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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관소/문화사 &시사

[차지철] 생애 * 경호실장 & 사망 *10월 26일사태

차지철(車智澈) 


(1934년 11월 16일 ~ 1979년 10월 26일)





차지철
車智澈
출생1934년 11월 16일
일제 강점기 일제강점기 경기도 이천군 마장면오천리
사망1979년 10월 26일 (44세)
대한민국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안가
거주지대한민국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국적대한민국 대한민국
학력한양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박사
직업군인정치가
종교개신교
배우자송희성 (1966 ~ ? )
윤보영 ( ? ~ 1979)
자녀슬하 2녀
부모김대안(모)
친척차주원(형), 차상철(이복 남동생), 차혜람(조카)



 

대한민국 군인, 정치가로 전 청와대 경호실장이다. 본관은연안(延安)이다. 5·16 군사정변을 비롯한 박종규와 함께 박정희의 경호 최측근으로 권력을 휘둘렸다



학력



생애


1934년 11월 16일 경기도 이천군 마장면 오천리에서 태어나 경성부(현 서울특별시)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차지철과 다른 성씨를 가진 3녀가 있었고 차지철은 서자였다. 


용산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군사관학교에 지원하였으나 낙방하고, 대한민국 육군 포병간부후보생을 통해 소위로 임관한 뒤, 미국에서 포트실 포병학교를 수료하였다. 


1958년 육군 최초의 특수전부대인 제1전투단(이듬해 제1공수특전단으로 개칭)에 창설요원으로 참가하였다. 

1960년 미국으로 군사유학을 가서 전두환등의 장교들과 함께 조지아주 포트베닝의 레인저스쿨에서 레인저훈련을 받았다.




이듬해 제1공수특전단 중대장의 신분으로박정희가 주축이 된 5·16 군사정변에 가담했다.







쿠데타의 성공 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경호차장으로 임명되었고, 1963년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육군 중령 진급과 동시에 전역한 뒤 민주공화당 국회의원이 되어 국회에 진출했다. 



1963년 국민대학교 정치학과를 학사 졸업, 1964년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 1965년에는 정치학 박사 학위를 땄으며, 이어 계속 공화당 의원직을 유지했다. 그 후에는 국회 외무국방위원장까지 지내며 국회에서 나름대로의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차지철은 그 시절에 권력을 쥐고 있는 여타 사람들과 다르게 청백리로 살았다



그는 경호실장에 재직을 할 무렵 박정희 대통령이 남루한 집에 살고 있는 것을 보고 경호실장이 그런 집에 살면 되냐며, 현대건설 정주영회장에게 말을 해서 2층집을 지어 줬다. 그러나 죽는 그 순간까지 그 집을 자기 앞으로 등기를 하지 않았다. 또 하나의 일화는 그가 군 재직시 부하가 찾아와서 남가좌동 시유지를 불하받게 해 주면 앙계장을 해서 먹고 살수 있다고 부탁을 했다. 


차지철은 적법한 절차를 받아서 시유지를 불하해 주었다. 이후 먹고 살만하게 된 부하가 생닭 다섯 버리를 차지철의 아내에게 갖다 줬다. 퇴근 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차지철은 진노하며 당장 그 닭을 양계장 주인에게 돌려 주었다. 


김재규를 비롯한 다른 정치인들은 천문학적인 재산을 남겼지만 그는 남루한 오막살이 단 한 채 밖애 남기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청렴성을 말해주고 있다. (장편 소설 청백리 차지철/김유권지음)에서 보면 그가 얼마나 올곧고 정직한 사람인지. 왜 그가 사후에 코믹한가 하면 무식한 사람으로 회자화 되었는지, 왜 그런 인간상으로 그려질 수 밖에 없었는지 그 배경을 알 수가 있다. 


가수 심수봉도 차지철과 김재규가 그 마지막 날 다투지 않았다는 점을 증언하고 있다. 1966년 송희성과 결혼하였으나.. 10.26 후 언론보도를 보면 노모 김대안씨와 부인 윤보영 씨 등이 기절했다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송희성과 이혼하고 윤보영과 재혼한 것을 알 수 있다. 1991년 7월11일 보도를 보면 전처 송희성이 중앙일보를 상대로 2억원의 위자료 청구소송을 했다는 기사도 있다.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차지철은 유신정우회 의원이 되었으며, 2년 뒤인 1974년에는 영부인 육영수 저격사건으로 자진사퇴한 박종규의 후임으로 제3대 대통령 경호실장이 되었다.




 

이후 박정희의 총애를 업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차지철이 경호실장 된후 차지철이 권력을 휘두르게 됐으며 박정희 정권이 부패되기 시작했다. 




부산 마산에 대한 학살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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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공화국 27부 (차지철과 경호실 上)




   




 (차지철과 경호실 下)


   




사망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전가옥에서 열린 연회중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박정희와 함께 사살되었다. 


권력기관(장)의 알력으로 중앙정보부장(김재규)에 대해 권력자의 편애, 경질설, 복합적인 불만과 당일 차지철 실장으로부터 인간적인 모멸감이 촉발되어 궁정동 안가에서 회식 도중 죽임을 당한 것, 그리고 박정희의 심복이었던 김재규가 자신이 모시던 대통령과 그 경호실장을 권총으로 살해한 경위는 아직까지도 뚜렷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차지철 경호실장은 어머니와 부인 그리고 어린 두딸이 있었는데, 장례식 당사 검은 상복을 입고 울고있는 어린 두 딸(10세 전후)의 모습이 권력무상을 알게하고, 어쨌튼 차지철은 이후 유신정권의 2인자로 제1공화국 당시 특무대장 김창룡 못지 않게 인간 적으로 나쁘게 평가되어 있다. 차지철의 무덤의 위치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운명의 날 10 26 上)



   




 (운명의 날 10 26 下)








김재규는 왜 쏘았는가 (2004.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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