽霊 | 1997 | |
스푸트니크의 연인 | スプートニクの恋人 | 1999 | |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 | 神の子どもたちはみな踊る | 2000 | |
해변의 카프카 | 海辺のカフカ | 2002 | |
어둠의 저편 | アフターダーク | 2004 | |
도쿄 기담집 | 東京奇譚集 | 2006 | |
1Q84 | 1Q84 | 2009 | |
잠 | ねむり | 2012 | |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 色彩を持たない 多崎つくると、彼の巡の年 | 2013 |
노르웨이의 숲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 한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에 대하여
현대인의 고독과 청춘의 방황을 선명하게 포착한 현대 일본 문학의 대표작
1987년 발표된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청춘의 영원한 필독서로 사랑받고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대표작 『노르웨이의 숲』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으로 출간되었다. 1960년대 말 고도성장기 일본을 배경으로, 개인과 사회 사이의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관계 가운데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을 것처럼 생생한 청춘의 순간을 그려 낸 이 소설은 35개국 이상의 국가에서 번역 소개되는 등 세계적인 ‘하루키 붐’을 일으키며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학적 성과를 널리 알린 현대 일본 문학의 대표작이다.
이번에 민음사에서는 1989년 『상실의 시대』라는 제명으로 처음 출간된 이래 한국 출판 사상 최장기 베스트셀러를 기록해 온 『노르웨이의 숲』을 원문에 충실하면서도 현대적인 언어로 새롭게 전면 번역하였다. 고독한 도시 한가운데에서 살아가는 청춘의 아픔과 사랑의 순간을 강렬하게 담아낸 ‘시대의 소설’. 신선하고 유려한 새 번역으로 만나는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의 진수는 첫 만남을 추억하는 독자에게도, 새로운 만남을 기다리는 독자에게도 잊지 못할 기억을 선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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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황희경 기자 = 20~30대가 가장 좋아하는 일본 소설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라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8일 대한출판문화협회가 일본이 주빈국으로 참가하는 2009 서울 국제도서전을 앞두고 싸이월드 20~30대 이용자 22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52%가 '상실의 시대'를 가장 좋아하는 일본 소설로 꼽았다.
이 외에 에쿠니 가오리와 쓰지 히토나리가 함께 쓴 '냉정과 열정 사이', 요시모토 바나나의 '키친' 등이 20~30대가 좋아하는 일본 소설인 것으로 나타났다.
가장 좋아하는 일본 작가로는 31%가 에쿠니 가오리라고 답했으며 이어 무라카미 하루키(23%), 요시모토 바나나 등의 순이었다.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로는 '세련되고 경쾌한 문장' 때문이라고 답한 사람이 32%로 가장 많았고 이어 '장르의 경계를 허무는 구성'(26%), '무겁지 않은 주제'(11%) 등으로 답했다.
[조명]하루키를 읽는가, 하루키 열풍을 읽는가
평일 낮시간 대형서점에서 독자들을 줄 세울 수 있는 작가 하루키. 1990년대부터 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의 고정팬층은 견고하다. 그의 작품을 둘러싼 독자들의 반응은 늘 뜨겁고 문학계 반응은 여전히 차갑다. 30대 독자들이 이끈다는 ‘하루키 열풍’을 들여다 본다.
서울 교보문고 광화문점에는 계산대가 네 곳 있다. 음반매장 맞은편 잡지 매장에 하나, 사회과학·자연과학·경영경제서적 매장에 하나, 외국어서적 매장에 하나, 그리고 문학·역사·철학 등 인문사회서적 매장에 하나가 있다. 위치상 접근성이 가장 좋은 인문사회서적 매장 계산대에 가장 많은 고객들이 몰린다.
월요일이었던 7월 1일 정오, 이곳에서 희귀한 풍경이 펼쳐졌다. 인문사회서적 매장 계산대 직원 네 명 앞으로 고객들이 네 개의 긴 줄을 이뤘다. 정문 바로 옆 고객안내 데스크 앞에도 긴 줄이 뻗어 있었다. 평소에는 볼 수 없는 거대한 행렬이었다. 방송사 카메라와 취재진까지 몰려 교보문고는 북새통을 이뤘다.
독자들은 하나같이 같은 책을 들고 서 있었다. 흰색 표지에 작가 이름과 제목이 세로로 인쇄돼 있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이날 한국에서 정식으로 출간된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최신 장편소설이다. 이날 정각 12시부터 출판사(민음사)와 교보문고가 시작한 신작 판매 이벤트에서 이 책은 10분 만에 100부가 팔렸고, 하루 만에 5700부가 팔렸다. 6월 24일부터 일주일 동안 예약판매를 진행한 인터넷서점 알라딘은 4년 전 화제를 모았던 전작 <1Q84>에 비해 예약판매량이 3배가량 앞선다고 밝혔다.
국내외 작가를 통틀어 평일 낮시간 한국의 대표적인 대형서점에 독자들을 줄 세울 수 있는 작가는 없다. 최근 비슷한 사례는 지난 2009년 9월 9일 교보문고 광화문점에서 팝음악 사상 가장 위대한 그룹이라는 비틀스의 리마스터 앨범을 판매하던 날의 풍경뿐이다. 이날 교보문고 풍경은 <상실의 시대>(원제: 노르웨이의 숲) 국내 출간 이후 1990년대를 정점으로 단단하게 형성된 하루키의 고정팬층이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만만치 않은 응집력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스펙터클하게 보여줬다.
최원호 인터넷서점 알라딘 해외소설 MD는 “<해리 포터> 시리즈의 조앤 K 롤링이 마케팅 파워에서 하루키에 비견할 수 있을 텐데, 롤링은 <해리 포터>의 경우에만 그렇다. 대중음악의 스타와 비교하자면 마이클 잭슨 정도가 아닐까”라며 “<상실의 시대> 이후에 소개된 하루키 소설들은 설정 자체가 환상적인 성격이 있어서 난이도가 꽤 있는 편인데 이번 작품은 하루키의 출세작인 <상실의 시대>처럼 드라마가 있고 대중성이 있는 작품이어서 이전의 하루키 소설과 거리가 멀어졌던 독자들도 쉽게 손이 갈 수 있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직장인 신성현씨(32)는 1일 새벽부터 줄을 섰다. 6시30분 교보문고에 도착했을 때 그 앞에 세 사람이 서 있었다. 신씨는 선착순 10명에게만 판매하는 저자 친필 서명본을 얻는 데 성공했다.
일반 독자에게 하루키의 대명사인 <상실의 시대>는 1989년에 정식으로 출간됐다. 한국 문단에서는 1992년 출간된 박이문 작가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이인화 작가의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가 하루키 표절 논란에 휘말리며 포스트모더니즘 논쟁까지 불러일으켰지만, <상실의 시대>가 정작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10만부가 팔린 1994년의 일이다.
“장편보다 단편, 단편보다 에세이”
1990년대 중반 이후 ‘남다른 취향’을 문화적 세련의 징표로 삼았던 ‘신세대’ 문화는 하루키라는 새로운 아이콘을 찾아냈다. <상실의 시대>와 하루키는 이념이 사라진 자리에 ‘개인’과 ‘문화적 취향’이 들어섰던 1990년대 청년들에게 청춘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았다.
2000년에는 광고에까지 등장했다. 기차에서 <상실의 시대>를 읽고 있는 여성에게 남자가 휴대폰 문자메시지로 ‘노르웨이 숲에는 가보셨나요?’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현대전자 휴대전화 광고였다. <상실의 시대>는 이 해에 베스트셀러 정상을 차지했다.
신성현씨는 이 광고가 등장한 2000년에대학에 입학했지만 <상실의 시대>나 하루키에 대해 잘 몰랐다. 그는 2004년 <해변의 카프카>(2003년 국내 출간)를 읽고 하루키의 팬이 됐다. “교보문고에 진열돼 있던 책을 파란색 표지에 이끌려 샀다. ‘하루키’라는 이름이 특이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루키의 팬들 중에는 “(하루키의 매력은) 장편보다는 단편, 단편보다는 에세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신씨는 “제 주변에도 그렇게 말하는 이들이 많은데, 장편에서 받은 모호한 느낌과 비교해 단편이나 에세이는 내용이 명확해서 그런 것 같다”고 말했다. 팬들에게 하루키의 에세이는 그의 작업방식, 취향, 일상을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보물창고와도 같다.
하루키 붐은 하루키가 좋아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미국 작가들의 국내 인지도를 높이는 효과도 가져왔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위대한 개츠비>다. 2000년대 이후 가장 주목받는 평론가 중 한 사람인 신형철 평론가는 <느낌의 공동체>(2011)에서 이렇게 썼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는 영문학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젊은 독자들 중에서는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 덕분에 비로소 이 작품을 손에 쥔 독자들이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노르웨이의 숲> 3장에 이런 대목이 있지요. 갓 대학에 입학한 주인공이 교정에서 그가 그토록 아껴 마지않는 피츠제럴드의 저 책을 세 번째 다시 읽고 있을 때, 선배 나가사와가 나타나 이렇게 말합니다.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읽는 사람이라면 나와 친구가 될 수 있겠군.’ 이런 문장을 읽고 당장 <위대한 개츠비>를 사러 가지 않고 버티기란 어려운 노릇입니다. 도대체 어떤 책이기에!”
“젊은 작가들의 참신함, 그 없이 가능했을까”
하루키는 레이먼드 카버, 트루먼 커포티, 레이먼드 챈들러 같은 미국 작가들의 열렬한 팬인데, 이들 작가의 작품이 한국 독서시장에서 작게나마 일정한 존재감을 지니게 된 데는 하루키 팬층의 존재가 한몫 했다.
인터넷서점 예스24와 알라딘의 집계에 따르면, 하루키 신작 구매자의 절반(예스24 55.6%, 알라딘 52.6%)이 30대다. 예스24 기준으로는 그 중에서도 여성 구매층이 남성보다 약 10%포인트 더 많았다.
7월 1일 1시 교보문고에서 열린 하루키 신작 낭독회에 ‘독자 낭독자’로 참여한 천현정씨(33·여)는 고등학생이던 1997년에 <상실의 시대>를 통해 하루키와 만났다. 첫인상은 하루키 소설의 특징 중 하나인 ‘성에 대한 과감한 묘사’가 “고교생이 읽기에는 재미있지만 좀 야하다”는 것이었다.
미야베 미유키, 마루야마 겐지, 나쓰메 소세키 등 일본 작가들을 좋아한다는 천씨가 느끼는 하루키 소설의 매력은 “보편적인 상황을 다른 소설가보다 구체적으로 그리고, 일상에서 소소한 행복을 추구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하루키만큼 독자의 반응과 문학계의 반응이 큰 격차를 보이는 작가가 드물다는 사실이다. 하루키라는 이름 주위에는 독자들의 뜨거움과 문학계의 차가움이 교차하면서 만들어내는 해석상의 대립지대가 존재한다.
독자와 문학계의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양상은 1990년대부터 일관되게 관찰되는 모습이다. 1992년에는 한국 작가들 중 일부가 하루키 문학의 무국적성을 비판없이 수용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왔다. 1998년 <문학과 인식> 가을호에서 문학평론가 이경훈 교수는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류 등 일본 작가들의 작품을) 들여다보면 자본주의 시스템을 편집증적이고 물신숭배적으로 숭상하고 즐기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하루키 소설의 문학성에 대한 폄훼는 비단 한국 문학계만의 사정은 아니었다. 1997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주최 ‘세계 작가와의 대화’에 참석한 일본의 대표적 지식인 가라타니 고진은 “(안보투쟁으로 사회가 들끓던 일본의 1960년을) 아무것도 없었던 해로 치부하는 것은 의도적인 정치적 무관심이다. 한국에서 하루키가 열렬히 읽히는 것도 그런 맥락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2006년 9월 교수신문이 한국의 젊은 소설가, 시인, 평론가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하루키는 국내외 작가를 통틀어 ‘가장 과대평가받는 작가’ 1위에 꼽히기도 했다. 조영일 평론가는 2011년 9월 교수신문에 쓴 글에서 “(작가들은) 개인적으로는 (하루키를) 즐겨 읽지만, 표가 나게 그것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 분위기 같은 게 존재하는 셈이다. 즉 하루키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순간, 그는 자신의 ‘수준 낮음’을 감당해야 한다”면서 “한국문학의 자기분열”이라고 주장했다.
“최근 높은 평가를 받는 젊은 작가들에게서 발견되는 ‘참신함’, ‘새로움’, ‘세련됨’, 그리고 ‘약간의 도덕적 의무감’ 등은 어떤 의미에서 하루키 없이는 불가능했던 것들은 아닐까. 그러고 보면, 어쩌면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하루키에 감염됐는데, 이제껏 그렇지 않다고 부정해온 것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즉 철저히 그것을 억압해온 것이다.”
1990년대에 하루키 문학은 사적이고 개인적인 소설, 성적 코드를 포함하고 있는 대중문학으로 평가됐다. 비평적으로 논의할 가치가 없다는 견해가 문단의 지배적 분위기였다. 2000년대 이후 하루키가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랐지만 하루키에 대한 문학계의 무관심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루키에 대한 진지한 비평적 논의가 멈춰선 자리에서 30년 이상 지속되고 있는 하루키의 진화를 확인하고 있는 것은 독자들인 듯하다. 고경태씨(29)는 중학교 3학년 때 <상실의 시대>를 읽었다. “좋아하던 여학생이 그 책을 진지하게 읽고 있었다. 표지도 아주 인상적이었는데, 내용이 궁금해서 읽었다.” 중학생이 이해할 수 있는 소설은 아니었지만, 고씨는 강한 흡인력을 느꼈다고 했다. 하루키만의 문장력과 수사법에 매료된 그는 그 이후 하루키의 열렬한 팬이 됐다. “하루키의 책은 빌려서 읽은 적이 없다. 그의 책만은 반드시 사서 읽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지난 1일 직장에는 휴가를 내고 교보문고에 새벽부터 줄을 선 이유도 그 때문이다.
장편, 단편, 에세이를 포함해 하루키의 모든 책을 소장하고 있다는 그는 하루키가 쓴 인상적인 문장들을 거의 그대로 외우고, 하루키에 대한 비평도 빠짐없이 찾아 읽는다. “하루키 작품의 선인세가 10억원을 넘어가는 게 정상이냐라거나 작품이 다소 동어반복적이라고 하는 비판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몇 년 전에 어느 유명한 평론가가 하루키 작품을 ‘쓰레기’라고 폄훼한 건 의외였다. 기호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차이를 들어 작품의 질까지 운운하는 건 잘못된 일이라고 본다. 하루키가 작중에서 특정한 문화적 취향을 드러내는 걸 허세라고 할 수도 있지만 나는 하루키가 언급한 음악이나 미술 작품을 따로 공부하면서 전에는 몰랐던 세계를 알게 됐다. 오히려 고마운 마음이 든다.”
묘사에 새로움 없어… 20대 독자 감소
하루키는 일상의 소소한 상처를 지탱해주는 감성적 버팀목이자 같은 작가의 작품세계에 깊이 공감한다는 이유만으로 성별·직업·연령을 뛰어넘어 교감할 수 있는 사람들과 만나게 해준 통로였다고 고경태씨는 말했다. 그가 보기에 올해 예순셋이 된 작가 하루키는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
“하루키는 1995년 고베 대지진과 사린가스 테러사건 이후 동시대 일본의 현실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사린가스 테러에서 착상을 얻은 <1Q84>에서는 스토리텔링이나 구성력에서도 압도적인 흡입력을 보여줬다. 이번 신작은 스케일은 작아졌지만 주제적인 측면에서는 오히려 더 깊어진 것 같다.”
하루키 고정팬층이 앞으로도 두껍게 유지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알라딘 집계에 따르면 사전예약 구매자 연령대는 4년 전 <1Q84> 때의 34.5세에서 36.6세로 높아졌다.
1990년대에 20대였던 40대 구매율은 30대의 절반 수준이다. ‘하루키 세대’로 불리기도 했던 40대가 퇴장하고 30대가 하루키 열풍을 견인하고 있는 셈인데, 그 뒤를 받쳐줄 20대 구매율은 4년 전에 비해 12%포인트 낮아졌다. 직장인 김정아씨(28·여)는 ‘하루키 스타일’이 더 이상 새롭지 않다는 데서 이유를 찾았다. “하루키 소설을 보면 주인공이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음악을 듣고 무슨 옷을 입는지 상세하게 묘사하는데, 그런 게 이젠 우리 일상이기 때문에 그다지 세련되게 느껴지지 않는다.
성에 대한 묘사도 요즘 애들이 보면 오글거리는 수준이다. 하루키 소설의 개인주의, 서구취향, 음식, 패션 등이 우리 세대에게는 더 이상 동경의 대상이 아니다.”
반대로 하루키의 호소력이 어느날 급작스럽게 소멸할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이명원 경희대 교수(문학평론가)는 “하루키 소설은 메트로폴리스에서 살고 있는 도시인들의 내적 공허감과 소통에 대한 열망을 반영하고 있다. 이건 보편적인 주제이고 현대적인 주제”라며 “지난해 중국에서 <상실의 시대>가 베스트셀러가 됐다. <1Q84>보다 20년 전에 나온 소설인데 베스트셀러가 된 것이다. 중국의 자본주의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하루키의 도시적 감수성이 호소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하루키 열풍은 한국 문학의 상대적 빈곤을 보여주는 현상이라고 해석한다. “하루키를 비판할 수 있지만 거꾸로 왜 한국 작가들이 하루키를 극복하지 못하느냐고 물을 수 있다. 하루키는 막상 읽어보면 만만한 작가가 아니다. 새로운 작가층은 얇고 기존 소설 독자들은 고령화로 떨어져나가고 있는 상황에서 하루키 이외의 대안이 없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이 그의 새 소설에 급격하게 쏠리고 있는 건 아닐까.”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임순만 칼럼] 무라카미 하루키, 왜 지구촌에서 읽히나
임순만 칼럼]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열풍은 이제 문학비평을 넘어 사회비평의 대상이다. 장편소설 '1Q84' 후 3년 만에 선보인 그의 최신 장편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초판 20만부가 인쇄돼 이달 초 서점에 깔리자마자 바로 베스트셀러 1위로 뛰어올랐다. 평일 대낮의 서울 주요서점에 독자들을 줄 서게 만드는 작가는 국내외를 통틀어 하루키 외에는 없다. 이 소설은 지난 4월 일본에서 초판 50만부를 찍어냈고, 일주일 만에 100만 부가 넘는 판매기록을 세웠다. 소설만이 아니다. 이 작품의 주요 테마로 등장하는 러시아 피아니스트 라자르 베르만이 연주한 프란츠 리스트의 '순례의 해'는 절판된 음반이었음에도 복간되어 클래식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발표하는 작품마다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는 작가. 연전에 미국 샌프란스시코 공항에서 워싱턴DC로 가기 위해 비행기 보딩을 기다리던 중 중년의 남녀 두 명이 공항 통로 바닥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비행기에 탑승을 하고 보니 마침 그들 옆좌석에서 앉게 되었는데 한 사람은 영역된 하루키 소설 '양을 둘러싼 모험'을, 또 한 사람은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을 읽고 있었다. 워싱턴의 한 로펌에 근무하는 부부 변호사라고 자신들을 소개한 이들은 바빠서 소설을 거의 읽지 못하지만 하루키 소설만은 틈틈이 본다고 말했다.
또 지난해엔가는 저녁 늦은 시간에 지하철 경로석에서 두툼한 책을 읽고 있는 노인을 봤는데 제목을 봤더니 하루키 소설 '1Q84'였다. 어르신이 이런 소설을 읽는 것은 좀 뜻밖이라고 말을 걸었더니 누군가의 소개로 읽기 시작했는데 조금 읽다 보니까 정신없이 읽게 된다고 했다. 읽고 있는 곳은 3권의 마지막 부분이었다. 1권이 700여 페이지, 2권이 600여 페이지, 3권이 750여 페이지니까 벌써 2000여 페이지를 읽은 것이다. 76세라고 했다.
하루키 독자들은 이런 식이다. 국경이 없고 남녀노소가 없다. 에세이나 소설은 물론 그가 언급하는 음반이나 치노팬츠, 로퍼, 태그호이어 같은 물건들도 유행이 되는 세상이다. 국내 일각에서는 하루키를 읽는 것이 '수준이 낮다'거나 '하루키가 과대평가됐다'는 시각도 있지만, 이는 하루키의 독창적인 어법을 모르고 하는 소리가 아닐까 싶다. 과대평가된 작가가 30년 이상 지구촌을 사로잡을 리가 없다. 더구나 하루키는 고갈되어가는 작가가 아니라 세월이 지날수록 독자층을 넓혀가는 작가다.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다니자키 준이치로'상을 비롯해 일본 거의 모든 문학상을 수상했고, 프란츠 카프카상(2008년), 예루살렘상(2009), 카탈로니아 국제상(2011) 등 지구촌 굴지의 상을 휩쓸고 있다. 더구나 예루살렘상과 카탈로니아 국제상은 문학상이 아니다. 세계 굴지의 국제정치 및 사회·인문분야의 상이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선정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들 상의 수상연설인 '벽과 알'(예루살렘상), '비현실적 몽상가'(카탈로니아 국제상) 등을 읽어보면 세계의 도시에서 왜 하루키를 꼽는지, 하루키가 수상하러 온다는 소식만으로도 현지 언론이 왜 들끓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1. 평이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지구촌에서 이처럼 하루키가 읽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우선적으로 하루키는 설명하지 않는 작가라는 점을 꼽아야 할 것이다. 이는 어떤 작가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독특한 하루키의 특징이다. 작가는, 또는 화자(話者)는 누구나 자기의 세계를 설명하려 한다. 대부분 자기가 말하는 것을 전달하고, 이해시키고, 동화시키기 위하여 이야기의 톤을 높이고 아우성을 친다. 세상이 시끄럽고 거칠어지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기자 윤창중은 격문(檄文) 직설(直說)을 날려 청와대 대변인이 되었지만 단 몇 개월도 버티지 못했다. 국가정보원장 남재준은 국정원이 2급 기밀문서로 분류해 보관해온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일반문서로 재분류해 세상에 공개해 국정에 파란을 일으켰다. 민주당 원내대변인 홍익표는 "만주국의 귀태(鬼胎)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가 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귀태의 후손들이 한국과 일본의 정상으로 있다"고 말했다가 사흘도 버티지 못하고 대변인에서 사퇴했다. 자기 격정과 독단을 제어하지 않거나 제어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세상이다.
그러나 하루키는 설명하지 않는다. 직설적으로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더 소통이 잘되는 방법을 찾아낸다. 하루키가 지구촌 어디서든 독자들과 효과적으로 소통하는 비밀은 바로 여기에 있다.
설명하는 대신에 하루키는 깊이 있게 관찰하고 판단은 조금만 내린다. 최종적인 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둔다. 설명하는 것은 쉽다. 설명하지 않고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하루키는 작가가 직접 판단하지 않고 독자들이 판단할 수 있도록 매력적인 형태의 다른 것으로 만들어 제시한다. 그래서 그의 글은 어떤 대목이라도 따분한 경우가 거의 없다. 작가가 이래저래 관여하면 글의 깊이가 없어지고 하나의 설명으로 고착화되기 마련이다. 부모가 책을 읽지 않는 아이에게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말하면 말할수록 아이는 부모를 따분해한다. 그러나 그 대신에 ①여행을 함께 가거나 아니면 공원에라도 놀러가서 친밀감을 높이고 ②어느 날은 도서관에 가서 지식에 대한 흥미를 북돋아주고 ③서점 구경을 가거나 아이의 방에 꽃이라도 꽃아 놓아 쾌적한 분위기를 만들어준다면 아이는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 책을 읽기 시작할 것이다.
이렇듯 하루키는 결론을 내리고 그것을 독자들에게 주입하는 대신에 가설(假說)을 쌓아가면서 자신의 세계를 완성시킨다. 그렇게 가설을 쌓아가는 것을 그는 '마치 잠든 고양이를 안아드는 것'으로 비유한다. 이야기라는 아담한 광장 한가운데 잠든 고양이처럼 포슬포슬한 가설을 얼마나 자연스럽고 솜씨 좋게 쌓을 수 있는 지가 바로 소설가의 역량이라고 본다. 그가 만들어내는 가설의 공명(共鳴)이 의외로 기똥차고 산뜻한 느낌을 주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의 출세작 '노르웨이의 숲'은 우리나라에는 처음에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소개됐었다. 성인으로 성장해 세상으로 나아가는 젊은이들이 느끼는 상실감을 다룬 이 소설은 분명 '상실의 세계', 혹은 '상실의 시대'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하루키는 자신의 작품 제목을 '상실의 시대'와 같은 문예(文藝)형 또는 설명형으로 만드는 작가가 아니다.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포슬포슬하게 잠든 고양이로 만드는 작가가 바로 하루키다.
그러니까 그는 자신의 소설에 대해서도 언급하는 것을 꺼려하는데, 아주 예외적으로 자신의 소설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자기란 무엇인가'라는 에세이. 한 독자가 "며칠 전에 시험을 봤는데 원고지 4매(일본 원고지는 400자, 우리나라 기준으로는 8매)로 '자기 자신에 대해 설명하시오'라는 문제가 나왔다. 혹시 그런 문제를 받는다면 하루키씨는 어떻게 하겠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형식이다.
이에 대해 하루키는 "원고지 4매로 자기 자신을 설명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면 굴튀김에 관한 글을 써보는 것이 어떻겠는가"라며 굴튀김으로 이야기를 바꾼다. 여기서 '굴튀김'이란 어떤 하나의 대상 혹은 사상(事象)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쓰는 것은 '사물과 자기 자신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와 방향을 데이터로 축적해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과정에서 많은 관찰(가설)이 동원되고, 비유로 사상(事象)과 그 이면을 오가는 그네타기를 시도한다. 비유가 하나의 사상 A를 설명하기 위하여 멀리에 있는 다른 사상 B를 불러다 대비시키는 일이라면, 단언컨대 하루키는 이 세상 작가 중에서 가장 먼 A와 B 사이의 그네를 탈 수 있는 작가라고 보면 될 것이다(출전은 기억나지 않지만 한 일본평론가가 이같은 분석을 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만큼 비유가 참신하다는 말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굴은 어느 깊은 바다 속에 있었다. 밤낮없이 단단한 껍데기 속에서 지냈다. 그런데 지금은 접시 위에 있다. 튀김으로 변한 굴을 젓가락으로 찔러보면 똑같은 굴이다. 그러나 다른 굴이다. 바삭한 튀김옷을 입힌 굴의 감촉과 향이 축복처럼 입안에 퍼진다. 나는 이런 굴튀김을 만드는 사람이다. 식사를 마치고 역을 향해 걸어갈 때 어렴풋하게 굴튀김의 조용한 격려를 느낀다. (…). 그렇게 제시하는 가설들이 층층이 쌓여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움직여나가고 하나의 세계가 만들어진다. '진정한 나'란 무엇인가. 하루키는 진정한 나를 설명하는 대신에 '굴튀김이란 소재를 잘 풀어서 가설을 쌓아나가는 것'으로 '진정한 나'를 그려낼 수 있다고 본다. "굴튀김에 관해 이야기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가 성립되는 것이다.
2. 독창적인 유기체를 만든다
하루키는 작가의 판단 대신 '가설의 틀 세우기'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묘사'라는 말로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설명은 직접적인 개입이고, 묘사는 형상화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다. 이때 하루키가 특징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은 색다른 비유와 독자들의 예상을 넘어서는 설정이다. 그의 '빌리 홀리데이 이야기'라는 글에서 예를 들어본다.
젊은 하루키가 도쿄 외곽의 작은 빌딩 지하에서 재즈 바를 운영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이따금 한 미국 흑인 병사가 일본 여성과 함께 가게를 찾아온다. 재즈 바를 찾아오는 흑인 병사라고 하면 독자들은 시끄럽고 덩치 큰 군인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하루키가 설정한 병사는 조용하고, 호리호리한 일본 여성과는 친구이면서도 미묘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내성적인 젊은이였다. 독자들의 예상을 가볍게 벗어난다. 두 사람은 도란도란 이야기하면서 재즈를 듣고 가끔 빌리 홀리데이의 판을 틀어달라고 부탁한다. 20세기를 감동시킨 재즈 3대 디바 중 첫 번째로 꼽히는 흑인 여가수 빌리 홀리데이.
어느 날 흑인 병사는 혼자 찾아와 구석 자리에서 빌리 홀리데이를 들으며 조용히 어깨를 흔들면서 운다. 하루키는 흑인 병사가 무안해 할까봐 못 본체 하며 다른 일을 한다. 그것이 그 병사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 후 일년쯤 지나 함께 오던 여성이 혼자 나타난다. 어느 비 내리던 가을밤이었다. 여자는 그 병사가 본국으로 돌아갔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 병사는 고향 사람들이 그리워질 때마다 이 가게에 와서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를 들었다고, 이 가게를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고. 그녀는 그리운 듯 추억을 풀어놓았다.
"그런데 그가 지난번에 편지를 보내왔어요." 그녀가 말했다. "자기 대신 그 가게에 가서 빌리 홀리데이를 들어달래요." 빌리 홀리데이의 판이 다 돌아가자 그녀는 레인코트를 조심스럽게 걸쳤다. "여러모로 고마웠습니다." 그 인사를 듣고 하루키는 적절한 대답을 해주지 못했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 때문에.
얼마나 재미있는 에피소드(가설)들의 조합인가. 하루키는 '재즈란 무엇인가'를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재즈란 무엇인가. 빌리 홀리데이란 누구인가. 그것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삽상하게 흑인병사와 일본여성을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이런 결론으로 유도한다. "나는 지금도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조용했던 그 흑인 병사를 떠올린다. 멀리 떨어져 조국을 그리며 카운터 한쪽 구석에서 소리 죽여 흐느껴 울던 남자의 모습을. 그 앞에서 조용히 녹아들던 온더록의 얼음을. 그리고 멀리 떠나간 그를 위해 빌리 홀리데이를 들으러 왔던 여성을. 그녀의 레인코트 냄새를. (…). '재즈란 어떤 음악인가요'하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나는 '이런 게 바로 재즈지'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나에게 재즈란 그런 존재다. 꽤나 긴 정의지만, 솔직히 말해 나는 재즈라는 음악에 대해 이보다 더 유효한 정의는 알지 못한다."라고.
이것을 이번의 신작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를 통해 더 자세히 이야기해 보겠다. 주인공 쓰쿠루는 나고야에서 성장하며 고교시절 5명의 그룹 멤버들과 아주 친하게 지낸다. 그 그룹이 주인공에게는 세상의 중심이다. 혼자 도쿄의 대학에 진학한 쓰쿠루는 대학 2학년 어느 날 한 멤버로부터 뚜렷한 이유도 없이 절교 통보를 받는다. '그냥 사라져 줘.' 이것이 쓰쿠루를 뺀 네 명의 공통된 의견이라는 일방적인 통보였다. 아무리 만남을 시도해도 그들은 쓰쿠루를 외면했다. 그날 이후로 쓰쿠루의 세상은 달라진다. 모든 의욕을 잃게 되고 늘 죽음의 곁에서 사는 세월이 이어진다. 16년이 지나 한 여자친구를 사귀게 됐을 때 여자친구는 쓰쿠루에게 그 상처를 해소해야만 한다는 조언을 해준다. 그리고 여친은 인터넷과 SNS 등을 통해 네 명 중 세 명의 현재의 위치를 검색해 알려준다. 그녀의 조언에 따라 쓰쿠루는 그들 네 명을 하나하나 만나는 순례여행길에 오른다. 일종의 추리의 세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피아니스트였던 여자 멤버(白)는 강간당한 후 심한 정신분열증세를 보이다 외딴 곳에 가서 살해당했음이 밝혀진다. 그러나 누구도 쓰쿠르가 죽은 여자 멤버(白)를 강간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도 왜 16년 전에 그를 강간범으로 몰아 왕따 시켰는지는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결국 주인공은 이야기의 키를 쥐고 있는 다른 여자 멤버(黑)를 만나기 위해 핀란드로 간다. 그녀는 핀란드 남자와 결혼해 일본을 떠났다. 그녀는 긴 이야기 끝에 이렇게 말한다.
"괜찮다면 나를 안아주지 않을래?"
여기에 포인트가 있다. 작가는 친구들이 왜 쓰쿠루를 강간범으로 몰았는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작품 어디에도 그런 설명은 없다. 그러나 "괜찮다면 나를 안아주지 않을래?"라는 말은 직접적인 설명 그 이상이다. 그녀(黑)는 심각한 정신분열 상태에 빠진 친구(白)를 치유시키기 위해, 그리고 자신이 남몰래 연정을 품고 있던 쓰쿠루를 곤란한 상태에 빠뜨리기 위해 쓰쿠루를 강간범으로 몰았던 거였고, 작가는 '괜찮다면 나를 안아주지 않을래?' 이 한마디로 모든 미스터리의 실마리를 풀어낸다. 이것은 고해성사이자 화해와 치유의 장치다. 이런 부분에서 하루키의 소설은 날개를 단다.
작가는 덧붙인다. "그때 그는 비로소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영혼의 맨 밑바닥에서 쓰쿠루는 이해했다. 사람의 마음과 사람의 마음은 조화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처와 상처로 깊이 연결된 것이다. 아픔과 아픔으로 나약함과 나약함으로 이어진다. 비통한 절규를 내포하지 않은 고요는 없으며 땅 위에 피 흘리지 않는 용서는 없고, 가슴 아픈 상실을 통과하지 않는 수용은 없다."
3. 답은 이야기를 풀어가는 과정 속에 있다
하루키는 집요하고 극한적인 묘사에 매달리지 않는 작가다. 매달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런 문장을 배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1979년 첫 데뷔작이자 '군상(群像)' 신인문학상을 수상한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첫 문장에서 "완벽한 문장은 존재하지 않아. 완벽한 절망이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말야."라고 쓰고 있다. 이 말은 그가 문장에 대해 상당히 고심했음을 알려주지만 동시에 그가 문장에 매달리는 글을 쓰지 않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그 뒤에는 이런 문장이 이어진다. "내가 대학생 때 우연히 알게 된 어떤 작가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 참뜻을 이해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뒤의 일이지만 당시에도 최소한 그 말은 내게 일종의 위안이 되기는 했다. 완벽한 문장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그러나 그래도 역시 뭔가를 쓰려고 하면 언제나 절망적인 기분에 사로잡혔다. 내가 쓸 수 있는 영역은 너무나도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코끼리에 대해서는 뭔가를 쓸 수 있다 해도 코끼리 조련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그런 뜻이다. 8년 동안 나는 계속 그런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8년 동안. 긴 세월이다."
이렇게 토로하는 하루키가 들고 나온 문장은 집요하면서도 극한으로 밀고 가는 문장이 아니라 심플하고도 쿨한 문장이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郞), 기구치 칸(菊池寬), 아쿠다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구메 마사오(久米正雄),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 등 일본 문예미학의 정점을 찍었던 작가들을 그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 문장은 한없이 아름답고 다루는 세계는 똑떨어지는 일본 문예미학의 대가들을 언급하는 대신 데릭 하트필드, 스콧 피츠제럴드, 레이먼드 카버, 커트 보네거트, 리차드 브라우티건 같은 미국 작가들에게서 소설을 배웠다고 말한다. 특히 첫 작품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그는 소설의 많은 것을 데릭 하트필드에게서 배웠다고 여러 군데서 말하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하트필드 자신은 모든 의미에서 '불모'의 작가였다. 그의 책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문장은 읽기 힘들고 스토리는 엉망이고 테마는 치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트필드는 글을 무기로 싸울 수 있는 몇 안 되는 뛰어난 작가 중 하나였다. 헤밍웨이, 피츠제럴드와 같은 동시대의 작가와 견주어도 하트필드의 그 전투적인 자세는 결코 뒤지지 않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하트필드 자신은 마지막까지 자기가 싸우는 상대의 모습을 명확하게 포착하지 못했다. 결국 불모라는 건 그런 뜻이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 나오는 데릭 하트필드에 대한 설명이다. 그러나 아직도 하트필드는 어떤 작가인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사람이다. 하트필드는 하루키가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이라는 분석이 대세를 이루지만, 중요한 것은 "글을 무기로 싸울 수 있는 작가, 그러나 끝내 불모의 작가"라는 하루키의 관점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글을 무기로 싸운다'거나 '끝내 불모'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이 점에 대해서는 그가 자주 언급한 나머지 작가들, 즉 스콧 피츠제럴드, 레이먼드 카버, 커트 보네거트, 리차드 브라우티건 같은 작가들을 연결시키면 대략 떠오르는 것이 있다. 설명하지 않고 무진장한 유머와 단문으로 치닫는 커트 보네거트, 고정적인 주인공이나 스토리가 없이 에피소드를 이어가면서 놀라운 상상력을 펼쳐내는 리차드 브라우티건. 이들이 문장을 통해 세상과 대결한 기록은 치열하다. 그런 반면 끝내 불모성으로 추락했음을 미국문학사는 안타까워 한다. 레이먼드 카버는 누구인가. '대성당' '발 밑에 흐르는 강' 등을 남긴 레이먼드 카버는 현란하게 기교를 부린 문장은 아예 때려치우고 일상어로 소박한 경이로움의 세계를 보여준 작가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의 문장이 추가되면 독자의 상상력이 허물어지고, 반대로 하나의 문장이 생략된다면 이야기 자체가 허물어질 정도로 작품을 정밀하게 구성한 작가였다. 이들의 결합이 하루키라고 보면 묘하게 짚이는 데가 있을 것이다. 공통점은 이들이 불모의 작가들이라는 점이다. 문장으로 세상의 객관화에 대해 치열하게 싸웠고 끝내 무너진 작가들이라는 사실. 이 점이 하나의 완성된 세계를 만들어냈던 일본 선배 작가들과 하루키의 차이점이다.
하루키는 계속 변화하고 있지만 이 같은 기본적인 글쓰기의 틀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루키는 완성된 세계를 보여주지 않는다. 이야기의 결론을 찾아가는 과정, 그것이 바로 하루키 작품의 주제이자 방법론이다. 앞에서 하루키는 설명하지 않는 작가라고 말했다. 이 말은 "하루키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다루는 작가"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이 점을 이해하지 않으면 하루키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작가(혹은 주인공)와 세계 사이에 놓인 거리를 찾아가는 과정 속에 들어있는 수많은 가설과 비유와 에프소드 속에 드러나는 몇 개의 프리즘. 어떤 것은 밝혀지고 어떤 것은 질문 속에 들어있거나 과정 그 자체가 답이 되기도 한다.
이번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 역시 몇 개의 부분을 미해결의 장으로 남겨두고 있다. 아마도 이것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순환하는 하루키의 작품에서 어떤 식으로든 다시 등장할 것으로 기대되는 부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정한 정도로 하루키의 소설이 가볍다고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과연 그런지는 좀 더 논의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30년 이상 세계의 독자들을 사로잡고 있고, '하루키 현상'이라는 사회·문화적인 신드롬이 확산되고 있으며, 하루키의 독자들이 나날이 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어법과 소설방법론을 자신만의 독창적인 것으로 만들어 세계에서 가장 잘 소통하고 있는 작가를 우리의 거대담론의 틀로 재단해보려는 시도는 여전히 유효한 것인지도 생각해봐야 한다
http://m.media.daum.net/m/media/newsview/20130714165105727
너도나도 무라카미 하루키..읽어볼까? 말까?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제목부터 참 길다. 색채가 없다니, 무슨 뜻일까? 다자키 쓰쿠루는 아마 주인공 이름이겠지. 그가 순례를 떠나는 내용인 것 같긴 한데. 그럼 순례기인가? 그런데 이 책을 그저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이라고 말하면 제목에 대한 이런저런 이해 따윈 필요 없어진다. 그의 작품이라면 설령 제목이 없다 한들 기꺼이 책을 집어들 사람은 많을 테니.
무라카미 하루키, 어떻게 읽을 것인가
지난 7월 11일 경희대 서울캠퍼스 오비스홀에서 예일대에서 동아시아 문학을 연구하는 존 트릿 교수가 '무라카미 하루키,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주제로 강연을 펼쳤다. 그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일본 문학이 아닌 미국 팝문학(대중문학)에 가깝다고 말한다.
"그의 작품은 전혀 일본 문학답지 않아요. 오히려 미국의 팝문학이 일본으로 전파되는 전도체 역할을 하고 있어요. 대부분의 일본 문학은 일본적 색채의 독특함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지만 하루키의 소설은 그런 색채가 묻어 있지 않죠. 플롯이 다소 무너지는 형식이 있지만 이 또한 소설의 특징입니다."
누군가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 '미국 팝문화를 너무 좇는다', '문체가 가볍고 시대적 고민이 없다'라는 비판을 한다. 또 그의 작품들 속 캐릭터는 '거기서 거기', 즉 고정적이고 평면적이라는 이야기도 한다. 전반적으로 무력감에 젖어 있는 주인공들에 대해서 존 트릿 교수는 그들은 역사와 시대의 혼란을 대변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의 소설 속 많은 캐릭터들은 세대의 아웃사이더죠. 무라카미 하루키의 자화상이 아닐까요? 그는 무의식의 발로, 자동적으로 글을 써내려가요. 그래서 독자들은 각자 다른 해석을 하죠."
'각자 다른 해석' 역시 '모호하다'라는 말로 호불호가 갈리긴 하지만, 그러나 모든 것을 감안해도 '사소한 것들을 멋지게 만드는 데'는 그만 한 소설가도 없다는 말에는 대부분 동의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읽었다
책의 줄거리나 구성은 단순한 편이다. 주인공 다자키 쓰쿠루는 5명의 친구 모임에서 이유도 모른 체 친구들에게 절교를 당한다. 절망과 고독의 시간을 보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그는 철도 회사에 취직해 철도역 설계사로 살아가고 있다. 여전히 과거의 기억은 정신적 외상으로 남아 있다. 그러다 연상의 여자친구, 사라의 설득으로 과거에 입은 상처와 직면하기로 결심한다. 주인공은 16년 만에 네 친구를 만나러 고향 나고야와 저 멀리 핀란드로 떠난다. 그는 잃어버렸던 시간을 찾아가며 그가 친구들에게 버림받은 이유에 대한 진실을 알아간다. 다음은 「색채가 없는…」을 읽은 작가, 평론가, PD의 서평들이다.
그의 순례는 핀란드에서 끝난다(애독자들에게 '헬싱키'는 낯선 곳이 아니다. 이미 무라카미 하루키의 다른 글에서도 심심찮게 언급됐다). 거기서 마지막 친구 구로를 만나고, 그녀로부터 이해와 위로를 얻는다. 그로써 그는 그동안 하염없이 무너져 가던 정신을 어느 정도 회복한다. 도쿄로 돌아온 쓰쿠루는 이제 새로 살아갈 이유와 힘을 얻는다. 그리고 그 앞에는 다시 떨리고 마음 졸이는 일상, 낯설고 새롭지만 보통 사람들이 당연하게 누리는 일상이 기다리고 있다. 그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유명한 표현대로 '작지만 확실한' 일상을 기다린다. 최근 하루키 소설들의 마지막이 주로 그렇듯이, 무척이나 희망적으로 말이다. 작품 내내 회의와 비관으로 일관해온 작가의 입장을 보면 아주 놀라운 희망이다. 이것은 최근 예순을 넘긴 하루키의 글에서 어렴풋이 느껴지는 변화다.
_풍월당 대표 박종호
'그러는 사이에 몸의 중심 가까이에 차갑고 딱딱한 것이, 1년 내내 녹지 않는 동토의 중심부 같은 것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그리고 그 동토를 녹이기 위해서 쓰쿠루는 다른 누군가의 온기를 필요로 했다. 자신의 체온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본문 중에서
주인공 다자키 쓰쿠루가 가야 할 곳, 돌아갈 곳은 가슴속 동토의 왕국이 아니다. 그 온기를 녹여줄 바깥세상, 누군가일 것이다. 성찰이 필요 없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효율적인 확실성의 세계가 아니라 함께 뭔가를 만들어가지 않으면 한없이 모호하고 불확실한 세계일 것이다. 다자키 쓰쿠루의 개인적 상실과 일본 사회가 앓고 있는 집단적 상실감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상력 속에서 어떻게 만나는가? 상실감에 빠지지 않게 우리를 지켜주던 우정, 사랑, 신뢰. 이런 것들이 다 같이 위기에 빠진 이 시기에 이런 고민을 하면서 읽어보면 좋을 듯하다.
_정혜윤 CBS 라디오 PD
다자키 쓰루쿠의 순례에 독자를 초대하는 가장 큰 동력은 바로 친구들이 왜 다자키 쓰쿠루를 버려야만 했을까에 대한 궁금증이다. 비밀의 핵심을 파헤치는 과정은 독자에게 흡사 추리소설이나 탐정소설을 읽는 듯한 강한 호기심을 준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일종의 와이더닛(Whydunit) 서사와 닮아 있다. 그들은 대체 왜 그랬을까?
_영화·문학평론가 강유정
이 책을 읽는 동안 다자키 쓰쿠루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한꺼번에 뒤섞이기 시작했다. 「양을 쫓는 모험」의 백영옥 버전이라고 해두자. 그 모험에서 나는 이쯤에서 나올 법한 섹스 장면과 저쯤에서 등장할 장면과 대화의 패턴 대부분을 알아맞혔다. 그것은 특유의 '리듬'이 아니라 '동어 반복'이라 말할 수 있는 종류의 체험이었다. 어쩌면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무척 많이 읽었거나, 무척 사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_소설가 백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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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 만발 속 「색채가 없는…」
또다시 무라카미 열풍
지난 4월 일본에서 첫 발매된 신작은 초판 50만 부가 금세 동났고, 출간된 지 1주일 만에 1백만 부 판매를 돌파했다. 그의 작품은 일본, 한국은 물론 미국, 프랑스 등지에서도 큰 인기를 얻어왔다.
소설 속 그 음악, 이번에는?
클래식 마니아로 알려진 무라카미 하루키는 작품 속에 실제 클래식 곡을 녹여내 독자들에게 '2차 소비'를 하는 즐거움을 준다. 이번 작품에는 러시아 피아니스트 라자르 베르만이 연주한 프란츠 리스트의 '순례의 해'라는 곡이 등장한다. 절판된 음반임에도 복간돼 클래식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기현상을 보이고 있다.
국내 판권, 선인세 16억+α?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을 발매한 도서출판 민음사는 판권 계약을 체결한 후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그 뒤로 선인세만 16억원이라는 추측이 제기되면서 논란이 일었다. 출판사와 비밀에 붙인 추가 금액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직접 출판사에 문의했지만 "확인해줄 수 없다"라고 답변했다. 외국 서적에 대한 대형 출판사들의 선인세 경쟁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시각도 많다.
무라카미 하루키, 차기 노벨 문학상?
해마다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무라카미 하루키. 그의 수상 가능성에 대해 존 트릿 교수는 작가의 평판도와 인기가 곧 노벨 문학상과 직결되지는 않는다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피력했다. 그러나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이고, 전 세계 독자들과 소통하는 역량 있는 작가인 만큼 기대와 의견은 지속적일 것이라는 게 그의 견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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