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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관소/문화사 &시사

김용민===>>>>> 약력 & 막말논란 ??? & 사견

김용민(金容敏, 1974년 7월 2일 ~ )은 대한민국의 시사평론가다.


 인터넷 라디오 《나는 꼼수다》를 제작하였으며, 2012년 제19대 총선 서울 노원구 갑 지역구에 출마하였다가 낙선한뒤 국민TV를 설립하여 활동중이다.




출생1974년 7월 2일 (39세)
대한민국 대한민국 강원도 춘천시
국적대한민국 대한민국
별칭시사돼지, 목사아들돼지, 돼지아들목사
학력강남대학교 신학과
건국대학교 언론홍보대학원
국민대학교 대학원
경력극동방송 PD
직업시사평론가
종교개신교
배우자정현주
자녀1남 1녀
웹사이트/



생애



1974년 7월 2일 춘천시에서 가곡교회를 담임하던 로교 목사 김태복의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고, 이듬해 11월 아버지가 서울 마장동 홍익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되면서서울특별시 성동구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현재 그의 아버지는 홍익교회 원로목사이며, 동생 김용범은 Mnet PD로 재직 중이다. 대학 재학 중 극동방송에서 리포터로 방송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대학 졸업 직전인 1998년 PD로 취업했다.



정치적으로 한나라당(현재 새누리당) 지지자이었으나 교계가 지나치게 특정 정치 세력과 결탁하는 모습에 반발하여 교회 비리를 파헤치기 시작하였다. 극동방송 입사 후 극동방송이 회장 김장환 목사의 개인 소유인 것처럼 운영되는 것에 반발하여, 자신의 개인 홈페이지를 통해 교회 부조리를 알리기 시작하였다.


2000년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의 아들인 조희준 스포츠투데이를 설립하자, 그는 홈페이지를 통해 교회 성금으로 청소년 유해매체를 만드는 것에 대해 비판하였다. 

순복음교회측에서는 극동방송을 통해 개인 홈페이지를 폐쇄할 것을 요구하였고, 김용민은 이를 거부하고 사건 전말을 공개하였다. 

방송을 그만두라는 김장환 목사의 권고를 받은 후 사직하고이후 기독교TV, 라디오21, 뉴스앤조이에서 근무하다 시사평론가로 전업하였다.



시사평론가로 전업한 이후 시사자키 등의 방송을 진행하면서 기타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에 패널로 출연하였고, 2007년에는 한양대학교 겸임 교수로 임용되었다. 2009년 김어준의 뉴욕타임스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김어준, 정봉주와 친분을 맺게 되어 2011년부터 나는 꼼수다의 PD를 맡게 되었다.


 간간이 정치인과 유명인의 성대모사를 보여주고, 기독교계의 부패를 지적하며 명성을 얻었다. 정봉주가 수감된 이후 정봉주의 강력한 요구로 대한민국 제19대 총선 출마를 선언하고 서울 노원구 갑 지역구에 민주통합당 야권 단일후보로 공천을 받아 출마하였으나, 새누리당 이노근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낙선 이후 나는 꼼수다 PD 활동을 재개하였으며, 대안적인 교회 건설 프로젝트인 '벙커1교회' 프로젝트를 시작하여 설교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2013년 2월에는 서울 노원구 갑 지역위원장 사퇴함과 동시에 민주통합당에서 탈당하였다.


막말 논란


김용민은 2004년 12월 인터넷방송 라디오21 김구라·한이의 플러스의 코너에 출연해 부적절한 발언을 한 것이 뒤늦게 알려져 논란이 일었다. 김용민은 "테러 대책"이라며 "미국에 대해서 테러를 하는 거에요. 유영철을 풀어가지고 부시, 럼스펠드, 라이스는 아예 강간을 해가지고 죽이는 거에요"라고 말했다. 


이외에도 저출산문제에 대한 다른 방송분에서는 “지상파 텔레비전 SBS, MBC, KBS가 밤 12시에 무조건 X영화(성인물)를 두세시간씩 상영을 하는 겁니다”, “피임약을 최음제로 바꿔서 피임약이라고 팔고는 안에는 최음제에요”등의 부적절한 발언으로 구설수에 올랐다.


 새이에 대해 새누리당 2012년 4월 3일 “막말, 성적 저질 발언의 김용민 후보자는 사퇴해야”라는 제목의 논평을 발표했고 김용민은 4월 3일 "성누리당, 드디어 제게 네거티브를 했는데 실패! 네거티브를 하는 이유 여러분들이 다 잘 아실 겁니다. 격차가 1.4%로 급격하게 줄어드니, 노원에서 부는 정권교체 바람이 무섭죠? "쫄리면 죽으시던가~" 라며 정당성을 주장했다.



 그러다 다음날인 4일 김용민은 자신의 블로그에 “지금 이 순간부터 지난 과거를 반성하면서 모두 짊어지고, 갚으며 살아가겠다"며 사과문과 동영상을 올렸다.



그러나 이후에도 과거 방송의 성차별,성희롱 발언이 계속 공개되며 논란은 가라앉지 않았고 민주당의 이해찬은 김용민 후보 논란에 대해 "이 일은 당의 도덕적 품위 문제"라며 "김용민 후보가 사과하는 수준갖고 안된다면 빠르게 사퇴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문재인 한명숙에게 김용민을 끌어안고 갈 것을 당부했고 김용민 역시 "유권자들에게 심판을 받겠다"며 사퇴를 거부했다. 

결국 이노근 후보에 4,782표(5.86%)차로 낙선하였다. 총선 이후 민주당이 접전지역에서 패배한 것은 김용민의 막말 파문 탓이라는 분석이 나왔다.이에 대해 김용민과 김용민을 공천한 한명숙 등 민주당 지도부에 대해 비난 여론이 일었다. 







#김용민 “불법정권…애비나 딸이나”…누리꾼 ‘와글와글’











#사견

김용민 막말은 아직 초보수준이다
직설적이고, 감정적 이다
문학적 풍자가 부족하다
사회적 영향력 & 인지도가  많이  부족하다



막말 불멸의 고전 을 소개 한다

,
 영향력 ,지속력 ,인지도 , 풍자., 반전 ,,,,,,,,,
 역사상 최고의 막말이다




  전재산 29만원’ 전두환


  전재산 29만원’ 전두환, 골프치고 ‘130만원짜리 양주 파티’



 







#

문장도 수려하고 ,힘이 있다

상대방에 따른 문장조절능력








1985년 전두환 대통령은 북한에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했고, 북한 역시 같은해 9월 허담 비밀특사를 서울에 특파해 전두환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논의를 타진했다.전두환은 허담 밀사와 만난 자리에서 김일성의 말을 전해듣고 다음과 같이 답했다.


김일성 주석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경청해보니 내용 하나 하나가 내 생각

과 거의 동일합니다.


김 주석께서는 공개적으로 말씀이 계셨지만 40년 전에는 민족해방 투쟁

으로, 그리고 평생을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애써오신 충정이 넘치는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 남북한 최고책임자들의 회담이 이와 같은 분위기라고 할 것 같으면 시기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하는 것도 나의 의견입니다.







# 장기 집권시도 호헌조치 




본인은 얼마 남지 않은 촉박한 임기와 현재의 국가적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중대한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습니다.

 이제 본인은 임기 중 개헌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현행 헌법에 따라 내년 2월 25일 본인의 임기 만료와 더불어 후임자에게 정부를 이양할 것을 천명하는 바입니다.

이와 함께 본인은 평화적인 정부 이양과 서울올림픽이라는 양대 국가 대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서 국론을 분열시키고 국력을 낭비하는 소모적인 개헌 논의를 지양할 것을 선언합니다.

본인의 이 결단은 오늘의 망국을 타계하고 국가 목표를 수행하는 데 현실적으로 최선의 길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서 국민 여러분께서 전폭적인 도움과 신뢰를 보내주실 것을 간곡히 당부하고자 합니다.


2가지의 국가 대사를 완성한 후에 충분한 시간을 두고 개헌 문제를 다시 생각한다면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한 좋은 방안이 발견될 수 있을 것으로 본인은 확신하는 바입니다.


이제 우리의 정치도 나라와 사회 성장발전에 부응하는 선진 정치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신념에서 본인은 남은 기간 동안 민주발전의 기반을 더욱 넓히고 사회 안정과 국민 화합을 다지기 위한 조치들을 더욱 과감하게 추진해 나가고자 합니다. 


그러한의 노력하나로 본인은 국민의 정치 참여를 확대하기 위한 지방자치제를 강제적으로 실시해 나갈 계획입니다.  


이 문제가 조속히 매듭지어져서 본인의 임기 내에 지방 자치가 시작된다면 민주 발전을 위한 또 하나의 튼튼한 토대가 마련되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본인이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제는 우리의 정치도 시대의 변천과 사회의 발전에 따라 꾸준한 신진대사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낡은 시대의 낡은 사고방식에 젖어 있는 인물에게 발전하는 나라의 장래를 의탁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전환기의 정치를 이끌어나갈 참신하고 유능한 정치 신진들을 광범위하게 포용하고 육성하는 정당의 노력은 매우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 전두환, 1987년 4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