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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관소/문화사 &시사

[시진핑] 중국시진핑 주석 .,,약력 & 주요 인맥 & 한중fta시대 ,


시진핑習近平

 (1953년 6월 1일~ )
Xi jinping Brazil 2013.png
중화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의 제7대 주석
임기2013년 3월 14일 ~
부주석리위안차오
총리리커창
전임: 후진타오(제8대)

임기2012년 11월 15일 ~
전임: 후진타오(제8대)

임기2012년 11월 15일 ~
전임: 후진타오(제7대)

임기2008년 3월 15일 ~ 2013년 3월 14일
주석후진타오
전임: 쩡칭훙(제8대)
후임: 리위안차오(제10대)

출생일1953년 6월 1일 (61세)
출생지중화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 시
정당중국공산당
학력칭화 대학교 공학원, 인문사회학원 법학 박사
배우자펑리위안(彭麗媛)
서명Xi Jinping sign.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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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이며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석이다.


제17기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중국공산당 중앙서기처 제1서기, 중국공산당 중앙 군사위원회 부주석, 중국공산당 중앙당 학교 교장으로 2007년 17기 1중 전회에서 권력서열 6위로 올랐으며, 2008년 3월 부터중화인민공화국의 부주석이 되었다. 2012년 11월 후진타오로부터 중앙위원회 총서기직을 물려받았다. 2013년 3월 14일, 임기 10년의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석에 선출되었다.




[약력]








초기 활동






시진핑은 1953년 6월 1일 베이징에서 태어났으며, 산시성에서 자랐다. 확고한 개혁개방론자였던 그의 아버지시중쉰(習仲勳)은 국무원 부총리를 역임하였으며 1962년에는 산시 성으로 좌천되었다. 





시진핑은 문화대혁명 시기 고초를 겪는 부친을 따라 농촌 지방을 돌아다니며 자랐다. 공산당 입당에 10번 실패한태자당 계열이다.





1978년 11기 3중 전회에서 시중쉰은 광둥성 제2서기로 복권되었고 그뒤 광둥성 서기가 되었으며 덩샤오핑 후야오방의 사상해방과 경제건설 실시에 큰 역할을 하였다. 




시진핑은 1979년 칭화 대학 공정화학과를 졸업하였고 학부 졸업 후, 국무원 껑뱌오 부총리의 비서로 정치 생활을 시작하였다. 뒷날 같은 대학에서 ‘중국 농촌의 시장화 연구'라는 논문으로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관료 생활




허베이 성정딩 현당위원회 서기, 푸젠 성 샤먼 시 부시장, 푸저우 시 당위원회 서기 등 푸젠 성에서의 공직 생활을 거쳐, 2000년에 푸젠 성 당위원회 서기, 2002년부터 2007년까지 저장성 당위원회 서기, 2007년 상하이시 당위원회 서기를 지냈다. 


특히 푸젠 성 당위원회 서기, 저장성 당위원회 서기 재직시 경제발전에 공을 많이 세우면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였다.




정치 활동





2007년 당 정치국 상무위원, 2008년 국가 부주석이 되었다. 현재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위원 겸 정치국 상무위원이며 공산당 중앙 서기처 서기, 중국 국가주석, 중앙 당교 교장이다.




부인은 중국의 국민가수로 통하는 펑리위안(彭麗媛)이다. 당 원로이자 개혁개방의 설계자였던 아버지 덕분에 보수와 진보의 지지를 모두 받았던 시진핑은 2013년 국가주석이 되었다.

 2010년 10월 18일 제 17기 5 중전회에서 중국공산당 중앙 군사위원회 부주석에 선출되었다. 이 지위를 손에 넣은 것으로 후진타오 주석의 후계자로 사실상 확정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2년 11월 15일 중국공산당 제18기 1 중전회에서 중국공산당 총서기에 선출됐다. 




그리고 2013년 3월 14일 12차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국가주석과 국가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되어 명실상부한 최고지도자가 되었으며 자신의 취임연설과 다름없는 전인대 폐막연설을 통해 중국의 꿈을 강조하며 중화민족의 부흥을 역설하였다.







[시진핑 시대]







(1)시진핑은 누구인가


혁명 원로의 아들로 지방서 25년 근무… 날카로운 공산주의 이론가

중국인 13억여명 가운데 최고의 1인 자리에 오르는 시진핑(習近平·59)은 파란만장한 인생 스토리를 지닌 정치인이다. 혁명 원로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질곡의 청년 시절을 보냈고 지방에서 25년을 근무했다. 온화한 미소 속에는 덕을 중시하는 인품이 담겨 있지만 10번이나 거절당했지만 끝내 공산당에 입당한 것에서 보듯 강한 집념의 소유자이며, 날카로운 공산주의 이론가란 평가도 따라붙는다.



시진핑은 1953년 6월 시중쉰(習仲勳·1913~2002) 전 부총리의 두 번째 부인 아들로 태어났다. 시중쉰은 당의 혁명 원로이자 광둥(廣東)성의 개혁·개방을 이끈 인물이다. 마오쩌둥(毛澤東)에 의해 숙청당했고 당에서 축출당한 개혁파 지도자 후야오방(胡耀邦) 전 총서기를 지지했다는 점에서 그의 성향을 짐작할 수 있다.


5살 때인 1958년 아버지, 형과 함께한 시진핑(가운데).


지방 전전 질곡의 청년기 보내
1979년 대학 졸업 후 정계진출
저장성 서기 시절 괄목할 업적
행동 중시하고 현장 시찰 즐겨


시진핑은 부친이 근무하는 중난하이에 자주 놀러갔고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를 수수(叔叔·아저씨)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태자당 계열로 분류되는 쩡칭훙(曾慶紅) 전 부주석, 위정성(兪正聲) 상하이시 서기 등과 어릴 적부터 교류했다.


시진핑의 고난은 1962년 부친이 권력투쟁에 밀려 실각하고 1966년 문화대혁명의 광풍까지 몰아치면서 시작됐다.

1969년 지식청년으로 분류돼 산시(陝西)성 옌안(延安)시 량자허(梁家河)촌으로 하방됐으며 처음에는 불과 3개월을 못 버티고 탈출했다. 체격은 우람했지만 농사짓는 솜씨는 시골 아주머니에 미치지 못했다. 백부와 백모의 설득으로 다시 량자허로 돌아갔는데, 이때부터 시진핑은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공산당 입당에 성공했고 1974년에는 량자허의 촌장이 됐다. 


시 부주석은 2003년 자신이 쓴 회고문에서 “처음에는 의지할 사람도 없어 무척 외로웠지만 생활에 적응해 가면서 내 숙소는 마을회관처럼 변해갔다. 노인들과 젊은이들이 찾아오면 내가 알고 있는 동서고금의 여러 문제에 대해 상담을 해 드렸고 당지부 서기도 무슨 일이 생기면 나를 찾기 시작했다”고 적었다. 

1975년 칭화대에 입학할 수 있는 2명이 옌안에 할당됐고 시진핑에게 한 자리가 돌아가면서 그는 7년간에 걸친 하방생활을 접고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문화대혁명의 혼란 속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 정규과정을 거치지 못한 그에게 비로소 학업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었다. 당시 부친의 연금생활도 13년 만에 끝나 부활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1980년대 초 아버지 시중쉰과 함께한 시진핑(오른쪽).




1979년 여름 칭화대를 졸업한 시진핑은 중앙군사위원회 판공청에 배치돼 당시 겅뱌오(耿彪) 부총리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했다. 주위의 부러움을 뒤로한 채 그는 지방으로 내려가기로 결심하고 1982년 3월 베이징에서 300㎞ 떨어진 허베이(河北)성 정딩(正定)현의 당위원회 부서기로 부임했다. 현의 3인자에 해당하는 자리였다. 최고 간부가 되려면 지방정부 간부의 길을 걷는 것이 좋다는 부친의 조언에 따른 것이었지만 보수파 겅뱌오가 실각하기 전에 아들을 빼내야 한다는 부친의 정치적 판단이 작용했다.

유명 가수 출신의 부인 펑리위안.

시진핑은 1985년 푸젠(福建)성 샤먼(厦門)시 부시장으로 옮겼으며 이후 17년간 푸젠성에서 일하면서 당서기까지 지냈다. 푸젠성에서의 시간은 그가 정치적 기술을 연마한 시기다. 


샤먼시 부시장 재직 시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 못한 시진핑은 자신의 뒤를 봐주던 샹난(項南) 푸젠성 서기가 실각하면서 1988년 5월 푸젠성 닝더(寧德)지구 서기에 임명됐다. 


닝더는 푸젠성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이었고 그로서는 정치적 좌절이기도 했다. 당시 푸젠성의 한 관리는 홍콩 언론에 “당시 시진핑에게 태자당의 인맥을 활용해 도시를 업그레이드하라고 권유했지만 그는 거절했다”며 “대신 시진핑은 푸른 산과 강을 인민들에게 돌려주자는 환경운동을 전개했다”고 말했다. 



시 부유층, 권력층이 조성한 큰 묘지들이 시진핑의 눈에는 거슬렸다고 한다. 지도자들이 승진하기 위해 눈에 보이는 업적만 생각하던 시기에 환경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한 경우는 드물었다. 1990년대 그의 밑에서 일했던 한 관리는 “표면적으로 시진핑은 안전을 추구하는 평범한 지도자처럼 보일 수 있으나 실상은 매우 야심찬 정치인이었다”고 평가했다. 한때 푸른색 군복과 낡은 옷으로 검소함을 드러내던 시진핑은 푸젠성 푸저우(福州)시 서기로 일하면서 양복을 입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만 등 해외 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외부 인사들을 많이 만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시진핑은 2002년 푸젠성 성장에서 저장(浙江)성으로 자리를 옮겨 2007년 초까지 재직했다. 당시 31개 중국 성·직할시·자치구 당서기 가운데 최연소급이었다. 그는 골수 현장주의자여서 저장성 서기 시절 동안 1년의 3분의 1을 출장으로 보냈다. 


2006년 8월에는 하루에 315명으로부터 진정을 받은 일도 있다. 저장성 서기 재임 당시 성의 국내총생산(GDP·1조5600억위안)이 상하이시(1조300억위안)를 능가하는 성취를 일궈냈다. 미국 브루킹스연구소의 중국 전문가 리청 연구원은 “민간 기업을 발전시키는 데 시진핑이 인상적인 업적을 보여줬으며 이는 그가 개방적인 지도자임을 증명한다”고 평가했다.



시진핑(오른쪽)이 저장성 서기 시절인 2003년 4월 위허진의 가물치 단지를 시찰하고 있다. 시진핑은 말보다는 행동을 중시하고 농촌이나 공장 등

 현장시찰을 즐겨 했다.


시진핑은 2007년 3월 돌연 상하이시 서기로 옮겼는데, 부패로 낙마한 천량위(陳良宇)의 뒤를 잇기 위해서였다. 천량위는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이 후진타오(胡錦濤)의 후계자로 고려한 인물이다. 상하이방의 본거지에 그가 입성한 것은 장쩌민이 포스트 후진타오로 시진핑을 지목한 것을 의미했다. 


시진핑은 말보다는 행동을 중시하고, 농촌이나 공장 등 현장 시찰을 즐겨했지만 상하이에서는 신중에 신중을 거듭했다. 일부 상하이 유력 인사들이 “그의 언동에는 생기가 없고, 특징도 없고, 강직함도 없었지만 실수도 없었다”고 혹평한 것도 이 같은 처신 때문이다. 상하이에 부임한 그를 위해 부하 관리들은 영국식 호화주택을 사택으로 준비했으나 시진핑은 “당 원로들의 요양원으로 쓰라”며 곧바로 떠나버렸다.


 혹자는 자신에게 쳐진 덫임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시진핑은 또 미국의 건축회사인 젠슬러가 상하이의 랜드마크 건물을 지으려는 계획을 승인하지 않았다. 이는 상하이의 아이콘이 될 건물이라면 중국 기업이 지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그는 또 전임 천량위 서기가 중앙정부와의 불화로 낙마했다는 점을 깊이 인식해 “상하이는 중앙정부의 정책에 보조를 맞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시 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상하이에서 나온 새로운 물결소리를 환영한다”는 제목의 사설을 실어 평가했다. 


상하이시 서기로 7개월 재직한 그는 마침내 2007년 10월 17차 당 대회에서 후진타오 주석이 미는 리커창(李克强)을 밀어내고 차기 지도자를 예약하기에 이른다. 그의 인생 역정에서 보듯 시진핑이 어느 날 갑자기 벼락출세한 정치인은 아니다. 

1997년 10월에 열린 15차 당 대회에서 장쩌민이 포함된 최고 간부들 사이에서 후진타오 후임을 논의하면서 시진핑은 리커창과 함께 후보로 일찌감치 떠올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7년 10월 상무위원이 된 시진핑.




시진핑이 중국의 지도자로 등극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모든 정파가 받아들일 수 있는 인물이기 때문임은 부인하기 힘들다. 그러나 치열한 권력투쟁 속에서 시진핑은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면서 입지를 굳혀 갔다. 정융녠(鄭永年) 싱가포르국립대 동아시아연구소장은 “시진핑의 위상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계기로 더욱 강화됐다”고 말한다. 


이는 중앙에서 그가 자신의 지도력을 발휘한 첫 케이스로 꼽힌다. 올림픽 준비는 외교뿐 아니라 국내 안보, 병참, 운송, 미디어 관리, 환경보호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친 작업이고 인민해방군, 경찰, 당, 정부, 지방관료들 사이에서 조정 역할을 해야 하는 만만치 않은 과제였다. 올림픽을 기회로 삼아 티베트의 분리주의 운동이 격화됐고 신장의 이슬람 분리주의자들도 동태가 심상치 않은 상황이었다.




2) 아킬레스건이 될 ‘가족 문제’


4억달러 가산 ‘부정축재’ 의혹… 국민가수인 부인도 ‘족쇄’로

시진핑(習近平·59) 중국 국가부주석의 형제들도 시 부주석처럼 부친의 실각과 문화대혁명 등으로 고난을 많이 겪었다. 하지만 시 부주석이 지도자 자리를 예약한 후 각종 이권 개입과 특혜로 재산을 불려 왔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가족 문제는 앞으로 10년간 중국을 이끌 시 부주석의 발목을 잡을 수 있는 요인이다.

 부인 펑리위안(彭麗媛·50)은 중국의 국보급 가수로 스타급 퍼스트레이디의 등장이 기대되지만 보수적인 중국의 정치풍토상 시 부주석에게 부담이 될 수도 있다. 중국 선전당국은 펑리위안의 이미지를 어떻게 형성해 갈지 딜레마에 빠져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시진핑 부주석 직계 가족. 시 부주석과 부인 펑리위안, 어머니 치신, 딸 시밍쩌, 아버지 시중쉰(왼쪽 위에서 시계방향으로).




시 부주석의 부친 시중쉰(習仲勳) 전 부총리는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 1남2녀를 뒀다. 시 부주석의 이복형 시정닝(習正寧)은 하이난(海南)성 사법청장을 역임했으며, 1997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떴다. 큰누나 시허핑(習和平)은 30세가 되기 전 요절했으며, 시 부주석은 누나의 죽음에 누구보다도 마음 아파했다고 한다. 또 다른 이복누나 시첸핑(習乾平)은 생존해 있다.

시중쉰의 두 번째 부인이자 시 부주석의 모친인 치신(齊心)은 공산당과 팔로군 여전사 출신의 지식인이었다. 시 부주석의 친누나 두 명의 이름은 각각 치차오차오(齊橋橋), 치안안(齊安安)이다. 이는 문화대혁명 당시 탄압을 피하기 위해 어머니 성으로 바꿨기 때문이다.

 

지난 6월 블룸버그통신은 시 부주석 일가의 자산 총액이 4억달러(약 4600억원)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자산은 대부분 치차오차오(齊橋橋)와 그의 남편 덩자구이(鄧家貴)가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치차오차오가 전략 물자인 희토류 업체의 지분을 18% 보유하고 있다는 파이낸셜타임스 보도도 있었다. 

치안안은 중국외교학원을 졸업했으며, 캐나다에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의 남편 우룽(吳龍)은 뉴포스트콤이라는 회사의 대표로 있으면서 2007년 이후 국영기업이 발주한 이동통신 관련 용역 및 자재 납품을 다수 수주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시 부주석의 2살 아래 남동생인 시위안핑(習遠平)은 시 부주석처럼 문화대혁명 등으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시 부주석도 그가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시위안핑은 인민해방군에 복무했으며 무역회사, 정부기관에도 근무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외국의 일부 전기 작가들은 그가 형의 권세에 기대 이권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폭로전문 웹사이트 위키리크스가 밝힌 미국 외교전문에 따르면 시위안핑은 1997년 홍콩 주권이 중국으로 반환되기 전 홍콩으로 이주했다.

중국 공산당이 공표한 이력에는 시 부주석의 초혼 사항이 기재돼 있지 않으나 첫 부인은 주영 중국대사를 역임한 외교관 커화(柯華)의 딸이다. 결혼 3년 만에 이혼했으며 부인이 시 부주석의 지방 생활을 힘들어 한 것이 헤어진 이유로 알려져 있다. 


시 부주석이 펑리위안을 만난 것은 1986년 푸젠성 샤먼시 부시장 시절이다

시 부주석이 베이징으로 올라와 만났다는 설과 샤먼에 있는 펑리위안의 친구 집에서 만났다는 설이 엇갈린다. 당시 펑리위안은 스타급 가수였고 시 부주석은 첫 만남에서 “성악 창법에는 어떤 종류가 있느냐”며 펑리위안의 전공에 깊은 관심을 보여 마음을 사로잡았다. 

두 사람은 1987년 9월 결혼했지만 위기도 있었다고 한다. 둘이 워낙 바빠 떨어져 있을 때가 더 많았고 춘제(春節·중국 설날) 때도 함께 시간을 보내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1993년 태어난 딸 시밍쩌(習明澤)가 있으며, 현재 하버드대에 유학 중이다. 시 부주석은 푸젠성에서 일할 때 방송 진행자와 밀접한 관계라는 소문도 돌았다. 



펑리위안은 1962년 산둥성에서 3남매의 장녀로 태어났다

부친은 현의 문화관장을 지냈고 모친은 극단 단원이었다. 지난해 중국 잡지 환구인물은 펑리위안 특집 기사에서 “그가 어린 시절 극단 마차를 타고 사방을 떠돌아다니며 먹다 굶다 하는 등 힘겨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전했다. 문화대혁명이 끝난 1977년 학생 모집을 재개한 산둥성의 5·7예술학교에 합격해 예술가의 길을 걷게 됐으며, 중국음악학원에서 유명한 민속 성악가의 지도를 받았다. 1982년 CCTV 춘제 경축 공연에 출연하면서 국민적 스타로 떠올랐다. 


2002년 군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소장 계급을 부여받았으며, 남편이 사실상 차기 지도자로 내정된 2007년부터는 공익활동에 치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2009년 부친을 잃었으며, 모친은 베이징에 사는 것으로 알려졌다. 펑리위안이 서방 스타일의 첫 퍼스트레이디로 개방적이며 현대화된 중국을 상징하는 역할을 할 수도 있지만 자칫 그의 존재에 시 부주석이 가리는 역효과를 중국 당국이 우려한다는 분석도 있다.




(3) 시진핑을 만든 사람들


쩡칭훙, 후진타오 설득 등 킹메이커 역할… 막후 실세로 떠올라

시진핑(習近平·59)을 최고 권좌에 올려 놓은 킹메이커로는 쩡칭훙(曾慶紅·73) 전 국가부주석이 꼽힌다

태자당의 다거(大哥·큰형)로 불리는 그는 시진핑 시대의 막후 실세다. 상하이방을 대표하는 장쩌민(江澤民·86) 전 국가주석도 시진핑을 지지했다는 점에서 시진핑 체제의 출범은 결국 태자당과 상하이방의 연합이자 장쩌민과 쩡칭훙의 합작품으로 볼 수 있다.


뒤에서 밀고 중국 차기 지도자인 시진핑 국가부주석(뒷줄 왼쪽)과 그의 킹메이커로 꼽히는 쩡칭훙 전 부주석(뒷줄 오른쪽)이 지난 8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공산당 18차 전국대표대회 도중 자리에 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는 후진타오 국가주석(앞줄 왼쪽)과 장쩌민 전 국가주석(앞줄 오른쪽) 뒤를 지나가고 있다. 베이징 | AP연합뉴스




▲ 각 정파와 두루 소통 능력
석유방 지지도 이끌어내
장쩌민의 신임도 한몫


2007년 10월 17차 당 대회를 앞두고 쩡칭훙은 자신의 2선 퇴진을 조건으로 시진핑을 차기 지도자로 옹립하는 데 성공했다. 공산주의청년단 출신으로 후진타오(胡錦濤·70) 국가주석이 밀던 리커창(李克强·57) 부총리에게 유리하게 흐르던 판세를 뒤집은 것이다. 

당시 쩡칭훙은 “어느 파벌에서도 거부할 수 없는 인물이 시진핑”이라며 당 원로와 후 주석 등을 설득했다. 시진핑과 14살 차이가 나는 쩡칭훙은 공산당 혁명 1세대 원로인 쩡산(曾山) 전 내정부장을 부친으로 둔 태자당 출신이다. 어릴 적부터 시진핑 집안과 친밀히 교류했으며, 시진핑은 지방 근무 시절에도 기회가 되면 쩡칭훙 부부를 찾아 안부를 전했다.

쩡칭훙은 1999년부터 3년간 당 조직부장을 맡은 경험이 있어 조직과 인사에도 정통하다. 2000년대 들어 중국 권부에 등장하기 시작한 석유방(석유부 또는 석유학원 출신 인맥)의 대표로, 저우융캉(周永康·70) 정법위 서기와 장가오리(張高麗·66) 톈진시 서기 등 석유방 출신들이 시진핑의 우군이 될 수 있도록 다리를 놨다. 지난 3월 보시라이(薄熙來) 실각 이후 당내 권력투쟁이 격해지면서 시진핑 체제가 흔들릴 위험에 처하자 정국 혼란을 막후에서 수습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쩡칭훙은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 당시 상하이에서 장쩌민과 함께 일하고 있었으며, 장쩌민이 상하이시 서기에서 당 총서기에 오르면서 베이징으로 데려왔다. 중앙에 기반이 없던 장쩌민을 당·군부 인사들과 연결시켜 주면서 권력기반을 안정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장쩌민이 총서기에서 물러난 뒤 중앙군사위 주석직을 2년 동안 후진타오 주석에게 넘기지 않자 이를 비판하면서 한때 갈등관계에 놓인 적도 있다. 


막후에서 정국을 움직이던 쩡칭훙은 지난 9월22일 베이징 국가대극원에서 열린 뮤지컬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장쩌민과 함께 관람하는 모습이 공개되면서 존재감을 부각시켰다. 지난 8일 열린 18차 당 대회 개막식에는 당 원로의 자격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베이징 소식통은 “장쩌민이 고령인 데다 건강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에 상하이방의 구심력이 약화되면 쩡칭훙이 시진핑 시대의 최대 막후 실세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홍콩 언론들은 그를 두고 줄을 가장 잘 서는 명석한 인물로 평가한다. 판세를 읽어 될 사람을 밀어주고 각 정파와 두루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시진핑은 2009년 10월 중순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국제도서전 개막식을 주관하기 위해 독일을 방문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만난 시진핑은 장쩌민의 영문판 저작을 선물했다. 신화통신은 당시 “시진핑이 에너지와 정보기술 문제에 대해 장쩌민이 쓴 저서의 영문판 두 권을 전달했다”며 “장쩌민의 안부와 축복을 전했다”고 보도했다. 당내에서는 시진핑이 장쩌민이 신임하는 인물이고 남다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언론인 출신의 중국 전문가 샹장위는 장쩌민이 시진핑을 택한 이유로 “중국이라는 거대한 배를 신중하게 운영하면서 옛 소련에서 고르바초프가 시작한 페레스트로이카와 같은 위험한 일을 벌여 배를 좌초시키고 모두를 끝장내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장쩌민으로서는 자신의 은퇴 후 저물어가던 상하이방 세력을 시진핑을 통해 다시 부활시킬 수 있는 계기도 마련했다.

시진핑을 도운 인물로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 자칭린(賈慶林·72) 정협 주석이다. 그는 1990~1996년 푸젠성 성장과 서기를 지내 오랫동안 시진핑의 상사였다. 


허궈창(賀國江·69) 중앙기율위 서기도 시진핑보다 한 발 앞서 푸젠성 성장을 역임한 푸젠파의 일원이다. 현재 상무위원 9명 중 3명이 푸젠 지역에서 함께 근무한 인연으로 묶여 있는 셈이다. 시진핑 주변에는 태자당과 상하이방, 푸젠방, 석유방, 칭화대 동문 등 각종 인맥이 거미줄처럼 포진해 있다.

후 주석이 시진핑 체제 출범을 사활을 걸고 막았다면 시진핑으로서는 큰 어려움을 겪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후 주석으로서는 시진핑이 최선은 아니었더라도 차선은 됐다는 얘기가 나온다. 이는 시진핑의 부친 시중쉰(習仲勳) 전 부총리와 무관치 않다. 1980년대 중반 후 주석의 스승으로 불리는 개혁파 후야오방(胡耀邦) 전 총서기는 덩샤오핑(鄧小平)의 퇴진을 요구해 원로들로부터 거센 반발을 샀다. 하지만 원로 가운데 후야오방을 지지한 사람이 바로 시중쉰이었다는 것이다.




(4) 시진핑·리커창 체제


“리커창, 시진핑에 앞서지 않을 것이며 뒤처지지도 않을 것”

시진핑(習近平·59) 중국 부주석과 리커창(李克强·57) 부총리는 향후 10년간 중국을 이끌 5세대 지도부의 핵심 2인이다

시 부주석은 오는 15일 당 총서기로 선출되는 데 이어 내년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국가주석에 오른다. 리커창 부총리는 15일 상무위원에 재선되고 내년 3월 국무원 총리로 정식 선출될 예정이다. 중국의 총리는 내각의 정책 집행과 인사권을 쥐고 있으며 사실상 국가원수급이다.



문제는 시진핑과 리커창이 정치적 기반은 물론 성장 배경과 가치관 등에서 차이가 있어 순항할지 미지수란 점이다. 시진핑과 리커창은 각각 당내 태자당(당·정·군 혁명 원로 자제 그룹)과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그룹을 대표하고 있다. 서로 다른 계파의 주석과 총리 조합이 탄생하는 것은 이례적이며 전임 주석이나 총리들과 비교해 시진핑과 리커창 체제의 차별성은 두드러진다.



중국 차기 최고지도자인 시진핑 국가부주석(왼쪽)과 차기 총리 내정자인 리커창 부총리가 지난 8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18차 전국대표대회(당대회) 개막회의를 마치고 걸어나가고 있다. 베이징 | AP연합뉴스



▲ 다른 계파 주석·총리 조합
리커창, 개혁 성향 더 짙어
손발 잘 맞춰갈지 미지수


지난 10년간 후진타오(胡錦濤·70) 주석과 원자바오(溫家寶·70) 총리는 갈등의 요소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 총리가 특정 계파에 속하지 않은 무계파인 데다 태자당보다는 공청단 계열에 가까운 성향을 보여왔기 때문이다. 1998년 총리에 오른 주룽지(朱鎔基·84) 전 총리의 경우 개성이 강하긴 했지만 당시 장쩌민(江澤民·86) 주석과 같은 상하이방 출신이어서 호흡에 별 문제가 없었으며 줄곧 성장지향적인 개방·개혁정책을 폈다.

시진핑과 리커창은 성장 배경부터 확연히 다르다. 시진핑의 부친이 시중쉰(習仲勳) 전 부총리란 점은 널리 알려져 있다. 반면 리커창의 부친 리펑싼(李奉三)은 지방정부의 중간급 간부로 안후이성 펑양현 현장, 안후이성 원롄(文聯·문학예술계연합회) 등에서 일했다. 

성격은 시진핑이 덕장형이라면 리커창은 재사(才士)형으로 알려져 있다. 리커창은 대학졸업 후 베이징대학 당위원회 고위 간부의 권유로 유학을 포기하고 베이징대 공청단위원회 서기를 맡으면서 정치의 길로 접어들었다. 공청단 활동 경력만 15년이 넘는 반면 시진핑은 일찌감치 지방행을 택해 지방에서 잔뼈가 굵었다.



리커창의 대학 친구 중에는 후일 민주화운동에 투신한 인사들이 있다. 이 때문에 해외에서 망명활동을 하는 인사들은 리커창의 개혁 성향에 기대감을 표시하면서 시진핑보다 적극적으로 정치개혁을 주장할 것으로 전망하기도 한다. 베이징대 재학시절 리커창과 영국의 법률서를 함께 번역했던 양바이쿠이는 지난 10일 워싱턴포스트에 “민주주의까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그가 입헌제와 법치를 신봉한다는 점은 확신할 수 있다”고 말했다. 


로이터통신도 리커창이 대학재학 시 활발한 학생운동을 했다며 개혁적 성향을 보일 것으로 예상했다. 시진핑은 경제적으로는 개혁·개방파에 속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일당 지배체제를 흔들 것을 암시하는 발언을 한 적이 없다. 이 때문에 리커창이 정치개혁에 과감한 목소리를 낸다면 충돌이 빚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리커창이 당의 입장에서 벗어나 급진적 개혁을 추진할지는 미지수다. 전직 관료 옌화이는 “시진핑이 얼마나 나갈 것인지가 리커창이 얼마나 나갈 것인지를 결정할 것”이라면서 “리커창은 시진핑 앞에 가지 않을 것이며 그의 뒤에서 지체되지도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중국 주간지 편집장 출신의 리다퉁도 “리커창은 시스템에 묶일 것이며 권한 또한 제한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경제에 대한 생각 역시 차이가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리커창은 임대주택과 식품안전, 공공의료, 기후변화, 청정재생 에너지 분야에 관심이 많다. 지난 30년간의 개혁·개방 후유증을 치료해야 하며 중국 경제의 체질을 뜯어고쳐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다. 반면 시진핑은 상하이와 저장성 등 부유한 동부 연안에서 주로 근무해 성장을 중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민간 기업의 자율성을 인정하는 편이다.







(5) 군부와의 관계


“덩샤오핑 이후 군 인맥 가장 탄탄”…미·일선 강경외교 우려

2002년 10월 중국 공산당 총서기에 취임한 후진타오(胡錦濤·70) 주석은 군부 장악에 줄곧 어려움을 겪었다. 두 가지 사건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올해 초 후 주석과 군 지도부가 참석한 연회장에서 인민해방군의 고위 장성이 만취해 군 인사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건배 제의를 하던 총참모부장을 밀쳐내는 등 소란을 피우자 후 주석은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베이징 소식통은 “후 주석 면전에서 장성들이 재떨이를 던지며 싸운 적도 있다”고 전했다. 


지난해 1월11일 로버트 게이츠 당시 미국 국방장관은 베이징에서 후 주석을 만나 중국의 스텔스 전투기 젠-20 시험 비행이 자신의 방중에 맞춘 것이냐고 물었다. 당시 미국 관리들은 후 주석이 시험 비행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고 전했다. 인민해방군 통수권자인 후 주석에게 시험 비행이 보고되지 않았다는 의미로 해석됐다.

차기 지도자인 시진핑(習近平·59) 부주석은 군부와의 관계가 후 주석과 다를 것이란 전망이 많다. 후 주석과 장쩌민(江澤民·86) 전 주석보다 군부와 더 깊은 관계를 맺을 것이란 분석이 많이 나오고 있다


중국에서 군부 장악은 권력 기반을 다지는 데 필수적이다. 당 총서기와 국가주석직에 올라도 군부를 틀어쥐지 못하면 불안할 수밖에 없다. 과거 반식민지로 전락한 역사적 경험, 14개국과 인접한 광대한 영토, 혼란기에는 군의 힘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중국 정치의 현실 때문이다. 따라서 군부와의 돈독한 관계는 시진핑으로서는 든든한 정치적 자산인 셈이다.






▲ 청년시절부터 군과 친밀
“4총부 수장 절반이 측근”
군과 유착 땐 개혁 난망


시진핑이 군부에 강한 이유는 정치적 배경과 본인의 노력 때문이다.

 그는 칭화대 졸업 뒤인 1979년 중앙군사위 겅뱌오(耿飇) 비서장의 비서로 들어가 3년간 군을 경험했다. 푸젠(福建)성과 저장(浙江)성 등 지방에서 근무할 때는 군의 정치위원을 겸임하면서 군부와 가깝게 지냈다. 부임하면 가장 먼저 군대를 찾았으며 병사들과 야영을 함께하기도 했다. 


중국의 현직 지도자 가운데 시진핑 같은 군 경력을 가진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부친 시중쉰(習仲勳) 전 부총리는 정치인이기도 했지만 서북 지역 혁명을 이끈 군사지도자 출신이었다. 더구나 중국은 군 고위급 지휘관의 60%가량이 태자당과 상하이방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문화대혁명 당시 일자리가 없어지자 고위 간부 자녀들이 줄줄이 군에 입대했고 이들이 진급을 거듭해 군부 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뉴욕타임스가 최근 “덩샤오핑 이후 누구보다도 태생적으로 군 인맥이 탄탄한 시진핑은 군부와의 밀착관계를 더욱 강화할 것”이라며 “미국으로선 상대하기 쉽지 않은 강력한 지도자를 만나게 되는 것”이라고 보도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시진핑이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까지 이어받는다면 명실상부하게 군을 장악하겠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차기 중앙군사위의 세력분포상 크게 우려할 정도는 아니다. 후 주석은 2004년 장쩌민으로부터 군사위 주석직을 물려받았지만 줄곧 군부 몫의 부주석 두 자리에는 장쩌민의 총애를 받아온 궈보슝(郭伯雄·70)과 쉬차이허우(徐才厚·69)가 포진해 있었다. 반면 차기 부주석에 내정된 쉬치량(許其亮·62) 전 공군사령원은 후 주석 계열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1980년대 장쩌민이 상하이 시장을 지낼 때 상하이에서 장교로 복무하면서 인연을 맺었고 돈독한 관계다. 장쩌민은 시진핑의 정치적 후원자다. 쉬치량은 나이도 젊어 2017년 19차 당 대회에서도 정년(68세)에 걸리지 않기 때문에 10년 동안 부주석에 앉을 가능성도 있다.

여기에 4총부 가운데 자오커스(趙克石·65) 총후근부(군수 담당) 부장과 장유샤(張又俠·62) 총장비부(군사장비 생산) 부장은 시진핑 인맥이다. 대만의 국방부 부부장을 지낸 린충빈(林中斌)은 “중국군 조직 수뇌부인 4총부 사령탑 중 2명이 시진핑 측근”이라고 분석했다.


 중국군 지휘부인 총참모부를 책임진 팡펑후이(房峰輝·61) 부장이 후 주석의 심복이라고는 하나 시진핑과도 사이가 괜찮은 것으로 전해졌다. 여기에 공군 총사령으로 내정된 마샤오톈(馬曉天·63) 역시 후 주석과도 관계가 좋지만 부친이 군 장성을 지내 태자당으로 분류된다.


경향일보







[한중FTA시대]



한중FTA 30개월만에 타결


한-중 FTA 타결



朴대통령-시진핑 인민대회장서 회담 FTA 실질적 타결선언
협정문안 작성후 연내 가서명→내년초 정식서명→내년중 발효


中 거대 내수시장 빗장풀어 경제영토 확장…22개 챕터 타결, 상품 90% 이상 개방 
농수산물 관세철폐 품목 기준 70%·수입액 기준 40%수입…쌀·자동차 완전제외





타결 "내년 효력 발효가 목표


야당 "장밋빛 전망 우려스럽다"…국회 비준 험로 예상

박근혜 대통령(오른쪽), 시진핑 중국국가주석 (사진=청와대 제공/자료사진)




2012년 5월에 시작해 2년 6개월을 끌어온 한중 FTA 협상이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계기로 마침내 타결됐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에이펙) 정상회의 참석차 중국을 방문 중인 박 대통령은 10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갖고 한중 FTA의 실질적인 협상 타결을 선언했다. 

박 대통령은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한중 정상회담에서 "한중 FTA가 2년 여 만의 협상 끝에 핵심 사안에 합의해 정상회담을 계기로 협상이 실질적으로 타결되었음을 발표하게 돼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세부 사항들을 조속히 마무리하고 서명 발효 절차를 신속하게 추진해 나갔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시진핑 주석도 "이익이 전반적으로 균형을 이루고 전면적이며 높은 수준의 FTA 체결에 관해 합의를 했다"며 "양측의 공동 노력에 의해 협상이 중대한 진전을 거두는 소식을 기쁘게 접하게 됐다"고 화답했다. 

정상회담이 끝난 직후 두 정상이 지켜보는 가운데 윤상직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 가오후청 중국 상무부장이 양해각서(MOU)의 일종인 합의의사록에 서명했다. 

안종범 청와대 경제수석은 "이번에 실질적인 타결로 남은 쟁점 사항은 없으며 문안 작업을 위한 수정이나 법률적인 검토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며 추가협상이나 후속협상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날 타결된 한중 FTA는 상품, 서비스, 투자, 금융, 통신 등 양국 경제전반을 포괄하는 22개의 으로 구성돼 있다. 

상품 부분에서 양국은 품목수 기준으로 90% 이상의 상품을 개방하기로 합의했고, 농산물 분야에서는 농수산 자유화율을 품목수 기준 70%, 수입액 기준 40%를 개방하기로 했다. 

쌀은 한중 FTA에서 완전 제외하기로 했다. 앞으로도 협상대상이 안된다는 뜻이라고 안종범 수석은 설명했다. 

하지만 국내 주요 생산 농산품인 고추, 마늘, 양파, 쇠고기, 돼지고기, 사과, 배, 감귤 등 610개 품목을 양허에서 제외하기로 해 앞으로 협상에 따라서는 개방 품목에 들어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우리가 쌀 등 주요 농산품을 지킨 반면 중국은 우리측에 공격적인 이익이 있었던 자동차, LCD 패널 등의 개방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정부는 한중 FTA 협상 타결로 FTA 사상 최대 규대모인 54억 5천만불의 관세절감 효과를 거두게 된 반면, 농산물 개방 수준은 역대 최저 수준으로 묶었다고 자평했다. 

또 ▷중국 내수 소비재 시장 진출 가속화 ▷ 비관세장벽 등 우리기업 애로 해소 ▷ 외국인 투자 유치 확대 ▷ 대중국 한류 진출 확대의 계기를 마련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정부는 올해 안으로 세부 사안에 대한 마무리와 가서명을 거쳐 내년 초에는 양국 통상장관간 정식서명을 한 뒤 국회 비준을 받아 내년중에는 한중 FTA가 정식으로 발효되도록 한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새정치민주연합 등 야당이 한중 FTA 협상 타결에 대해 박근혜 정부가 정상회담에 맞춰 졸속으로 처리했다며 반발하는 등 국회 비준과정에서 진통이 예상된다. 

새정치민주연합 유기홍 수석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한중 FTA에 대한 우리 정부의 장밋빛 전망이 우려스럽다"며 "중국이 제조업을 턱밑까지 추격한 상황에서 장밋빛 환상에 기초한 한중 FTA 졸속타결이 과연 국익을 위한 길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정의당 김종민 대변인은 "농어업과 중소자영업에 끼치는 막대한 피해는 상상하지도 못할 지경이다"라며 "한미FTA가 농업과 자영업자 민생 파탄의 신호탄이었다면 한중FTA는 파탄의 종결점이 될 것이다"고 비판했다.


http://www.nocutnews.co.kr/news/43244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