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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 & 군주론==>>개요 & 강의 영상

                                        

                             

                      마키아벨리








Niccolo Machiavelli,Niccolo di Bernardo dei Machiavelli
마키아벨리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인물로 이탈리아의 외교관이자, 정치철학자, 음악가, 시인 그리고 희곡가로 알려져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문예운동이 최고봉에 달했던 15세기 중반, 1469년 5월 3일. 마키아벨리는 ‘유럽의 꽃밭’이라 불린 피렌체에서 법학자인 베르나르도 마키아벨리와 바르트로메아 데 네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498년 약관의 나이로 피렌체 공화정에 참여, 주로 외교업무를 담당했다. 1500년 7월에 처음으로 외교사절의 임무를 띠고 프랑스 루이 12세의 궁정에 파견되었던 그는 3년 뒤에 로마로 파견되어 체사레 보르자의 도움으로 교황에 선출된 율리우스 2세가 무모할 정도의 단호한 행동으로 세력을 직접 확대해가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1512년 스페인에 의해서 피렌체 공화정이 무너지고 메디치 가의 군주정이 복원되자 공직에서 추방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다음해 메디치 정부를 몰아내려다 실패로 끝난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체포돼 고문을 받고 투옥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바로 메디치 가의 조반니 추기경이 교황 레오 10세에 즉위하자 특사를 받고 석방되었다. 

마키아벨리가 유명해진 계기가 된 것은 실제 정치 이론을 반영 묘사한 그의 단편 The Prince [군주론]이라는 작품을 통해서였다. 이 책은 그의 사후인 1530년대 초반에 인쇄되었는데, 그가 살아있을 때에는 친구들에게 작품을 돌렸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16세기 이후 사람들에게 가장 어필을 하면서도 동시에 비판을 받는 등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었던 책, 군주론으로 인해 마키아벨리라는 이름은 후대에 냉혹한 정치, 술수 그리고 권력 추구를 떠올리게 하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르네상스 시대에 활약한 위대한 정치가이자 외교관이며, 군사전략가이자 사상가이며, 저술가이자 문학가였다. 

정치가로서의 그의 명성은『군주론』을 통해 형성되었다. 오랜 공직 생활을 통해 프랑스의 루이 12세, 신성로마제국의 막시밀리안 황제, 교황 율리우스 2세, 그리고 체사레 보르자를 직접 만난 그는 강력한 힘을 지닌 군주가 이탈리아의 내부 분열을 종식시키고 조국의 안정을 찾아 줄 것이라 생각하고, 그 기대를『군주론』이라는 정치사상의 고전으로 탄생시켰다. 무릇 정치사상이란 그 사상가가 살던 시대적 배경을 모르고는 올바로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때문에 마키아벨리가 살던 피렌체의 상황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마키아벨리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가 살던 시대로 돌아가, 그가『군주론』을 서술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유, 즉 혼란했던 당시의 이탈리아 반도의 현실을 이해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마키아벨리가 살았던 시대는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중세의 질서가 차츰 무너지고, 근대국가의 틀이 갖추어지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군소 국가들 간의 대립, 외세의 침략 등 어지러운 상황에서 메디치 가문이 강력한 군주로 등장해 풍전등화와 같은 조국 피렌체를 구해 줄 것을 염원하는 바람이 마키아벨리의『군주론』에는 담겨 있다. 

또한 마키아벨리는 르네상스 문예의 토양을 바탕으로 문학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그의 대표적 문학작품인 희곡 『만드라골라』를 통해 부패한 지도층을 통렬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만드라골라』는 이탈리아 연극 사상 획기적인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내 영혼보다 조국 피렌체를 더 사랑했다.”고 고백한 그는 관대하고 열정적이며, 정직하고 자애로운 아버지였으며, 성실한 카톨릭 신자였다. 마키아벨리는 1520년 『피렌체사』집필을 시작하여, 1527년 메디치 군주정이 붕괴되고 공화정이 복원되었으나 6월 21일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는 이탈리아가 여러 나라로 분열되고 외세의 지배를 개탄, 강력한 군주 아래 통일되기를 열망하며 『군주론』, 『전술론』, 『로마사론』등의 명저를 남겼다.


예스24






군주론(君主論, II Principe)






마키아벨리 1513년에 쓴 책이다.

당시 피렌체의 참주인 메디치에게 헌정하는 성격의 책으로, 동시대 사람인 체사레 보르자를 군주의 모델로 지향했다. 군주의 자질로 권력에 대한 야심과 의지, 용기를 제시하여 정치적인 몰인정과 냉혹함을 군주가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의 하나로 인정하였다.

당시 프랑스와 스페인의 침입과 정치적 간섭에 직면한 이탈리아의 도시국가에게 통일 이탈리아를 해결책으로 제시하면서 이탈리아 통일을 위해 강력한 군주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군주론 목차

서문으로서의 헌사
제1장 군주국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으며 어떻게 성립되는가
제2장 세습 군주국
제3장 복합 군주국
제4장 알렉산더 대왕에게 정복당했던 다리우스 왕국은 
왜 대왕이 죽은 후에도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을까
제5장 병합되기 전 자신들 고유의 법에 따라 살아온 
도시나 공국은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
제6장 자신의 군대와 능력으로 얻은 신생 군주국
제7장 다른 세력의 군대과 행운을 기반으로 얻게 된 신생 군주국
제8장 부정한 방법으로 군주가 된 인물들
제9장 시민 군주국
제10장 주변 군주국들의 군사력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제11장 교회형 군주국
제12장 다양한 군대의 종류와 용병
제13장 지원군과 혼성군 그리고 자국군
제14장 군사와 관련된 군주의 의무
제15장 군주가 칭송을 받거나 비난받게 되는 경우
제16장 관대함과 인색함
제17장 잔혹함과 인자함, 사랑받는 것과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나은가
제18장 군주는 어떻게 약속을 지켜야 하는가 
제19장 경멸과 미움을 어떻게 피하는가
제20장 요새 구축과 같은 군주의 정책이 유용한가, 해로운가
제21장 명성을 얻기 위해 군주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제22장 군주의 측근들
제23장 아첨꾼을 피하는 방법
제24장 이탈리아의 군주들은 왜 나라를 잃게 되었을까
제25장 인간사에 미치는 운명의 힘과 운명에 대처하는 방법
제26장 야만족으로부터 이탈리아를 해방시키기 위한 간곡한 권유





가장 정직한 정치 교과서 군주론


가장 정직한 정치 교과서 군주론


근대 정치학의 시초가 된 《군주론》. 《군주론》은 지난 5세기 동안 숱한 논란과 비난의 대상이 되어 왔다. 교황청은 《군주론》을 금서로 공포하고 불태웠으며, 프랑스 인은 마키아벨리즘이라는 오명을 붙이고 맹비난했다. 《군주론》은 왜 이토록 끊임없는 논란을 일으켰을까.


 그것은 이 책이 정치와 군주에 대한 진실, 그 누구도 쉽게 말하지 못한 진실을 말했기 때문이다. 《군주론》은 너무나 솔직하게, 또 너무나 현실적으로 군주와 국가의 모습을 보여 준 아주 정직한 정치 교과서이다.

 



마키아벨리는 왜 군주론을 집필했을까



《군주론》은 권모술수주의를 제창했다고 하여 오랫동안 위험한 서적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군주론》은 마키아벨리의 애국심에서 나왔다. 마키아벨리가 살던 시대는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중세의 질서가 차츰 무너지고 근대 국가의 기틀이 갖추어지기 시작한 때였다.


 마키아벨리는 오랜 공직 생활을 통해, 당대의 권력자인 프랑스의 루이 12세, 신성로마제국의 막시밀리안 황제, 교황 율리우스 2세, 그리고 체사레 보르자를 직접 만나면서, 강력한 힘을 지닌 군주가 나타나 위기에 처한 조국 이탈리아를 구원해 줄 것을 염원했다. 그의 이러한 간절한 바람이 《군주론》이라는 정치사상의 고전古典을 탄생시켰다.

 

21세기에도 군주론을 읽어야 하는 이유



《군주론》은 쉽고 간결하고 재미있다. 마키아벨리가 직접 <헌사>에서 말하고 있듯이 《군주론》에는 어려운 용어나 화려한 미사여구가 없다. 간결하고 직설적이다. 1532년에 출간된 고전임에도 불구하고 《군주론》의 내용은 오늘날의 상황에 대입해 보아도 손색이 없다. 위대한 정치사상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우리에게 살아 있는 교훈을 전해 준다는 점에서 마키아벨리가 역설하는 군주의 자질은 21세기의 리더를 위한 텍스트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 가장 정직한 정치 교과서 군주론

 

근대 정치학의 시초가 된 《군주론》. 《군주론》은 지난 5세기 동안 숱한 논란과 비난의 대상이 되어 왔다. 교황청은 《군주론》을 금서로 공포하고 불태웠으며, 프랑스 인은 마키아벨리즘이라는 오명을 붙이고 맹비난했다. 《군주론》은 왜 이토록 끊임없는 논란을 일으켰을까. 그것은 이 책이 정치와 군주에 대한 진실, 그 누구도 쉽게 말하지 못한 진실을 말했기 때문이다. 《군주론》은 너무나 솔직하게, 또 너무나 현실적으로 군주와 국가의 모습을 보여 준 아주 정직한 정치 교과서이다.

 

풍부한 그림과 별면으로 새롭게 만나는 군주론


《군주론》을 이해하는 데 한 가지 걸림돌이 있다면, 90여 명에 달하는 인물들과 복잡한 시대 상황이다. 이것을 모르고는 《군주론》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하기 어렵다. 



그래서 이 책은 《군주론》을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정보를 풍부한 도판과 별면, 부록을 통해 생생히 전달하는 것에 역점을 두었다. 그림으로 보는 《군주론》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다채로운 그림과 설명으로 고전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또 별면을 마련해 군주론의 모델인 체사레 보르자와 당시 이탈리아와 유럽의 정세에 대해 재미있고 상세하게 설명한다.

 

마키아벨리는 왜 군주론을 집필했을까


《군주론》은 권모술수주의를 제창했다고 하여 오랫동안 위험한 서적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군주론》은 마키아벨리의 애국심에서 나왔다. 마키아벨리가 살던 시대는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중세의 질서가 차츰 무너지고 근대 국가의 기틀이 갖추어지기 시작한 때였다. 


마키아벨리는 오랜 공직 생활을 통해, 당대의 권력자인 프랑스의 루이 12세, 신성로마제국의 막시밀리안 황제, 교황 율리우스 2세, 그리고 체사레 보르자를 직접 만나면서, 강력한 힘을 지닌 군주가 나타나 위기에 처한 조국 이탈리아를 구원해 줄 것을 염원했다. 그의 이러한 간절한 바람이 《군주론》이라는 정치사상의 고전古典을 탄생시켰다.

 

21세기에도 군주론을 읽어야 하는 이유


《군주론》은 쉽고 간결하고 재미있다. 마키아벨리가 직접 <헌사>에서 말하고 있듯이 《군주론》에는 어려운 용어나 화려한 미사여구가 없다. 간결하고 직설적이다. 1532년에 출간된 고전임에도 불구하고 《군주론》의 내용은 오늘날의 상황에 대입해 보아도 손색이 없다. 위대한 정치사상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우리에게 살아 있는 교훈을 전해 준다는 점에서 마키아벨리가 역설하는 군주의 자질은 21세기의 리더를 위한 텍스트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



여성신문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권모서 지향술수 정당론 펼쳐 후세까지 논란

과감하고 혁신적인 새 정치질


서양 역사상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면서도, 가장 논란이 많은 책 가운데 하나, 단테의 ‘신곡’보다 더 많이 번역된 이탈리아어 저술, 바로 마키아벨리(1469∼1527)의 ‘군주론’이다. ‘군주론’이 세상에 등장한 것이 1513년이니 올해로 꼭 500년이 된다.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과 미국에서는 ‘군주론’ 탄생 50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회와 강연회 등 각종 학술행사가 빈번하다.

‘군주론’은 군주의 자질과 통치기술에 관한 책으로서 군주를 위한 지침서이다. 마키아벨리는 당시 도시공화국 피렌체의 실권을 장악한 메디치 가문의 실력자에게 헌정한 이 책에서 군주란 모름지기 사자의 힘과 동시에 여우의 꾀를 지녀야 한다고 설파한다.


 예컨대 그의 조언에 따르면 ‘군주는 사랑보다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 더 안전하다.’ ‘어제는 약속할 수밖에 없고 오늘은 약속을 깰 수밖에 없다.’ ‘속임수로 얻을 수 있는 것을 힘으로 얻으려 하지 마라.’

권력을 위해서는 협잡, 모략, 겁박 등 부정하고 부도덕한 행위도 용인할 수 있다는 마키아벨리의 주장은 기독교 윤리의식에 젖어 있던 동시대나 후대 사람들에게 충격적이었고 두고두고 논란이 되었다.



 ‘군주론’의 원고는 마키아벨리 사후 5년, 집필 후 근 30여 년이 흐른 1532년에야 비로소 출간될 수 있었고, 그나마 ‘악마의 손’에 저술되었다는 비난을 받으며 가톨릭교회의 금서목록에 올랐다. 특히 16세기 후반 영국에서 마키아벨리는 악의 상징이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는 마키아벨리의 이름이 통치나 일상 행위에서 교활하고 표리부동한 태도를 뜻하는 용어로 등재되었다. 한 마디로 마키아벨리는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권모술수, 즉 ‘마키아벨리즘’의 창시자가 된 것이다.



반면 후대의 평자 가운데는 ‘군주론’의 내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마키아벨리의 숨은 의도를 찾아내려 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들은 ‘군주론’ 집필 이전 마키아벨리의 행적에 주목한다. 마키아벨리는 피렌체가 메디치家의 영향력에서 잠시 벗어난 시절 이 도시의 고위관리로서 외교와 국방 업무를 담당했으며, 메디치家가 권좌에 복귀한 뒤에는 모반을 공모한 혐의로 구금된 적이 있었다.


 그리하여 18세기 철학자 루소에 따르면 ‘군주론’의 의도는 군주에 대한 조언을 가장하여 공화정을 지키는 방안을 제시하는 데 있다. 말하자면 루소와 같은 이들에게 ‘군주론’은 군주정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군주정을 조롱하기 위한 정치적 풍자인 셈이다.


이처럼 ‘군주론’을 저술한 마키아벨리의 동기와 의도를 두고 논란이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르네상스기 이탈리아의 정치상황을 배제하고서는 ‘군주론’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당시 이탈리아는 여러 왕국과 공국, 도시국가, 교황 세력 등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여기에 프랑스, 스페인 등 주변 강국들이 개입하여 혼란을 조장했다. 

정치적 분열과 대립, 외세의 개입 속에 당시 이탈리아 각지에는 중세 봉건시대에는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유형의 지도자들이 등장하고 있었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주목한 것도 바로 이들이다. 이들은 전통적인 세습군주와는 달리 오로지 자신의 재능에 의해 권좌에 오른 자들이며, 위험을 감수하면서라도 과감하고 혁신적 방식으로 새로운 통치 질서를 수립하려던 자들이었다. 


그리하여 마키아벨리는 이 새로운 유형의 지배자에게는 무엇보다도 이해관계에 대한 냉철한 타산과 현실의식이 필요하며 때에 따라서는 탈법과 악행도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마키아벨리는 행운이나 우연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운명을 개척한 그들을 보면서 정치란 당위가 아니라 현실이며, 종교와 도덕과는 분리된 영역이라 생각했다. 바로 그 점에서 ‘군주론’은 근대정치이론의 효시였다


안병직 서울대 교수·서양사학








마키아벨리 마키아벨리의 일생





   






 지식채널 군주론 



 







정규재의 고전읽기 - 마키아밸리의 군주론





   







 생각하는 십대를 위한 고전읽기 강연회 - 군주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