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全泰壹)
전태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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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8가에 있는 전태일 흉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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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감리교(Methodis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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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全泰壹, 1948년 8월 26일 대구 (당시 대구부 남산정) 출생 ~ 1970년 11월 13일)은 대한민국의 노동자, 노동운동가이다.
1960년대 평화시장 봉재공장의 재봉사로 일하며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다 분신 자결하였다. 헌신적으로 노동자 인권운동을 펼쳤기에 “전태일이 없었다면 한국 노동자들의 인권은 수십 년 뒤에나 존중받았을 것”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대한민국의 노동운동과 민주주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전태일을 부를 때 흔히 ‘열사’나 ‘동지’호칭을 붙인다.
생애
남산동의 가난한 노동자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재봉사였던 아버지가 사기를 당하는 바람에 서울로 올라와서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하고 초등학교와 고등공민학교자퇴 거리에서 삼발이를 만들어서 파는 각종 행상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다.
아버지에게 배운 재봉 기술로 서울 평화시장의 피복점 보조로 취업해 14시간 노동을 하며 당시 차한잔 값이던 50원을 일당으로 받았다.
이듬해 직장을 미싱사로 옮겨 재봉사로 일하며 어린 여공들이 적은 월급과 열악한 환경, 과중한 노동에 시달리는 것을 보며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특히 함께 일하던 한 여공이 가혹한 노동 환경으로 인한 직업병인 폐렴으로 강제 해고 되는 옳지 못한 일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자신도 여공을 도왔다는 이유로 자본가들에게 밉보여서 해고된다. 이후 재단보조로 취직하여 재단사가 사장과의 갈등으로 해고당한 뒤 새로 재단사 자리에 올랐다.
노동운동
1968년에 우연히 노동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법인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그 뒤 해설서를 구입해 그 내용을 공부하면서 법에 규정되어 있는 최소한의 근로조건조차 지켜지지 않는 현실에 의로운 분노를 느끼고, 1969년 6월 평화시장 최초의 노동운동 조직인 바보회를 창립하여 평화시장 노동자들에게 근로기준법의 내용과 현재 근로조건의 부당성을 알리기 시작하고 설문을 통해 현재의 근로실태를 조사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자본가들의 탄압으로 실패로 끝나고 더 이상 평화시장에서 일할 수 없게 된 전태일은 한동안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며 지냈다.
1970년 9월 평화시장으로 돌아온 전태일은 재봉사보다 지위가 높은 재단사로 일하며 이전의 바보회를 발전시킨 삼동친목회를 조직한다. 그 뒤 다시 노동실태 조사 설문지를 돌려 126장의 설문지와 90명의 서명을 받아 노동청에 진정서를 제출한다.
이 내용이 경향신문에 실려 주목을 받자, 전태일 등 삼동회 회원들은 본격적으로 임금, 노동 시간, 노동환경의 개선과 노동 조합 결성 등을 위해 사업주 대표들과 협의를 벌였으나, 일을 무마하려는 정부의 약속 위반으로 인해 번번이 무위로 돌아갔으며,자본가들도 삼동회는 사회주의 조직이라고 헐뜯음으로써 노동자들이 노동운동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방해하였다.
죽음
이에 따라 전태일과 삼동회 회원들은 11월 13일 근로기준법은 노동자들의 인권을 보호하지 못하는 무능한 법이라고 고발하는 뜻에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하기로 결의하고 플래카드 등을 준비해 평화시장 앞에서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자본가들과 경찰의 방해로 플래카드를 빼앗기는 등 시위가 무위로 돌아갈 위기에 처했을 때, 전태일은 갑자기 온 몸에 석유를 끼얹고 불을 붙이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온 몸에 불이 붙은채 평화시장 앞을 달리는 와중에도 끝까지 “정부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갔으며 이 소식을 듣고 병원에 온 어머니 이소선에게 전태일은“어머니,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 주세요”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현재 전태일의 무덤은 모란공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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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사 전태일
인물을말하다- 전태일 편
친구들의 눈에 전태일은 참 별난 녀석이었다. 자그마한 체구에 걸음이 무척 빠른 데다 늘 밝고 명랑했다.
넥타이 없는 양복을 즐겨 입고 머리도 단정히 다듬었는데 매일 저녁 이불 밑에 양복바지를 깔아 놓아
아침이면 빳빳이 줄이 선 바지를 입고 나왔다. 생각이 깊어서 여러 사람들 앞에서도 당당했고
욕이나 험한 말은 쓰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전태일이 남달랐던 것은 재단사로서 미싱사나 시다들에게 유난히 친절했다는 점이었다.재단사는 미싱사나 시다들에게 독하게 굴어야 했다. 그러나 전태일은 인정이 아주 많았다.
여공들에게 잘해준다는 이유로 툭하면 해고를 당했다. 해고되어 돈이 아쉬우면 시장 근처에서
구두닦이를 하기도 하고 아버지가 만든 점퍼를 가지고 나와 팔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친구들을 만나면 어떻게 평화시장 어린 여공들의 근로조건을 고칠 것인가 이야기했다.자기가 공장을 세워 좋은 조건으로 노동을 시키면 다른 사업주들도 따라 하지 않을까 하는 공상도 나누고,
좋은 재단사들이 모임을 만들어 근로조건개선에 앞장서자는 제안도 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삼동회였다. 청계천 일대의 세 곳의 옷 제조상가 재단사들이 모였다는 뜻이었다.1970년 가을, 삼동회원들은 매일이다시피 만나서 평화시장의 근로조건개선 방법을 찾기 위해 머리를 짜냈다.
하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외로운 객지생활에 좋은 친구들을 만나 술 마시고 노는 데더 재미를 느낀 것도 사실이었다.
때문에 친구들은 술과 담배도 하지 않고 만나면 오로지 근로조건 개선 이야기만 하는
전태일에게 불만을 털어놓기도 했다.
“한 잔 마셔! 태일이가 술 안마시면 나 삼동회 안 해!”
친구들이 농담으로 떠들면 전태일은 그제야 ‘알았어, 알았어.’ 하며 막걸리 한 잔 마시고담배도 받아 피우며 씩 웃었다.
그래도 야유회를 가면 ‘맨발의 청춘’ 같은 유행가도 곧잘 부르고 개다리 춤과 바보 흉내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삼동회원들은 이 독특하고도 재미있는 친구를 좋아하고 잘 따랐지만,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죽음조차두려워 않는 사랑의 정신이 들어있는 줄은 아무도 몰랐다.
2. 하얀 눈 내린 도시락을 먹으며
근로감독관에게 쓴 전태일의 편지(전태일의 일기 중에서) 열악한 환경에서 고된 노동을
하고도 갈취를 당하는 어린 여공들을 바라보며 고뇌하는 전태일의 모습이 드러나 있다.
전태일은 이러한 노동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근로감독관에게 편지를 쓴다.1970년대 청계천 일대에는 2천여 개의 피복공장이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옷공장 1년이면 집을 산다느니, 3년이면 빌딩을 산다느니 하던 호시절이었다.
하지만 그 밑에서 일하는 2만 7천여 노동자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끔찍한 노동과 가난뿐이었다.
하루 평균 14시간에서 16시간까지, 일요일은 물론 국경일조차 거의 놀지 못한 채 일 년 내내 혹독한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의류산업이 호황이라 명절 때 사흘 노는 게 전부일 정도로 일이 많았다.크리스마스 날, 저녁 6시에 일이 끝나자 다 같이 만세를 부르며 좋아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어떤 집은 한 달에 한 번은 논다느니, 일 잘하는 사람에게 명절 때 쌀 한 포를 준다더라 하는
소문에 솔깃해 옮겨 봐도 가보면 거기서 거기였다.
공장은 숨쉬기도 힘들 정도로 먼지가 많았다.점심시간에 도시락을 까면 몇 숟가락 먹기도 전에 시커먼 꽁보리밥 위에 먼지가 눈처럼 하얗게 내려 앉아
흰 쌀밥처럼 보일 정도였다.
마스크가 있어도 덥고 숨이 차서 쓸 수 없는 지경이었는데, 어린 시다가 마스크를 썼다고 건방지다며 따귀를
때리는 사장도 있었다.
대부분의 여성노동자들은 자취방 하나 얻을 돈조차 없어 먼지구덩이에서 공장 바닥에서 새우잠을 자야 했다.
청계천 생활 몇 년 만에 폐병에 걸려 죽어나가는 어린 여성들이 숱했지만 보상이나산재보험 따위는 전혀 적용되지 않았다.
재봉틀 바늘이 손톱에 박히면 펜치로 빼버린 다음 미싱 기름을 발라주고 바로 일을 시키는 사장도 있었다.
노동자는 기계가 되고 손가락은 부품이 된 셈이었다.
마술처럼 쏟아지는 돈에 미친 사장들에게는 노동자들의 고통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국민의 기본권을 짓밟고 들어선 군사독재의 눈에 그 고통이 들어올 리도 없었다.
끔찍한 노동현실을 개선하는 일은 온전히 노동자 스스로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전태일과 친구들이 그 운명의 역할을 맡게 된다.
3.배가 고프다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년) 제작비 모금을 위해 만든 팸플릿. 고 이소선 여사가 환하게 웃고 있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이 아들의 소식을 들은 것은 두 시 라디오뉴스를 통해서였다.
평소 어린 여공들의 근로조건을 개선해야 한다며 어려운 노동법을 읽고
이상적인 공장을 꿈꾸던 아들이었다.
하지만 분신까지 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제 사십대 초반의 과부인 그녀에게는 너무나 벅찬 일이었다.
“태일이 엄마, 설마 죽겠어요? 어서 병원에 가봐요.”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위로하고 있을 때, 아들의 친구인 김영문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택시를 타고 왔다.김영문은 어서 병원에 가자고 재촉했다. 그러나 이소선은 담담히 말했다.
“영문아, 택시를 그냥 보내라.”
다들 택시를 타라고 했지만 그녀는 끝내 택시를 보내고 버스를 탔다. 자신이 무얼 해야 할지 생각할시간을 갖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아들의 뜻을 잘 알고 있었다. 아들이 자신에게 남긴 숙제가 무엇인가를 알고 있었다.
이소선이 병원에서 아들의 주검을 지키고 있을 때, 정부에서는 작은 빌딩을 한 채 살 수 있을만한현금을 싸들고 찾아와 조용히 장례를 치를 것을 요구했다.
그녀는 돈다발을 관리들의 얼굴에 집어 던지며 아들의 뜻이 이뤄질 때까지 온몸으로 싸울 것을 맹세했다.
이소선은 분신현장을 지켰던 삼동회원들과 함께 청계피복노동조합을 만들어 아들의 뜻을 지켰다.그리고 2012년 사망할 때까지 40여 년간, 전태일의 어머니로서
한국 노동자 모두의 어머니로서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모든 것은 전태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그 뜻을 이뤄낸 것은 어머니 이소선과 친구들,그리고 수많은 노동자와 양심적인 지식인들이었다.
http://archives.kdemo.or.kr/RecordContentsView?pId=11
#전태일 43주기… ‘우리 옆’ 노동자들의 현실
무관심·홀대·피폐한 삶.. 여전한 '노동의 위기'
32살 청년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배가 고팠다"였다. 그는 돈이 필요했다. 병환 중인 홀어머니와 돌을 앞둔 딸아이를 위해 쉴 틈이 없었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때로는 자정을 넘기며 일했다. 그러나 통장에 들어오는 돈은 부족했다. 그는 형에게 전화를 걸어 "나는 왜 이렇게 죽어라 일하는데 돈이 없느냐"며 울었다. 지난달 31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삼성전자서비스 기사 최종범씨 얘기다. 그가 휴대전화 메시지로 남긴 유서에는 낯익은 이름이 적혀 있었다. "전태일님처럼 그러진 못해도…"라고.
1970년 11월13일 서울 평화시장 앞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며 22살 청년 전태일 열사가 분신했다. 그로부터 43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노동자들의 죽음은 끊이지 않고 있다. 민주노총이 전태일 열사 분신 후 추인한 '노동 열사'는 195명에 이르고, 김대중 정부 이후로만 따져도 101명이다. 이명박 정부 5년 동안에도 21명의 열사가 생겼다.
박근혜 정부에서는 최종범씨와 윤주형 기아차 해고자, 박정식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 등 3명이 '열사'가 됐다. 기아차 비정규직인 윤주형씨는 2010년 잔업 거부 등 투쟁에 참여했다가 해고된 후 복직 투쟁을 벌이다 지난 1월 해고자 처지를 비관하며 목숨을 끊었다. 박정식씨는 2004년 현대차 아산공장 사내하청 업체에 입사해 올해부터는 노조 사무장을 맡아 일했다. 그는 유서에서 "비겁한 세상 저 또한 비겁자로서 이렇게 먼저 세상을 떠나려 한다"며 "저로 인해 그 꿈과 희망을 찾는 끈을 놓지 마시고 꼭 이루시길…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썼다.
1970년 254달러였던 1인당 국민소득이 지난해 2만2708달러로 100배 가까이 늘어났지만 여전히 노동자들은 벼랑으로 내몰리고 있다. 공장 노동자뿐 아니라 서비스업과 특수고용노동자 등으로 고통은 더욱 세분화됐다. 극단적 선택과 투쟁을 하는 노동자가 더 이상 공장에만 있지 않고, 우리 집 냉장고를 고치고 아이들 학습지를 봐주러 오는 '우리 옆' 사람들까지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일자리를 지키고 질을 높이겠다고 공약했으나 실제로는 노동 홀대로 일관하며 역주행했다. 전국공무원노조의 노조 설립신고서를 반려하고 전국교직원노조를 법외노조화한 것이 상징적이다. 민주노총은 "더 이상 박근혜 정부에는 기대할 것이 없다"며 지난 10일 전국노동자대회에서 노조 설립신고증을 찢어버렸다. 대정부 강경투쟁을 예고한 것이다.
보다 근본적인 '노동의 위기'는 무관심이다. 한 노동운동가는 "예전에는 '정말 누가 죽어야 쳐다볼 텐가'라고 말하곤 했는데, 이제는 아예 죽어도 관심을 받지 못하는 현실이 됐다"고 말했다. 노조 조직률은 1980년대 말 한때 20%까지 육박했으나 2000년대 들어 10% 안팎에서 맴돌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최하위권이다.
하종강 성공회대 교수는 "한국의 노동계는 내부에서도 빈부격차가 심해지는 양극화 현상으로 갈라졌고, 노조 조직률에서 보듯 노동자를 대변할 수 있는 세력이 든든하지 못해 극단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면서 "외환위기 이후 기업의 이익이 모든 가치에 우선하게 되면서 노동자의 목소리는 홀대됐다"고 말했다. 노동계 내부에서, 겉도는 정치에서, 시민들의 무관심 속에서 노동의 답이 없다면 '제2·제3의 전태일'이 나올 가능성이 잠재돼 있는 셈이다.
절망의 벽에 부딪친 노동자들이 지금 향하는 곳은 공중이다. 2011년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309일의 크레인 고공농성을 벌였고, 지난해부터 현대차 최병승·천의봉씨가 296일 동안 철탑 고공농성을 했다. 재능교육 학습지 교사 오수영씨와 여민희씨가 성당 종탑에서 202일을 버텼다. 지난해부터 올해 3월까지 151일간 고공농성을 했던 유성기업 홍종인 노조 지회장은 지난달 13일 다시 철탑에 올랐다. 회사 측이 노조와의 약속을 없던 일처럼 치부하고 징계를 단행했기 때문이다. 고공농성자들은 한결같이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쳐다봐주지 않기 때문에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이들의 공통점은 해고자이거나 비정규직이라는 점이다. 현재의 위기는 노동의 계층화에서 찾을 수 있다. 노광표 노동사회연구소장은 "1970년대에 모든 노동자들이 어려웠다면 지금은 노동자 내부에서도 양극화가 빚어졌고 이로 인해 국민들의 감정도 많이 달라졌다"면서 "경제가 성장하면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달려왔는데 실제로는 최저임금도 못 받는 근로빈곤층들이 양산되는 결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홍종인 지회장은 "자본은 성장하면서 노동자 대응 전략도 발전시켰는데 노동운동은 사실 전략적으로 정체돼 있던 것도 사실"이라며 "노동에 대한 문제의식의 공감대가 없다는 점이 가장 힘든 부분"이라고 말했다. 43년 전 평화시장에서 불씨가 지펴진 노동은 갈 길이 멀고 안팎으로 위기인 셈이다.
그럼에도 사회의 건강한 발전을 위해서는 노동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소외와 무시가 아닌 합의와 희망의 관점에서 노동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병훈 중앙대 교수는 "노동자들은 우리 사회의 절대 다수인데 그들이 제대로 보상받지 못한다면 계급 사회가 심화되고 끊임없는 사회 갈등이 빚어질 수밖에 없다"면서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면 내수가 얼어붙어서 활력이 떨어지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유럽의 복지 국가들도 정책이나 제도 이전에 노동자들이 사회적으로 존중받고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토대 위에서 건설된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박철응 기자 hero@kyunghyang.com>
경향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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