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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관소/문화사 &시사

[사도세자 이선 ] 생애*죽음 & 임오화변 (영상)

                        [사도세자  이선 ]

                        

         


1900년에 그려진 사도세자의 어진
왕세자(王世子)
추존왕(追尊王)
추존황제(追尊皇帝)
별명사도세자, 장헌세자, 자는 윤관(允寬), 호는 의재(毅齋)
배우자혜경궁 홍씨(본부인)
숙빈 임씨(측실)
경빈 박씨(측실)
자녀의소세자정조은신군은언군은전군
부모영조(부), 영빈 이씨(모)
친척이복형 진종(효장세자), 형수 효순왕후, 장인 홍봉한, 처삼촌 홍인한, 인척 홍국영, 사촌 낙천군, 숙부 연령군
출생1735년 음력 1월 21일
조선 한성부 창경궁 집복헌
사망1762년 음력  5월 21일 (28세)
조선 한성부 창경궁 문정전
사인사형(아사)
거주지조선 한성부
국적조선
직업왕세자, 정치인, 무술가
학력성균관 수학
종교유교(성리학)



장조(莊祖, 1735년 2월 13일(음력 1월 21일) ~ 1762년 7월 12일(음력  5월 21일))는


조선의 왕세자이자 추존왕이다. 영조의 둘째 서자로, 효장세자의 이복 동생이며 정조의 생부이다. 

흔히 사도세자(思悼世子) 또는 장헌세자(莊獻世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李), 이름은 선(愃), 본관 전주(全州), 자는 윤관(允寬). 호는 의재(毅齋)이다.


영조의 둘째 아들로 생후 1년만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749년 왕명으로 대리청정을 시작하였으나 노론, 부왕과의 마찰과 정치적 갈등을 빚다가 1762년(영조 38년) 왕명으로 뒤주에 갇혀 아사하였다



사후 지위만 복권되었고,양주 배봉산에 안장되었다가 다시 수원 화성 근처 현륭원(융릉)에 안장되었다. 정조 즉위 후 장헌의 존호를 받았다.


정조는 재위 중 그를 왕으로 추존하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노론계열의 반발로 무산되고 만다. 한편 부인 헌경왕후는 후일 저서 《한중록》에서 그가 의대증과 정신질환을 앓았다고 진술했고, 실록에도 그의 병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우울증이나 화병 같은 병을 앓고 있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영조 99권, 38년(1762 임오 / 청 건륭(乾隆) 27년) 윤5월 13일(을해) 2번째기사 "~천자(天資)가 탁월하여 임금이 매우 사랑하였는데, 10여 세 이후에는 점차 학문에 태만하게 되었고, 대리(代理)한 후부터 질병이 생겨 천성을 잃었다. 


처음에는 대단치 않았기 때문에 신민(臣民)들이 낫기를 바랐었다. 정축년15394) ·무인년15395) 이후부터 병의 증세가 더욱 심해져서 병이 발작할 때에는 궁비(宮婢)와 환시(宦侍)를 죽이고, 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하였다.") 시호와 존호는 사도수덕돈경홍인경지장윤융범기명창휴찬원헌성계상현희장헌세자였다가 후에 고종 때 왕으로 추존되면서 장종(莊宗)의 묘호를 더하여 장종신문환무장헌광효대왕(莊宗神文桓武莊獻廣孝大王)이라고 하였다. 대한제국 때 황제로 격상되어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로 추존되었다.


비교적 근래의 무속 신으로, 무속 신앙에서 모시는 신의 한 사람으로 숭배되었는데, 이때의 호칭은 '뒤주대감'이었다.








흔히 “정치는 비정하다”고 말한다. “권력은 부자(父子) 사이에도 나눌 수 없다”는 짧은 문장은 그런 비정함을 압축하고 있다. 대체로 구체적 사실의 집적에서 추상적 개념이 도출되듯이, 이 표현도 유사 이래 권력을 둘러싼 인간의 수많은 암투를 겪으면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조선 왕실에서도 그런 사례는 드물지 않았다. 잠시만 생각해도 태조와 태종, 선조와 광해군, 인조와 소현세자, 대원군과 고종의 관계가 떠오르지만, 그 비극성과 구체성에서 가장 압도적인 사례는 이 글의 주제인 사도세자(1735∼1762)와 영조(英祖, 1694∼1776)의 경우일 것이다.


사도세자의 비극은 널리 알려져 있다. 차기의 국왕을 예약한 세자의 지위에 있었지만, 친아버지의 명령으로 27세 때 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은 그 비극의 객관적 외형을 구성한다. 그리고 그 죽음이 엽기적인 방식으로 집행되었다는 측면은 그 비극을 더욱 끔찍하게 만들었다.


전근대 왕조국가에서 국왕은 그야말로 지존의 존재였다. 이론적으로는 자신을 제외한 그 국가의 모든 사람의 생사를 결정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왕권의 절대성을 가장 잘 상징할 것이다. 현실의 크고 작은 수많은 사건들도 그 원인과 과정에 관련된 주장과 해석이 어지럽게 충돌한다. 그러니 전근대의 왕조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들이 개입된 사건의 내면은 더욱 복잡할 것이다. 이 짧은 글에서는 신뢰할 수 있는 기록을 따라가면서 될 수 있는 대로 그 과정을 객관적으로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출생과 성장


사도세자는 조선 제21대 국왕인 영조의 두 번째 왕자로 이름은 이선(李愃), 자는 윤관(允寬), 호는 의재(毅齋)다. 잘 알 듯이 영조는 조선의 국왕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았고 재위했다(각 82세, 52년). 


영조는 정성(貞聖)왕후(1692∼1757)ㆍ정순(貞純)왕후(1745~1805) 등 왕비 2명과 정빈(靖嬪) 이씨(1694~1721)ㆍ영빈(暎嬪) 이씨(1696~1764)ㆍ귀인 조씨ㆍ후궁 문씨 등 후궁 4명을 두었다. 왕비에게서는 후사를 보지 못했고, 후궁에게서만 2남 12녀를 두었다(그 중 5녀는 일찍 사망했다).


첫 아들인 효장(孝章)세자는 즉위하기 전 정빈 이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났지만(숙종 45년(1719) 2월 15일) 9세로 요절했다(영조 4년(1728) 11월 16일). 둘째이자 마지막 아들인 사도세자는 그 7년 뒤에 태어났다(영조 11년(1735) 1월 21일).


그때 영조는 41세로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나이였다. 국왕의 기쁨은 당연히 매우 컸다. 그는 “삼종(三宗. 효종ㆍ현종ㆍ숙종을 말함-인용자. 이하 같음)의 혈맥이 끊어지려고 하다가 비로소 이어지게 되었으니, 돌아가서 여러 성조(聖祖)를 뵐 면목이 서게 되었다. 즐겁고 기뻐하는 마음이 지극하고 감회 또한 깊다”고 말했다.


그런 기쁜 마음은 즉각적인 조처로 반영되었다. 영조는 즉시 왕자를 중전의 양자로 들이고 원자로 삼았으며, 이듬해에는 왕세자로 책봉했다(영조 12년 3월 15일). 원자 정호(定號)와 세자 책봉 모두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빠른 기록이었다.


그 결과의 참혹함과 파괴력은 특별했지만, 도세자와 영조의 관계도 기본적으로는 일반적인 과정을 밟으면서 진행되었다. 처음에는 재능과 총애가 넘쳤지만, 점차 서로의 생각이 어긋나기 시작했고, 결국 돌이킬 수 없는 비극으로 귀결된 것이다.


그런 과정을 간략하지만 포괄적으로 서술한 자료는 영조 38년(1762) 윤5월 13일, 세자가 처벌되던 날의 기록이다. 거기서는 “세자의 천품과 자질이 탁월해 임금이 매우 사랑했는데, 10여 세 뒤부터 점차 학문에 태만하게 되었고, 대리청정한 뒤부터 질병이 생겨 천성(天性)을 잃었다”고 지적했다. 이미 여러 연구들이 분석한대로 이 기록은 대체로 믿을 만하다고 판단된다. 먼저 어린 시절 탁월했던 자질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탁월한 자질


국왕의 사랑과 왕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세자는 순조롭게 성장했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세자는 매우 총명했고, 부왕의 기쁨은 그만큼 더 커졌다.


세자는 만 2세 때부터 글자를 알았다. ‘왕’이라는 글자를 보고는 영조를 가리키고 ‘세자’라는 글자에서는 자기를 가리켰으며, 천지ㆍ부모 등 63자를 알고 있었다(정조 13년(1789) 10월 7일. 어제장헌대왕 지문(誌文). 장헌대왕은 사도세자의 추존왕호다). [효경]에서는 ‘문왕(文王)’이라는 글자를 읽었다. 글씨도 쓸 수 있었다. 


‘천지왕춘(天地王春)’이라는 글자를 쓰자 대신들이 서로 다투어 가지려고 했고(영조 13년(1737) 2월 14일) 얼마 뒤에는 종이 12장에 두 자씩 써서 영의정 이광좌(李光佐)를 비롯해 입시한 대신들에게 나눠 주기도 했다(같은 해 윤9월 22일).


판단력도 성숙해졌다. [천자문]을 읽다가 ‘사치할 치(侈)’자를 보고는 입고 있던 반소매 옷과 자줏빛 비단으로 만든 구슬 꾸미개로 장식한 모자를 가리키면서 “이것이 사치한 것”이라고 하고는 즉시 벗어버렸다. “비단과 무명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나으냐”고 부왕이 묻자 “무명이 더 낫다”면서 무명옷을 입겠다고 대답하기도 했다(어제장헌대왕 지문). 

9세 때는 식사 중에 부왕이 부르자 음식을 뱉어내고 대답했는데, [소학]에 그렇게 하도록 적혀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영조 20년(1744) 1월 21일). 어린 시절 세자의 영특함은 부왕과 왕실의 기대를 넉넉히 충족시킬 만했다.



혼인과 처가


세자는 8세 때 홍역을 앓기도 했지만(영조 19년(1743) 1월) 관례(冠禮)를 치른 뒤(3월) 당시 세마(洗馬. 정9품)였던 홍봉한(洪鳳漢, 1713~1778)의 동갑내기 딸과 혼인했다(11월 13일). 그녀가 바로 유명한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 1735∼1815)다.


홍봉한은 본관이 풍산(豊山)으로 선조ㆍ광해군 때 대사간ㆍ대사헌ㆍ대사성을 지낸 홍이상(洪履祥, 1549~1615)의 후손이었다. 고조 홍주원(洪柱元)은 선조의 1녀 정명(貞明)공주와 혼인해 영안위(永安尉)에 책봉되었고, 외조부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문장가로 좌의정을 지낸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였다. 


조부 홍중기(洪重箕, 1650~1706)는 사복시 첨정(종4품)을 지냈고, 아버지 홍현보(洪鉉輔, 1680~1740)는 예조판서ㆍ좌참찬까지 올랐다. 그의 가계는 당시 노론의 주요 가문인 여흥 민씨ㆍ경주 김씨 등과 긴밀히 혼인하고 있었다.


급제하지 못하고 세마라는 말직에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이 보여주듯이, 홍봉한은 딸이 세자빈으로 간택되기 전까지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그러나 딸의 간택을 계기로 도승지(영조 25년(1749))에 발탁된 뒤 어영대장(영조 26년)ㆍ예조ㆍ이조판서ㆍ좌참찬(영조 29년)을 거쳐 우의정ㆍ영의정(영조 37년(1761))까지 오르면서 영조 중ㆍ후반 노론의 대표적 대신으로 활동했다.


세자는 홍씨와 혼인한 7년 뒤 첫아들인 의소세손(懿昭世孫)을 낳았지만(영조 26년(1750) 8월 27일) 2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영조 28년(1752) 3월 4일). 그러나 같은 해 다시 둘째 아들을 낳았다(9월 22일). 그는 24년 뒤 즉위해 조선시대의 대표적 현군으로 평가받는 정조(正祖, 1752∼1800. 재위: 1776∼1800)가 되었다.



무인적 기질



세자는 영특했지만 기본적으로 무인적 기질이 강했던 것 같다. 그런 측면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그 뒤 영의정까지 오른 주요한 대신인 조현명(趙顯命)이었다. 그는 두 살 때 거행된 책봉례를 보고서 “세자가 효종을 닮았으니 종사의 끝없는 복”이라고 경하했다. 널리 알듯이 효종(孝宗, 1619~1659. 재위: 1649~1659)은 북벌을 추진하는 등 군사력을 중시한 국왕이었다.


세자는 어릴 때부터 반드시 군사놀이를 하면서 놀았다. 병서도 즐겨 읽어 속임수와 정공법을 적절히 변화시키는 오묘한 이치를 터득했다고 한다.


신체적 조건과 무예도 뛰어났다. 일찍이 효종은 무예를 좋아해 한가한 날이면 북원(北苑: 대궐 뒤쪽에 위치한 정원)에서 말을 달리면서 무예를 시험했는데, 그때 쓰던 청룡도(靑龍刀)와 쇠몽둥이가 세자의 거처인 저승전(儲承殿)에 남아 있었다. 


그것은 힘 좋은 무사들도 움직이기 어려울 만큼 무거웠지만, 세자는 15∼16세 때 그것을 자유롭게 사용할 정도로 기운이 대단했다. 무예도 뛰어나 활을 쏘면 반드시 명중시켰고, 나는 듯이 말을 몰았다. 사람들은 조현명의 예견에 감탄했다.


무예에 대한 세자의 열정은 저술로 이어졌다. 세자는 24세 때인 영조 35년(1759)에 장수와 신하들이 무예에 익숙하지 않은 것을 걱정해 [무기신식(武技新式)]이라는 책을 엮었다. 그 책은 명(明)의 유명한 장수인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와 선조 때 한교(韓嶠)가 편찬한 [무예제보(武藝諸譜)]를 바탕으로 곤봉ㆍ장창(長槍) 등 6가지 기예에 죽장창(竹長槍)ㆍ월도(月刀)ㆍ쌍검(雙劍) 등 12가지 기예를 추가해 그림과 설명을 붙인 저작이다(이상 어제장헌대왕 지문). 


이 책은 훈련도감에서 교재로 사용되었으며, 그 뒤 정조 때 간행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의 저본(底本: 원본)이 되기도 했다. [한중록]에 따르면 세자는 늘 군복을 입고 다녔으며, 홍역에 걸렸을 때도 혜경궁 홍씨에게 제갈량의 <출사표>를 늘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이런 기질에 바탕한 세자의 국방ㆍ국제정세 인식은 상당히 적극적이었다. “우리나라는 좁아서 군사를 쓸 땅이 없다. 그러나 동쪽으로는 왜(倭)와 인접하고 북쪽으로는 오랑캐와 이웃했으며 서쪽과 남쪽은 큰 바다니, 바로 옛날의 중원(中原)인 셈이다. 지금은 비록 변방에 경보(警報)가 없지만, 위험에 대비하는 태세를 구축해야 한다. … 성인들은 아무 걱정 없는 편안한 시기에도 병기를 만들어 갑작스러운 외적에 대비했는데, 우리나라에는 효종께서 결심하신 일까지 있으니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어제장헌대왕 지문)



아버지는 이런 아들의 기질을 당연히 알고 있었다. 영조는 세자가 8세 때 형조판서 이종성(李宗城)을 세자시강원 빈객으로 임명하면서 세자의 강인한 성품을 인자함으로 보필해 조화롭게 해달라고 부탁했다(영조 19년(1743) 9월 18일).


세자가 13세 때 영조는 “중국의 한 문제와 무제 중 누가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세자가 문제라고 대답하자 영조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면서 “나를 속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부왕은 “네가 지은 시 중에 ‘호랑이가 깊은 산에서 울부짖으니 큰 바람이 분다(虎嘯深山大風吹)’는 구절이 있어 기가 매우 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영조 24년(1748) 5월 19일). 1년 뒤에도 영조는 “‘쾌(快)’라는 한 글자가 네 병통이니 경계하고 경계하라”고 당부했다(영조 25년 2월 17일).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이, 10세 이후 세자의 성격은 점차 특징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아버지들처럼, 영조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분노나 본격적인 갈등은 나타나지 않았다고 판단된다. 14세의 세자에게 “경계하고 경계하라”는 말에서는 질책보다 간곡한 당부의 마음이 느껴진다.



학문적 태도


앞서 살펴본 대로 세자는 무인적 기질이 좀 더 강했고, 자연히 학문과는 조금씩 멀어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아들을 꾸짖었고, 아들은 아버지를 꺼리게 되었다. 지금의 여느 가정에서도 드물지 않은 갈등의 순환과 증폭이 나타난 것이다.


앞서의 기록대로 세자는 10세 무렵부터 학문에 싫증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9세(이 글에서는 나이를 만으로 계산했다. 그러니 세는 나이로 환산하면 10세가 된다) 때 영조는 “글을 읽는 것이 좋은가, 싫은가” 하고 물었고 세자는 “싫을 때가 많다”고 대답했다. 이때 영조는 “동궁의 이 말은 진실하니 내 마음이 기쁘다”고 대답했다(1744년(영조 20) 11월 4일).


그러나 자연스럽게 예상할 수 있듯이, 이때의 기쁨은 진심이 아니었다. 부왕은 세자에게 엄격한 지침을 하달했다. 그는 “내가 동궁으로 있을 때는 거의 휴식할 겨를이 없었고, 두 차례의 연강(筵講)을 거른 적이 없었으며, 술도 좋아하지 않았다”고 전제한 뒤 [정관정요]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오늘 이후에는 매월 초1일에 쓰기 시작해 그믐까지 어느 날에는 소대(召對)하고 어느 날에는 차대(次對)했으며, 어느 날에는 서연(書筵)하고 어느 날에는 공사(公事)를 보았으며, 어느 날에는 무슨 책 무슨 편(篇)을 읽었고 어느 날은 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강관(講官) 등을 기록해 내가 볼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지시했다(1755년(영조 31) 9월 10일).


그러나 영조 자신이 실천했던 이런 엄격한 규율은 호방한 무인적 기질의 세자에게는 무거운 규제가 되었다. 부왕은 세자를 꾸짖었고, 세자는 부왕을 꺼리고 멀리하게 되었다. 12세 때 세자는 [자치통감]을 강독했는데, 서연에서는 글 읽는 소리가 컸지만 부왕 앞에서는 점차 낮아지고 작아졌다. 


영조는 “내 앞에 있는 것을 꺼려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1747년(영조 23) 10월 3일). 상당히 나중의 기록이지만 9년 뒤에도 지평 이휘중(李徽中)은 “세자가 서연에 태만해 2년 동안 [맹자]를 마치지 못했고 [강목]은 첫 부분만 보았다”고 지적하기도 했다(영조 32년(1756) 윤9월 1일).



부자의 사이는 세자가 대리청정으로 정무에 직접 관여하면서 더욱 멀어졌다. 세자가 14세 때인 영조 25년(1749)에 시작된 대리청정은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에서 중요한 첫 번째 변곡점이었다고 생각된다.


대리청정의 시작

사도세자가 대리청정 기간 중에 내린 교서. 사도세자는 1749년(영조 25년) 대리청정을 시작했다.

전근대 왕정에서 대리청정은 기회이자 위기였다. 국왕을 대신해 정무를 잘 처리할 경우는 능력을 인정받고 입지를 다질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신뢰를 잃고 실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대리청정은 훈련을 목적으로 한 우호적 기회였다. 영조도 정무와 거리가 있는 세자의 기질을 사전의 훈련으로 조정하려는 의도로 대리청정을 도입했다고 평가된다.



재위 25년 2월에 대리청정을 시작하면서 영조는 세자에게 기본적인 지침을 하달했다. “여러 신하들이 아뢰는 일을 ‘그렇게 하라(依爲之)’는 세 글자로 미봉적으로 대답하면 반드시 잘못을 저지를 우려가 있다.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면 반드시 대신에게 묻고 자신의 의견을 참작(參酌: 헤아림)한 뒤에 결정하라(16일).” 그런 뒤 크고 작은 공무를 모두 동궁으로 들여보내라고 명령했다(같은 해 12월 8일).



그러나 예상할 수 있듯이 그 뒤의 과정은 순조롭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들의 정무적 능력과 수신(修身)에 더욱 불만을 갖게 되었다. 그런 불만은 양위(讓位: 임금의 자리를 물려줌) 파동을 계기로 집약되어 폭발했다.




양위 파동의 전개



기본적으로 양위 파동은 대단히 소모적인 행위다. 국왕이 실제로 그럴 의사가 전혀 없음을 뻔히 알면서도 세자와 신하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양위를 만류해야 했고, 국왕은 의사를 관철하겠다고 고집한다. 이런 실랑이를 몇 차례씩 거친 뒤에야 어명은 마지못해 거둬진다.


 그 과정에서 충성은 검증되고 불충은 적발되며, 왕권은 공고해지고 이런저런 정치적 전환이 이뤄진다. 적지 않은 선왕들처럼 영조도 신하들을 제압하거나 정국을 전환하는 방법의 하나로 양위 파동을 사용했다.


대리청정이 시작되기 전까지 이미 영조는 5회의 양위 의사를 밝혔다. 재위 15년(1739) 1월, 16년 5월, 20년 1월, 21년 9월, 그리고 25년 1월이었다. 그때 세자의 나이는 각 4, 5, 9, 10, 14세였다. 맨 처음 네 살의 세자에게 양위하겠다는 지시는 공허해 보이기도 한다.


어린 세자는 양위 파동 때마다 긴장하고 두려워하면서 철회를 애원했다. 대리청정이 시작된 뒤에도 세 번의 양위 파동이 나타났다. 이 사건들은 그 기간에 누적된 영조와 세자의 갈등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대리청정이 시작된 3년 뒤인 재위 28년(1752) 12월 14일 영조는 양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세자는 극력 만류했다. 그러자 국왕은 “네 효성이 밝혀지면 너를 위해 전교(傳敎: 임금의 명령)를 거두겠다”면서 [육아시(蓼莪詩)]를 읽게 했다. 


[육아]는 [시경] 소아(小雅)의 한 편으로 ‘무성하게 자란 아름다운 채소’라는 의미다. 어떤 효자가 무성하게 자란 풀을 보고 아름다운 채소로 알았지만 살펴보니 쓸모없는 잡초였는데, 부모가 자신을 낳고 기르는 데 수고하면서 큰 인물이 될 것을 기대했지만 그렇게 되지 못해 부모에게 죄스럽다는 의미를 담은 작품이다. 세자는 그 시의 끝부분에 이르자 부왕 앞에 엎드려 눈물을 줄줄 흘렸다(至終篇, 王世子伏於前, 涕汪汪下). 약속대로 전교는 철회되었다. 세자의 나이 17세였고, 밤 3경(23∼1시)의 일이었다.



2년 뒤에도 비슷한 사건이 재발했다. 영조 30년(1754) 12월 대사간 신위(申暐)를 종성(鍾城)에 귀양 보냈는데, 그의 상소에 “지극히 공평하고 크게 중정(中正)해야 한다”는 대목이 있기 때문이었다. 영조는 이 부분을 “내가 공정하지 않다고 말한 것”이라고 지목하면서 “내가 예순의 늙은 나이에 신위에게 속아 업신여김을 받았는데, 너는 어찌하여 글을 상세히 살피지 않았는가?”라고 세자를 꾸짖었다.



 계속해서 국왕은 차마 듣지 못할 전교를 내렸다. 세자는 관(冠)을 벗고 뜰에 내려가 석고대죄(席藁待罪)한 것이 두 번이었고, 머리를 조아리며 땅에 짓찧은 것이 한 번이었다. 그러나 국왕은 차마 듣지 못할 전교를 계속 내렸고, 세자는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이번의 소동은 어둑새벽(黎明)에나 끝났다(2일).


갈등의 수위는 더욱 높아졌다. 3년 뒤 22세의 세자는 스스로 반성하면서 승정원에 글을 내렸다.

“나는 불초(不肖)하고 불민(不敏)한 사람이어서 정성과 효성이 천박(淺薄)해 잠자리와 식사를 돌보는 절차를 때맞춰 하지 못했으니 자식된 도리에 참으로 어긋남이 많았다. 이것이 누구의 잘못이겠는가. 바로 나의 불초함이다. 이것이 누구의 잘못이겠는가. 바로 나의 불초함이다. 대조(大朝: 영조를 말함)께서 그동안 거듭 간곡하게 가르치신 것은 참으로 자애로운 성의(聖意)와 사물(事物)에 부응하는 지극한 가르침에서 나온 것인데, 내가 불초하고 불민해 만분의 일도 우러러 본받지 못했고 작년 5월에 반성하겠다고 한 말 또한 한두 가지도 실천하지 못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황공하고 부끄러움이 갑절이나 되어 땅속으로 들어가고 싶지만 그러지는 못하겠다. 성실히 강학(講學)하지 못하고 부지런히 정사를 돌보지 못한 것은 어느 것도 내 허물이 아닌 것이 없다. 어제 두 대신이 반복해 경계해 더욱 나의 불초하고 불민함을 깨달았다. 



더욱 나의 불초하고 불민함을 깨달았다. 두렵고 송구스러워 끝없이 후회할 뿐이다. 두렵고 송구스러워 끝없이 후회할 뿐이다. 지금부터 통렬히 스스로 꾸짖고 깨우쳐 장차 모든 일에 허물을 보충해 이전의 기질과 습관을 한번에 바꾸려고 한다. 만약 혹시라도 실행하지 못하고 작년처럼 된다면, 이것은 내 잘못이 더욱 심한 것이다. 아! 조정의 신하들은 나의 이 뜻을 체득해 일마다 바로잡아 주기 바란다. 이것이 나의 바람이다. 이것이 나의 바람이다"


- 영조 33년(1757) 11월 11일

동일한 표현을 거듭 반복한 부분은 반성의 깊이를 알려주기도 하지만, 불안과 초조와 두려움의 크기를 보여주는 측면이 더 많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부왕은 아들의 반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날 밤에 판부사(判府事) 유척기(兪拓基)ㆍ좌의정 김상로(金尙魯)ㆍ우의정 신만(申晩)ㆍ좌참찬 홍봉한과 양사(兩司)의 장관(長官)ㆍ유신(儒臣)이 모두 입궐했다. 초경(初更. 19∼21시)에 국왕은 최복(衰服: 상복의 하나)을 입고 걸어서 숭화문(崇化門) 밖에 나와 맨땅에 엎드려 곡을 했고, 동궁도 최복을 입고 뒤에 엎드려 있었다.


신하들이 엎드려 울면서 “전하께서 어찌 이런 거조를 하십니까?”고 묻자 국왕은 대답했다. “승지가 동궁의 글을 가지고 와서 아뢴 것에 ‘뉘우쳐 깨달았다’는 말이 있으므로 얼른 지나쳐 보고는 놀라고 기쁨을 금치 못해 경들을 불러 자랑하고 칭찬하려고 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정신을 쏟은 곳이 없었다. 그래서 동궁을 불러 ‘지금 네가 뉘우친 것은 어떤 일이냐?’고 물었지만, 동궁은 대략만 말하고 끝내 시원하게 진달하지 못했다.”



이때 신하들이 세자를 두둔하면서 그 까닭을 설명한 부분은 매우 주목된다. 유척기ㆍ홍봉한을 비롯한 모든 신하들은 “전하께서 평소에 너무 엄격하기 때문에 동궁이 늘 두려워하고 위축되어 제대로 말씀드리지 못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특히 홍봉한은 “동궁은 보통 때도 입시하라는 명령만 들으면 두려워 벌벌 떨며 쉽게 알고 있는 일도 즉시 대답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날 밤 동궁은 물러나와 뜰로 내려가다가 기절해 일어나지 못했고, 결국 청심환을 먹고 한참 뒤에야 말을 할 수 있었다.



모두 겨울 밤 늦게 벌어진 이 세 번의 사건은 그 무렵 부왕과 세자의 관계를 깊이 비춰준다. 특히 그때 22세로 결코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기절했다가 한참만에야 깨어난 맨 뒤의 사건은 극한적인 감정의 충격을 보여준다.



이런 세자의 정신적 질환은 2년 정도 전부터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영조 31년(1755) 약방 도제조 이천보(李天輔)는 “동궁이 요즘 가슴이 막히고 뛰는 증세가 있어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그렇게 된다”고 아룄다(4월 28일).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가 사망한 원인을 의대증(衣帶症)이라고 지적했다. 그 증상은 옷 입기를 싫어하는 것인데, 세자가 영조를 만나기 싫어 옷을 입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다. 



임오화변(壬午禍變: 영조 38년 윤5월 세자가 뒤주에 갇혀 살해된 사건)이 일어난 당일의 기록에서도 “정축년(1757. 영조 33)ㆍ무인년(1758) 뒤부터 병의 증세가 더욱 심해져 발작할 때는 궁비(宮婢: 궁중의 계집종)와 환시(宦侍: 내시)를 죽였고, 죽인 뒤에는 후회하곤 했다. 임금이 그때마다 엄한 하교로 절실하게 책망하니, 세자는 두려워 질병이 더하게 되었다”고 언급했다.


요컨대 세자는 20세 무렵 부왕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정신적 질환에 걸린 것으로 판단된다. 그때 질환이 표면에 드러났으니, 그 원인과 징후는 몇 년 전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 시기는 아마 대리청정을 시작한 이후일 것으로 여겨진다. 국무를 맡긴 뒤부터 부왕은 세자를 더욱 자주 질책했고, 세자는 부왕은 두려워하고 피하게 되었다. 그 결말은 참혹한 비극이었다.


멀어진 관계


이 무렵 영조와 세자의 관계는 같은 궁궐 안에서 거주했어도 매우 멀었다. 세자가 기절한 사건이 일어나기 며칠 전 영조는 “동궁이 7월 이후로 진현(進見: 임금께 나아가 뵘)한 일이 없다”고 신하들에게 밝혔다(영조 33년(1757) 11월 8일). 그러니까 한 궁궐에 있으면서도 넉 달 동안이나 대면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런 추세는 계속 이어졌다. 3년 뒤 좌의정 이후(李厚)와 우의정 민백상(閔百祥)은 “건강 문제로 오래 진현하지 못했으니 빨리 진현하시라”고 재촉했고 세자는 “각별히 조섭(爪攝: 조리함)해 이 해를 넘기지 않겠다”고 대답했다(영조 36년(1760) 12월 15일). 그러나 진현은 그 해를 넘겨 이듬해 5월에야 이뤄졌다(영조 37년 5월 17일). 실제로 이때 세자는 습종(濕瘇)을 앓아 치료차 온양에 다녀오기도 했다(영조 36년 7월 18일∼8월 4일).



격절된 관계를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증거는 영조 37년(1761)의 관서행(關西行)일 것이다. 그 해 4월 2일부터 22일까지 세자는 관서(평안도) 지방을 여행하고 돌아왔다. 그 직후 유선(諭善) 서지수(徐志修)는 관서행의 소문이 불러올 파장을 우려했다. 세자는 “내가 이미 후회하고 있는데, 명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대답했다(같은 해 5월 2일).


영조가 그 사건을 알게 된 것은 이번에도 넉 달이나 지나서였다(같은 해 9월 21일). 세자는 며칠 동안 금식하면서 대죄했다(9월 29일). 이 사건은 영조와 세자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이 악화된 대표적인 증거로 거론된다


그리고 그 여행의 목적은 변란을 모의하려는 중대한 정치적 의도를 가졌다고 해석되기도 한다. 그런 견해는 좀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아무튼 임오화변을 8개월 정도 남긴 시점에서 영조와 세자의 관계는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매우 멀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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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과 기대의 증거들

모든 부자 사이가 그렇듯이, 당연히 두 사람의 관계도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보았듯이 그 관계는 계속 악화된 것이 사실이지만, 관심과 기대를 보여주는 편린들도 적지 않다. 결국은 천륜이라고 부르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 그것은 어쩔 수 없는 모습일 것이다.


영조는 세자가 19세 때 [소학]의 근본을 물었고, 세자는 ‘경(敬)’이며 “경은 본심을 지키고 방심하지 않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영조는 “괄목할 만한 발전”이라고 흡족해했다(영조 30년(1754) 5월 13일).


3년 뒤에도 영조는 세자의 학문에 큰 관심과 기대를 나타냈다. 특히 이때는 앞서 본대로 세자가 질책을 받다가 기절하는 사건이 일어나기 5개월 전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주목된다. 영조는 “어제 내가 우연히 휘령전(徽寧殿)에 갔더니, 원량(元良: 세자)이 보는 서책(書冊)이 책상 위에 쌓여 있었는데 내가 보지 못했던 것이 많았다”고 말했다.

 


보덕 윤동승(尹東昇)은 “세자가 박학해 국한됨이 없으며, 덕성합(德成閤: 창경궁 안에 있던 전각)이 매우 좁아 한낮에는 매우 더운데도 어려운 부분을 질문하면서 고달파하는 기색이 없다”고 아룄다. 영조는 “원량이 매우 총명해 읽기만 하면 곧 욀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표시했고, 윤동승은 다시 세자를 상찬했다.


 “강학(講學)을 부지런히 잘할 뿐 아니라 다섯 차례 우제(虞祭)를 행하면서 슬픔과 공경하는 마음이 모두 극진했고, 제사를 지내며 주선함에 조금의 실수도 없었으며, 대수롭지 않은 작은 절차도 강구(講究)하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예절이 적합한 데 돌아가게 하려고 힘썼으므로 신들이 서로 마주 보며 감탄했습니다.” 영조는 “그렇다면 얼마나 다행스러운가?”면서 안도했다(영조 33년(1757) 6월 27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일도 서로의 관계가 매우 멀어진 상태에서 생겨난 막연한 기대와 추측 때문에 발생했을 가능성도 크다. 그러나 그래도 세자의 총명을 믿고 기대하는 마음이 영조에게 아직 남아 있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그 뒤에도 재정 경비의 은밀한 유출을 막아야 한다는 시독관 엄인(嚴璘)의 주청에 왕세자가 하답하자 “잘 하답했고 정신이 담겨 있다. 내가 답변을 하더라도 다시 더할 말이 없겠다”고 칭찬한 사례가 보인다(영조 36년(1760) 2월 5일. 1년 뒤에도 세자의 비답을 칭찬했다(영조 37년 9월 5일)).



세자의 건강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세자에게 천연두 증세가 있자 영조는 “내 마음이 안절부절해 안정되지 않는다”면서 “천연두는 본디 날짜가 있어 보름도 넘기지 않는데, 내 마음은 하루가 한 달 같다. 참으로 산에 들어가 알지 못한 채 조금 낫기를 기다려 돌아오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세자가 쾌차하자 국왕은 매우 기뻐하면서 약방의 제조(提調) 이하에 상을 내리고 이듬해 봄에 경과(慶科)를 시행하라고 지시했다(영조 32년(1756) 11월 17일·22일·26일).


앞서 말했듯이, 이런 기록은 대세와는 거리가 있는 편린들일 것이다. 그럼에도, 모든 사실들이 그렇듯이, 두 사람의 관계가 일면적이지만은 않았다는 측면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세자의 정치적 성향

세자의 정치적 성향은 소론에 가까운 것으로 평가된다. 이 때문에 임오화변의 원인을 노론과 소론의 당쟁에서 찾는 견해가 유력하게 제시되기도 한다.


세자가 소론에 가까운 정치적 성향을 가졌다는 판단의 중요한 근거는 1755년(영조 31) 2월에 발생한 나주 벽서 사건다. 그때 세자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갖기에 충분한 20세의 청년이었다.



그 사건은 나주 객사에 “간신들이 조정에 가득해 백성이 도탄에 빠졌다”는 내용의 벽서가 붙은 것이었다. 범인은 영조 초반에 숙청된 소론의 중심 인물 중 하나인 윤취상(尹就商)의 아들 윤지(尹志)로 밝혀졌다. 그는 나주에 귀양 가서 몰래 역심을 품고 조정을 원망하며 같은 무리들과 체결하여 흉서(凶書)를 펼쳐서 걸은 것이었다. 이 사건은 탕평의 틀이 깨지고 정국이 노론 중심으로 돌아가는 계기로 작용했다고 평가된다.



앞서 본대로 이때 세자는 대리청정을 하고 있었다. 이 사건에서 세자는 소론을 옹호하는 태도를 강하게 나타냈다. 사건에 연루되었다고 사직한 소론의 영수 이종성을 만류하고, 유배된 소론 인물을 극형에 처하거나 처벌을 확대해야 한다는 노론의 주장을 모두 거부한 것이다.


그 뒤에도 이런 태도는 지속되거나 강화되었다. 세자는 서명응(徐命膺)ㆍ서명선(徐命善) 등 소론 인물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면서 송시열ㆍ송준길의 문묘배향이나 김창집(노론 4대신의 한 사람)의 석실서원(石室書院) 배향 같은 노론의 주요한 요청을 거부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노론은 세자에게 큰 불만을 갖게 되었다고 평가된다.

임오화변의 발발과 전개



화성 융릉(隆陵). 융릉은 사도세자와 그의 부인 혜경궁 홍씨의 무덤이다. 원래 양주 배봉산에 있던 영우원을 수원의 화산으로 옮겨 현륭원이라 하였다. 효심이 지극했던 정조는 현륭원을 만들 때에 온갖 정성을 기울여 창의적으로 만들었다. 경기 화성시 안녕동 소재. 사적 제 206호. 

왕실의 가장 비참한 사건 중 하나일 임오화변은 영조 38년(1762) 윤5월 13일에 일어났다

그 직접적인 계기는 20여 일 전에 제기된 나경언(羅景彦)의 고변이었다(5월 22일)


그는 세자의 비리를 영조에게 고변했다가 무고 혐의로 참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그 고변으로 영조는 세자의 여러 비리를 더욱 상세히 알게 되었다. 이틀 뒤 영조는 시전 상인들을 불러 세자가 진 빚을 갚아주었다(5월 24일).


왕의 분노와 고민은 깊어졌다. 며칠 뒤 영조는 건명문(建明門)에서 밤을 지새면서 새벽에 영의정과 우의정을 입궐케 했다. 신하들은 “요즘 세자께서 매우 뉘우치고 있다”고 해명했지만 국왕은 “말하지 마라, 말하지 마라. 여망(餘望: 남은 희망)이 전혀 없다”면서 개탄했다(윤5월 1일).


신하들에게 강한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나경언이 어찌 역적이겠는가? 지금 조정 신하들의 치우친 논의 때문에 부당(父黨)ㆍ자당(子黨)이 생겼으니, 조정의 신하가 모두 역적이다”라고 말했다(윤5월 6일). 이 발언은 임오화변의 근본적 원인이 정치적 문제에 있었다는 중요한 근거로 거론된다.


최종적인 결론은 윤5월 13일에 내려졌다. 그날 영조는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널리 알려졌듯이 뒤주에 가두었다

실록에는 ‘뒤주’라는 말은 나오지 않고안에다 엄중히 가두었다(自內嚴囚)”고만 기록되어 있다(‘뒤주’와 관련해 그 협소한 공간에서 9일 동안 살아있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논거에서 그 사실성을 부정하는 견해도 제시되어 있다(함규진, [왕이 못 된 세자들]). 그는 하루 정도 뒤주에 가뒀다가 방 같은 곳에 유폐시켰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뒤주’라는 표현은 [한중록]에 나오는 것이며, 그뒤의 [정조실록]에는 ‘한 물건(一物)’이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사실 여부를 가리기는 어렵지만, ‘한 물건’이라는 표현이 여러 차례 나오는 것으로 보아 뒤주가 사망에 중요한 도구가 된 것은 사실로 생각된다).


가장 중요한 판단의 주체는 물론 영조지만, 기록에 따르면 그의 판단에 결정적 영향을 준 사람은 두 비빈이었다. 그때는 사망한 상태였던 영조의 비 정성왕후(貞聖王后)는 일찍이 “변란이 호흡 사이에 달려 있다”고 말했고, 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는 영조의 최종적 결단을 촉구했다.


이튿날에는 세자의 부정한 행실과 관련된 인물인 환관 박필수(朴弼秀)ㆍ여승 가선(假仙) 등이 처형되었다. 옛 동궁의 잡물(雜物)을 선인문(宣仁門) 밖에서 불태웠는데, 유희하는 기괴한 물건이 많았다는 기록도 있다. 국왕은 “이러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겠는가?”고 말했다(14일).


세자가 갇혀 있는 동안 영조는 일상적인 국무를 처리했다. 그는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전배하고 문을 지키는 군사를 위로했으며, 주강에 참석하고 인사를 처리했다(윤5월 19∼21일).


결국 세자는 9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윤5월 21일). 당연히 비참한 죽음이었을 것이다. 세자의 장인 홍봉한은 “전하께서 결단하지 못할까 염려했는데, 결국 혈기가 왕성할 때와 다름없이 결단하셨으니 흠앙해 마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다(윤5월 28일).


후속 조처는 신속하게 이뤄졌다. 장례를 치르고(7월 23일), 즉시 세손을 동궁으로 책봉했다(8월 1일).

 2년 뒤 영조는 세손을 효장세자의 후사로 입적하면서 사도세자를 추숭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당부했다. ‘갑신처분’이라고 불리는 그 지침에서 국왕은 “종통이 영원히 크게 확정되었으니 사설(邪說)에 흔들려 한 글자라도 더 높여서 받들면, 그것은 할아비를 잊은 것이고 사도(思悼)도 잊은 것”이라고 강조했다(영조 40년(1764) 2월 20일).


몇 달 뒤에도 영조는 세손에게 다시 한번 하교했다. “임오년에 대의(大義)를 통쾌하게 밝히지 않았더라면 윤리가 그때부터 폐지되었을 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만고에 없는 지경을 당했고, 그의 아버지는 만고에 없는 의리를 실행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어찌 오늘이 있었겠으며, 세손 또한 어찌 오늘이 있었겠는가? … 그때 존망이 순간에 달려 있었다.” 대신들도 “이것은 바뀌지 않는 의리”라고 동의했다(1764년 9월 26일).


추숭과 평가

이런 ‘처분’은 그 뒤 정조가 사도세자를 추숭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했지만, 추존은 계속 이뤄졌다. 정조는 일단 장헌(莊獻)세자라고 시호를 올리고, 묘소와 사당을 영우원(永祐園)과 경모궁(景慕宮)으로 고쳤다(정조 즉위년 3월). 그 뒤 묘소는 현륭원(顯隆園. 뒤의 융릉)으로 개칭되어 수원으로 옮겨졌다(정조 13년 1789년 10월).



세자가 국왕으로 추존된 것은 고종 때였다. 사도세자는 고종 36년(1899) 국왕(장종)을 거쳐 황제(장조 의황제)로 추존됨으로써 사후나마 지존의 자리에 올랐다(각 9월, 12월).



일정한 나이를 넘은 한국인으로 사도세자의 비극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로서 이 글을 쓰면서 영조의 마음을 자주 생각해 보았다. 21세기를 사는 평범한 소시민이 18세기 중반 국왕이 내린 결정은 물론 이해하거나 동의하기 어려웠다.


지금까지 나온 여러 연구들은 임오화변의 원인을 다양하게 분석했다. 그 결론은 크게 정치적 처분이라는 견해와 개인적 문제에 무게를 두는 해석으로 나뉘고 있다. 다소 무책임한 말일 수도 있지만, 진정한 원인은 아마 그 둘 다 일 것이다.


지금도 국가수반의 개인적 행동이나 발언은 국정과 결부되어 이해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전근대 국왕과 세자의 언동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세자의 질병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운명이 걸린 중대한 사안이었다. 그러니 “종사의 대의를 생각해 처결했다”는 영조의 말은 거대하고 모호한 만큼 진실을 담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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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화변 뒤 영조는 14년을 더 살았고, 세자의 아들 정조는 즉위한 바로 그 날 신하들에게 내린 윤음의 첫 머리를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嗚呼, 寡人思悼世子之子也. 정조 즉위년(1776) 3월 10일)”라는 문장으로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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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의 비극]



[한국사 傳] 아버지의 눈물, 영조]





[한국사 傳] 아버지의 눈물, 영조 by zenas034










[정병설 '권력과 인간' ]











사도세자의 죽음은 크게 당쟁이상설, 정신이상설(병증설) 등으로 학계에서 분분하게 논쟁과 논란을 이은 가운데, 정 교수는 반역설을 내세웠다. 『한중록』 등 다양한 사료를 토대로 근거와 해석을 내놓았다. 그것을 인터넷에 연재했고, 『권력과 인간』으로 묶었다. 250년이 흐른 지금의 시간, 지난 3월22일 서울 상암동에선 『권력과 인간』의 저자 정병설 교수 강연회가 열렸다.



    인간의 본디 모습은 균열을 통해 드러나곤 한다. 일상에서 쉽게 드러나지 않는 무엇도 특정한 사건, 즉 균열 앞에 민낯으로 나타난다. 1862년 윤5월, 죽음을 맞이한 사도세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500년 조선왕조의 균열. 왕이 세자를 죽인,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엄청난 사건이었다. 


    정병설 교수는 인간의 본질에 들어갈 수 있는 적합한 주제라고 보고 그것을 파헤쳤다. 균열을 통해 속살이 드러나는 법이니까. 그래서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싸고 다양한 이견들이 백가쟁명식으로 펼쳐졌다. 특히나 조선에서 가장 풍요로운 시대 중의 하나인 영정조 시대, 이토록 비극적인 죽음이라니.

    사도세자의 죽음은 크게 당쟁이상설, 정신이상설(병증설) 등으로 학계에서 분분하게 논쟁과 논란을 이은 가운데, 정 교수는 반역설을 내세웠다. 『한중록』 등 다양한 사료를 토대로 근거와 해석을 내놓았다. 그것을 인터넷에 연재했고, 『권력과 인간』으로 묶었다. 250년이 흐른 지금의 시간, 지난 3월22일 서울 상암동에선 『권력과 인간』의 저자 정병설 교수 강연회가 열렸다. ‘아버지는 왜, 아들을 죽였을까?’를 주제로 인간의 본질을 엿봤다.





    “사도세자의 죽음, 인간의 본질 파악에 적합한 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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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 교수는 역사학자 아닌 국문학자다. 그래서 전제를 둔다. 역사학자와 다르게 역사를 해석하는 부분도 있으리라는 것. 그가 사도세자의 역사에 들어간 이유는, 사도세자를 향한 특별한 애정, 아니다. 『한중록』 때문이다.


     국문학의 대표적 고전산문. 그에 의하면, 『한중록』에 대한 연구, 그리 많지 않고, 읽기도 쉽지 않다. 7~8년 전부터 작심하고 읽었다. 텍스트를 비교하고 어휘를 찾았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과 대조했다.

    “공부를 많이 했고, 지금도 많이 하고 있다. 작년에 『한중록』을 냈다. 자부심이 있다. 50년 내 이런 책 나오기 어려울 거다. (웃음) 그만큼 정성을 쏟았다.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 때문에라도 그랬고, 출판사에서도 상당 액수를 투자했다. 사명감 없이 만들 수 없는 책이었다. 그래서 50년 안에 그런 책을 상업적인 출판사에서 내기 어려울 거다.”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 들으면 반드시 떠오르는 궁금증이 있다. 사인이다. 왜 아버지가 아들을 죽였을까? 왜 그것도 뒤주에 가두어 죽였을까? 사도세자의 죽음을 가장 자세히 해명한 자료는 혜경궁이 쓴 『한중록』이다.”(p.4)




    그는 『한중록』에서도 제1부를 꼭 보라고 권한다. 문학적으로도 훌륭하고 재미만 따져도 충분한 의미가 있단다. 혜경궁 홍씨가 망한 친정(노론)을 변호하기 위해 쓴 것이라 믿을 수 없는 책인데, 왜 냈느냐는 반응도 있었다. 그는 그런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덕일 씨가 『사도세자의 고백』을 냈는데, 그 책은 나와 글 쓰는 관점이 다르다. 사도세자의 억울함을 신원하겠다는 취지로 쓴 이덕일 씨의 책을 읽었더니 사관의 차이가 아닌 사실 관계가 틀린 게 많이 보였다. 문제는 가설이 있으면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그 근거가 사료에 합당하지 않은 해설이었다. 심지어 사료를 왜곡한 것도 많이 발견됐다. 그 책은 대중역사서라 나와는 길이 다른데, 나는 하나하나 근거를 뒀다. 이덕일 씨의 책은 어떤 것은 밝히고 어떤 것은 밝히지 않더라.”

    그가 보기에 인문서와 학술서와 다르다. 학술서는 가능성을 계속 따지나, 대중서는 말하고자 하는 바를 곧장 지른다. 그는 이덕일 소장(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과 펼친 논쟁도 잠시 언급했다. 그는 이 소장이 사도세자 죽음의 배후로 내세운 당쟁희생설에 대한 비판 논문을 냈었다. 논쟁이 붙었고, 이 소장은 1년 뒤 개정판을 낸『사도세자가 꿈꾼 나라』의 서문을 통해 정 교수를 비판했다.

    “그때 (나에 대한) 인신공격성 비판이 있었다. 내 책에도 틀린 게 있을 수 있겠지만, 내가 그 분에게 던진 질문은 맞는 근거를 대보라는 거였다. 이 책은 논쟁 중이라, 비판하고자 하는 분도 분명 있을 거다. 이 책, 논쟁을 의도해서 낸 건 아니다. 자료를 보다가 빠져들었다. 난 텍스트를 통해 인간을 연구하는 학자다. 『한중록』이 다루는 사도세자의 죽음이 인간을 보는 다양한 시각을 제공해줬다. 인간학을 한다고 말하지만,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겠나. 모든 모습이 늘 같을 수는 없는 게 인간이다. 그걸 다 알아야 인간을 알 텐데, 사람 속을 보는 게 어디 쉽나? 대중서는 대개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 두 부류로만 나누고자 한다.”

    그는 사도세자의 죽음이 인간의 본질에 들어가기에 적합한 주제라고 봤다. 권력 최상층의 세계는 알기가 더욱 어려운데, 사건을 통해 그것이 드러나곤 한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균열이다. 균열을 통해 속살이 드러난다.

    “요즘 그런 이면을 드러내는 순간이 어딘가. 화목해 보이는 창업주 가족들이 창업주가 죽고 재산 때문에 소송하고, 싸우고. 그걸 통해 우리는 속마음을 알 수 있다. 사건, 즉 균열을 통해 드러난다.”


    “반역죄, 사도세자의 죄명!”

    조선왕조, 세자의 죽음은 대형사건이다. 이면이 드러날 수 있는 계기다. 세자는 소조라고 불렸다. 작은 임금이라는 뜻이다. 즉, 큰 임금이 작은 임금을 죽인 것이다. 이 사건, 당시 사료를 봐도 속을 알기는 어렵다. 그만큼 민감한 문제였던 것이다.

    사도세자의 죽음. 정 교수는 ‘반역죄’를 호명한다. 그렇다고 처음이라고 말할 수는 없단다. 앞선 연구나 조사가 부각시키지 않았기 때문. 물론 사도세자가 반역했다는 말, 한 마디도 없다. 그가 그렇게 붙였다. 사료는 그렇게 이해하도록 적어놓고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사도세자를 죽인 도구인 뒤주는 한중록이나 실록에서 ‘일물(一物)’이라고 표현한다. 즉, 어떤 물건이다. 사람들은 뒤주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어떤 물건이라는 표현도 쓰면 안 됐다. 특히 영조 앞에서는. 실록에도 민감한 부분은 안 쓴다. 가령, 영조는 걸핏하면 임금노릇 그만하겠다고 말했다. 조선왕조의 문법으로 임금이 그러면 사력을 다해 말려야 한다. 실록에는 그렇게 말하면 ‘차마 듣지 못할 하교를 하셨다’고 표현한다. 그걸 해석해야 한다. 맥락을 고려해서 읽어야 하는데, 그런 것을 세심하게 고려하지 않아서 엉뚱한 소리를 한다.”




    “사도세자의 사인과 직접 연관된 세자의 죄에 대해서만은 아주 완곡하게 표현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한중록』을 오독했다.”(p.4)




    그는 인정한다. 『한중록』, 한계를 가진 사료다. 개인의 기록이다. 인간은 시간이 지날수록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기억이 바뀐다는 것. 특히 한중록처럼 정치적으로 이해가 얽힌 것이라면 개인의 이해에 더 기울 수밖에 없다는 것. 그래서 기록을 볼 때 한 쪽의 주장을 보면 다른 쪽의 주장(기록)도 봐야 함을 강조한다. 그래서 두 견해 가운데 공통적인 부분이 사실에 가깝다고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불어 그는, 『한중록』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혜경궁 홍씨의 지위를 일컬음이다. 혜경궁 홍씨는 70년을 궁궐에 있었다. 대왕대비에 버금가는, 그 이상의 권력을 가졌던 사람이었다.

    “나는 『한중록』을 혜경궁 혼자 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최상층 권력에 있는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책을 쓰겠나. 지휘하고 감독하고 감수했을 것이다. 『한중록』을 쓸 무렵, 자기 가문에게 시켜서 수천 통의 자료를 정리하게끔 한다. 주석을 해석하면서 놀란 건, 사실 관계가 매우 정확하다는 거였다. 개인의 수준을 넘어선 집체 작업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당쟁희생설, 사료의 오독”

    『권력과 인간』은 사도세자의 죽음 뿐 아니라 조선왕조에서 일어난 일을 드러내고자 했다. 정 교수에 의하면, 사도세자 당쟁희생설은 조선 후기부터 있었다. 억울하게 죽었다며, 특히 영남에서 상소가 많이 올라왔다. 세자가 현명했고 훌륭했으며 광증이 있었으리라 생각할 수 없으니 모함이 있었다는 뉘앙스. 정조는 그것을 근거로 사도세자의 신원에 나섰다는 거다.


    당쟁희생설은 사료를 잘못 해석해서 나왔다고 정 교수는 주장한다. 사도세자에게 죄가 있다는 것은 노론일파의 것이요, 죄가 없음에도 죽은 것은 남인일파의 것으로, 이는 잘못됐다고 부연한다.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한 당파의 문제는 노론과 소론이 아닌 노론 시파와 벽파가 핵심이라는 것. 즉, 부흥파와 공은파의 싸움이었다.

    『사도세자의 고백』에선 혜경궁 홍씨의 친정과 정적인 정순왕후 파, 모두 노론인데 한 패로 묶었다. 정치사를 왜곡해서 무리한 해석을 한 거다. 광증설은 해독을 잘못한 것이다. 『한중록』을 보면 광증에 대한 기록이 있긴 하나, 죽기 전까지의 기록을 꼼꼼하게 읽지 못했다. 혜경궁 홍씨가 고급 정보원이나 전적으로 믿을 순 없다. 「영조실록」에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 한 단락 정도가 있을 뿐이다.”

    졸기를 보면 사도세자가 발작(병)을 일으키면 이성을 잃는다고 썼다. 그는 여기서 맥락을 읽으면 무슨 병인지 알 수 있다고 전한다. 그럼에도 정신병이 아니라고 해석하면 안 된다는 것. 중요한 것은 조선시대에는 미친 사람을 죽이지 못하게 돼 있었다. 조선시대 법전은 미친 사람을 감형 시켜서 유배를 보내도록 했다. 이에 따라 광증설은 근거가 떨어진다. 특히나 미쳤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것이 가능했겠냐는 것.



    “일반불안장애, 강박장애, 충동조절장애 등으로 신음하던 세자는 1760년부터는 헛것을 보기 시작했다. 길에 사람이 없는데도 사람이 보인다며 두려워했다. 사고장애 곧 정신분열증까지 생긴 것이다.”(p.179)




    “「영조실록」을 보면 영조가 사전 작업으로 사도세자를 폐세자 시킨다. 임금을 죽일 수 없으니까. 세자에서 폐위시키는 것은 사회적 죽음이다. 죽음과 똑같다. 폐위시키면서 너 이제 끝이야, 이렇게 할 수는 없다. 그래서 문서화 시킨다. 세자를 폐위시키는데도 절차가 있다. 정당성을 대외에 공표하고 청나라에 알려야 한다. 그러면 그 기록이 있을 것이다.”

    「영조실록」, ‘폐세자반교’라는 단어는 있으나 내용은 없다. 왜 이런 중요한 기록을 실록에서 빠트렸을까? 그는 여기서 냄새를 맡았다. 『권력과 인간』에는 없으나, 최근 냄새의 근원을 확인했다. 영조는 영혼의 목소리, 왕비의 목소리가 들리느냐고 신하들에게 묻는다. 신하들은 뭐라 말하지 못하고 있는데, 영조는 영혼의 소리를 들었다며 판결을 내린다.

    “지난주 공부를 통해 짐작을 했다. 「영조실록」을 만드는 과정을 적은 논문이었는데, 특이한 내용이 있더라. 실록은 임금이 죽으면 다음 세대에 만든다. 영조실록은 정조 때 만들어졌다. 정조가 특별한 부탁을 한다. 사도세자가 죽기 직전인 1759~1762년, 1776년 이전의 몇 년, 1773~1776년의 기록 총 9년의 기록을 이휘지, 한 사람에게 맡긴다. 실록편찬에 관해 임금이 개입하는 건 부당하다. 그런데 한 사람에게 특별한 권한을 줬다. 끝나고 실록에 대해 토 달지 말라는 이례적인 명령도 내린다.”

    그렇다면 이휘지는 누굴까? 그는 골수 노론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특정한 시기의 실록 편찬을 맡겼다는 것. 정 교수가 맡은 냄새의 정체다.

    “공교롭게도 정조 때 영조 때 만든 경종실록을 개정한다. 경종실록 개정판을 내는 조건으로 아버지를 약하게 다뤄달라는 빅딜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정조는 정직만으로 통치한 사람이 아니고 필요에 의해 거래를 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폐세자반교’가 영조실록에 오르지 않은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든다.”



    “정조는 아버지를 위해, 또 왕실을 위해, 그리고 당연히 자신을 위해 사도세자의 추숭 사업을 벌였다.”(p.18)




    사도세자의 죽음, 정면으로 직시하라

    사도세자가 죽인 사람만 100명을 넘었다. 하루에 6명을 죽였다는 기록도 있다. 아랫사람 고문하고 불로 지지고 기생과 비구니까지 불러서 놀았다. 그러나 그는 세자였다. 문제, 없었다. 그러다 심각해지기 시작하는 건, 어머니 선희궁을 죽이려 했다. 선희궁, 자신의 안위보다 임금까지 위기에 처해 있기에 고민했다. 그런데 그 내용, 폐세자반교에 없다.

    폐세자반교의 결론은, 영조가 처분을 내린 것은 사도세자의 광증 때문이 아니다. 아들이 임금인 자신을 위기에 빠트리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것. 『한중록』에는 구체적인 정황이 나온다. 죽기 전전날 밤, 세자가 물에 젖어 웃대궐로 가려다가 지쳐서 돌아왔다는 기록. 세자, 평소 칼을 들고 가서 아무렇게나 해버리고 싶다는 말을 했다. 아버지였다. 맥락상 세자는 아버지를 계속 욕한다. 칼을 들고 아버지를 죽여버리고 싶다. 정 교수는 달리 해석할 길이 없다고 말한다. 세자는 칼을 들고 아버지를 죽이려고 간 것이다.

    “세자는 혼자 안 다닌다. 무사들을 대동했겠지. 밤에 세자가 반쯤 미쳐있는 거다. 아마 비가 와서 정신이 번쩍 들어서 돌아왔을 것이다. 그 얘기를 듣고 영조가 결심했다. 맥락이 그렇다. 다른 여러 문헌에서도 세자의 죄를 계속 얘기한다. 물론 세자의 비행이 많다. 그러나 살인, 강탈, 뇌물죄, 경제사범으로 세자가 죽을 순 없다. 반역죄밖에 없다. 정황도 다 있고. 새 학설도 아니다. 나는 해석했을 뿐이다. 학자들이 학설로 제대로 내지 않고 대중서로만 나와 있을 뿐이었다. 그 죽음에 대해 정면으로 질문하고 연구한 적이 없는 거다.”

    그는 고생하고 노력만 하면 예전 사람이 못 찾은 것을 찾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자신의 해석도 노력한 결과로, 그것이 왕조의 이면과 인간의 본질에 좀 더 접근할 수 있게 했다. 그는 책을 쓰면서 영조도, 정조도 되고, 사도세자도 되고, 선희궁도 됐다.

    “아들을 죽여야 했던 선희궁이 굉장히 괴로웠을 것이다. 그녀는 아들의 3년 상이 끝나던 달, 죽었다. 왕조실록에는 병으로 나와 있다. 나는 심정적으로 자살로 본다. 심증은 있다. 『혜빈궁일기』라는 자료가 있다. 주석을 하면서 1764년 7월을 보니 자살로 심증을 굳혔다. 그녀의 지병에 대한 구절이 전혀 없다. 조심스럽게 자살에 심증을 둔다. 책을 쓰면서 인간에 대한 이해가 좀 더 깊어졌다. 참 많은 가르침과 깨우침을 준 사건이다. 여러분도 그런 부분을 쫓아서 보면 좋을 것이다.”



    “사도세자는 반역죄로 죽었다. 아버지를 죽이려고 했다지만, 그래도 영조는 자식의 정신이 온전치 않다는 것을 영 모르지 않았다.… 영조는 누구보다 크게 분노했고 아들을 반드시 죽이려고 들었다. 권력의 속성 때문인지 개인의 성격 때문인지, 자식을 사랑하는 보통 아버지의 눈에는 아쉬움이 남는다.”(p.218)




    Q&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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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권력의 본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답변

    『권력과 인간』이 제목이지만, 인간의 이면을 보고자 했다. 요즘 역사학계는 역사를 통해 너무 교훈을 앞세운다. 교훈을 맞추려고 역사를 보는 것 같다. 역사는 좀 더 복잡한 가르침이 있을 것이다. 나는 교훈을 쉽게 찾기보다 역사 텍스트가 찾는 메시지를 더 찾고 싶다. 예를 들면 ‘권력은 인간을 황폐하게 만든다’, 이런 결론이 나올 것이다. 이런 빤한 결론을 위해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 나는 권력 자체를 욕망으로 봤다. 누구나 권력을 갖고 있다. 권력은 여러 형태로 존재하고 권력 자체로 하나의 욕망이다.

    ‘권력욕을 버리라’는 훌륭한 교훈은 안 믿는다. ‘권력에서 헤어날 수 없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렇게 봐야한다. 인간이 권력욕을 컨트롤 하긴 어렵다. 버리라고 해서 통할게 아니고 어떻게 컨트롤 할지 생각해야 한다. 나는 부당하게 권력을 행사한 적이 없는가. 남이 아닌 자기 얘기를 해야 한다. 나는 권력에 대한 욕심은 타고난다고 보고 권력의지 또한 본능이라고 생각한다.

    질문

    책을 보고 드라마 <동이>이 떠올랐다. 사극 드라마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

    답변

    나는 사극을 못 본다. 이유가 있다. 눈에 걸린다. 최근 <해품달>에서 임금이 금관자를 붙이고 나온다. 금관자는 하급 문신들이 붙이는 것이다. 즉, 계급장 역할이다. 작고 무늬가 없을수록 고위층이 달았다. 임금이나 세자는 민옥관자를 붙인다. 김수현이 그렇게 큰 것을 달고 나오니, 저 놈이 임금이라니 죽일 놈! (웃음)

    그래서 사극을 못 본다. 얘기는 듣는데, <동이>는 좀 더 연구가 철저히 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숙빈 최 씨 출신에 대해선 자료가 없는데, 전해지는 설에 대해 근사치가 뭣일까? 분명한 건 동이는 하급내인이 아니었다. 그 정도는 알아야 한다. 그런 토대위에 사극적 상상력이 발휘되어야 한다고 본다. 알면 알수록 더 못 본다. 나도 사극을 보고 싶다. (웃음)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