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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관소/문화사 &시사

[故 김영삼 대통령 ] 생애 & 업적 ,어록

                   故 김영삼



故 김영삼(金泳三, 1927년 12월 20일 ~ 2015년 11월 22일)

대한민국의 제14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김녕(金寧)이다.






약력




기간내용
1951년  장택상 국무총리 비서관
1954-1958년  제3대 민의원(자유당, 거제군)
1955년  민주당 청년부장
1960-1961년  제5대 민의원(민주당, 부산 서구)
1961년  신민당 원내부총무
1963년  민정당 , 대변인
1963-1967년  제6대 국회의원(민정당, 부산 서구)
1965-1967년  민중당 원내총무, 대변인
1967-1969년  신민당 원내총무
1967-1971년  제7대 국회의원(신민당, 부산 서구)
1971-1972년  제8대 국회의원(신민당, 부산 서구)
1971년-  한국문제연구소 소장
1973-1979년  제9대 국회의원(신민당, 부산서.동구)
1973년  신민당 부총재, 정무회의 부의장
1974-1976년  제5대 신민당 총재, 지도위원회 의장
1974년-  신민당 정무회의 의장
1976년  신민당 고문
1979-1980년  제10대 국회의원(신민당, 부산 서.동구)
1979년-  신민당 총재
1979년  총재 직무집행정지 가처분,의원직 제명
1980년-  정치활동 규제
1980-1981년  1차 가택연금
1981년-  민주산악회 결성, 고문
1982-1983년  2차 가택연금, 단식투쟁(23일간)
1985년  민족문제연구소 고문
1986-1987년  신한민주당 상임고문,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고문
1987년  통일민주당 창당, 총재
1987년  제13대 대통령 후보(통일민주당)
1988-1992년  제13대 국회의원(민주당, 부산 서구)
1990년  3당통합,민주자유당 대표최고의원
1992-1992년  제14대 국회의원(민자당, 전국구)
1992년  제14대 대통령후보(민주자유당)
1992-1996년  민주자유당 총재
1992년  제14대 대통령 당선
1993-1998년  제14대 대통령
1995-1997년  신한국당 총재
1997년  신한국당 명예 총재


1954년 거제에서 제3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해 28세의 나이로 당선되며 역대 최연소 국회의원이 되었다. 9선 국회의원을 지내며 유신정권의 야당 지도자로서 민주당 원내총무, 민정당 대변인, 신민당 원내총무로 활동하며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 초산 테러 사건 등의 탄압을 받았다. 1979년 10월에는 YH 무역 여공 농성 사건 이후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에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것을 주장하였다. 유신정권은 이 발언을 문제삼아 의원직 제명 파동을 일으켜 부마항쟁을 촉발했다. 


1983년에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기념일을 기해 23일 동안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6월 민주 항쟁 이후 통일민주당 총재로 민주화추진협의회을 구성해 민주진영을 구축했다. 1986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1천만 서명운동을 전개하였다. 1990년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3당 합당을 선언하여 민주자유당 대표최고위원으로 추대되었다.

1993년 제14대 대통령에 취임하며 32년만에 군사 정권의 마침표를 찍었고, 문민 정부를 열었다.


예술인과 작가들의 반정부와 사회비판을 전면 허용하였고 군사 정권에 의해 수감된 박노해김남주마광수 등의 문학가를 석방하여 표현의 자유를 대폭 허용하였다.


대통령 재임 기간 중 금융실명제를 도입하고 차명 부정 계좌를 단속 및 처벌하였으며, 지방자치제를 전면 실시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통 명문화 등 역사 바로 세우기 정책의 일환으로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폭파 철거하였고, 신군부 관련 단체를 해체하며 국군 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척결했다.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을 수사하여 처벌하였고, 군사반란과 5.17 쿠데타 및 5.18 민주화 운동 진압의 책임을 물어 군사 정권 관계자들을 사법처리하였다. 1997년 외환위기로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였다. 2015년 11월 22일 0시 21분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혈액감염 의심 증세로 치료를 받던 중 숨을 거뒀다



“민주화 거목-IMF 환난 책임…공과 교차하는 영욕의 88년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최연소 국회의원·독재맞선 민주화 투사…3당합당 뒤 문민정부 열어
금융실명제·하나회 청산·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처벌 등 개혁 앞장
오락가락 개혁정책·IMF 구제금융 위기·임기 중 친인척 비리 얼룩도
한국 현대사에서 김영삼만큼 영욕이 뚜렷하게 교차하는 정치인은 드물다. 독재시대에는 불굴의 민주화투사였고, 대통령이 돼서는 정치군인 청산과 금융실명제 실시, 전두환 노태우 처벌 등 과감하고 단호한 모습을 보이며 많은 개혁을 성취했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에는 집권을 위해 독재세력과 손잡은 변신의 정치인이었고, 대통령 재직 때엔 오락가락하는 대북정책과 아이엠에프(IMF) 구제 금융위기를 빚으며 무능한 일면도 드러냈다. 김대중과 함께 ‘양김’으로 불리거나 김종필을 포함해 ‘3김’으로 회자되며 한국정치에 굵고 선명한 족적을 남겼다.

김영삼은 1928년 경남 거제의 멸치잡이 선주인 김홍조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김영삼은 부산 경남고와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했으며, 1950년 2대 민의원 선거 때 자유당 정치거물 장택상의 선거운동을 도우면서 정치권과 인연을 맺었다. 장택상 비서관을 거쳐 1954년 3대 총선 때 김영삼은 고향인 거제에서 자유당 후보로 출마해 최연소(26세) 국회의원이 됐다.


박정희 전두환 정권 붕괴 이끌어

51년 2월 서울대 졸업식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한겨레 자료
51년 2월 서울대 졸업식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한겨레 자료
그러나 의회민주주의를 추구했던 김영삼은 이승만의 독재정치에 반대하면서 야당 정치인으로 탈바꿈한다. 이승만 정권과 집권 자유당이 54년 11월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없앤다’는 개헌안을 사사오입이라는 어거지 해석으로 가결하자, 김영삼은 동료의원 10여명을 규합해 자유당을 탈당한 뒤 이듬해 야당인 민주당 창당에 합류했다.

1960년 4.19 혁명 후 구성된 장면 정부 시절 김영삼은 잠시 여당(민주당) 의원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이듬해 박정희의 5.16 군사 쿠데타 이후 본격적인 민주화투쟁의 길을 걷게 된다. 특히 박정희 집권이 장기화하면서 유진산 등 야당 지도자들이 타협적으로 변했을 때 김영삼은 오히려 비타협적인 ‘선명 야당’의 노선을 걸었다. 1970년 ‘40대 기수론’으로 야당 대선 후보에 도전에 나선 데 이어 1974년 전당대회에서 마침내 신민당 총재로 당선됨으로써 그는 야당 지도자로 우뚝 선다.

특히 1979년 5월 신민당 당권 경선에서 김영삼이 김대중의 도움을 받아, 사쿠라라는 비판을 받던 이철승을 극적으로 누른 것은 이후 한국 정치사의 흐름을 바꾼 전환점이었다. 박정희 정권이 붕괴하는 고리의 출발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야당 총재로서 김영삼은 그해 8월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 사건 때 노동자편에서 싸우는 등 박 정권과 정면에서 맞섰다. 이에 박 정권은 김영삼을 당 총재직(9월)과 국회의원직(10월)에서 제명했다. 이는 김영삼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과 마산 시민들이 대대적으로 반정부 시위에 나서는 부마항쟁의 도화선이 됐으며, 시위 진압을 놓고 온건론을 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강경론의 대통령경호실장 차지철과 박정희를 쏘는 10.26 사건으로 이어진다.

김영삼의 민주화 투쟁은 5.18 광주 학살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 아래에서도 꺾이지 않았다. 그는 폭압적인 분위기를 뚫고 5.18 3주기를 맞은 1983년 5월18일부터 6월10일까지 23일 동안 민주인사 석방 등을 요구하면서 목숨을 건 단식 투쟁을 벌였다. 그의 투쟁으로 힘을 얻은 야권은 민주화추진협의회(1984년) 결성을 거쳐 신한민주당(1984년)을 창당해 1985년 12대 총선에서 관제야당 민한당을 제치고 제1야당이 되는 돌풍을 일으켰다. 

전두환 군사독재에 커다란 균열을 만든 야당의 이러한 전열 정비는 학생운동 등 재야 민주화세력과 결합해 1987년 6월 항쟁을 이끌어냈으며, 결국 대국민 항복선언인 노태우의 6.29선언을 끌어냈다. 야당 시절 김영삼은 1969년 상도동 자택 부근에서 괴한들로부터 초산 테러 사건과 1980년대 초 장기간 가택 연금 등 많은 고초를 겪었다.

평생 김대중과 숙적관계

1970년 9월29일 ‘40대 기수 3명’이 겨룬 신민당 임시전당대회에서 김대중은 예상을 뒤엎고 7대 대선 후보로 지명됐다. 사진은 애초 선두 후보였으나 2차 결선 끝에 패배한 김영삼이 당선자 김대중에게 축하의 악수를 건네는 모습.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70년 9월29일 ‘40대 기수 3명’이 겨룬 신민당 임시전당대회에서 김대중은 예상을 뒤엎고 7대 대선 후보로 지명됐다. 사진은 애초 선두 후보였으나 2차 결선 끝에 패배한 김영삼이 당선자 김대중에게 축하의 악수를 건네는 모습.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김대중을 빼놓고는 김영삼의 생애를 설명하기 어렵다. 양김씨로 불린 두사람의 라이벌 관계가 본격화한 것은 1971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벌어진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 때부터였다. 김영삼이 먼저 ‘40대 기수론’을 주창했지만, 경선 2차 투표에서 그는 김대중에게 역전패했다. 나이도 비슷한 두 사람은 이후 상도동계(김영삼)와 동교동계(김대중)로 불리는 계보를 형성해, 야당 지도자 자리를 놓고 끊임없이 경쟁한다. 

김영삼의 신민당 총재 당선(74, 79년)과 민추협 결성, 신한민주당 창당 등 정권의 탄압이 거셀 때는 서로 힘을 합쳐 협력했지만, 1980년 서울의 봄과 1987년 민주화 이후 등 합법적인 공간이 열렸을 때는 양보 없이 대립했다.

특히 1987년 말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자리를 놓고 벌인 양김씨의 갈등은 민주세력의 영구적인 분열을 가져왔다. 대통령 후보 선출방식에 대한 합의를 이루지 못하자, 김대중은 동교동계를 이끌고 통일민주당을 나와 평화민주당을 만들었다.

그러나 부산 경남을 지역기반으로 하는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은 이듬해인 1988년 13대 총선에서 노태우의 민주정의당,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에 이어 제3당으로 전락했다. 제2야당이라는 비참한 신세를 탈출하기 위한 방편으로 김영삼은 1990년 노태우의 요청을 받아들여 3당합당(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을 결행한다. 

오랫동안 투쟁의 대상이었던 쿠데타 세력과의 결합을 그는 구국의 결단이라고 주장했지만, 노무현과 김정길, 이철, 이기택 등은 3당야합이라며 동참하지 않았다. 3당합당은 영남의 지역패권주의 강화와 함께 ‘이기면 된다’는 그릇된 승리 지상주의, 민주진보세력의 지역적 분열로 인한 정치발전 지체 등 한국 정치사에 어두운 그림자를 길게 남겼다.

두둑한 배포와 신속한 결단, 밀어붙이기 등을 특징으로 하는 김영삼의 정치스타일은 3당 합당 이후 더 두드러졌다. 그는 합당 당시 약속했던 내각제 개헌 합의서가 공개되자, 도리어 자신을 죽이기 위한 음모라고 주장하면서 고향인 마산으로 내려가 당무를 거부한 끝에 노태우쪽으로부터 사실상 내각제 포기를 받아냈다.

 또, 그는 소수파임에도, 노태우의 후계자로 주목받던 박철언, 노재봉, 박태준 등 다수파인 민정계 출신들과의 권력투쟁에서 차례로 승리해 민자당 대선 후보가 됐다. 1992년 말 14대 대선에서 초원복국집 사건 등에도 불구하고 오랜 정적인 김대중을 이겼다.

화려한 개혁, 비참한 임기말

김영삼 대통령 취임식 : 1993년 2월
김영삼 대통령 취임식 : 1993년 2월
1993년 2월 말 문민정부를 출범시킨 김영삼은 전광석화처럼 각종 개혁조처를 쏟아냈다. 취임 초 자신의 재산공개를 시작으로 고위공직자들의 재산공개제를 도입했으며, 검은돈을 차단하기 위한 금융실명제도 전격적으로 단행했다. 

또,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 해산 등 정치군인들을 대거 축출했으며, 고위공직자에 대한 대대적인 사정작업도 진행했다. 비자금 축재와 군사쿠데타의 책임을 물어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을 구속하는 등 역사바로세우기 작업도 밀어붙였다. 군사정권의 적폐를 청산하는 과감한 개혁조처로 인해 김영삼은 한때 90%대의 지지율을 기록할 정도의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김영삼은 합당의 파트너였던 김종필이 1995년 탈당해 충청권을 기반으로 한 자유민주연합을 만든 뒤 김대중과 1997년 대선에서 연대함으로써 임기말에는 오히려 정치적으로 고립되는 신세가 됐다. 차남 현철의 국정 농단과 한보비리 연루 등도 큰 상처가 됐다.

 냉온탕을 오락가락한 대북정책이나 “버르장머리” 등 비외교적 언사로 인해 미·일 등과의 대외관계도 나빠졌다. 특히 경제정책에서는 맹목적인 민영화 추진과 금융정책 실패 등으로 97년 아이엠에프(IMF) 구제금융 사태를 초래하는 등 최악의 성적표를 남겼다. 퇴임 직전 그의 지지율은 한자릿수로 떨어졌다. 그는 마지막 국무회의에서 “변화와 개혁을 추진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아쉽고 미흡한 부분이 더 많다”고 스스로 평가했다.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718483.html?_ns=t1




‘저항’과 ‘직설’ 정치 역정 김영삼 어록





22일 서거한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은 유신 시절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되자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오고야 만다”며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 의식을 드러내는 등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수많은 ‘어록’을 남겼다.

대통령 당선 이후에는 “우째 이런 일이…”라는 말이 시중의 유행어가 되기도 했으며, 1995년에는 일본 정치인의 ‘망언’을 가리켜, 2008년에는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 공천을 두고 각각 “버르장머리를 고쳐야 한다”고 하는 등 거칠고 직설적인 화법도 마다하지 않았다. 

다음은 김 전 대통령의 주요 어록. 

▲순교의 언덕, 절두산을 바라보는 이 국회의사당에서 나의 목을 자른 공화당 정권의 폭거는 저 절두산이 준 역사의 의미를 부여할 것이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오고야 만다. (1979년 국회의원에서 제명되자)

▲10·26 뒤 나는 대통령이 돼 꼭 4년 단임을 하고 물러나고 싶었다. 그러나 83년 단식투쟁을 통해 대통령을 하겠다는 욕심을 완전히 버렸고, 이런 생각을 버리게 해 준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싶다. (1985년 한국일보 인터뷰)



▲노태우씨는 전두환 대통령과 같은 군인 출신으로서 12·12 사태를 일으켰고, 일선 군부대를 빼내 쿠데타를 한 사람이다. 쿠데타 한 사람이 대권을 잡는 것은 군정의 연장이다. (1987년 관훈클럽 토론에서) 

▲단식 이후 마음을 완전히 비웠다고 생각했는데, 설산을 바라보니 더 비워야겠다는 아쉬움이 살아나는 것 같다. (1987년 지리산 등반 중 기자회견에서) 

▲산행 도중에 많은 낙오자도 있었다. 민주화도 이와 같다. 민주화의 길은 그만큼 고행의 길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민주화 산행에 있어서 최종 고지의 200m 전방에 와 있는 셈이다. (1987년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대통령 후보 지명은 축제 속에 이뤄져야 한다. 박종철군 사건으로 온 국민이 우울한 지금, 민정당의 6·10 전당대회에서 하는 대통령 지명대회는 초상집에서 춤을 추는 격이다. (1987년 국회의사당 단식농성 중 인터뷰에서)

▲선거혁명을 통한 민주화가 내 지론이었으나, 이 정권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젯밤과 오늘 내내 생각한 끝에 이 정권을 완전히 타도할 것을 결심했다. 나는 박정희 정권을 타도시킨 사람이다. 기필코 전두환 노태우 정권을 타도할 것이다. (1987년 대통령 선거 직후 기자회견에서) 

▲신한국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내와 시간이 필요하다. 눈물과 땀이 필요하다. 고통이 따른다. 우리 다 함께 고통을 분담하자. (1993년 대통령 취임사에서)

▲우리가 먼저 달라져야 한다. 우리가 먼저 깨끗해져야 한다. 우리가 먼저 고통을 기꺼이 감당해야 한다. 나는 대통령인 나 자신이 솔선해야 한다는 각오 아래 오늘 나의 재산을 공개하는 바이다. (1993년 첫 국무회의를 주재하는 자리에서)

▲추석 때 떡값은 물론 찻값이라도 받지 않을 것이다. (1993년 청와대 기자간담회에서 정치자금을 받지 않을 것임을 강조하면서)

▲새 정부에 있어 국가기강 확립의 대도(大道)는 하나도 윗물 맑기요, 둘도 윗물 맑기다. (1993년 국가기강확립 보고회의에서 고위공직자의 청렴성을 강조하면서)

▲우째 이런 일이…. (1993년 최형우 민자당 사무총장 아들의 대입 부정과 관련해서)

▲토지와 건물 등 부동산을 갖고 있는 것이 고통이 되도록 하겠다. (1993년 신경제계획 민간위원과의 조찬에서) 

▲요즈음 개혁을 하다 보니 환부 하나를 찾아내 도려내면 또 나오고 또 나오고 한다. 32년의 권위주의 시대가 만든 ‘한국병’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실감한다. (1993년 주요 인사 접견에서) 

▲너무 급히 달려도 위험하지만 달리다가 멈추면 쓰러진다. (1993년 모범수출업체 대표들과 오찬에서 개혁의 속도를 자전거 타기에 비유하면서)

▲이 시간 이후 모든 금융거래는 실명으로만 이루어진다. (1993년 금융실명제에 관한 특별담화문에서) 

▲아직도 골프를 열심히 치십니까. (1993년 경제5단체장 회식에서)

▲군 개혁을 단행해 문(文)은 문답게, 무(武)는 무답게, 문과 무가 각기 제자리를 찾도록 했다. (1993년 계룡대 국군의 날 기념행사에서)

▲개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 사랑을 받지만, 또 한편으로는 달리는 기차를 보고도 짖는다. 그러나 개가 짖는다고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다. (1994년 ‘개의 해’ 의미를 되새기며) 

▲대통령으로서 정도를 걷고 당당하게 대도를 가겠다. (1994년 신년 기자간담회에서 ‘서울시 분할론’을 부인하며) 

▲지지율이 90%를 넘을 때는 너무 높아서 어지럽고 스트레스를 받았다. 민주국가에서는 반대도 있을 것이니, 이제야 정상으로 돌아온 것이다. (1994년 대통령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분노와 저항의 시대는 갔으며, 투쟁이 영웅시되던 시대도 갔다. (1993년 서울대 졸업식 치사에서) 

▲북한이 무모한 핵개발을 계속하며 서방의 인내를 시험한다면 반드시 자멸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경고한다. (1994년 민주평통 운영위원 접견에서)

▲보름 후면 남북 정상이 한자리에 모여 민족의 장래를 위해 허심탄회하게 논의키로 했는데 이 소식을 접하면서 아쉽게 생각한다. (1994년 북한 김일성 주석 사망 소식에)

▲태풍을 기다리는 것은 밤에 도둑이 들기를 기다리는 것 같지만, 태풍이라도 와 비가 내렸으면 한다. (1994년 극심한 가뭄에 대한 심정을 토로하면서)

▲남북한 사이의 체제경쟁은 이미 끝났다. (1994년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

▲로마제국은 외침이 아니라 내부 부패로 망했다. (1994년 인천 북구청 세무비리 사건에 대한 엄단을 지시하면서) 

▲국민 여러분의 참담한 심경과 허탈감, 정부에 대한 질책과 비판의 소리를 들으면서 대통령으로서 부덕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관련 대국민 특별담화에서) 

▲이번 기회에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 (1995년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일본 정치인의 거듭된 망언에 대해)

▲저의 임기 중 대통령 중임제 도입이나 정경유착의 온상이 될 내각제 채택을 위한 개헌, 또는 어떤 형태의 개헌도 단호히 반대할 것이다. (1996년 신한국당 전당대회 치사에서) 

▲북한이 국지전을 일으키면 전면전으로 갈 수 있다. (1996년 여야 및 국회 지도자들과의 회담에서)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과 마찬가지로 저도 아들의 허물은 곧 아비의 허물이라고 여기고 있다. (1997년 차남 현철씨의 한보사태 이권개입 의혹에 대해)

▲최 의원 나요, 나. 빨리 일어나야지. (1997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의식 불명인 최형우 의원을 문병하면서) 

▲정상에 오르면 반드시 내려갈 때도 생각해야 한다. (1997년 LA다저스 박찬호 선수 가족 초청 오찬에서) 

▲국민들을 잠시 속일 수는 있어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 (1999년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와 회동에서) 

아버지와 딸은 다르다. (2001년 한나라당 박근혜 부총재를 평가하면서)

▲나도 23일간 단식해 봤지만, 굶으면 죽는 것은 확실하다. (2003년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를 방문해 단식 중단을 종용하면서)

▲버르장머리 고쳐줘야 한다. (2008년 무소속 출마를 선언한 김무성 의원을 방문한 자리에서 한나라당 공천심사가 엉망이라고 비판하면서)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51122800017&wlog_sub=svt_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