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鄭道傳, 1342년 ~ 1398년 10월 6일(음력 8월 26일)
고려 말기, 조선 초의 문신, 유학자이자 시인이며, 외교관, 정치가, 사상가, 교육자이다.
한국의 초기 성리학자의 한사람이며,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峯),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별칭은 해동장량이다.
아버지는 형부상서 염의선생 정운경이고 어머니는 우연의 딸 영천 우씨이다. 본관은 봉화(奉化)이다.
과거 급제 후 성균관 등에 있으면서 성리학을 장려하였고, 외교적으로는 권문세족에 대항하여 명나라와의 외교론을 주장하다 여러 번 파직과 복직을 반복하였으며 1383년 이성계를 만나 정사를 논하다가 역성혁명론자가 되었다.
이후 정몽주,이성계 등과 함께 우왕과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추대했다가 1392년 조선 건국을 주도하여 개국공신 1등관에 녹훈되었다. 관직은 판삼사사를 거쳐 대광보국숭록대부로 영의정부사에 추증되었으며, '봉화백'(奉化伯)에 봉작되었다.
조선 건국의 일등 공신이자 최고 권력자였던 그는 조선의 이념적 바탕을 마련하고 모든 체제를 정비하여 조선왕조 500년의 기틀을 다져놓았으며, 서울시내의 전각과 거리의 이름을 직접 지었다고 한다. 제1차 요동 정벌(1388)과 제2차 요동 정벌(1392)에 반대하였으나 요동을 정벌할 계획을 세워 명나라와 외교 마찰을 빚었고, 공신과 왕자들이 사적으로 보유한 사병을 혁파하려다가 갈등한다.
그 뒤 신덕왕후 강씨 소생 방석 등을 세자로 추대하였으며 요동 정벌을 계획하여 명나라태조 주원장과 갈등하던 중, 이방원이 정변을 일으킨 뒤 1398년 8월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의 군사들에게 살해되었다.
성리학이념 보급에 기여하였으며, 그는 안향-백이정-이제현의 학통을 계승한 이색의 문하생이자 정몽주, 권근의 동문으로, 나중에 정몽주, 길재의 문하생들에 의해 폄하되었다.
조선사회에 성리학을 정착, 국교화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신덕왕후 강씨와 함께 세자 책봉에 공을 들였던 정도전은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조정에서 철저히 배격되었다. 태종은 그를 역적으로 만든 뒤 정몽주를 추상하였으며, 이후 역적의 대명사로 매도되어 오다가 고종 때 흥선대원군에 의해 복권되었다.
생애 초반
출생과 가계
삼봉 정도전은 1337년 아버지 형부상서 정운경(鄭云敬)과 어머니 영천 우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출생년대는 명확하지 않아 1342년설과 1337년설이 혼재하고, 출생지는 단양으로 알려져 왔으나 후대에 와전된 것이고 고향 영주에서 태어나서 양주 삼각산 부근에서 성장하였다.
대체적으로 그의 선대는 본관지 봉화에서 호장직을 세습하며 살았으며, 할아버지 정균대에 영주로 이주 정착하였다. 그의 호 삼봉은 삼각산과 같이 학문과 경술에 우뚝하라는 뜻으로 이존오, 박의중, 이집, 김구용 등이 1369년 가을 삼각산 그의 집을 찾아와 지어준 것이다.
고조부는 봉화호장을 지낸 정공미(鄭公美)이다. 그 이전의 가계 기록은 실전되어 그를 시조로 삼게 되었다. 아버지 정운경은 중앙에서 벼슬하여 형부상서에 이르렀다. 정도전의 어머니는 영천우씨(榮川禹氏) 산원(散員) 우연(禹淵)의 여식이다. 정도전이 지은 아버지 정운경의 행장과 봉화정씨 족보에 그의 외가를 영천우씨로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유년기
정도전은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독서를 좋아하였다. 정도전이 유년을 보낸것은 양주 삼각산이다. 그의 동지이자 훗날 정적이 되는 포은 정몽주의 시문집과 포은봉사고서에 '15~6세 때 삼각산에서 성율을 공부할 때 정몽주에게 대학과 중용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였다. 정도전의 외가는 영주였으나 아버지 정운경이 중앙으로 관직을 옮김에 따라 개경으로 이주했다.
그의 아버지 정운경은 이곡과 나이를 잊은 두터운 친교가 있었기 때문에 이곡의 아들 이색과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 정도전은 그 뒤 성균관에서 이색과 스승과 제자로 다시 만나 성리학에 대해 한층 심도있게 연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수학과 소년기
이색의 문하에서 그는 성리학적 국가경영의 이념과 사상을 심층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외에도 맹자의 성선설과 역성혁명론에 주목하였다. 그러나 부패한 사회의 현실을 보면서 맹자의 성선설에는 다소 회의적인 견해를 품게 되었다.
이때 그와 함께 공부했던 이들로는 포은 정몽주, 박의중, 윤소종, 이존오, 김구용(金九容), 김제안(金齊顔), 박의중, 설장수(偰長壽), 박상충 및 5년 연하의 이숭인과 하륜, 10년 연하의 권근 등이 있었는데 모두 당대 최고의 문인들이었다. 정도전은 성균관에서 경사(經史)를 강론하였는데 특히 문장과 성리학에 능하였다.
스승인 이색은 이제현과 백이정, 권부, 안향 등의 학통을 계승했는데, 이제현은 백이정의 문인이자 권부의 사위로 28살 때 원나라에 가서 공부하고 돌아와 성리학을 이루었다.
그의 학문은 이색으로 이어졌다. 정몽주,정도전, 이숭인, 권근 등 고려 말의 대표적 성리학자들은 대부분 이색의 문하에서 배출된 인물들이다.
당시 그는 권문세족들의 전횡 못지않게 불교는 국가경제를 저해하고 민생을 황페하게 하는 해악으로 보게 되었다. 이는 사원경제의 팽창과 타락, 민의 불교에 귀의 등으로 인한 조세수입의 궁핍과 부역의 징발 부재로 나타난 국가경영 존립의 위기에서 출발한 것이다.
따라서 개인의 삶조차 기약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사후 세계를 논한다는 것은 공허한 생각이라는 공자의 의견에 강하게 동조하게 된다. 이후 불교가 국가에 미치는 해악에 대한 비판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며, 만년에 《불씨잡변》으로 집성하게 되었다.
특히 정도전은 동문수학한 동료들 중 정몽주와 마음이 맞아, 그가 말한 부패한 사회를 개혁하고 권문세족으로부터 농민들을 해방시켜야 된다는 사상에 정몽주는 깊이 감격, 공조하였다. 이후 정몽주와는 오랜 친구로, 청소년기때부터 권문세족과 외척의 발호로 부패한 고려사회를 성리학적 이상향으로 개혁해야 된다는 사상을 품고 사상적, 정치적 동지로서 협력하였으나 뒤에 조선개국과 관련하여 정적으로서 참예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관료생활과 정치 활동
과거 급제와 관료생활 초기
공민왕 때인 1360년(공민왕 9년) 성균시(成均試)에 급제한 데 이어 2년 뒤1362년 문과 동진사로 급제하여 1363년 관직에 나갔다.
그해 충주사록(忠州司錄)을 거쳐전교시주부(典敎寺主簿)·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를 지냈다. 그 뒤 성균관에서 정몽주와 함께 명륜당에서 유학을 강론하며 유생들을 길러냈고, 성균관박사, 태상박사 등의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출세를 하였다.
그러나 그의 벼슬살이는 순탄하지 않았다. 공민왕이 신돈을 기용하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삼각산 옛집으로 낙향해서 은둔생활을 하였으며, 아버지와 어머니가 1월과 12월에 연이어 작고하여 영주에서 3년간 여묘살이를 하며 학문연구와 교육에 힘썼다. 당시 관료들과 지식인들은 백일상이 일반적인 관행이었으나, 그는 주자가례에 따라 3년상을 봉행 실천하였다. 1369년 가을, 부모의 3년상을 마치고 삼각산 옛집으로 돌아왔고 이듬해 12월, 관직에 복귀하였다.
신돈의 죽음과 성균관 강학
1370년 성균관을 중건하고 그해 스승 이색이 대사성이 되자, 그는 스승 이색과 벗들의 천거로 성균관박사가 되었다. 성균관의 박사로 있으면서 정몽주 등 교관과 매일같이 명륜당에서 성리학을 수업, 강론하였다.
다시 70년 예조정랑 겸 성균·태상박사(禮曹正郞兼成均太常博士)가 되어 전선(銓選)을 관장하였다. 또한 권문세족을 경계하고 새로운 인재를 찾으려던 시중 신돈에 의해 신진 사류가 중용되면서 그 역시 요직에 앉았던 연유로 신돈의 일파로 몰리기도 했다. 그는 위험을 무릎쓰고 신돈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1371년 태상박사에 임명되고, 다시 예의정랑이 되어 태상박사를 겸임했다.
신돈이 제거된 뒤에도 정도전은 기용됐으나 1374년(공민왕 24) 공민왕이 살해되면서 친명파에 속했던 정도전은 다시 정치적 위기를 겪었다. 그때 정국은 친원파(親元派)와 친명파(親明派)가 대결하고 있었다.[3] 이때 그는 성균관에서 성리학을 강학하면서 한편으로는 정몽주 등과 함께 명나라와의 외교관계를 돈독히 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후 그는 공민왕의 부패와 타락을 옹호하거나 묵인하는 권문세족이 왕의 눈과 귀를 가린다며 비판을 가하였다. 1374년 공민왕이 홍륜 등에 의해 암살당하자 그는 이 사실을 명나라에 고할 것을 주장하였다가 이인임 등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관직 생활과 권문세족과의 갈등
친원파, 권문세족과의 갈등
이때 그는 부와 권력을 독점한 권문세족들로부터 전답 등의 농토는 실제로 농사를 짓는 농민들에게 부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권문세족들의 분노를 샀다. 또한 그는 사원경제의 팽창과 문란이 정치 경제 사회의 폐해가 극심함으로 불교의 배척을 주장하였다.
1375년(우왕 1년) 성균관사예·지제교가 되었다. 동년 원나라 사신이 왔을 때 원나라의 사신을 맞아들이는 문제로 조정에서는 신흥사대부와 권신들 간에 대립이 일어났다. 이인임과 지윤 등은 사신을 맞아들이자고 한 반면, 정도전을 비롯한 신흥사대부들은 이에 반대했다. 그러나 이인임 등은 그들의 주장을 물리치고 원나라 사신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이인임은 정도전을 영접사로 임명해 보내려고 했다.[3] 그러나 정도전은 사신영접을 거부했다.
이런 와중에 원나라 사신을 맞이할 영접사로 지목된 인물은 정도전이었다.[5] 이에 정도전은 “사신의 머리를 베든지, 그렇지 않으면 묶어서 명나라로 보내버리겠다.”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인임·경부흥(慶復興) 등이 친원정책으로 되돌아가려 하고 원나라 사신이 명나라를 치기 위한 합동작전을 고려 조정에 제의해 오자, 정도전은 이를 반대하였다.
그리하여 정도전은 이인임·경부흥 등의 권신의 진노를 사 나주의 속현인 회진현(會津縣) 거평부곡(居平部曲)으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그는 성리학 관련 서적을 연구하며 동리 청년자제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귀양길에 곤장까지 맞을 뻔하였으나 때마침 일어난 석기의 난을 일어나 경황이 없어 장형은 당하지 않았다.
유배와 학문 연구
유배살이 중 그는 온갖 인신비방에 시달렸다. 그가 낙마하자 사방에서 그에 대한 비방이 끊이지 않았다. 그는 그런 비방은 소인배들의 짓이라며 씁슬하게 넘겼다. 그러나 그를 원망하는 아내의 편지를 받게 되었다.
“ | 당신은 평소 부지런히 독서에만 몰두하여 아침에 밥이 끓든 죽이 끓든 간섭하지 않아 집안에는 한 섬의 쌀도 없었습니다. 방에 가득한 아이들은 끼니 때마다 배고프다고 울고 날이 찰 때는 춥다고 울부짖었습니다. 제가 살림을 맡아 그때그때 수단을 내어 꾸려가면서도 당신이 열심히 공부하시니 언젠가는 입신양명하여 집안의 영광을 가져오리라고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영광은 커녕 국법에 저촉되어 이름을 더럽히고 몸은 남쪽 변방에 귀양 가서 가문이 망하였습니다. 이에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현인, 군자의 삶이란 진실로 이런 것입니까?[6] | ” |
— 아내의 편지 |
“ | 당신의 말이 모두 맞소. 예전의 내 친구들은 형제들보다 정이 더 깊었는데 내가 이지경이 되자 뜬구름처럼 흩어졌소. 이는 그들이 원래 세로써 맺어졌지 은으로 맺어지지 않은 까닭이기에 나는 원망하지도 않소. 하지만 부부는 한번 맺어지면 죽을 때까지 고칠 수 없는 것이니 당신이 나를 질책하는 것은 나를 사랑해서이지 미워해서는 아닐 것으로 나는 믿소. 또 아내가 남편을 섬기는 것은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과 같으니 당신이 집을 근심하고 내가 나라를 걱정하는 것이 무엇이 다르겠소? 나는 오직 나의 뜻에 충실할 뿐이오. 성패와 영욕과 득실은 하늘이 정하는 것이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오. 내가 무엇을 근심하겠소? | ” |
— 정도전의 답장 |
정도전은 아내를 원망하지 않았다. 정도전은 아내에게 대의에 대해 말하지도 않았다. 다만 자신의 뜻대로 나아가면 하늘이 돌볼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을 버린 친구들에 대한 애증은 이미 정리된 감정이었다.
배소에 있는 그에게 꾸준히 안부를 묻고 편지서신을 보내며 위로하는 친구는 정몽주 등 소수였다.
역성혁명 준비
석방과 교육 활동
1377년에 유배에서 풀려나 4년간 선향 영주와 안동, 제천, 원주 등을 오가며 유랑하며 지냈다. 그 뒤 1381년 가을 거주가 완화되자 삼각산 옛집으로 돌아왔고 1382년 초려(草廬)를 지고 '삼봉재'(三峯齋)라 이름하고 학문과 교육에 힘썼다.
그러나 권문세족들은 정도전을 위험 인물로 보고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전국에서 많은 재생들이 운집하여 교육의 즐거움을 향유하였으나 그 또한 오래가지 못했다. 이곳 출신 재상이 삼봉재를 헐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생들을 이끌고 부평부사 정의에 의탁하여 부평부 남촌(南村)으로 이사하여 후생 교육사업을 재기 하였으나 이곳 역시 재상 왕모(王某)가 별장을 짓는다고 학숙을 폐쇄하였다. 계속되는 멸시와 박해로 다시 경기도 김포로 옮겨야 했다.
유배와 유랑 살이를 통하여 향민(鄕民)과 사우(士友)에게 걸식하기도 하고 스스로 밭갈이도 했다. 이때 그는 가난과 기근으로 죽어가는 백성들과 그들을 수탈하는 권문세족의 횡포와 사원경제의 팽창으로 국가경영의 존폐위기 상황을 직면하고 일대의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이성계와의 만남
1383년 가을, 정도전은 드디어 비장의 결심을 하고 함길도 함흥에 있는 동북면도지휘사(都指揮使) 이성계를 찾아갔다. 한때 이성계와 함께 왜구와 여진족을 토벌하는데 함께 출정했던 정몽주로부터 그의 명성을 듣고, 외적의 침략을 물리쳐 고려의 새로운 영웅으로 떠오른 이성계를 만나기 위해 함흥으로 직접 찾아간 것이다.
그는 이성계와의 오랜 대화로 세상사를 논하다가 그와 인연을 맺었다.
정도전은 부패한 관료로 인한 피폐한 백성들을 구제하고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하는 길은 오직 혁명 밖에 대안이 없다고 결론 짓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이성계의 군사력이 절실하였던 것이다.
당시 조우에서 정도전은 이성계 휘하의 정예 군대와 일사분란한 지휘통솔에 감탄을 금치 못했고, 이성계 또한 정도전의 심오한 학문과 원대한 국가경영에 대한 경술에 감탄해 마지 않았다. 정도전은 이성계 휘하의 동북면 군사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군령을 엄하게 지킬 뿐 아니라 무기들 또한 잘 정비되어 있으며 훈련에도 열심히 임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정도전은 이성계를 훌륭하다고 칭찬하며 “이 정도의 군대라면 무슨 일인들 성공시키지 못하겠습니까?”라고 넌지시 떠보았다.
평생 전쟁터를 누벼 온 이성계가 정도전의 말뜻을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으나, 무슨 뜻이냐며 모르겠다는 듯이 반문하였다. 이에 정도전은 동남방의 왜구를 소탕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개혁 정치와 정변 기도
이성계와 역성혁명
정도전은 그날 밤 이성계와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날 정도전은 군영 앞에 서 있는 오래된 소나무의 껍질을 벗기고 그 위에 이성계를 위해 시 한 수를 지었다.
“ | 蒼茫歲月一株松 / 아득한 세월에 한 그루 소나무 | ” |
— 정도전, 《제함영송수》(題咸營松樹) |
이 시에서 정도전은 이성계를 늙은 소나무에 비유하고 있는데, 앞으로 때가 되면 이성계는 천명(天命)에 따라 세상을 구원하러 나서야 하며, 자신과 손잡고 큰일을 하여 위대한 역사적 과업을 남기게 될 것이라는 자신의 속마음을 은근히 드러내었다.
이성계는 개혁을 주장하는 정도전 등에게 협력하기로 하고 지원을 약속했다. 그의 인물됨됨이에 매료된 정도전은 그의 막료가 되었고 이후 역성혁명까지도 논의하게 되었으며 이 일을 계기로 정도전은 이성계의 참모로서 큰 야망을 품게 되었다.
1384년 가을 전교시부령(典校侍副令)으로 복직과 동시에 성절사(聖節使) 정몽주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가서 승습(承襲)과 시호를 청하고 되돌아왔다.
1385년 귀국 후 성균관 제주(祭酒)와 지제교를 거쳐 86년 외보를 요청 남양부사(南陽府使)로 도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부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그 뒤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위화도 회군과 권력 장악
1388년 음력 6월 제1차 요동 정벌에 출정한 이성계 등이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잡게 되자 밀직부사로 승진하여 조준, 남은, 윤소종 등과 함께 이성계의 우익이 되어 전제(田制) 개혁에 착수, 조세 제도와 토지 제도를 개혁하였다.
이는 개인이 함부로 토지를 사유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권문세족들이 보유한 토지를 몰수하고 새 정권을 창출하는 데 필요한 자금 확보는 물론, 백성들의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그는 전국의 토지를 국가에 귀속시킨 뒤 인구수에 따라 토지를 분배할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스승인 이색과 친구인 정몽주 등과 의견이 달라지면서 서서히 멀리하게 되었다. 이어 최영, 이인임, 염흥방, 조민수 등 구 세력을 비판, 제거함으로써 차근차근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닦아 나갔다. 같은 해, 우왕을 내쫓고, 이인임의 주장으로 창왕을 세웠다. 이때 우왕의 측근인 최영일파를 제거하였다.
정변과 공양왕 추대
1389년 음력 11월 여주로 유배된 폐주 우왕이 자신을 찾아온 김저(金佇)와 정득후(鄭得厚)에게 보검을 주며 곽충보(郭忠輔)와 함께 이성계를 제거하라는 밀명을 내린 음모사실이 곽충보의 고변으로 발각되었다. 이에 이성계는 우왕을 서인으로 강등시켜 강화도로 유배시켜 버렸다.
정도전은 이성계, 정몽주, 조준, 남은과 함께 뜻을 같이해 창왕을 신돈의 자손이라 하여 폐위시키고, 폐가입진을 명분으로 공양왕을 추대하고 공신이 되었으며 최영 등을 죽이고 실권을 잡았다. 이때 그는 우왕과 창왕 부자가 왕씨가 아니라는 주장을 했으나 우왕이 신돈의 친자 여부는 입증하지 못했다.
정몽주 등과 함께 공양왕을 추대한 공으로 그는 봉화현 충의군(忠義君)에 봉군된뒤 수충논도좌명공신(輸忠論道佐命功臣)에 책록되고 공신전 100결과 노비 10명을 하사받았다. 이후 삼사좌사(三司左使)가 되었다. 1390년(공양왕 2년) 경연지사(經延知事)에 올랐다.
그 해 1390년 이성계가 명나라를 치려 한다고 명나라 주원장에게 밀고하는 윤이 이초 사건이 발생하자, 성절사 겸 변무사(聖節使兼辨誣使)로 명나라에 가서 윤이·이초의 주장이 무고임을 밝히고 돌아왔다. 곧 동판도평의사사사 겸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
정적 숙청과 역성혁명
1391년에 이성계는 삼군도총제부를 만들고 군대를 장악하였고, 정도전은 삼군도총제부 우군도총제의 자리를 맡았다.
이어 불교 배척의 기치를 들고 척불(斥佛) 상소를 올려 권문세족들을 불교도로 몰아 제거한 뒤, 성균관 학생들과 함께 외세를 빌어 국내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윤이,이초 사건의 배후인 이색과 우현보(禹玄寶) 등을 신우(辛禑)·신창(辛昌) 옹립의 죄를 물어 처단할 것을 상소했다.
그러나 정도전과 신진사대부 역시 창왕 등의 옹립에 가담했었고, 이를 부담스럽게 여긴 공양왕은 처음에는 거절하였다. 정도전은 거듭 이색, 우현보를 처단할 것을 극력 피력하였다.
그해 9월 평양부윤에 임명되었으나 정몽주 등은 그를 제거할 목적으로 사간원과 사헌부의 간관들을 사주하여 그가 "가풍(家風)이 부정(不正)하고, 파계(派系)가 불명함에도 큰 벼슬을 받아 조정을 어지럽히고 있다"라고 탄핵케 하여 봉화로 유배당하였다.
정몽주가 정도전을 탄핵한 실제 목적은 이성계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몽주의 탄핵 내용을 접한 그는 정몽주에게 극심한 반감을 품게 된다. 이어 나주로 배소가 옮겨졌으며 두 아들은 삭탈관직당해 평민이 되었다. 이때 정몽주는 김진양을 사주하여 사죄로 다스릴 것을 상소하여 그를 처형하라고 강력히 주장하였으나 공양왕이 이를 듣지 않았다.
그가 유배되자 정몽주는 사람을 보내 그를 고문하는 척 하면서 죽이라고 밀명을 내렸으나, 그는 정몽주가 자객을 보낼 것을 예상하고 피하여 극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정몽주는 그를 처형해야 된다고 건의하였지만 공양왕의 반대로 1392년(공양왕 4년) 봄 귀양에서 풀려나 고향 영주로 돌아갔다.
1392년 3월 초 이성계가 해주의 사냥터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자 이성계 세력을 제거하려는 정몽주 등에 의해 "천지(賤地)에서 기신(起身)하여 당사(堂司)의 자리를 도둑질했고, 천근(賤根)을 감추기 위해 본주(本主)를 제거하려고 모함했다"라는 탄핵을 받고 보주(甫州)의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러나 곧 풀려나 복직하고, 개경으로 상경한 뒤 충의군에 봉군되었다. 이어 향리에 은신하던 중 그해 4월, 이방원, 조영규 등이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격살함으로써 고려 왕조를 지지하는 세력은 구심점을 잃고 와해되었다. 그 뒤 한성부에 내려가 있다가 정몽주가 제거된 뒤 6월 10일 개경으로 상경하였다.
역성혁명과 조선 건국
조선의 건국
6월 정도전은 비로소 소환되어 정치 일선에 나서서 새왕조 창업을 위한 정지 작업을 단행하여 7월17일 공양왕의 선양을 이끌어 내어 이성계를 임금으로 추대하여 새 왕조 조선을 건국하였다.
조선 왕조가 건국되자 정도전은 왕명을 받아 새로운 왕조의 정책 방향을 제시하는 17조의 〈편민사목〉(便民事目)을 지어 발표하였다. 또한 조선 건국을 반대한 정적 등 반대파를 일소하였다.
조선을 건국하는 데 일등 공신이 된 정도전은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겸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 등의 군국의 요직을 겸함으로써 권력을 손에 쥐어 조선의 핵심 실세가 되어 행정, 군사, 외교, 교육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전반적인 문물 제도와 정책의 대부분을 직접 정비해 나갔다.
태조로 즉위한 이성계는 나랏일을 모두 정도전에게 맡겼다. 그리하여 정도전은 명실상부한 조선의 2인자가 되었으며, 건국 사업에 크게 이바지하여 새 나라의 문물 제도와 국책의 대부분을 결정하였다. 즉 한양 천도 당시 궁궐과 종묘의 위치 및 도성(都城)의 기지를 정하고, 각 궁전 및 궁문의 칭호, 도성의 8대문 및 성안 48방(坊)의 이름 등을 제정하였다.
국정 방안 수립과 병권 장악
이후 태조의 교지(敎旨)를 지어 새 왕조의 국정방향을 제시했고, 개국공신 1등으로 대광보국숭록대부 문하시랑찬성사 겸 판의흥삼군부사로 동판도평의사사사·판호조사·겸판상서사사·보문각대학사·지경연예문관춘추관사 겸의흥친군위절제사를 겸직하여 정권과 병권을 모두 장악했다.
7월 20일 도평의사사사 겸 상서사사(尙瑞司事)가 되었다. 7월 28일 좌명공신(佐命功臣)에 녹훈되고 문하시랑찬성사 의흥친군위 절제사(門下侍郞贊成事義興親軍衛節制使)에 임명된 뒤 봉화군(奉化君)에 봉군되었다.
새 왕조를 연 태조 이성계는 즉위 한 달 만에 수도를 옮길 결심을 했다.
처음에는 나라 이름도 고치지 않고 수도도 그대로 개경으로 할 생각이었으나 무슨 까닭에서인지 천도를 결심, 후보지를 고르기 시작했다.
맨 먼저 후보지로 지목된 곳은 계룡산이었다. 이성계는 곧바로 궁궐터를 닦기 시작했다.그런데 계룡산 천도에 반대하는 상소가 올라왔다. '너무 협소하여 백성들이 들어가 살기 어렵고, 토지가 비옥하지 못하여 교통이 불편하고 금강이 멀어 백성들이 고생한다'는 이유였다. 계룡산에 대한 반대 상소가 올라가자 정도전 등도 계룡산으로의 천도를 반대하여 태조는 새로운 길지를 선정하게 하였다.
1392년 10월 명나라에 파견되는 사은사 겸 계품사로 명나라에 가서 조선 건국의 당위성을 호소하고 승인받아왔다. 12월,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가 되었다.
1393년(태조 2년) 7월 다시 문하시랑찬성사로 동북면도안무사가 되어 변방으로 나가 여진족을 토벌, 회유하고 되돌아왔으며, 한성으로 되돌아온 뒤 〈문덕곡 文德曲〉·〈몽금척 夢金尺〉·〈수보록 受寶〉 등의 악사(樂詞) 3편을 지어 왕에게 창업의 쉽지 않음과 수성(守成)의 어려움을 반성하게 하는데 쓰이는 자료로 삼도록 권고하였다. 1393년 9월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10월 관습도감판사(慣習都監判事)를 거쳐 1394년(태조 3년) 1월 판의흥삼군부사로 병권을 장악하여 병제개혁에 대한 상소를 올리고, 3월 경상·전라·양광 삼도 도총제사가 되어 지방의 병권까지 장악하였다.
체제와 관제의 정비
정도전은 조선이 갖춰야 할 정부 형태와 조세 제도는 물론 법률 제도의 바탕을 만들었으며,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나라의 통치 이념으로 확립시켰다. 또한 정도전은 수도 천도를 결정하고 수도 이전을 단행하였다.
조선의 건국 직후부터 그는 《조선경국전》을 편찬해 새로운 법제도의 틀을 닦았으며, 도읍을 옮겨 새 왕조의 면모를 높일 것을 계획하였으며, 경세문감을 저술하여 재상, 대간, 수령, 무관의 직책을 확립했다.
또한 명나라의 공물 요구가 거세지자 요동 정벌으르 계획하고, 군량미 확보, 진법 훈련, 사병 혁파 등을 적극 주장, 추진해 병권 집중운동을 펼쳐나간다.
또한 노비 해방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병제(兵制)를 대폭 개혁하여 진법(陳法)·진도(陳圖)를 지어 장병을 훈련하고, 1397년(태조 6)에 동북면 도선무순찰사(東北面都宣撫巡察使)가 되어 지금의 경원(慶源 : 함경북도) 지방에 가서 성보(城堡)를 수리하고 주·군과 역참을 획정하였다.
정도전은 고려 말 배불론(排佛論)의 주동자로 불교를 대체할 사상으로 유교 성리학을 지목했다. 그는 유교로써 문교(文敎)를 통일하고자 하여 주자학으로 미신이라 여겨지는 불교와 노자교(老子敎), 무속 등을 압도하고자 유감없이 공격을 가하였다.
불교의 자비는 친함과 안면이 있음에 따라 차별이 있고, 불교는 인류 자연의 성정에 위배하여 사회 조직을 파괴하는 것이며, 석가가 인세(人世)를 이탈하여 자립자영코자 아니하였음은 타력에 따라 기생코자 한 것이고 특히 선종과 같은 것은 인심을 현혹하는 마종(魔宗)이라고까지 비판하였으나 아무도 이에 응대하는 불교인이 없었던 유학의 대가였다.
또한 그는 유교를 전파하고자 조선 왕조의 제도와 예악(禮樂)의 기본구조를 세운 《조선경국전》·부병제(府兵制)의 폐단을 논한 〈역대부병시위지제〉(歷代府兵侍衛之制)의 편찬을 시작하였다.
한양 천도
1392년 8월부터 그는 새 도읍지 건설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는데, 이는 고려의 구신과 세족이 도사리고 있는 개경은 신왕조의 정착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1394년 8월부터 개경을 떠나 새로운 도읍 건설을 추진하여, 한양을 새 왕조의 도읍지로 정하였다.
한양을 조선의 새 수도로 결정한 것은 물론, 서울의 도시 설계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경복궁 자리도 정도전이 잡은 것이라고 한다.
무학대사는 지금의 인왕산을 주산으로 궁궐을 세워야 한다고 했으나 정도전은 반대하였다. 그는 무학대사가 추천한 위치는 동향이며 터가 너무 좁아 왕도로 적당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결국 정도전의 뜻대로 경복궁이 현재의 자리에 세워지게 되었다.
한성부의 각 궁궐과 전각, 문의 이름을 짓고 도로 수도의 행정분할도 결정했다.1394년 한양 천도의 지도와 감독을 병행하면서 새 사회에 걸맞은 사상으로 유교 성리학을 정식 국교로 채택할 것을 주청하였으며, 그해에 〈심기리편〉(心氣理篇)을 지어 불교·도교를 비판하고 유교가 실천 덕목을 중심으로 하는 인본주의 사상이라고 주장했다.
태조의 허락 아래 종묘와 사직, 궁궐의 터 등이 들어설 자리를 정했을 뿐만 아니라 각종 궁궐 및 각 전각의 이름은 모두 정도전이 손수 지었다.
그는 전각과 거리의 이름을 지을 때 유교적 덕목이 나타나도록 근정(勤政), 인정(仁政) 등의 단어를 사용했다. 또한 한성의 4대문과 4소문의 첫 이름고 현판을 짓기도 했다. 그 밖에도 종묘의 제례법과 음악도 정도전이 제정한 것이었다. 특히 〈몽금척〉(夢金尺), 〈수보록〉(受寶籙), 〈문덕곡〉(文德曲) 등 수많은 악장을 지어 태조의 공덕을 찬양하였는데, 이 악장은 조선조 5백 년간 중국에서 연주되었다.
조선건국 이후 정권 투쟁
세자 책봉 문제
세자를 누구로 임명하느냐는 문제에 관해서 당초의 의론은 "시절이 태평하면 적장자를 세우고, 난세에는 공이 많은 왕자를 세워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신덕왕후 강씨는 자신의 아들을 왕세자로 책봉하기를 간절히 소원하였고, 태조 이성계 역시 방석을 총애하여서 배극렴을 비롯한 대소신료들은 태조의 의중에 따라 여덟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태조의 전처 한씨 소생 아들 중 다섯째 인 이방원은 정치적 야심이 가장 컸던 탓에 이 일로 격분하였다.
또한 다른 전처 한씨 소생의 왕자들도 자신들을 배제하고, 후처인 강씨의 아들 막내 방석이 왕세자가 된 것에 대해 모두 분개하였다.
이것이 훗날 제1차 왕자의 난의 원인이 되었다. 태조가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자 정도전은 바로 세자시강원이사(世子侍講院貳師)의 한사람이 되어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했다.
국방력 강화와 명나라와의 갈등
1395년 1월 정총(鄭摠) 등과 함께 《고려국사》(高麗國史)를 편찬하였다. 조선 창업에 성공한 정도전은 세자책봉에 이은 새나라 문물과 제도정비에 착수했다. 6월에는 국가의 통치규범인《조선경국전》,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제왕들의 치적을 담은 《경제문감》,《경제문감별집》(經濟文鑑別集) 등의 편찬을 주도하여 새로운 치국의 대요와 관제 등 모든 제도와 문물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경제문감》과 《경제문감별집》에는 정치제도·재상·대관(臺官)·간관(諫官)·부병제도·감사(監司) 등의 업무와 인사 행정 및 실무를 논하였다. 이어 국방력 강화와 고구려 고토수복을 위한 공병제도를 도입 군의 통수권을 국가에 귀속 시키기 위한 사병을 혁파하였다.
또 조세수급의 안정을 통하여 국가 재정의 건전성 확보하기 위하여 경자유전의 원칙에 입각한 과전법을 단행하는 등 일소에 혁신하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일방적인 정도전의 정책에 대해 태조는 그의 상소를 수용하는 것을 머뭇거렸고, 점차 반발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1395년 3월에는 다시 판삼사사로 복직했다.
1395년 일부 반발 세력에 의한 국가기밀 누설로 인하여 갈길 바쁜 조선은 명나라와 외교적 분쟁에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신흥국 조선의 일신을 경계하였던 명나라의 황제 주원장은 조선의 정조표전(正朝表箋) 문구에 명나라를 모독하는 글귀가 있다는 걸 문제삼아 태조에게 정도전을 자신에게 넘겨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태조는 정도전은 병에 걸렸다거나 나이가 많다거나 하는 등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명나라의 소환에 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계속해서 그의 소환을 요구하였고, 이를 무마하기 위한 조처로 문하시랑찬성사를 비롯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동북면도선무찰리사로 체직되었다.
한성부의 도시 정비
천도가 확정, 단행될 무렵 그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고, 1394년부터 2년간 그는 한성부의 도시 정리를 추진했다.
1395년(태조 4년)에는 도성축조도감이라는 관청을 설치, 성을 쌓기 위한 기초측량을 하게 했으며,총책임자는 정도전이 되었다. 1396년부터 성곽을 쌓기 시작 1년여 만에 완성했다.
백악산 꼭대기를 기점으로 하여 동쪽으로 한성부 시내를 돌아 백악에 이르는 성곽은 총길이 5만 9천 5백 자, 그 중 토성이 4만 3백여 자, 석성이 1만 9천 2백 자, 높이 40자 2치로 정도전은 이 수치를 정확히 계산, 파악했으며, 공사기간은 여름과 겨울로 농번기를 피해 2기로 나누어 공사를 벌였다. 공사는 2년만에 완공되었다.
생애 후반
이방원과의 갈등
정도전은 자타가 공인하는 해동장량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었다. 그는 자신과 이성계의 관계를 한 고조 유방과 그의 참모 장량에 비유하였는데, 한 고조가 장량을 이용한 게 아니라 거꾸로 장량이 한 고조를 이용했다
는 말을 꼭 덧붙였다. 이 말은 한 고조가 장량을 이용해 한나라를 세운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 고조를 내세워 자신이 원하는 제국을 건설했다는 뜻으로, 자신 또한 태조를 내세워 자신이 원하는 새로운 왕조를 건설한 것이며, 조선 건국의 실질적인 기획자가 곧 자신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주장은 정몽주 등을 제거한 이방원을 비롯한 왕자들의 반발을 초래하게 되었다.
정도전은 임금은 세습되는 직책이라 어리석고 멍청한 임금이 나올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정도전은 어린 세자 방석을 교육시켜 재상이 중심이 되는 왕도 정치의 실현을 꿈꾸었지만, 왕권과 자신의 입지가 약화되는 것을 두려워한 이방원은 후일 사병을 이끌고 내습하여 그를 살해하고 더불어 세자 방석도 살해하였다.
요동 정벌 계획
1392년 건국 직후부터 그는 요동 정벌(1392)을 계획한다. 1396년 요동 정벌의 방안으로 그는 그때까지 각 지역의 왕실측근과개국공신들이 사적으로 보유하던 사병을 모두 혁파하여 국가의 정규군으로 개편하자는 사병 혁파를 단행하였다.
그러자 사병을 중심으로 정변을 세우려고 계획한 이방원은 고려유신 그룹을 규합하여 노골적으로 반감을 품고 역습의 기회를 품게 되었다. 동시에 이방원은 정도전을 제거하기 위하여 명나라로 가는 사신 하륜, 설장수 등을 비롯한, 반감을 품은 인사들을 사주하여 은밀히 정도전이 요동 정벌을 획책하려 한다고 밀고하였다.
1396년(태조 5년) 3월 과거 고시관(科擧考試官)에 임명되어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해 5월 조유인(曹由仁), 이치 등 33인을 선발하였다.
1396년 7월 27일 봉화백에 봉작되었다. 1397년(태조 6년) 3월 상서사 판사(尙瑞司判事)로 공동 상서사판사인 조준과 함께 내관과 궁녀의 작호와 품계를 정하여 올렸다. 1397년 명나라의 사은사가 가지고 온 자문(咨文)에서 명나라는 그를 '조선의 화(禍)의 근원'이라고 지적했다.
동시에 조선 조정에 정도전의 해임과 요동 정벌을 중단하라고 경고했다. 요동 정벌을 목적으로 명나라와 싸우기 위해 왕족들과 여러 호족으로부터 몰수한 사병들을 새로 신설한 의흥삼군부에 병합한 뒤 그가 지은 진도(陳圖)에 따라 대대적인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정도전의 개혁과 명나라와의 전쟁 준비는 같은 개국공신인 조준 등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끝내 결별하게 되고 만다.
요동정벌 계획 실패
그해 4월 요동공벌 계획을 명나라에 누설한 설장수와 권근의 문책을 요구하였으나, 불문율로 부치고 왕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6월 정도전은 확보한 병력으로남은과 함께 양주목장에서 대대적인 진도(陣圖) 훈련을 하면서 이성계에게 출병을 요청하였는데, 이때 조준의 강력한 반대로 실행하지 못했다.
그해 12월, 다시 동북면도선무순찰사가 되어 주군(州郡)의 구획을 확정하고 성보(城堡)를 수리했으며, 비밀리에 사람을 파견하여 평안도, 함경도 일대의 인구 수와 군관(軍官) 수를 점검하고 되돌아왔다.
그해 10월 가례 도감(嘉禮都監) 제조에 임명되었다.
1398년초 그는 왕에게 상무정신을 함양할 것을 건의하고 병법과 진법 훈련을 강화하면서 요동 정벌의 준비를 마무리한다. 바로 그는 태조에게 절제사를 혁파하여 관군(官軍)으로 합치고, 사병을 모두 압수하며, 왕자와 공신들이 나누어 맡고 있던 군사지휘권을 박탈하게 하고, 개인이 거느린 사병 집단을 국가에 귀속시킬 것을 건의하였다.
정변과 최후
1398년(태조 7) 음력 8월 그는 명나라 황제 주원장이 자신의 아들들을 변방으로 보낸 것을 인용하여 이방원은 전라도로, 이방원은 동북면으로 보내야 된다고 건의하여 태조의 승인을 얻었다. 그러나 이방원은 파견을 거부하고 민무구, 민무휼 등과 함께 정도전 암살을 기도하였다.
10월 6일(음력 8월 26일) 정도전은 송현에 있던 남은의 첩의 집에서 남은, 심효생, 이직 등을 만나 술을 마셨다. 그가 남은의 집에서 술을 마신다는 정보를 입수한 이방원은 즉시 소수의 결사대를 이끌고 남은의 첩의 집으로 향한다.
정도전은 신덕왕후 강씨 소생인 이방석을 세자로 세운 일로 인해, 이방원과 대립하게 되었다. 이에 앙심을 품은 이방원은 그가 한씨 소생의 모든 왕자들을 궁으로 불러 들인 후에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을 죽일 계략을 세웠다고 누명을 뒤집어 씌워 살해하였다.
그러나 이방석의 세자 책봉은 정도전이 아니라 태조 이성계가 한 일이고, 정도전이 왕자들을 암살하는 계략을 실제 세운 근거는 없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최후에 이르러 정도전은 자신의 목숨을 구걸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삼봉집》에는 그가 이방원의 칼에 맞기 직전 자신의 삶을 조롱하는 ‘자조(自嘲)’라는 이름의 시를 남겼다.
“ | 操存省察兩加功 / 조존과 성찰 두 곳에 온통 공을 들여서 | ” |
— 정도전, 《자조》 |
정도전의 두 아들 정영과 정유(鄭游)는 아버지를 구하러 달려다가다 살해되고, 얼마 뒤 조카 정담(鄭澹)은 큰아버지와 사촌들의 죽음 소식을 듣고 집에서 자살했다. 맏아들 정진만은 살아남았으나 관직을 삭탈당하고 수군으로 충군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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